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루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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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중반 프리메라 리가를 대표했던 왼발 잡이 공격수. 최전방과 왼쪽 측면을 겸할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 유스 출신으로 마요르카 시절 사무엘 에투와 뛰어난 콤비 플레이를 보이며 스페인 최고의 유망주로 발돋움했다. 이후 데포르티보로 이적해 정상급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뉴캐슬로 이적한 후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며 희대의 먹튀로 전락했다. 아약스에도 잠시 몸담았다가 말라가에서 10/11 시즌 도중 은퇴를 선언했다.
2002 한일 월드컵과 유로 2004에 스페인 대표로 출전했지만 아쉽게도 메이저 대회에서 주전이 된 적은 없었다.
스페인 선수치고 테크닉이 섬세하진 않았다. 하지만 폭발적인 스피드와 적절한 몸싸움을 이용한 돌파가 뛰어났다. 전성기 시절엔 라 리가에서 가장 주력이 빠른 선수 중 하나였다.
183cm으로 윙어치고 체격 조건이 좋았다. 애초에 스트라이커 출신이라 제공권, 몸싸움도 다른 윙어보다 좋은 편이라 상대 수비수 입장에선 매우 껄끄러웠다. 데포르티보의 플랜 A였던 4-2-3-1 포메이션에서 원톱은 (특히 페널티 박스 근처에서) 상대 수비가 주는 부담을 혼자서 견뎌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케의 중앙 지향적인 점과 (윙어치고) 좋은 체격은 아군 원톱에 대한 상대 수비의 집중 견제를 분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발재간은 평균이지만 발이 빨랐기에 넓은 공간이 주어질 경우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던 선수다. 반대급부로 좁은 공간이나 정적인 상황에선 다소 위력이 떨어지는 편.
무엇보다 가장 큰 장점은 바로 강력한 왼발. 킥이 받쳐줬기에 루케는 스트라이커뿐만 아니라 윙어로도 활약할 수 있었다. 프리킥도 꽤나 잘 차는 편으로 낮고 빠른 강슛은 트레이드 마크였다. 골키퍼가 반응조차 못했던 경우가 여러번.
아래 후술하겠지만 큰 경기에 굉장히 강했다. 바르셀로나 유스 출신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유난히 잘했다.
마지막으로 투우 세리머니가 트레이드 마크다. 정말 기쁠 때 빼곤 골을 넣으면 항상 투우 세리머니를 했다.
당대에 스페인이 보유했던 윙어들, 호아킨 산체스, 루페테, 비센테 로드리게스는 클래식 윙어로 측면에서 직선적인 플레이를 선보였다.
반면 루케는 스트라이커 출신이라 그런지 상대적으로 중앙 지향적이었다. 그래서 득점력이 좋았던 편. 본격적으로 윙어로 뛰었던 03/04 시즌 리그 8골, 04/05 시즌 리그 11골을 득점했다. 모두 필드 골이다. 이 시절은 지금과 달리 윙어에게 득점을 요구하던 시대가 아니었다는 걸 생각하면 상당한 득점력이다.
반대급부로 비센테 로드리게스나 호아킨 산체스에 비해 온전히 드리블 능력으로 측면을 파괴하는 능력은 떨어졌다. 쉽게 말해서 순수한 드리블 능력은 평균적인 수준. 측면에서 직접 볼 운반을 하기 보단 공간을 파고 들어서 간결하게 마무리를 짓는 유형이었다.
지난 20년 동안 스페인은 육각형에 가까운 공격수를 많이 배출했다.[1] 다만 라울 곤살레스, 디에고 트리스탄, 다비드 비야를 제외하곤 모두 작은 육각형이라 문제였지.[2]
알베르트 루케가 신성으로 떠올랐던 이유는 스페인에선 흔하지 않은, 애매한 육각형이 아닌, 스피드를 바탕으로 라인 브레이킹에 확실한 강점을 보이는 유형이었기 때문. 여기에 적절한 연계 능력은 덤.
무엇보다 보통 돌파형 스트라이커는 상대 수비가 라인을 낮게 잡을 경우 무기력해진다. 예를 들어, 페르난도 토레스가 그렇다. 반면에 루케의 경우 상대가 라인을 낮게 잡더라도 강력한 왼발 킥으로 직접 타격이 가능했기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
이는 루케가 커리어 초기에 득점 기록이 다소 부진했음에도 애매한 육각형의 표본 라울 타무도, 애매한 타겟터 이스마엘 우르사이스같은 쟁쟁한 라이벌들을 제치고 2002 한일 월드컵에 출전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왼쪽 윙어로 포지션을 변경하면서 잠재력을 폭발시켰지만 반대급부로 스페인 대표팀에서의 입지는 좁아진 케이스. 왜냐면 순수하게 윙어로서 능력은 비센테 로드리게스가 뛰어났기 때문. 감독들에겐 윙어로 인식되었는지 스트라이커로는 크게 쓰이지 않았다.
스트라이커로 계속 컸더라면 라울의 파트너로 스페인 대표팀 주전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페르난도 모리엔테스, 디에고 트리스탄이 갑작스레 하향세를 타며 스페인 최전방이 사실상 전멸했었기 때문이다.[3]
마요르카 역사상 최고의 트리오: 루케, 에투, 이바가사
알베르트 루케는 바르셀로나에서 유소년을 보낸 후 1998년 여름 마요르카 B로 이적한다. 당시 감독이던 엑토르 쿠페르는 루케 잠재력을 높이 샀고 98/99 시즌 말미에 리그 5경기를 소화했다. 루케의 프리메라 리가 데뷔 시즌.
99/00 시즌 디에고 트리스탄의 1군 합류로 루케는 말라가로 임대를 떠난다. 말라가에서 리그 23경기 3골을 기록했다.
00/01 시즌 루케는 자신의 축구 인생을 바꿔놓는 두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은사 루이스 아라고네스와 피부색만 다른 형제 사무엘 에투. 아라고네스의 절대적인 신임 아래 루케는 주전으로 나서 31경기 9골을 터트렸다. 비록 많은 골을 득점하진 않았으나 루케는 대형 유망주로 떠오르게 된다.
'''사무엘 에투-알베르트 루케'''로 이어지는 투톱 그리고 둘을 보좌했던 플레이메이커 '''아리엘 이바가사'''까지, 20대 초반의 젊은 유망주로 이뤄진 삼각편대가 보여준 축구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이들은 리그에서만 30골을 합작했고 '''마요르카를 리그 3위, 구단 역사상 가장 높은 순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챔피언스 리그에 올려놓았다.'''
01/02 시즌 마요르카는 리그와 챔스 병행으로 인해 고전했으나 알베르트 루케는 36경기 14골로 오히려 더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특히 라울 타무도, 이스마엘 우르사이스, 카타냐 같은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2002 한일 월드컵에도 출전하며 몸값은 그야말로 급상승.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무엘 에투와 매우 각별한 사이다. 사무엘 에투는 '''"알베르트는 피부색만 다를 뿐 나의 친형제다."'''라고 여러번 언급했고 2004년 이후 루케의 바르셀로나 리턴설이 돌았을 때 '''"환상적인 일"'''이라며 기뻐했다. 물론 루케의 리턴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당시 레알 마드리드에 '''라울-모리엔테스'''가 있었다면 마요르카엔 '''루케-에투'''가 있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실질적으로 레알 소시에다드의 '''니하트-코바체비치'''와 함께 2000년대 초반을 장식했던 프리메라 리가 최고의 콤비 중 하나다.
최고의 순간
알베르트 루케는 2002년 여름 데포르티보로 이적했다. 이적료는 약 1,500만 유로. 당시 데포르티보는 로이 마카이와 디에고 트리스탄이라는, 정상급 스트라이커를 2명이나 보유한 강팀이었다.
참고로 로이 마카이는 02/03 시즌 리그 29골로 라 리가 득점왕에 올랐고 01/02 시즌 스페인과 유럽에 공포를 안겨줬던 디에고 트리스탄도 정신줄을 아예 놓진 않은 상태였다. 그로인해 루케는 조커로 대부분 경기를 출전해야만 했다. 리그 32경기에 나섰으나 선발은 4번, 총 925분을 소화하는데 그쳤다. 출전 시간이 대체로 25분 정도로 한정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8골을 터트리며 수퍼 서브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925분 8골, 거의 90분에 1골을 넣은 셈.
02/03 시즌 톡톡히 수퍼 서브 역할을 해냈던 루케, 하지만 데포르티보엔 앞서 언급한 두 명의 스트라이커 외에도 세바스티안 아브레우와 왈테르 판디아니처럼 검증된 공격수가 있었다.[4] 그렇다고 루케의 재능을 썩히긴 아쉬웠던 터라 하비에르 이루레타 감독은 노쇠화 기미가 보이는 프란 곤살레스의 포지션인 레프트 윙으로 포지션을 변경하길 권유한다. 결과적으로 이는 루케에게나 데포르티보에게나 신의 한수가 된다.
03/04 시즌 루케는 말 그대로 포텐셜이 폭발했다. 프란처럼 섬세한 개인기와 축구 센스는 부족했지만 루케에겐 폭발적인 스피드와 득점력이 있었다. 로이 마카이가 떠나고, 디에고 트리스탄이 끝이 없는 부진에 빠진 시점에서 루케의 득점 능력은 매우 큰 역할을 했다. PK없이 리그에서만 8골을 득점했다.
챔피언스 리그에서 활약상이 매우 뛰어났다. 조별 리그에서 PSV 아인트호벤을 상대로 환상적인 프리킥 골과 판디아니의 골을 어시스트하며 팀의 16강을 확정지었다.
16강에선 02/03 시즌 챔스 준우승팀 유벤투스를 상대로 2차전에서 1골을 기록하며 팀을 8강으로 이끌었다.[5]
8강에선 디펜딩 챔피언 AC 밀란을 만났는데, 바로 리아소르의 기적이 일어났던 라운드였다. 데포르티보는 1차전 1:4로 대패한 후 2차전 4:0 대승을 거뒀다. 2차전 리아소르의 기적 당시 루케는 선발 출전해 팀의 두 번째 골을 어시스트했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적의 마지막 퍼즐인 세 번째 골을 직접 터트리는 맹활약'''을 펼쳤다. 이런 활약상 바탕으로 유로 2004에도 참가했다.
2004/2005 시즌 데포르티보는 마우로 실바의 노쇠화, 판디아니의 이적, 디에고 트리스탄의 끝없는 부진, 후안 카를로스 발레론의 부족한 체력 안배 및 부상, 전술적 한계 등등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 무승에 이은 광탈+리그 8위로 시즌을 마무리한다.
이런 악재 속에도 루케는 리그에서만 11골을 터트리며 한층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국가대표팀에서도 비센테 로드리게스와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를 밀어내며 주전으로 등극했다. 특히 리투아니아 전 강력한 왼발 슛으로 월드컵 진출 실패가 코 앞이던 스페인을 구해내기도 했다.
가지 말았어야 했던 곳
03/04 시즌과 04/05 시즌, 두 시즌을 거치며 알베르트 루케는 프리메라 리가 정상급 선수로 성장했다. 반대로 데포르티보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고 재정까지 급속도로 악화되던 상황. 애초에 루케는 다른 선수들과 달리 리아소르에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 공개적인 석상에서도 항상 바르셀로나 리턴을 꿈꾼다고 말했을 정도니까.
2005년 여름, 알베르트 루케는 시즌 종료 이후 사무엘 에투와 조합을 구상했던 친정팀 바르셀로나와 산티아고 솔라리의 대체자로 그를 노리던 레알 마드리드를 비롯해 리버풀, 세비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관심을 받았으며, 루케의 경우는 자신이 동경하던 바르셀로나를 원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행선지는 EPL의 뉴캐슬이었다. 이적료는 약 2,000만 유로.
루케의 뉴캐슬 행은 데포르티보의 구단주 아우구스토 렌도이로의 입김이 컸다. 그는 데포르티보에게 치명타를 입혔던 히바우두 사건[6] 이후로 레알 마드리드면 모를까 바르셀로나에겐 절대 핵심 선수를 팔지를 않았다. 훗날 필리페 루이스도 루케와 같은 이유로 바르셀로나 행이 불발되었다.
당시 EPL과 뉴캐슬의 위상을 생각했을 때 알베르트 루케는 이적 시장에서 가장 클래스가 높은 선수 중 하나였다. 뉴캐슬은 다른 구단들이 제시한 금액보다 더 높게 제시했기에 이적이 가능했다.
루케의 뉴캐슬 행은 파격적이었다. 데포르티보가 04/05 시즌 부진했다지만 여전히 핵심 선수들은 남아있었고 충분히 챔피언스 리그~UEFA 컵 진출권으로 평가받았기 때문. 또한 프리메라 리가 최고의 선수 중 하나가 한 수 아래인 리그의 중위권~상위권으로 이적하는 셈이기도 했으니.
EPL 혹은 뉴캐슬 팬이라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지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EPL은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선수들 사이에서 인식도 좋지 않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나 아스날 FC을 제외하곤 눈에 띄는 구단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프리메라 리가, 세리에 A에서 한물 간 선수들이 말년에 돈 땡기러 가는 리그라는 인식이 강했다. (사실 베르캄프도 이런 과정으로 아스날로 이적했고) 그렇다고 현재 중동 급은 아니고, 스페인이나 이탈리아보다 반 단계 아래 정도.
데뷔 경기였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전에서 괜찮은 활약을 펼치며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이후 크고 작은 부상의 연속, 그에 따른 자신감 결여, 결국 감독에게 전력 외 선수로 구분되며 2군 경기나 뛰는 선수로 전락했다. 이적 당시 기대감, 높은 이적료와 주급을 고려했을 때 EPL 역대급 먹튀 중 하나. 뉴캐슬 팬들에겐 금지어나 다름 없다.
07/08 시즌을 앞두고 마침내 뉴캐슬에서 벗어났다. 행선지는 네덜란드의 명문 아약스. 아약스는 루케에게 상징적인 번호인 10번을 건내며 그의 부활을 기대했다. 그러나 루케는 아약스에서도 부진했다. 16경기 4골 2어시스트.
07/08 시즌이 끝난 후 루케는 아약스에서도 전력 외 선수로 구분을 받게 된다. 08/09 시즌을 앞두고 과거에 몸담았던 말라가로 임대를 떠난다.
여담으로 아약스 시절 루이스 수아레스와 함께 뛴 적이 있어선지 은퇴 후 축구 방송 패널로 활동하면서 수아레스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 편.
말라가는 승격팀으로 08/09 시즌 유력한 강등 후보였다. 그러나 골키퍼 이냐키 고이티아를 비롯 수비진의 웰링톤, 엘데르 로사이로, 헤수스 가메스, 측면의 엘리세우, 중원의 아포뇨, 최전방의 나빌 바하 등등 세군다 리가부터 함께 했던 기존 자원들이 프리메라 리가에서도 제 몫을 해준 가운데 두다, 아드리안 로페스같은 이적생들도 빠르게 녹아들며 시즌을 7위 마쳤다. 훗날 말락티코로 챔피언스 리그 4강까지 찍었던 말라가의 기틀을 닦았던 시즌으로 남아있다.
알베르트 루케는 전반기에 주로 교체로 출전하다가 후반기에 들어선 선발로 자리매김했다. 리그 28경기 8골을 기록하며 기나긴 슬럼프에 마침표를 찍었다. 말라가 시절에 유난히 원더골이 많기도 했다.[7]
루케가 기나긴 슬럼프에서 나올 수 있었던 이유라면 일단 프리메라 리가는 피지컬적으로 높은 수준이 필요한 리그가 아니기 때문. 루케는 스피드가 강점이었던 전성기 시절에도 (라 리가 기준) 몸싸움이 약하지 않았다. 말라가 시절엔 상체가 더 두꺼워진 상태였다. 한편 킥 위주로 플레이스타일을 변화하며 떨어진 스피드를 커버했다.
그러나 09/10 시즌 들어 새로운 선수의 영입으로 출전 시간이 큰 폭으로 감소했다. 더군다나 2010년을 기점으로 말라가가 말락티코를 선언하고 본격적으로 투자를 감행하게 되면서 입지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10/11 시즌엔 전반기에 3경기 교체로 출전하는데 그쳤고 시즌 도중 은퇴를 결정했다.
은퇴 직후 스페인의 축구 방송인 Punto Pelota의 고정 패널로 활동했다. 최근엔 GOL TV에서 해설가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했다. 은퇴한 지 8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좋은 체형을 유지하고 있고 생각보다 동안이다.
바르셀로나 유스 출신답게 바르셀로나에 대한 애정이 선수 시절이나 지금도 각별하다. 특히 리오넬 메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 편.
Punto Pelota에서 데포르티보 관련 영상이 나올 때마다 눈가가 촉촉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여러번의 갈리시아 더비를 비롯해 리아소르의 기적이 있었던 밤은 자신의 축구 인생 중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이후 2016년 여름에 데포르티보가 레전드들을 초빙해 열었던 자선 겅기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라울 타무도, 카타냐, 우르사이스 등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2002년 월드컵에 참전했다. 조별 예선에서 이미 디에고 트리스탄이 부상으로 낙마한 상황이기도 했고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감독의 배려로 16강 아일랜드 전 연장전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유로 2004에 참가했으나 당시 스페인은 희대의 띵장 이냐키 사에스가 지휘봉을 잡았던 암흑기. 국대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라울 곤살레스, 뛰어난 득점력도 보유했었지만 라울과 궁합이 좋다는 이유가 더 컸던 페르난도 모리엔테스, 레알 마드리드 프리미엄을 업고 주전으로 나선 투톱은 0골+답도 없는 경기력으로 스페인에게 조별 예선 광탈 선사했다. 당시 발레론을 쓰느냐, 라울을 쓰느냐? 모리엔테스가 원톱에 적당한가? 등등 공격진 조합에 논란이 많았기에 루케로선 매우 아쉬웠던 메이저 대회. 왼쪽 측면같은 경우 비센테가 정점을 찍을 시절이라 비센테를 쓰는 게 맞았다. 그러나 모리엔테스나 라울은 2차전부턴 나와선 안됐다. 라울 대신 발레론을 쓰지
않을 거였으면 적어도 루케가 모리엔테스를 대신해야만 했다. 당연히 루케로선 아쉬움이 많이 남을 수밖에 없었던 대회였다.
스페인 국대에서 바르셀로나-레알 마드리드 소속이 갖는 프리미엄은 상당하다. 일단 클래스가 증명되는 첫 번째 척도이며 양강 소속이면 그에 따른 언론, 여론이 조성하는 영향력이 중소 구단들과 차원이 다르기 때문. 라울-모리엔테스가 투톱으로 나선 것도 사실 언론, 여론에서 떠들었던 것이 컸다. 일단 라울은 당대에 스페인에서 절대적인 존재이기도 했고.
사에스 입장에선 똑같이 광탈해도 라울을 쓰고 광탈하는 것이 그나마 비난을 덜 받는 방법이었다. 만약 라울이 아닌 다른 선수를 기용하고 광탈했더라면? 당시 스페인 내에서 라울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생각했을 때 사에스는 신변에 위협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8]
이런 분위기에서 루케는 당연히 데포르티보의 한계를 체감했을 것이다. 데포르티보가 명문이 아닌 어디까지나 신흥 강호에 불과했으니까.
만약 루케가 바르셀로나 소속이었다면, 축구 내외적으오 모든 면에서 언론에 노출되는 빈도가 훨씬 많았을 것이다. 더해 데포르티보가 아닌 바르셀로나에서 03/04 시즌 정도의 퍼포먼스를 펼쳤다면? 카탈루냐 대형 언론을 필두로 루케의 국가대표팀 주전 기용을 심도있게 보도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루케는 바르셀로나 유스 출신이다. 당연하게도 루케가 바르셀로나를 울부짖기 시작했던 것도 유로 2004 이후였다.
루케는 2006년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에서 비센테 로드리게스와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를 제치고 주전 자리를 꿰차며 활약했다. 특히 리투아니아 전 통쾌한 중거리포로 스페인을 탈락 위기에서 구해냈다. 당시 감독도 은사인 루이스 아라고네스였기에 평타만 쳤어도 2006 월드컵 주전을 꿰찼을 상황이었다.
특히 2006 독일 월드컵 16강 프랑스 전, 후반전 아라고네스가 벤치에서 애타게 찾았던 중 1명이었을 것이다. 스페인에서 나름 대형 유망주 소리를 듣고 자랐고, 클럽에서의 활약도도 좋은 편이었기에 적어도 2006 월드컵까진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는데 안타까운 선수.
1. 소개
2000년대 초반~중반 프리메라 리가를 대표했던 왼발 잡이 공격수. 최전방과 왼쪽 측면을 겸할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 유스 출신으로 마요르카 시절 사무엘 에투와 뛰어난 콤비 플레이를 보이며 스페인 최고의 유망주로 발돋움했다. 이후 데포르티보로 이적해 정상급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뉴캐슬로 이적한 후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며 희대의 먹튀로 전락했다. 아약스에도 잠시 몸담았다가 말라가에서 10/11 시즌 도중 은퇴를 선언했다.
2002 한일 월드컵과 유로 2004에 스페인 대표로 출전했지만 아쉽게도 메이저 대회에서 주전이 된 적은 없었다.
1.1. 플레이스타일
스페인 선수치고 테크닉이 섬세하진 않았다. 하지만 폭발적인 스피드와 적절한 몸싸움을 이용한 돌파가 뛰어났다. 전성기 시절엔 라 리가에서 가장 주력이 빠른 선수 중 하나였다.
183cm으로 윙어치고 체격 조건이 좋았다. 애초에 스트라이커 출신이라 제공권, 몸싸움도 다른 윙어보다 좋은 편이라 상대 수비수 입장에선 매우 껄끄러웠다. 데포르티보의 플랜 A였던 4-2-3-1 포메이션에서 원톱은 (특히 페널티 박스 근처에서) 상대 수비가 주는 부담을 혼자서 견뎌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케의 중앙 지향적인 점과 (윙어치고) 좋은 체격은 아군 원톱에 대한 상대 수비의 집중 견제를 분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발재간은 평균이지만 발이 빨랐기에 넓은 공간이 주어질 경우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던 선수다. 반대급부로 좁은 공간이나 정적인 상황에선 다소 위력이 떨어지는 편.
무엇보다 가장 큰 장점은 바로 강력한 왼발. 킥이 받쳐줬기에 루케는 스트라이커뿐만 아니라 윙어로도 활약할 수 있었다. 프리킥도 꽤나 잘 차는 편으로 낮고 빠른 강슛은 트레이드 마크였다. 골키퍼가 반응조차 못했던 경우가 여러번.
아래 후술하겠지만 큰 경기에 굉장히 강했다. 바르셀로나 유스 출신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유난히 잘했다.
마지막으로 투우 세리머니가 트레이드 마크다. 정말 기쁠 때 빼곤 골을 넣으면 항상 투우 세리머니를 했다.
1.2. 윙어로서의 루케
당대에 스페인이 보유했던 윙어들, 호아킨 산체스, 루페테, 비센테 로드리게스는 클래식 윙어로 측면에서 직선적인 플레이를 선보였다.
반면 루케는 스트라이커 출신이라 그런지 상대적으로 중앙 지향적이었다. 그래서 득점력이 좋았던 편. 본격적으로 윙어로 뛰었던 03/04 시즌 리그 8골, 04/05 시즌 리그 11골을 득점했다. 모두 필드 골이다. 이 시절은 지금과 달리 윙어에게 득점을 요구하던 시대가 아니었다는 걸 생각하면 상당한 득점력이다.
반대급부로 비센테 로드리게스나 호아킨 산체스에 비해 온전히 드리블 능력으로 측면을 파괴하는 능력은 떨어졌다. 쉽게 말해서 순수한 드리블 능력은 평균적인 수준. 측면에서 직접 볼 운반을 하기 보단 공간을 파고 들어서 간결하게 마무리를 짓는 유형이었다.
1.3. 스트라이커로서의 루케
지난 20년 동안 스페인은 육각형에 가까운 공격수를 많이 배출했다.[1] 다만 라울 곤살레스, 디에고 트리스탄, 다비드 비야를 제외하곤 모두 작은 육각형이라 문제였지.[2]
알베르트 루케가 신성으로 떠올랐던 이유는 스페인에선 흔하지 않은, 애매한 육각형이 아닌, 스피드를 바탕으로 라인 브레이킹에 확실한 강점을 보이는 유형이었기 때문. 여기에 적절한 연계 능력은 덤.
무엇보다 보통 돌파형 스트라이커는 상대 수비가 라인을 낮게 잡을 경우 무기력해진다. 예를 들어, 페르난도 토레스가 그렇다. 반면에 루케의 경우 상대가 라인을 낮게 잡더라도 강력한 왼발 킥으로 직접 타격이 가능했기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
이는 루케가 커리어 초기에 득점 기록이 다소 부진했음에도 애매한 육각형의 표본 라울 타무도, 애매한 타겟터 이스마엘 우르사이스같은 쟁쟁한 라이벌들을 제치고 2002 한일 월드컵에 출전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왼쪽 윙어로 포지션을 변경하면서 잠재력을 폭발시켰지만 반대급부로 스페인 대표팀에서의 입지는 좁아진 케이스. 왜냐면 순수하게 윙어로서 능력은 비센테 로드리게스가 뛰어났기 때문. 감독들에겐 윙어로 인식되었는지 스트라이커로는 크게 쓰이지 않았다.
스트라이커로 계속 컸더라면 라울의 파트너로 스페인 대표팀 주전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페르난도 모리엔테스, 디에고 트리스탄이 갑작스레 하향세를 타며 스페인 최전방이 사실상 전멸했었기 때문이다.[3]
2. 클럽
2.1. 마요르카
마요르카 역사상 최고의 트리오: 루케, 에투, 이바가사
알베르트 루케는 바르셀로나에서 유소년을 보낸 후 1998년 여름 마요르카 B로 이적한다. 당시 감독이던 엑토르 쿠페르는 루케 잠재력을 높이 샀고 98/99 시즌 말미에 리그 5경기를 소화했다. 루케의 프리메라 리가 데뷔 시즌.
99/00 시즌 디에고 트리스탄의 1군 합류로 루케는 말라가로 임대를 떠난다. 말라가에서 리그 23경기 3골을 기록했다.
00/01 시즌 루케는 자신의 축구 인생을 바꿔놓는 두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은사 루이스 아라고네스와 피부색만 다른 형제 사무엘 에투. 아라고네스의 절대적인 신임 아래 루케는 주전으로 나서 31경기 9골을 터트렸다. 비록 많은 골을 득점하진 않았으나 루케는 대형 유망주로 떠오르게 된다.
'''사무엘 에투-알베르트 루케'''로 이어지는 투톱 그리고 둘을 보좌했던 플레이메이커 '''아리엘 이바가사'''까지, 20대 초반의 젊은 유망주로 이뤄진 삼각편대가 보여준 축구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이들은 리그에서만 30골을 합작했고 '''마요르카를 리그 3위, 구단 역사상 가장 높은 순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챔피언스 리그에 올려놓았다.'''
01/02 시즌 마요르카는 리그와 챔스 병행으로 인해 고전했으나 알베르트 루케는 36경기 14골로 오히려 더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특히 라울 타무도, 이스마엘 우르사이스, 카타냐 같은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2002 한일 월드컵에도 출전하며 몸값은 그야말로 급상승.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무엘 에투와 매우 각별한 사이다. 사무엘 에투는 '''"알베르트는 피부색만 다를 뿐 나의 친형제다."'''라고 여러번 언급했고 2004년 이후 루케의 바르셀로나 리턴설이 돌았을 때 '''"환상적인 일"'''이라며 기뻐했다. 물론 루케의 리턴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당시 레알 마드리드에 '''라울-모리엔테스'''가 있었다면 마요르카엔 '''루케-에투'''가 있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실질적으로 레알 소시에다드의 '''니하트-코바체비치'''와 함께 2000년대 초반을 장식했던 프리메라 리가 최고의 콤비 중 하나다.
2.2. 데포르티보
최고의 순간
알베르트 루케는 2002년 여름 데포르티보로 이적했다. 이적료는 약 1,500만 유로. 당시 데포르티보는 로이 마카이와 디에고 트리스탄이라는, 정상급 스트라이커를 2명이나 보유한 강팀이었다.
참고로 로이 마카이는 02/03 시즌 리그 29골로 라 리가 득점왕에 올랐고 01/02 시즌 스페인과 유럽에 공포를 안겨줬던 디에고 트리스탄도 정신줄을 아예 놓진 않은 상태였다. 그로인해 루케는 조커로 대부분 경기를 출전해야만 했다. 리그 32경기에 나섰으나 선발은 4번, 총 925분을 소화하는데 그쳤다. 출전 시간이 대체로 25분 정도로 한정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8골을 터트리며 수퍼 서브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925분 8골, 거의 90분에 1골을 넣은 셈.
02/03 시즌 톡톡히 수퍼 서브 역할을 해냈던 루케, 하지만 데포르티보엔 앞서 언급한 두 명의 스트라이커 외에도 세바스티안 아브레우와 왈테르 판디아니처럼 검증된 공격수가 있었다.[4] 그렇다고 루케의 재능을 썩히긴 아쉬웠던 터라 하비에르 이루레타 감독은 노쇠화 기미가 보이는 프란 곤살레스의 포지션인 레프트 윙으로 포지션을 변경하길 권유한다. 결과적으로 이는 루케에게나 데포르티보에게나 신의 한수가 된다.
03/04 시즌 루케는 말 그대로 포텐셜이 폭발했다. 프란처럼 섬세한 개인기와 축구 센스는 부족했지만 루케에겐 폭발적인 스피드와 득점력이 있었다. 로이 마카이가 떠나고, 디에고 트리스탄이 끝이 없는 부진에 빠진 시점에서 루케의 득점 능력은 매우 큰 역할을 했다. PK없이 리그에서만 8골을 득점했다.
챔피언스 리그에서 활약상이 매우 뛰어났다. 조별 리그에서 PSV 아인트호벤을 상대로 환상적인 프리킥 골과 판디아니의 골을 어시스트하며 팀의 16강을 확정지었다.
16강에선 02/03 시즌 챔스 준우승팀 유벤투스를 상대로 2차전에서 1골을 기록하며 팀을 8강으로 이끌었다.[5]
8강에선 디펜딩 챔피언 AC 밀란을 만났는데, 바로 리아소르의 기적이 일어났던 라운드였다. 데포르티보는 1차전 1:4로 대패한 후 2차전 4:0 대승을 거뒀다. 2차전 리아소르의 기적 당시 루케는 선발 출전해 팀의 두 번째 골을 어시스트했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적의 마지막 퍼즐인 세 번째 골을 직접 터트리는 맹활약'''을 펼쳤다. 이런 활약상 바탕으로 유로 2004에도 참가했다.
2004/2005 시즌 데포르티보는 마우로 실바의 노쇠화, 판디아니의 이적, 디에고 트리스탄의 끝없는 부진, 후안 카를로스 발레론의 부족한 체력 안배 및 부상, 전술적 한계 등등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 무승에 이은 광탈+리그 8위로 시즌을 마무리한다.
이런 악재 속에도 루케는 리그에서만 11골을 터트리며 한층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국가대표팀에서도 비센테 로드리게스와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를 밀어내며 주전으로 등극했다. 특히 리투아니아 전 강력한 왼발 슛으로 월드컵 진출 실패가 코 앞이던 스페인을 구해내기도 했다.
2.3. 뉴캐슬
가지 말았어야 했던 곳
03/04 시즌과 04/05 시즌, 두 시즌을 거치며 알베르트 루케는 프리메라 리가 정상급 선수로 성장했다. 반대로 데포르티보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고 재정까지 급속도로 악화되던 상황. 애초에 루케는 다른 선수들과 달리 리아소르에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 공개적인 석상에서도 항상 바르셀로나 리턴을 꿈꾼다고 말했을 정도니까.
2005년 여름, 알베르트 루케는 시즌 종료 이후 사무엘 에투와 조합을 구상했던 친정팀 바르셀로나와 산티아고 솔라리의 대체자로 그를 노리던 레알 마드리드를 비롯해 리버풀, 세비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관심을 받았으며, 루케의 경우는 자신이 동경하던 바르셀로나를 원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행선지는 EPL의 뉴캐슬이었다. 이적료는 약 2,000만 유로.
루케의 뉴캐슬 행은 데포르티보의 구단주 아우구스토 렌도이로의 입김이 컸다. 그는 데포르티보에게 치명타를 입혔던 히바우두 사건[6] 이후로 레알 마드리드면 모를까 바르셀로나에겐 절대 핵심 선수를 팔지를 않았다. 훗날 필리페 루이스도 루케와 같은 이유로 바르셀로나 행이 불발되었다.
당시 EPL과 뉴캐슬의 위상을 생각했을 때 알베르트 루케는 이적 시장에서 가장 클래스가 높은 선수 중 하나였다. 뉴캐슬은 다른 구단들이 제시한 금액보다 더 높게 제시했기에 이적이 가능했다.
루케의 뉴캐슬 행은 파격적이었다. 데포르티보가 04/05 시즌 부진했다지만 여전히 핵심 선수들은 남아있었고 충분히 챔피언스 리그~UEFA 컵 진출권으로 평가받았기 때문. 또한 프리메라 리가 최고의 선수 중 하나가 한 수 아래인 리그의 중위권~상위권으로 이적하는 셈이기도 했으니.
EPL 혹은 뉴캐슬 팬이라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지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EPL은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선수들 사이에서 인식도 좋지 않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나 아스날 FC을 제외하곤 눈에 띄는 구단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프리메라 리가, 세리에 A에서 한물 간 선수들이 말년에 돈 땡기러 가는 리그라는 인식이 강했다. (사실 베르캄프도 이런 과정으로 아스날로 이적했고) 그렇다고 현재 중동 급은 아니고, 스페인이나 이탈리아보다 반 단계 아래 정도.
데뷔 경기였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전에서 괜찮은 활약을 펼치며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이후 크고 작은 부상의 연속, 그에 따른 자신감 결여, 결국 감독에게 전력 외 선수로 구분되며 2군 경기나 뛰는 선수로 전락했다. 이적 당시 기대감, 높은 이적료와 주급을 고려했을 때 EPL 역대급 먹튀 중 하나. 뉴캐슬 팬들에겐 금지어나 다름 없다.
2.4. 아약스
07/08 시즌을 앞두고 마침내 뉴캐슬에서 벗어났다. 행선지는 네덜란드의 명문 아약스. 아약스는 루케에게 상징적인 번호인 10번을 건내며 그의 부활을 기대했다. 그러나 루케는 아약스에서도 부진했다. 16경기 4골 2어시스트.
07/08 시즌이 끝난 후 루케는 아약스에서도 전력 외 선수로 구분을 받게 된다. 08/09 시즌을 앞두고 과거에 몸담았던 말라가로 임대를 떠난다.
여담으로 아약스 시절 루이스 수아레스와 함께 뛴 적이 있어선지 은퇴 후 축구 방송 패널로 활동하면서 수아레스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 편.
2.5. 말라가
말라가는 승격팀으로 08/09 시즌 유력한 강등 후보였다. 그러나 골키퍼 이냐키 고이티아를 비롯 수비진의 웰링톤, 엘데르 로사이로, 헤수스 가메스, 측면의 엘리세우, 중원의 아포뇨, 최전방의 나빌 바하 등등 세군다 리가부터 함께 했던 기존 자원들이 프리메라 리가에서도 제 몫을 해준 가운데 두다, 아드리안 로페스같은 이적생들도 빠르게 녹아들며 시즌을 7위 마쳤다. 훗날 말락티코로 챔피언스 리그 4강까지 찍었던 말라가의 기틀을 닦았던 시즌으로 남아있다.
알베르트 루케는 전반기에 주로 교체로 출전하다가 후반기에 들어선 선발로 자리매김했다. 리그 28경기 8골을 기록하며 기나긴 슬럼프에 마침표를 찍었다. 말라가 시절에 유난히 원더골이 많기도 했다.[7]
루케가 기나긴 슬럼프에서 나올 수 있었던 이유라면 일단 프리메라 리가는 피지컬적으로 높은 수준이 필요한 리그가 아니기 때문. 루케는 스피드가 강점이었던 전성기 시절에도 (라 리가 기준) 몸싸움이 약하지 않았다. 말라가 시절엔 상체가 더 두꺼워진 상태였다. 한편 킥 위주로 플레이스타일을 변화하며 떨어진 스피드를 커버했다.
그러나 09/10 시즌 들어 새로운 선수의 영입으로 출전 시간이 큰 폭으로 감소했다. 더군다나 2010년을 기점으로 말라가가 말락티코를 선언하고 본격적으로 투자를 감행하게 되면서 입지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10/11 시즌엔 전반기에 3경기 교체로 출전하는데 그쳤고 시즌 도중 은퇴를 결정했다.
2.6. 은퇴 이후
은퇴 직후 스페인의 축구 방송인 Punto Pelota의 고정 패널로 활동했다. 최근엔 GOL TV에서 해설가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했다. 은퇴한 지 8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좋은 체형을 유지하고 있고 생각보다 동안이다.
바르셀로나 유스 출신답게 바르셀로나에 대한 애정이 선수 시절이나 지금도 각별하다. 특히 리오넬 메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 편.
Punto Pelota에서 데포르티보 관련 영상이 나올 때마다 눈가가 촉촉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여러번의 갈리시아 더비를 비롯해 리아소르의 기적이 있었던 밤은 자신의 축구 인생 중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이후 2016년 여름에 데포르티보가 레전드들을 초빙해 열었던 자선 겅기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3. 국가 대표
라울 타무도, 카타냐, 우르사이스 등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2002년 월드컵에 참전했다. 조별 예선에서 이미 디에고 트리스탄이 부상으로 낙마한 상황이기도 했고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감독의 배려로 16강 아일랜드 전 연장전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유로 2004에 참가했으나 당시 스페인은 희대의 띵장 이냐키 사에스가 지휘봉을 잡았던 암흑기. 국대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라울 곤살레스, 뛰어난 득점력도 보유했었지만 라울과 궁합이 좋다는 이유가 더 컸던 페르난도 모리엔테스, 레알 마드리드 프리미엄을 업고 주전으로 나선 투톱은 0골+답도 없는 경기력으로 스페인에게 조별 예선 광탈 선사했다. 당시 발레론을 쓰느냐, 라울을 쓰느냐? 모리엔테스가 원톱에 적당한가? 등등 공격진 조합에 논란이 많았기에 루케로선 매우 아쉬웠던 메이저 대회. 왼쪽 측면같은 경우 비센테가 정점을 찍을 시절이라 비센테를 쓰는 게 맞았다. 그러나 모리엔테스나 라울은 2차전부턴 나와선 안됐다. 라울 대신 발레론을 쓰지
않을 거였으면 적어도 루케가 모리엔테스를 대신해야만 했다. 당연히 루케로선 아쉬움이 많이 남을 수밖에 없었던 대회였다.
스페인 국대에서 바르셀로나-레알 마드리드 소속이 갖는 프리미엄은 상당하다. 일단 클래스가 증명되는 첫 번째 척도이며 양강 소속이면 그에 따른 언론, 여론이 조성하는 영향력이 중소 구단들과 차원이 다르기 때문. 라울-모리엔테스가 투톱으로 나선 것도 사실 언론, 여론에서 떠들었던 것이 컸다. 일단 라울은 당대에 스페인에서 절대적인 존재이기도 했고.
사에스 입장에선 똑같이 광탈해도 라울을 쓰고 광탈하는 것이 그나마 비난을 덜 받는 방법이었다. 만약 라울이 아닌 다른 선수를 기용하고 광탈했더라면? 당시 스페인 내에서 라울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생각했을 때 사에스는 신변에 위협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8]
이런 분위기에서 루케는 당연히 데포르티보의 한계를 체감했을 것이다. 데포르티보가 명문이 아닌 어디까지나 신흥 강호에 불과했으니까.
만약 루케가 바르셀로나 소속이었다면, 축구 내외적으오 모든 면에서 언론에 노출되는 빈도가 훨씬 많았을 것이다. 더해 데포르티보가 아닌 바르셀로나에서 03/04 시즌 정도의 퍼포먼스를 펼쳤다면? 카탈루냐 대형 언론을 필두로 루케의 국가대표팀 주전 기용을 심도있게 보도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루케는 바르셀로나 유스 출신이다. 당연하게도 루케가 바르셀로나를 울부짖기 시작했던 것도 유로 2004 이후였다.
루케는 2006년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에서 비센테 로드리게스와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를 제치고 주전 자리를 꿰차며 활약했다. 특히 리투아니아 전 통쾌한 중거리포로 스페인을 탈락 위기에서 구해냈다. 당시 감독도 은사인 루이스 아라고네스였기에 평타만 쳤어도 2006 월드컵 주전을 꿰찼을 상황이었다.
특히 2006 독일 월드컵 16강 프랑스 전, 후반전 아라고네스가 벤치에서 애타게 찾았던 중 1명이었을 것이다. 스페인에서 나름 대형 유망주 소리를 듣고 자랐고, 클럽에서의 활약도도 좋은 편이었기에 적어도 2006 월드컵까진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는데 안타까운 선수.
[1] 지난 20년 동안 페르난도 요렌테를 제외하고 제대로 된 타겟터도 없었다. 페르난도 모리엔테스나 이스마엘 우르사이스의 피지컬은 어디까지나 프리메라 리가에서만 통했으니까. 특히 프리메라 리가 수비수들의 피지컬은 타 리그에비해 떨어지는 편인 걸 감안하면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2] 과거 라울 타무도, 현재 제라르 모레노가 스페인 대표팀에서 크게 중용받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다재다능함이 리그에서만 한정되는 레벨이기 때문.[3] 페르난도 토레스가 10대 후반부터 대표팀에 드나들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스페인 대표팀이 공격수 가뭄을 겪었던 것이 컸다.[4] 아브레우는 매번 임대를 다니기 바빴지만 우루과이 대표팀의 일원이었다. 판디아니도 우루과이 대표팀 소속으로 클럽에선 트리스탄, 마카이에 밀려 철저한 후보이긴 했으나 한 시즌 10골 정도는 책임질 수 있었던 공격수[5] 델레 알피에서 열린 1차전도 데포르티보가 판디아니의 골로 1:0 승리했던 상황[6] 97/98 시즌 여름 이적 시장 마지막 날에 바르셀로나가 히바우두의 바이아웃 조항 금액을 지불하며 이적을 성사시킨 사건. 데포르티보는 히바우두를 중심으로 리빌딩을 마친 상황이었기에 엄청난 치명타였다. 당시 데포르티보는 꾸준히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와 우승 경쟁을 하던 시점이었기에 렌도이로와 데포르티보 팬들의 분노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더해 히바우두가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후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생각한다면 렌도이로가 바르셀로나에게 왜 적대적인지 이해가 충분히 갈 것이다.[7] transfermarkt 기준으로 어시스트는 달랑 2개. 허나 transfermarkt의 어시스트 기록은 정확하지 않다. 상위권 소속이 아닌 경우 어시스트 기록이 누락되는 경우가 요즘에도 빈번하다.[8] 당장 아라고네스가 2006 독일 월드컵 이후 라울을 소집하지 않았을 때도 말이 엄청 많았다. 유로 2008 우승이 없었다면 아라고네스의 평가는 지금과 정반대를 달리고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