엑토르 카스트로

 

'''엑토르 카스트로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엑토르 카스트로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베스트팀'''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1930'''

''' 우루과이의 前 축구인 '''
''' 이름 '''
'''엑토르 카스트로'''
'''Héctor Castro'''
''' 출생 '''
1904년 11월 29일/
몬테비데오
''' 사망 '''
1960년 9월 15일
''' 국적 '''
우루과이
''' 신체 '''
169cm | 체중 69kg
''' 직업 '''
축구선수(스트라이커#s-1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나시오날'''(1923~1932)
에스투디안테스(1932~1933)
나시오날(1933~1936)
''' 감독 '''
나시오날(1940~1943)
CA 나시오날(1952)
우루과이(1959)
''' 국가대표 '''
25경기 18골(우루과이 / 1923~1935)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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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번호 '''
-[6]


1. 개요
2. 생애
2.1. 사고
2.2. 초기 선수 생활
2.4. 월드컵 이후
2.5. 감독 생활
3. 수상
3.1. 클럽
3.2. 국가대표
3.3. 개인
3.4. 감독


1. 개요


우루과이의 前 축구선수 출신 감독. 별명은 El Manco(외팔이)[1]

2. 생애



2.1. 사고


그는 보통 축구 선수들과 달랐다. 바로 오른팔이 없었던 것. 13살 때 전기톱을 다루다 사고로 오른손을 잃었다. 그로 인해 그는 외팔이, 불구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
[image]
박물관에 전시된 카스트로의 사진. 오른손이 없는 것이 선명히 보인다.

2.2. 초기 선수 생활


1923년에 나시오날에 입단한 그는 그 해에 바로 우루과이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로 발탁되었다. 대표팀에서는 그렇게 많은 출장수를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출전하면 골을 넣는 일종의 조커로 활약했다. 그리고 나시오날도 그가 데뷔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2.3. 초대 월드컵


카스트로는 초대 월드컵에서 단 두 골을 넣었다. 5골을 넣은 팀 동료 페드로 세아 등에 비하면 모자란 활약. 하지만 카스트로가 그렇게 월드컵 역사에서 빛나는 이유는 초대 우승팀 우루과이에서 첫 경기의 선제 결승골[2], 결승전의 쐐기골을 그가 넣었기 때문이다. 즉, 초대 월드컵 우승팀이었던 우루과이에서는 알파와 오메가였다.[3]
[image]
카스트로의 결승전 쐐기골. 앞에서 몸을 날리는 선수는 아르헨티나골키퍼 후안 보타소이다.

2.4. 월드컵 이후


카스트로는 1932년에 아르헨티나에스투디안테스에 잠시 건너간 것을 빼면 선수생활을 나시오날에서만 보냈다. 1935년에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한 것을 끝으로 우루과이 대표팀에서 은퇴했고, 1936년에는 나시오날에서도 선수생활을 그만뒀다.
1933년의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챔피언 결정전은 상당히 유명하다. 늘 그랬듯 우루과이의 전통의 라이벌 페냐롤나시오날간의 시합이었고 여기에서 페냐롤의 브라울리오 카스트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골을 넣었다. 원래 경기장 밖으로 나가는 볼이었지만 메디컬 팀[4]의 캐비닛을 맞추고 그를 재빨리 이용해 골을 만든 것. 첫 경기는 이 득점이 유일한 득점이자 결승골이 되었고 나시오날은 격렬한 항의 끝에 세 명이 퇴장당했다.[5] 사유는 심판 폭행. 그로 인해 경기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심판이었던 텔레스포로 로드리게스 대신 대기심 루이스 스칸드롤리오가 남은 경기를 진행하였다. 결국 조명 사정까지 겹쳐지면서 70분에 경기가 중단되고 말았다.
두 달 후 우루과이 축구 협회는 그 골을 무효로 선언했고 심판 폭행 역시 무효로 처리하였다. 남은 경기는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에서 치러졌고 무승부로 끝났다. 2차전은 골이 없어서 2차 연장전까지 치른 끝에 무승부로 끝났고 3차전에서야 카스트로의 해트 트릭으로 우승팀을 결정지었다.

2.5. 감독 생활


한 마디로 평가하면 프로 감독으로서의 성과는 최고, 국가대표팀 감독으로는 기대에 못 미쳤다.
은퇴한지 3년 후인 1939년에는 나시오날의 수석 코치로 돌아왔고, 나시오날은 우승을 차지했다. 그 다음해에는 아예 정식 감독으로 취임. 1940년부터 1943년까지 4년 연속으로 우루과이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그는 정상에 있을 때 물러났다. 그러다가 1952년, 다시 나시오날의 감독으로 복귀하여 또 우승을 시키고 감독 자리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1959년에 우루과이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참가한 코파 아메리카 대회에서는 2승 4패로 만족스러운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우루과이 국가대표팀의 지휘봉을 내려놓은 이듬해 55세의 다소 이른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 수상



3.1. 클럽



3.2. 국가대표



3.3. 개인



3.4. 감독



[1] 정확히 말하면 오른팔이 아예 없던게 아니라 오른손이 없던 것으로 이 선수가 드리블을 하면 수비수가 어디로 갈지 몰라 막기 어려웠다. 여담으로 소설 돈키호테를 쓴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 또한 별명이 외팔이였다. 레판토 해전에서 한쪽 팔을 잃었는데, 이로 인해 'El Manco de Lepanto(레판토의 외팔이)'로 불렸다.[2] 우루과이의 월드컵 첫 경기가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에서 처음으로 열린 경기였으므로 이 골은 우루과이의 선제 결승골인 동시에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의 개장골이기도했다.[3] 여담으로 2018년 대회까지 이렇게 월드컵 우승팀의 첫 경기 선제골과 결승전의 마지막골을 넣은 선수는 다음 대회의 이탈리아 공격수 안젤로 스키아비오가 유일하다[4] 정확히는 운동 생리학 팀.[5] 그 중 한 명은 대표팀 주장 호세 나사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