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종(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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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금나라(金)의 제9대 황제. 이름은 '''완안영갑속'''(完顔寧甲速)으로 중국식으로는 완안수서(完顔守緒)이다. 대금국지(大金國志)에는 묘호를 의종(義宗), 시호를 경천덕운충문정무천성렬효장황제(敬天德運忠文靖武天聖烈孝莊皇帝)로 기록하고 있다.
2. 생애
2.1. 즉위 이전의 삶
금선종의 3남으로 본래는 제위와 거리가 멀었으나 황태자와 황태손이 덩달아 요절해 버리자 셋째인 완안수서가 황태자로 책봉된 후 결국 제위에 올랐다. 둘째 황자인 완안수순이 제위를 계승하길 원했던 수순의 모친 방비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를 알아차린 선종의 황후 왕씨는 선종이 승하한 후 방비에게 선종이 볼일을 보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 후 대신들을 모아놓고 수서를 후계자로 공표했다. 미리 도착해 있던 완안수순은 그대로 연금당해 버렸다. 완안수순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선종의 황후인 인경황후 왕씨가 애종을 제지했기 때문이었다.
2.2. 즉위 후
애종은 즉위직후부터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군재를 등용하는 등의 개혁 정책을 시행했다.
2.2.1. 몽골과의 대결
1232년, 몽골이 금나라를 상대로 다시금 전면전을 개시했는데 이 때 몽골군은 남송과 협의해서 남송의 영토를 통과하는 방식으로 금나라의 수도인 카이펑(개봉)의 취약 지역인 남쪽 방면으로 진군하여 북쪽에서 황하를 건넌 군대와 함께 카이펑을 포위했다. 금군은 진천뢰(震天雷)라는 대포를 앞세워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끝내 못 버티고 1233년 5월 수도 카이펑을 함락당했다. 이 때 애종은 카이펑이 함락되기 전 탈출하여 하남성 남부의 채주(蔡州)로 도주했다. 카이펑에 남은 관원들 사이에서는 내분이 일어나 서면 원수 최립(崔立)이 쿠데타를 일으켜 태후와 비빈, 황족들을 포로로 잡고 몽골에 항복해버렸다. 태후와 비빈들은 몽골로 압송되고 완안수순을 비롯한 남자 황족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애종의 피난길에서는 포찰관노가 난을 일으켜 관원 300명이 죽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때 몽골과 금나라 모두 남송에 사자를 파견하여 지원을 요청하고 나섰다.
1232년 10월, 명령을 내려 민간에 비축한 양식을 수색하면서 한 사람당 세 말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관부에서 가져가는데, 만일 방해하면 곤장을 때리는 일이 대단히 많았다.
먼저 몽골은 1232년 12월, 양양에 주둔한 남송의 경호제치사(京湖制置使) 사숭지(史嵩之)에게 사신을 보내 금나라를 공격할 때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금나라의 채주를 남송과 연합하여 공격하자는 것, 또 남송에게 군량을 달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사숭지는 이 제의를 수도 임안에 즉시 보고하였는데, 남송 조정에서는 그 수락 여부를 둘러싸고 쟁론을 벌였다. 일부 신하들은 과거 북송 때 금나라와 연합하여 요나라를 멸망시켰다가 뒤이어 금나라의 공격을 받아 화북을 빼앗겼던 전철을 밟으려는가 하는 반론도 제기했다. 하지만 이런 의견은 금나라를 멸망시켜 옛 원수를 갚자는 압도적 다수의 주장에 묻혀버렸다. 끝내 남송은 1233년 6월, 몽골에 사자를 보내 그 제의의 수락을 통보하였다.
금나라의 사자는 이미 남송이 몽골의 제의를 수락한 뒤인 1233년 8월에야 뒤늦게 찾아왔다. 남송과 몽골이 맹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금나라의 사자는 남송에 호소하였다.
그러나 금나라의 사자가 아무리 간곡히 하소연해도 남송은 이미 방침을 정한 뒤였다. 애초에 선대인 선종도 수도를 카이펑으로 옮길 만큼 몰렸음에도 남송과 평화 조약을 안 맺고, 기회만 있으면 남송을 공격해서 흡수할 생각이 컸으니 이런 결과는 뻔했다.[1] 애종은 즉위하자마자 금나라 장수들에게 사사로이 남송을 공격하는 것을 중지시키는 칙조를 보내는 등 어느정도 현실적인 조치를 취했지만... 그래서 남송은 금나라의 연대 제의를 일축하고 몽골과 체결한 맹약에 따라 이 해 10월 명장 맹공(孟珙)을 파견하여 타차르가 이끄는 몽골의 금나라 공격을 지원했다. 맹공은 군대 3만 명을 이끌고 채주에 당도했다."몽골은 40개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마침내 서하에 이르렀습니다. 서하를 멸망시키고 나서는 우리에게 왔습니다. 우리가 망한다면 그 다음은 반드시 남송일 것입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것, 이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남송이 우리와 동맹하는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남송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원래 애종은 채주를 거쳐 촉으로 달아나려고 했는데 애종을 구하기 위해 채주로 오던 군대가 남송에게 전멸당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채주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몽골-남송 연합군이 채주를 몇 달 간 포위하자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포위된 상황에서 금의 멸망을 직감한 애종의 탄식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애종은 절망한 나머지 마지막 수단으로 궁중 대장 완안승린에게"짐은 금자광록대부가 된지 10년이었고 , 태자가 된지 10년이었고, 황제가 된지 10년이었는데, 스스로 큰 과오와 악행을 저지른 적이 없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조종(祖宗)으로부터 100여년간 이어온 국통이 짐에 이르러 끊어져 옛날의 황음무도한 군주와 똑같이 망국의 군주가 되었으니 이것이 홀로 마음에 서글플 뿐이다. 예로부터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는데, 망국의 군주는 남에게 갇히고 혹은 구속되어 승리한 나라의 궁정으로 끌려가 모욕을 당하기도 하였고 빈 골짜기에 유폐되기도 하였다. 짐은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니 경들은 보라. 짐의 뜻은 결정되었다."
라고 명한 뒤 그에게 탈출을 지시했다."짐은 몸이 둔해[2]
말을 타고 잘 달리지 못하네. 그대는 몸이 날래고 전략을 잘 아니 도망쳐 국운이 끊기지만 않게 하면 되네. 이것이 짐의 소원일세. "
몽골군 대장 타차르가 서성을 함락시키고 남송군 대장 맹공이 남문을 함락시키자, 애종은 결국 스스로 유란헌(幽蘭軒)에서 목매달아 자살했다. 그의 시신은 신하들이 장례를 한 다음 묻으려고 했으나, 맹공과 타차르가 들이닥쳐 시신을 뺏어갔다. 거기다 완안승린은 도망치다 몽골에 걸려 '''재위 하루만'''에 잡혀 참수를 당하고 장대에 효수를 당했으며, 채주마저 연합군에 떨어져 금나라는 건국 120년 만에 멸망했다. 애종의 시신은 몽골군이 불태우고 분쇄했으며 두개골은 잘라 개선식 때 맹공을 거쳐 남송으로 보냈다. 이종은 이 두개골을 태묘에 바쳐 송휘종, 송흠종에게 원수를 갚았다고 알리는데 썼다. 이는 금나라가 북송을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삼강행실도에도 따르면 완안강산(完顏絳山)이 몽골군이 들어오는 와중에도 끝까지 애종의 유해를 수습하려고 했고 그의 충성심을 기특하게 여긴 몽골군의 허락을 받아 애종의 유해를 매장했다고 한다.
사실 애종은 꽤나 개념 있는 황제였다. 애종은 사사로이 남송을 공격하는 것을 막고 몽골과의 항전을 위해 적국이었던 남송에 화의 사신을 파견하는 한편 인재 등용에 힘을 쓰며, 즉위 초에는 황실의 사냥터를 없애고 농민들에게 그 땅을 나눠 주는 등 몽골에 밀리는 상황에도 백성들의 구휼을 우선했다.[3] 완안진화상 등의 활약으로 일부 전선에서는 몽골군에 반격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렇게 나름대로 금의 멸망을 막기 위해 애썼으나 결국 실패했다. 민생을 보살피는 것도 재위 초반부 이야기고 완안진화상 사후에는 몽골군에게 연이어 대패했으며 말엽에 개봉이 포위됐을때는 엄청난 수의 피난민들이 개봉성 안으로 몰려오는 바람에 구휼이고 뭐고 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성 내에서 수십만명이 아사하거나 질병으로 병사했다.
송사전 금 열전에 따르면 어느날 한 노인이 금의 궁성 지붕에 올라가 금의 멸망을 예언하자 신하들은 노인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애종은 "지금은 백성들에게 바른 말을 구하고 있으니, 일개 노인의 비방에 가까운 헛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만한 구석이 있다"고 말하며 신하들의 주장을 일축했다고 한다. 그만큼 대인배였는데 치세였다면 명군이나 성군까진 아니었지만 충분히 그에 준하는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 만약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명군이 되었을 지도...
그러나 결과적으로 수도는 함락당하고 황족들은 정강의 변 때보다 더 비참하게 몽골군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몽골로 끌려가고 본인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뿐이다. 채주성에서 몽골군에게 포위된 애종이 모든 것을 체념하고 목을 매어 자살하기 직전 완안승린에게 남긴 유언은 자신이 다른 망국 군주들처럼 황음무도한 폭군은 아니었기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였으나, 자신의 대에 나라가 망하여 조상들을 볼 면목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사직을 살려보려 노력을 했지만, 결국 망국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좌절감과 조상들에 대한 죄책감이 잘 드러나는 유언이다.
바로 앞대의 무능한 황제들과 달리[4] 본인이 문제 의식을 가지고 나라를 살려보겠다고 나름 몸부림치다가 결국 절망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에서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와 비교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5] 애종은 이민족 출신에다가 인지도가 낮아서 그냥 묻히는 편이다. 사실 애종이 자살한 실질적 이유는 몸이 지쳐 도망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며[6] 젊고 민첩한 완안승린에게 선양하고 도망치게 해서 금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으려고 시간 벌이를 한 것이다.
특이하게도 1224년 황후를 들였다는 것 외에는 처첩과 자녀에 대한 기록이 일체 없다. 죽을 때 36세였으니 충분히 있었을 만한데도 아무런 기록이 없으며, 마지막 순간에 완안승린에게 자식을 부탁한다는 말이 없었던 것, 그리고 애종의 자녀를 포로로 잡았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정말로 자식이 하나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개 망국 군주는 횡음무도하다는 레파토리가 달라붙게 마련인데, 애종은 그들과는 상당히 달랐다.
3. 대중매체에서
징기스칸 4 PK에 나오는데 본인 능력치도 나쁘고, 북쪽에는 강력한 몽골 제국이 있고 남쪽에는 남송이 있어 정세가 매우 암울하다. 다만, 부하 중에 강력한 무장인 완안진화상이 있다.
고우영 화백의 십팔사략에서는 상당히 무능하게 나왔는데, 그냥 몽골에게 발리고 땅 뺏으려고 공격한 남송에게마저 털리자 무책임하게 “에라이 골치아픈 세상 떠나면 그만이지!”하고 자결해버린다(...). 물론 십팔사략 자체가 전체적인 역사를 매우 간소화시킨 편이라 그런 감이 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피해자가 된 인물.
4. 둘러보기
[1] 애초 카이펑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 중 하나도 기회를 틈타 약체화된 남송을 먹어버리고 먹은 남송을 기반으로 몽골과 맞서려고 한 것인데 문제는 남송도 이후에 40년에 걸쳐 몽골에 맞설 만큼 마냥 약체는 아니었던지라 실패했고 그렇다고 금선종이 망해가는 나라를 살릴만큼 능력이 있지도 않았고 그런 노력도 제대로 안 한지라 이도저도 아니게 되었다.[2] 뚱뚱하다는 의미보다는 겸양에 가깝다. 애종은 의붓 어머니에게 꾸지람을 들었을 정도로 격구 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또는 중년에 접어들면서 비대해졌다는 설도 있다.[3] 훗날 개봉으로 몽골군이 몰려오는 상황에서 신하들이 청야전술을 권했지만 애종은 백성들에게 피해를 줄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청야전술을 거부하고 군사를 보내 몽골군을 막게 했다. 그러나 그렇게 출전한 금군의 주력은 삼봉산 전투 등에서 거의 전멸당한다.[4] 위소왕은 칭기즈칸에게 디스먹고 진짜로 졌을 만큼 무능했고 금선종 역시도 몽골에 맞서려고 천도했으면서 정작 제대로 한게 없는 무능하기로는 위소왕 못지않은 인물이었다.[5] 구한말 황현이 지은 시에서 애종과 숭정제의 자살을 언급한 구절이 나온다. 幽蘭軒燬亦奇哉(유란헌이 불탄 일도 기이하지만) 萬歲亭摧宇宙哀(만세정이 꺾이니 온 세상이 슬퍼했네). 유란헌과 만세정은 각각 애종과 숭정제가 자살한 곳이다.[6] 채주성에 갇힌 후 밤에 신료들을 이끌고 도주하려고 여러번 시도했는데, 몽골군에게 들켜서 모두 실패하고 그 후 말을 모두 도축해서 말고기를 군사들에게 나눠 주었다.[7] 참고로 저 얼굴도 '''가상 인물 전용'''얼굴이다.(...) 그리고 고려의 김통정 얼굴과 중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