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울 곤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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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 국적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현재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 CF 감독을 맡고 있다.'''몸싸움이 두려웠다면, 그 후의 판단력도 없다.'''
선수 시절 세컨드 스트라이커의 교과서라고 불린 3인 중 한 명[4] 으로, 레알 마드리드 시절 UCL 3회 우승과 득점왕 2회를 차지하면서 챔피언스 리그의 제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또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은퇴 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등장 전까지 레알 마드리드의 상징으로 군림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평범한 노동자 집안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서포터였던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아틀레티코의 유스 클럽에 입단했으나, 12세 때 아틀레티코가 재정 문제로 유스 클럽을 일시 해체하면서 다른 마드리드의 연고 클럽인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게 된다. 이 아틀레티코 유스의 붕괴는 레알 마드리드 창단 이래 '''가장 운이 좋았던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2.1.1. 레알 마드리드 CF
1994년 10월, 레알 사라고사와의 경기에서 클럽 역사상 최연소 출전 기록인 '''17세 4개월'''이라는 어린 나이로 성인 팀 경기에 데뷔한다.[6] 데뷔 시즌인 1994/95 시즌에 9골을 기록하면서 스페인 축구의 미래로 각광받게 되었고[7] 카펠로, 하인케스 등 감독들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게 된다. 처음엔 좌우 날개 혹은 공격형 미드필더로 위치했으나, 거스 히딩크 감독 휘하에서 최전방 공격수로 보직을 변경한다.
1998/99 시즌에 25골, 2000/01 시즌에 24골로 득점왕을 거머쥐고, 2000년과 2001년 연속으로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구가,[8] 엄청난 카리스마와 존재감으로 페르난도 이에로 이후 레알 마드리드의 주장이자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된다.
특히 1999/2000 시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은 거의 라울과 비센테 델보스케 감독 더해서 페르난도 레돈도 셋이서 만들어 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는 주전 선수들의 기량 및 조직력 저하로 인해 라리가에서 홈에서도 5골을 먹고 패배하며 5위로 추락하던 시절이었고 전체적인 경기력이 부진하였고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에서도 뮌헨에게 2차례 패배해 2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하는 등 좋지 못한 상황이였다. 그리고 8강에서 만난 맨유를 상대로 홈에서 비기면서 퍼거슨은 기자회견에서 레알을 두고 '''"더 이상 레알 마드리드는 두렵지 않다."'''라고 말하며 심리전을 구사하며 도발할 정도였다. 하지만 라울은 퍼거슨의 발언을 들은 뒤 기자회견에 임하며 퍼거슨의 발언에 대해 '''"다시는 그런 말 내뱉지 못하게 해주겠다.'''"라고 일갈하였다.
그리고 2차전 경기에서 라울은 맨유를 상대로 2골을 넣으며 3:2 승리를 이끌었다. 준결승 바이에른 뮌헨 상대로는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지만 팀은 결승 진출에 성공했고, 결승에서는 발렌시아를 상대로 2:0 리드 상황에서 팀의 마지막 쐐기골을 기록하며 팀에게 8번째 빅 이어를 안긴다. 이 시즌에 리그 17골, 챔스 10골 포함 57경기 29골을 기록하며 팀내 최다 득점자가 된 것은 덤.
라울은 2000/01 시즌에 리그 우승과 리그 득점왕 그리고 챔스 4강과 득점왕을 동시에 기록하면서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레알 마드리드 시절 라울은 팀이 필요로 하는 장소에서 뛰었고 스탯도 그와 연관성이 높다. 실제 라울이 2000/01 시즌 24골을 넣은 것은 피구와 마켈렐레를 영입한 갈락티코스 정책의 성공임과 동시에 모리엔테스의 부상으로 득점을 할 필요성이 생겼고 이에 맞춰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위해 전방으로 올라온 호세 마리아 구티의 지원이 있었음에 기인한다. 그러면서 유력한 발롱도르 후보로 꼽혔으나, 아쉽게도 당시 리버풀 FC에서 활약하던 마이클 오언에게 밀려 2위에 그쳤다.[10]
지네딘 지단이 합류한 2001/02 시즌에는 레알 사라고사와의 수페르코파에서 2차전에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트로피를 견인했으며, 리그에서는 14골을 넣었고, 챔피언스 리그와 코파 델 레이에서 각각 6골씩 기록하며 총 55경기 29골을 기록했다. 비록 리그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원정에서의 극심한 부진으로 인해 3위에 그쳤고[11] , 코파 델 레이에서는 결승에 진출해 이 경기에서 라울은 득점을 기록했으나 팀이 2-1로 패배하며 빛이 바랬지만, 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바이어 레버쿠젠과의 챔스 결승전에서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드로인을 받아 선제골을 넣으며, 레알 마드리드의 9번째 챔스 우승을 이끌었다.
호나우두의 입단으로 공격력이 더욱 강해진 2002/03 시즌에는 충수염으로 인해 잠시 이탈한 기간이 있었지만 리그에서 16골,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9골을 기록하며 총 47경기 25골을 기록했다. 그러면서 레알 마드리드도 리그 우승, 챔스 4강, UEFA 슈퍼컵 우승, 인터콘티넨탈컵 우승이라는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이렇게 많은 골들을 넣었지만, 그럼에도 01/02 시즌과 02/03시즌의 마드리드의 탑 스코어러는 건재를 과시하는 페르난도 모리엔테스나 호나우두였고 라울은 이들을 보조하며 15골 전후로 득점했다.
그러나 새로운 주장으로 선임된 2003/04 시즌부터는 슬럼프 아닌 슬럼프를 겪게 된다. 잇따른 갈락티코스의 성공에 도취된 레알 마드리드는 2003년 여름에 데이비드 베컴을 먹고 스티브 맥마나만과 마켈렐레, 콘세이상을 뱉으며 캄비아소마저도 가볍게 쓰는 선택을 한다. 공격수 위주의 갈락티코스 정책으로 팀의 밸런스가 급격히 무너지자[12] 라울은 아래로 내려가 미드필드에 가세하며 분전했지만 전 같은 경기력은 나오지 않았고 라울의 득점력마저 급감했다. 팀 성적도 명성에 비해 실속이 없어 이후 마드리드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끝내 캄비아소까지 내치고[13] 마이클 오언을 데려온다거나 모나코발 부메랑을 맞고 모리엔테스를 다시 데려온다거나 카사노를 영입한다거나 혹은 우드게이트를 영입한다든가 같은 행위를 자행했다. 쉽게 말해 '''뻘짓의 연속'''.
라울은 이 와중에 열심히 경기장을 뛰어다녔지만 시즌이 끝난 후 결산 스탯은 2004/05 시즌부터 2006/07 시즌까지 리그에서 10골도 채 기록하지 못하는 등 하위권 팀의 그저 그런 공격수와 비슷하거나 떨어져, 여론의 화살에서 라울도 안전하지는 못해 부진이나 기량 하락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즉, '''시궁창으로 향하는 팀에서 포지션을 상관하지 않고 그야말로 죽어라고 뛰어다녔으나 오히려 까인 케이스'''. 이렇듯 약 3시즌간 리가에서 공격포인트 스탯상으로는 부진했지만, 최전방을 호나우두가 차지하거나 말거나 리가에서 호나우두가 골을 몰아치거나 말거나 챔피언스 리그는 여전히 라울의 독무대였고 호나우두는 강팀들의 수비에 막혀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14]
결국 성적 부진을 이기지 못해 결국 갈락티코스는 해체의 수순을 밟았다. 2005/06 시즌 루이스 피구와 산티아고 솔라리와 월터 사무엘을 내치고 토마스 그라베센을 영입했지만 실패, 2006/07 시즌에 이르러서야 마하마두 디아라와 페르난도 가고가 중원에 정착하고 호나우두가 부상으로 스스로 모습을 감추고 호비뉴, 데이비드 베컴, 뤼트 판 니스텔로이 등이 효과적으로 가동됨으로써 우승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라울은 득점 면에서는 그 이전 시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경기력 측면에서는 확실히 이전과 달랐다. 루드-라울이라는 꿈의 투톱이 맨유가 아닌 레알 마드리드에서 결성되었고, 퍼거슨이 괜히 그 두 명을 투톱으로 구성하고 싶어 했던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루드와 라울 두 명은 처음 손발을 맞추는 선수들답지 않게 뛰어난 호흡을 보였다.
그리고 2007/08 시즌 라울은 리그에서 18골을 넣으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라리가 우승의 일등 공신이 되었음은 물론 라 리가 MVP의 성격을 띠는 상인 알프레도 디스테파노 상의 초대 수상자에 오르는 영광을 맛보았다. 판 니스텔로이가 부상 때문에 출장 수가 적어지고 베컴, 판 니스텔로이라는 꿈의 콤비가 맨유를 떠나 마드리드에서 재회하자마자 헤어지게 된 덕택도 있지만, 이런 때는 언제나 써 먹을 수 있는 말이 있다. '''클래스는 영원하다'''. 또한 뤼트 판니스텔로이와의 호흡 역시 좋았다. 둘 다 서로의 장점을 잘 이해했고 잘 이용하는 멋진 축구였다. 서로 간의 차이점이 명확하지만, 축구 지능과 센스, 그리고 볼에 대한 집요함은 둘의 공통점이었다. 거기다 아무래도 공간 경합이나 몸싸움에서 별 도움을 안 주는 호나우두와는 정반대로 판니스텔로이는 수비수들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선수이기에 세컨드 스트라이커로서는 훨씬 더 도움이 되는 선수이기도 하다.
이 다음 시즌인 2008-09 시즌도 리그 18골을 넣는 등 여전한 클래스를 증명했지만, 우승은 충격적인 경기력을 과시한 FC 바르셀로나 드림 팀 3기가 가져간다.[15] 이에 빡친 레알 마드리드는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을 다시 선임하게 되고, 갈락티코스 2기가 시작된다. 기존의 공격수 라인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카림 벤제마, 히카르두 카카 등 그야말로 후덜덜한 라인을 첨가하였으나 최전방 공격진은 '''누가 라울의 파트너가 되느냐'''가 주 관심사였을 정도로 라울의 존재는 확고부동이었다.
그러나 2009/10 시즌 후반에 가며 이과인이 폭주를 시작하고, 벤제마의 희망 고문이 시작됨에 따라 서서히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2010/11 시즌을 앞두고 주제 무리뉴 감독이 부임한다. 아직 자신의 실력이 건재하다고 생각한 라울은 2010년 7월 26일에 레알 마드리드를 떠날 것임을 밝히며 이적을 결심하고,[16] 이틀 뒤에 샬케로 떠나며 마드리드에서의 커리어를 끝낸다.[17] 이렇게 2010년, 레알 마드리드에서 FC 샬케 04로 적을 옮기면서 이젠 퇴물이 되어버린 줄 알았으나...
'''클래스는 영원했다.'''
2.1.2. FC 샬케 04
라울이 변방 리그의 여러 클럽으로부터 고액 연봉을 바탕으로 한 러브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샬케에 합류한 이유는 챔피언스 리그 출전을 위해서였다. 그렇게 많은 샬케 팬들의 기대를 받은 라울이었으나, 데뷔 후 첫 7경기에서 약 1달간 침묵하며 '퇴물인가, 역시 원 클럽 맨이라 적응이 힘든가' 등 억측이 쏟아졌다. 그러다보니 이 시기에는 휜텔라르가 골을 쏟아 내며 샬케를 지탱했다.
그러다 9월 25일에 리그 6R 묀헨글라트바흐 전에서 데뷔골을 기록한 이후 10월 말부터 골이 하나 둘 쏟아지더니 어느새 분데스리가에서 무서운 능력을 과시했다. 특히 11월과 12월의 활약상이 어마어마했는데, 13R 베르더 브레멘 전과 17R 쾰른 전에서는 해트트릭을 뽑아냈을 정도. 그 반대로 훈텔라르는 무서운 침묵을... 어쨌든 설마 하던 챔스도 조별 리그를 1위로 뚫어내고,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1월에는 평범한 모습을 보이다, 챔피언스 리그의 사나이 아니랄까봐 2월 중순에 챔스 16강 발렌시아 원정에서 득점을 기록한 이후 다시 골행진을 이어갔다. 포칼 준결승 바이에른 뮌헨 원정에서 결승골을 넣어 결승 진출을 이끌었으며, 챔스에서도 16강을 넘어 8강 인테르를 상대로 2경기에서 모두 득점을 뽑아내 합산점수 7:3으로 준결승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토너먼트에서의 성과를 대가로 리그에서 샬케는 극초반부터 극심한 부진을 겪었는데, 중반부터 살아나며 유로파 티켓까지 노려볼 수 있었으나 리그 마지막 4경기에서 모두 패배해 14위로 마쳤다. 그런 상황에서 챔스 준결승에서도 맨유에게 거하게 털리며 홈, 원정 모두 패배하며 최근 6경기 모두 패배라는 참담한 상황에서 포칼 결승을 치루게 되었다. 다행히 결승 상대는 2부 리그의 MSV 뒤스부르크였기에 이 경기에서는 승리 가능성이 높은 편이었다. 그리고 5-0 완승을 따내며 시즌의 대미를 포칼 우승으로 장식하게 되었다. 샬케로서도 9년 만의 우승이고 유로파 진출권도 따냈기에 뜻깊지만, 생애 최초로 국가내 컵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린 라울에게도 감격스러운 우승이었다.[18] 특히 헤더 한 방으로 바이에른을 침몰시킨 4강전 경기는 라울의 진가를 보여주는 장면. 어느 웹툰에서는 라울을 두고 ''''이제 할 수 있는 건 스스로 골을 넣는 것 정도입니다. ''''라고.
2011/12 시즌, 직전시즌 중간에 감독이 펠릭스 마가트에서 랄프 랑닉으로 바뀐 이후 전술적 변화에 따라 프리 롤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라는 제한된 역할을 부여받고, 그 역할을 주전으로 소화할 수 있느냐는 문제까지 겹쳐 말라가 CF, 파리 생제르맹 FC 등 신흥 돈 지랄 팀에서 비드가 쏟아졌으나 프로답게 계약을 준수하겠다고 선언하여 잔류가 결정되었다. 그렇게 샬케에서의 두번째 시즌, 슈퍼컵에서 도르트문트를 2:0으로 꺾고 샬케 소속으로 2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공미로 포지션을 바꾼 라울은 팀의 중추로 활약하며 해트트릭을 뽑아내는 등 전반기에 리가에서만 무려 17경기 10골을 꽂아 넣었다. 샬케 팬들은 '레알 마드리드? 그게 뭔가요? 라울은 우리 레전드!'라며 날뛰었을 정도다.
후반기에도 매 경기 선발출전하였고, 2월 19일 경기에서는 프로 통산 400번째 골을 기록했다. 한편, 유로파 리그에서는 16강까지 리그에서보다 아쉬운 9경기 1골을 기록 중이었는데, 8강 아틀레틱 클루브 전에서 2경기 3골을 넣으며 노장의 무서움을 보였으나, 샬케는 합산점수에 밀려 탈락했다. 그러다 4월 19일에 기자회견을 통해 계약 기간이 끝나는 6월에 샬케를 떠날 것임을 밝혔고, 시즌 막판까지 클라스얀 훈텔라르와 함께 공격진을 이끌며 샬케를 리그 3위에 안착시켰다.
샬케 구단에서는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라울의 작별식을 치뤄주었고, 라울과의 계약이 만료된 뒤 라울의 등번호 7번을 단기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였다. [19]
2.1.3. 알 사드 SC
그렇게 2011-12 시즌 종료 후, 샬케 04를 떠나 5월 12일에 알 사드 SC로 이적을 하게 된다. 계약 기간은 1년 계약으로, 직전 시즌에 알 사드가 리그 4위에 머무르면서 AFC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얻지 못해 K리그 팀과 대결할 일은 없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울은 총 34경기 12골을 기록하며, 알 사드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2013년 8월 22일에는 알 사드가 트로페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참여하며 친정팀인 레알 마드리드를 만났다. 라울은 전반에는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임해 득점을 기록했고, 후반에는 알 사드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20] 그리고 경기 전에는 자신이 레알 마드리드 시절에 들어올린 트로피와 함께 마드리디스타에게 인사를 건넸으며, 경기 중에는 현재 7번을 달고 있는 선수에게 직접 7번을 건네주는 훈훈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계약 기간을 연장하며 한 시즌 더 뛰게 되었다. 그러면서 AFC 챔피언스 리그 무대도 밟게 되었다. 다만 K리그 팀을 상대로는 경기를 치르지 못했다. 경기력도 예전만 못해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2014년 3월에 알 사드를 떠남과 동시에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2014년 레알 마드리드가 라울의 복귀를 추진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거기에 코칭 스태프가 아닌 스포팅 디렉터나 구단 스태프 자리를 약속한다고. 라울 측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2.1.4. 뉴욕 코스모스
그러던 2014년 10월 30일에 은퇴 번복과 동시에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하였다. ESPN에 따르면 연봉을 비롯해 정확한 계약 조건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년 계약 가능성이 높다고 하며, 2015년에 창설되는 유스 아카데미로 지도한다고 한다.
2015시즌 NASL 봄 시즌에 9경기 출전 4득점으로 6월 13일 뉴욕 코스모스를 NASL 봄 시즌 무패 우승(5승 5무)으로 이끌었다. 6월 17일에는 FA컵에 해당하는 US OPEN CUP 32강전에 출전, 뉴욕 시티를 상대로 승부차기 승을 하는데 일조했다. 가을 시즌에도 19경기에 출전하며 팀을 이끌었고, 포스트시즌에는 오타와 퓨리를 상대로 3:2 승리를 거두며 미국에서도 리그 우승을 차지 했다.
2015년 11월 15일 오타와 퓨리와의 경기를 끝으로 동료 마르코스 세나와 함께 현역에서 은퇴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국대에서의 라울은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이진 못한 선수이다. 102경기를 뛰며 44골을 넣었으며 라울의 골 기록은 다비드 비야가 갱신하기 이전까지 스페인 국대 최다 골 기록이었고 2002년 페르난도 이에로의 은퇴 이후 대표 팀 주장도 도맡았다. 하지만 팀 커리어가 이 당시 스페인이 강팀이 아니었다는 걸 감안해도 나쁜 편이었다. 상당수가 약팀이나 중위권팀을 상대로 몰아친게 전부고 강팀을 상대로 넣은 골이라고는 독일과 이탈리아 단 두 개국과의 친선전에서 넣은 4골이 전부였다. 정작 중요한 본선에선 부진에 시달리기도 하고[21]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오히려 그가 국대에서 빠진 다음 스페인은 3연속 메이저 대회 우승을 달성하고 있으니...
다만 이는 라울이 빠져서라기보단 바르셀로나 드림팀이 절묘하게도 라울 이후 등장해서이다. 실제로 스페인의 월드컵 우승 당시 많은 축구 전문가들이 "스페인이 월드컵을 우승한 게 아니야. '''카탈루냐'''가 우승한거지"라고 말할 정도로 바르셀로나 선수들의 공헌이 절대적이었다. 라울 혼자 지나치게 옛 스페인의 나쁜 점들을 뒤집어 쓰고 있다는 점에서는 변명거리가 있다.
라울이 대표팀에 더 이상 차출되지 못한 것은 라울의 폼이 망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1차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이 원인이라고 보긴 어렵다. 라울이 부진했던 시기는 03-04 시즌 후반기부터 05-06 시즌 정도까지였다. 하지만 이 시기 라울은 대표팀에 꼬박꼬박 차출되었고 별로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UEFA 유로 2004에서는 페르난도 모리엔테스와 멋진 골 장면을 만들어낸 것을 제외하고는 무기력했고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주전도 아니었다. 그리고 라울이 클럽에서 완벽하게 부활한 UEFA 유로 2008 시기에는 당시 대표팀과의 전술적인 문제, 팀내 구설수 등의 문제로 출전하지 못했다.
여기서 라울이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라서 레알까인 아라고네스의 중용을 받지 못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당시 스페인 대표팀의 경기를 꾸준히 봤다면 콧방귀도 뀌지 않을 수준의 극히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이는 실제 사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주장으로 단순한 소설에 불과하다. 아라고네스는 부임 초기인 2004년부터 라울을 꾸준히 출장시켰으며, 심지어 초기에는 그를 중심으로 팀의 전술을 짰으나 그가 부진하자 라울을 살리기 위해서 그를 중심으로 대표팀의 전술을 여러차례 바꾸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울은 대표팀에서 그의 이름값에 비해 부진한 모습을 보였기에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중용받지 못했고, 여기에 2006 월드컵 이후 루이스 아라고네스의 전술적인 변화, 대표팀에서의 부진, 그리고 팀내 불화 등의 문제로 대표팀에서 배제당한 것이다.
게다가 레알 마드리드를 싫어해서 아라고네스가 카시야스와 라모스를 혹사시켰다는 주장이 있는데 그야말로 어처구니 없는 소리이다. 일단 당시 스페인 대표팀에서 대체불가에 가까운 인물이었던 라모스를 중용한 것을 마치 그를 혹사한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명백히 악의적인 왜곡에 불과하며, 만약 정말로 아라고네스가 단순히 레알을 싫어해서 선수를 쓰지 않는 수준의 인물이었다면 카시야스가 아니라 그의 부임 당시 최고의 활약을 보여줬던 레이나나 발데스를 쓰려고 했을 것인데, 아라고네스 시절 레이나는 만년 백업에 불과했고 발데스는 대표팀에서 아예 데뷔전조차 갖지 못했다. 아라고네스 체제에서 카시야스와 라모스는 핵심 중의 핵심 선수들이었던 데다가 아라고네스는 다른 선수로 이들을 대체하려는 시도조차 보인 적이 없을 정도로 이들을 신임했다. 게다가 라울을 쓰지 않은 것을 비판하면서 또 반대로 카시야스와 라모스를 중용한 것을 혹사라고 비난하는 것은 순전히 자가당착에 불과하다. 위와 같은 주장들은 전부 라울을 신격화하고 그가 대표팀에서 일으켰던 문제를 덮어버리기 위해 아라고네스를 악의적으로 비방하려는 말도 안 되는 왜곡이다.
비센테 델보스케도 라울의 복귀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으며, 라울 본인도 "팀이 원한다면 돌아갈 것"이라며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2002년 월드컵 8강 한국전에는 라울이 출전하지 않았다. 16강전에서 부상을 입었는데 도저히 경기를 못 뛸 정도는 아니었지만 감독이 4강 이후의 경기를 대비해서 체력 안배를 시킨 것. 결과적으로는 스페인이 패했기 때문에 설레발이 되어버렸다. 스페인전에서 한국은 페르난도 모리엔테스를 막기도 버거웠는데 만약 조별리그와 16강전에서 3득점을 한 라울까지 가세했다면 경기가 훨씬 어려워졌을 것이다.
앙리, 베르캄프 투톱이나 델피에로, 트레제게 투톱만큼이나[22] 유명한 라울, 모리엔테스의 '''영혼의 투톱'''은 스페인 국대 올드 팬들이라면 종종 회자하곤 하는 그리운 콤비이다. 머리, 무릎, 허벅지, 가슴 등 그 어느 신체 부위로도 골을 다 넣어봤다고 할 정도로 타고난 타겟 맨인 모리엔테스에게 수비수가 붙으면, 라울이 이리저리 상대 진영을 휘젓고 다니는 플레이가 매우 유명했다.
여러모로 웨인 루니와 흡사한데 클럽 활약에 비해 영 부진한 국대 활약, 국대 골 기록은 매우 높으나 떨어지는 순도[23] , 메이저 대회에서의 성과 부족[24] 등.
3. 지도자 경력
2018년 8월 17일에 레알 마드리드 유스 (U-15)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후 2019년 6월 20일부터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의 감독을 맡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중단되기 전까지 10승 10무 8패를 기록 중이었다. 시즌 재개 후, 레알 마드리드 후베닐 A팀을 임시로 이끌고 UEFA 유스 리그에서 우승하였다.
2020년 12월 기준 레알 마드리드 1군 감독 지네딘 지단이 챔피언스리그 샤흐타르전에서 무기력하게 0-2로 패하는 등 부진을 면치 못하자 마우리시오 포체티노와 함께 대체자로 물망이 오르고 있다.
2021년 1월 19일, 마르카에 의하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4. 플레이 스타일
라울은 어떻게 팀을 승리로 이끌지 아는 선수였다. 영리한 축구 지능과 득점력을 갖추고 있어 언제나 필요할 때면 골을 터뜨려주었으며, 플레이 메이킹에도 능해 수비 라인을 파고들어 기회를 노리거나 사냥개처럼 수비수를 물고 늘어지는 등 세컨드 스트라이커로서의 모습도 많이 보여주곤 했다.[25] 신체 조건이 남다르거나 화려한 개인기를 가지고 있는 선수는 아니지만 '''축구 자체를 잘 이해하는 선수'''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비교적 평범한 스피드와 개인기[26] 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상기한 장점들과 함께 박스 안쪽에서의 감각적인 위치 선정, 다양한 슈팅 기술[27] , 정확한 골 결정력으로 해결사 역할을 해줬던 선수였다.[28]
허나 이 수많은 장점들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것은 바로 '''그의 리더십과 프로 정신'''이다. 라울은 강인한 멘탈로 무너지는 모습 없이 주장으로서 묵묵히 선수들을 다독이며 소리 없이 팀을 이끌었고, 앞장서서 몸을 던져 팀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29] 또한 경기장에서의 매너도 상당히 좋았는데, 프로 데뷔 후 경기에서 한 번도 퇴장당한 적이 없다. 이렇듯 그는 팬들과 팀원들 모두에게 있어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였다.
5. 평가
5.1. 레알 마드리드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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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은 갈락티코스 정책으로 인해 유독 이적생들이 많았던 레알 마드리드 CF에서 진짜 전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수로, 레알 마드리드에서 16년간 뛰며 통산 '''741경기에 출장했고, 323골을 넣었다'''. 이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넘어선 당시 레알 마드리드 최고 득점 기록이자 최다 출장 기록이다.[30]'''1억 유로? 그걸로 나의 마드리드를 살 순 없어!'''
또한 라리가에서는 통산 550경기 228골[31] 로 통산 5위의 득점을 기록했는데, 통산 1위인 메시의 기록과는 조금 차이가 나는 기록이지만 종전 기록을 경신하고자 했으면 충분히 가능했기에 아쉬운 기록이다.[32]
이처럼 레알 마드리드에서 라울이 남기고 간 업적들은 절대 잊을 수 없는 것들이며, 팬들도 그를 '''Raulito'''[33] , '''El ángel del Madrid'''[34] , '''Raul Madrid'''[35] 라고 부르며 그의 오랜 공헌에 감사함을 표했다. 라울은 당시 구단의 정책이었던 갈락티코스 1기 중에서도 팬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받던 선수였다.
다만 오랜 기간 동안 레알 마드리드와 스페인의 상징이었던만큼 구설수도 조금 있다. 예를 들자면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지역 감정의 중심축이었고, 클럽에서도 분위기를 자신이 주도했다는 것들이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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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좋은 일화도 있다. 2007-08 시즌 라리가 우승을 이미 확정지은 레알 마드리드는 레반테 UD와의 리그 최종전을 앞두고 있었는데, 당시 레반테 선수들은 임금 체불로 인해 파업 직전까지 갔었다. 그러나 라울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라리가의 유명 선수들에게 연락해 레반테 선수들을 위한 자선 경기를 약속했고, 이를 레반테의 선수들에게 전하자 경기가 무사히 진행될 수 있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나자 라울은 한 부심에게 다가가 포옹을 했는데, 사실 그 부심은 그 경기를 마지막으로 부심에서 은퇴하는 심판이었다. 부심은 라울과 얼싸안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5.2. 챔피언스 리그의 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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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을 빼고서는 UEFA 챔피언스 리그를 논할 수 없다. 데뷔 이후 매년 챔피언스 리그에 출전하며 142경기로 역대 최다 출장 기록 보유자였고[37] , 득점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훌쩍 넘어서 71골을 기록하며 최다 득점자에 올랐었다.[38] 또한 챔피언스 리그와 UEFA 유로파 리그를 합산해 계산한 유럽 대항전 최다 골 랭킹에서도 라울이 77골로 1위를 지키고 있었으나 2014-15시즌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78골로 기록을 경신하였고 2019년 기준 리오넬 메시에 이어 3위에 랭크되어 있다.
이제는 호날두가 챔피언스 리그의 신이라 불릴 정도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흐릿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2010년대 이전까지의 챔피언스 리그의 제왕은 라울이었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 레알 마드리드 CF (1994~2010)
- 라리가: 1994-95, 1996-97, 2000-01, 2002-03, 2006-07, 2007-08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97, 2001, 2003, 2008
- UEFA 챔피언스 리그: 1997-98, 1999-2000, 2001-02
- UEFA 슈퍼컵: 2002
- 인터컨티넨탈컵: 1998, 2002
- 알 사드 SC (2012-13~2013-14)
- 카타르 스타즈 리그: 2012-13
- 카타르 아미르컵: 2014
6.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2위: 2001
- FIFA 올해의 선수 3위: 2001
- FIFA 100: 2004
- UEFA 올해의 공격수: 1999-2000, 2000-01, 2001-02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2000
-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 1999-2000, 2000-01
- UEFA 챔피언스 리그 도움왕: 2002-03
- 인터컨티넨탈컵 맨 오브 더 매치: 1998
- 라리가 득점왕: 1998-99, 2000-01
- 라리가 최우수 스페인 선수[41] : 1996-97, 1998-99, 1999-2000, 2000-01, 2001-02
- 라리가 최우수 신인 선수[42] : 1994-95
- 코파 델 레이 득점왕: 2001-02, 2003-04
- 카타르 스타즈 리그 페어플레이 상: 2013
- 트로페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2007-08
- 트로페오 텔모 사라: 1998-99, 2000-01, 2002-03
- 레알 마드리드 명예의 전당: 2015
- ESM 올해의 팀: 1996-97, 1998-99, 1999-2000
- 독일 올해의 골: 2011, 2013
- 독일 이달의 골: 2011년 8월, 2012년 3월 · 4 월, 2013년 7월
- 북미 축구 리그 이달의 선수: 2015년 5월
- lFFHS 세계 최고 득점자: 1999
- 마르카 레전드: 2009
- 마르카 레알 마드리드 역대 베스트 XI: 2017
- 마르카 레알 마드리드 역대 UCL 베스트 XI: 2018
- 돈 발론 2000년대 베스트 XI: 2010
6.3. 출전 기록
7. 라울에 대한 말, 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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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까다로웠던 공격수가 누구였나는 말에) 라울 곤살레스'''
'''위고 요리스'''
'''라울이 있기에 레알 마드리드는 승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라울은 마치 골을 넣으려고 태어난 선수 같아요. 득점할 수 있는 자리에는 항상 그가 있었습니다.'''
'''티에리 앙리'''
'''내 생애 라울과 함께 레알 마드리드에서 뛴 것은 특권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라사나 디아라'''
'''라울의 DNA는 오직 승리를 향한 열망으로만 가득 차 있다.'''
'''페르난도 레돈도'''
'''라울은 내가 생각하는 스페인 역대 최고의 선수입니다.'''
'''파비오 카펠로'''
'''라울은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입니다.'''
'''지네딘 지단'''
'''경기장 안에서나 밖에서나 귀감이 된 선수였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챔피언스 리그의 전설 중 한 명.'''
'''클라렌스 세도르프'''
'''물론 예전같진 않아요. 하지만 그들이 곧 마드리드죠.'''
'''에이. 라울과 구티가 없는 마드리드요? 상상할 수 없어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의 서포터즈'''
8. 여담
- 레알 마드리드의 애칭이 블랑코스(Los Blancos, 영어로 하면 The Whites)인데, 이는 라울의 모계성씨 '블랑코'와 같기 때문에 마드리드와의 영원한 인연을 나타낸다고 한다. 흔히 스페인의 'Raul'이라 하면 그를 떠올리곤 한다.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골수 라울 빠돌이로 유명하다. 라울이 마드리드에서 한창 뛰어다닐 때도, 마드리드에서 샬케로 이적할 때도, 또 샬케 데뷔 시즌을 막 마쳤을 때에도 계속해서 어떻게든 모셔 오려고 바득바득 노린 걸 보면...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
- 2016년 10월 9일에는 스페인의 축구 전문 통계 업체 'CIHEFE' 가 최고점인 528점을 부여하여 라리가 역대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 부인 사이에서 4남 1녀를 두고 있다.
- 2017년 3월, 본의 아니게 펠레의 저주같은 발언을 하게 됐는데, 2016-17시즌 챔피언스 리그 16강전, 1차전에서 PSG에 대패한 바르셀로나의 2차전에 대해 바르셀로나가 아니라 레알 마드리드라면 역전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지만, 결과는...다만 감안해야 할 점은 PSG가 1차전 같은 경기력을 보여준다면 이라는 단서를 붙인 것이랄까...
- 시메 브르살리코가 라울과 외모가 닮았다는 의견이 있다. 단 시메는 좀 더 부드러운 느낌.
- 뜻밖에도, 라울은 레알 마드리드 커리어 내내 코파 델 레이 우승 경력이 한번도 없다. 공교롭게도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자마자 레알 마드리드는 코파 델 레이에 우승한다. 그리고 샬케로 이적한 라울은 DFB-포칼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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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공격수 5인을 선정했는데, 2000년대 공격수들 중 5위에 이름을 올렸다.
[1] 2006년 수훈, 스페인 스포츠 왕립 훈장 Real Orden del Mérito Deportivo[2] 세컨드 스트라이커[3]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통산 득점 2위, 1위는 다비드 비야.[4] 나머지 2명은 데니스 베르캄프와 알레산드로 델피에로.[5] 이 번호는 라울이 떠난 이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물려받았다. 호날두가 맨유에서 온 첫 시즌엔 라울이 아직 레알 소속이었기 때문에, 호날두는 9번을 달았다.[6] 이때는 1998 월드컵 득점왕 다보르 슈케르와 유고의 거성 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가 결성한 투 톱에 밀려 섀도우 스트라이커 정도의 포지션으로 출전했다.[7] 나이는 어리지만 30대 선수처럼 노련하게 경기를 뛰며 더욱 돋보였다. 흔히 말하는 이제 '축구가 보이는' 선수처럼 동료를 활용하며 슛과 패스할 시기를 잘 구분했다.[8] 특히 2000/01 시즌엔 라 리가 득점왕과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을 동시에 거머쥐고 본인의 커리어 하이 스탯을 기록했다. 이를 바탕으로 2001년 가장 유력한 발롱 도르 수상자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마이클 오언이 상을 가져가 논란이 되었다. 당시 마드리드는 그야말로 충격의 도가니. 적은 점수 차도 아니었던지라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불가사의한 결과였다는 의견이 많다.[9] 레알 마드리드는 주요 대회에서 우승을 하면 시벨레스 광장에서 퍼레이드를 벌인 뒤 주장이 여신상에 키스를 하는 전통이 있다. 이 제목은 레알 마드리드가 우승을 너무 자주 해서 매번 라울과 키스를 해야 하는 시벨레스의 상황을 재치 있게 표현한 것.[10] 오언의 발롱도르는 당시 논란이 많았는데, 미니 트레블을 달성했다고는 하지만 리그 우승이 없었고 챔스 우승이 아닌 UEFA 컵 우승이었던 뿐 아니라 득점왕을 차지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해당 발롱도르를 두고 리그 우승과 리그, 챔스 득점왕을 동시에 석권한 라울 또는 리그와 챔스에서 더블을 달성하고, 골키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활약을 보여줬다는 올리버 칸이 오언보다 나은 대상자라는 논란이 컸다.[11] 홈에서는 15승 4무로 무패를 달린 반면, 원정에서 5승 4무 '''10패'''라는 충격적인 성적을 거뒀다(...)[12] 마켈렐레의 이탈은 한 가지 원인이었지 치명타는 아니었다. 치명타는 스쿼드 축소. 베스트 11 + 후보 선수 2~3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유스 수준의 선수들이었다.[13] 캄비아소는 나가서 인테르에서 성공한거지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대성할 자질조차 보이지 않았었다.[14] 호나우두의 챔스 기록은 42경기 16골로 그 명성이나 월드컵에서의 활약에 비해서는 별로 좋지 않았다. 갈락티코스 초창기 시절에는 챔스에서 나쁜 모습을 보였다고 하긴 어렵지만 빡빡한 경기에선 그저 그랬고 팀 밸런스가 붕괴한 이후에는 미드필드에 별 가세 없이 최종 라인에서 골을 따 내는 역할인데도 정말 성적이 나빴다.[15] 2007-08 시즌 좋은 활약을 보였던 호비뉴의 이탈, 그리고 시즌 초반 최고의 활약을 선보였던 루드, M 디아라, 루벤 데 라 레드의 시즌 아웃이 결정타였다.[16] 무리뉴는 라울이 팀에 남기를 바랐지만 라울은 주전으로 뛸 수 있는 팀을 찾아 떠난 것.[17]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데, 2010/11 시즌에 팀을 떠난 주장과 부주장, 라울과 구티는레알 마드리드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팀을 떠난 것이다. 물론 두 선수가 고향과도 같은 팀에서 은퇴하지 못한 것은 선수 개인에게나 팬들에게나 몹시 안타까운 일이지만, 팀의 미래와 자신들의 출전 시간을 위해 좋게 헤어진 것은 분명하다. 특히 라울의 경우 알 사드와의 친선 경기 개최를 통해, 클럽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대우를 해 주었다.[18]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단 한 번도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19] 2013/14 시즌부터는 막스 마이어가 이 7번은 이어받아 뛰고 있다.[20] 경기는 레알 마드리드의 5:0 승리.[21] UEFA 유로 2000 8강 프랑스와 2:1 상황에서 경기 종료 직전 동점을 만들 수 있던 기회인 페널티 킥을 실축했다.[22] 앙리, 트레제게 투톱이 이론상으론 정말 짱짱일 것 같은 조합이지만 생각보단 별로였단 평이 많다. 또 프랑스 국대는 주로 원톱 전술을 썼기에 투톱으로 나오기보단 앙리 주전, 트레제게 서브인 경우가 많았다.[23] 루니는 역대 1위, 라울은 역대 2위임에도 국대 활약이 훌륭했다라고 평가받기엔 반론이 많다.[24] 공교롭게도 둘 다 대표팀에서 배제된 직후 메이저 대회에서 대표팀이 호성적을 올렸다. 스페인은 메이저 대회 3연패, 잉글랜드는 월드컵 4강.[25] 실제로 당시 라울은 세컨드 스트라이커의 정점에 오른 선수였으며, 정통 최전방 스트라이커보다는 그 아래에서 플레이 하는 것에 능했다.[26] 메시, 호날두, 호나우두 같은 스피드와 개인기 최상위 선수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기본적으로 빅리그에서 충분히 통할 스피드와 개인기를 갖추고 있었다.[27] 특히 칩샷을 기가 막히게 잘 차는데 칩샷으로만 골을 기록한 영상들을 모아서 스페셜로 만들 정도로 시도한 횟수와 성공한 횟수가 많다.[28] 특히 3번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2골을 넣고 3번의 우승을 팀에게 안겨주는 등 큰 경기에서도 해결사 본능을 발휘했다.[29] 라울은 공격수임에도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하는 등 팀을 위해 헌신적인 플레이를 여러차례 보여주었다.[30] 현재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438경기 450골로 구단 최다 득점 기록을 가지고 있다.[31] 디 스테파노는 227골이다.[32] 레알 마드리드는 갈락티코스 정책으로 인해 최전방 공격수를 끊임없이 영입했고, 라울은 세컨드 스트라이커 자리에서 득점보다는 플레이메이킹 등에 집중하는 플레이를 하면서 골 기록이 줄어들기도 했다.[33] 라울을 스페인식 애칭으로 부르는 표현이다.[34] 마드리드의 천사[35] 라울+레알 마드리드[36] 니콜라 아넬카, 시시뉴, 마이클 오언 등이 라울을 디스한 대표적인 선수들.[37] 이후 라이언 긱스, 차비 에르난데스, 그리고 마드리드의 또 다른 전설 이케르 카시야스가 라울의 기록을 깼다. 현재 카시야스가 최다 출장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177경기)[38] 2014년 말까지 단독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 있었으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리오넬 메시에 의해 경신되었다.[39] NASL 포스트 시즌.[40] NASL 봄 시즌, 가을 시즌 최종 합계 성적.[41] 돈 발론 어워드[42] 돈 발론 어워드[43]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의 하부 리그로 2부 리그 개념이다.[44] 현지에선 'El señor de los anillos'라고 불린다. 'anillos'가 스페인어로 반지를 뜻하고, 'señor'는 영어의 'Mr.'와 같은 뜻.[45] 2002 FIFA 월드컵 조별리그 B조 5-1경기였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경기에서 두 골을 성공시키면서 반지에 키스를 하는 세레머니를 하였다. 특히, 후반전에 호아킨 산체스의 크로스를 받고 헤딩으로 골을 넣은 뒤 반지에 키스를 하고 경기장을 뛰어다니는 모습은 이탈리아 전에서 골든 골을 넣고 반지 세레머니를 하던 안정환의 모습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