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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擊毬.
1. 개요
마상육기의 하나. 말을 타고 기다란 격구채로 골프공만한 크기의 공을 치는 고대~중세의 전통 공놀이 스포츠이다.
2. 역사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어 실크로드를 거쳐 당나라로, 그 후 고구려와 신라로 전해졌다. 특히나 고려 때에 매우 크게 성행 하였는데 고려 무신정권의 2번째 지배자였던 정중부도 격구로 왕의 눈에 들었고, 3번째 지배자였던 경대승이 어린 나이에 명종 앞에서 격구를 시연해 2등으로 왕의 눈에 들었다.
고려시대 무신정권의 집권자 최우는 1229년에 '''이웃집 100여 곳을 빼앗고 헐어''' 격구장을 만들었는데 그 크기가 '''승려 3만명'''이 동시에 입장해 앉아서 밥을 먹으며 격구를 구경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컸다.[1]
조선 1대 임금인 이성계는 전설적인 격구의 달인이었다. 또한, 2대 임금인 정종이 태종에게 양위 한 후 이 스포츠를 매우 즐겼다고 나와있다. 정종이 본래 무장 출신인데다가 상왕이라는 명예직으로 나와있는 상황에서 격구만큼 시간 때우기에 좋은 스포츠도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격구는 마상재와 함께 기병을 양성하는 국가 무예로서 중요한 훈련과정 중 하나였다. 덕분에, 격구 같은 무예는 국궁이 주력이었던 시기에는 '''기마궁수 양성을 위해서''' 중세시대까지 가장 안전하면서 효율성이 높은 기병훈련으로 각광 받았다.
이후 조선 중후기부터 차츰 쇠퇴하여 이전처럼 국가적으로 지원하는 프로 스포츠와 같은 모습은 사라지고 마상격구는 한 때 맥이 끊겼으며, 말을 타지 않고 사람이 뛰어다니면서 하는 도보격구만이 간략화되어 장치기, 격방(擊棒)이라는 백성들의 민속놀이 형태로만 남게 되었다.
3. 상세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하나는 말을 타고 하는 "마상격구(馬上擊毬)"와 직접 발로 뛰는 "보행격구(步行擊毬)[2][3] 가 있다.
기마 상태로 선수들끼리 엉켜 싸우고, 격구채를 맹렬히 휘둘러야 하므로 현대의 스포츠에 비해서 매우 위험하다.[4] 말의 운동 에너지와 격구채의 길이에서 나오는 원심력 때문에 강력한 타격력이 나오며, 작은 공을 신경쓰다가 떨어지면 말에 짓밟혀 죽는다! 말이 사람의 생각대로 백퍼센트 움직여주는 것도 아니니 사고위험성은 매우 높다. 게다가 인간보다 강한 말들 조차도 경기중에 다칠위험이 높은데 선수들이야 말할것도 없다. 격구의 현대 개량형인 폴로가 올림픽에서 퇴출된 것도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이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지배층들 사이에서 축국, 수박(무술)과 함께 가장 인기있던 스포츠였는데, 고려시대에는 군인들의 격구를 통해서 벼슬이 오가는등 악용된 역사도 남아있다.
기마궁수의 단련에 있어서는 격구가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기마궁술이란 것은 현대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기마창술'''에 가까운 싸움법이다. 창이 닿을락 말락할 정도로 가까운 5m~10m 사거리에서 강력한 활로 '창'을 내지르듯이 싸우는 기마궁술의 싸움법에 있어서, 격구는 말을 타고 거리유지 하는 허릿심을 적절히 훈련할 수 있었으므로 중요한 군사 훈련이 될 수 있었다.
물론, 과녁과의 10m 내외의 거리를 유지해야하는 초인적인 허릿심의 단련에 중요한 격구 훈련은 이러한 기마궁사들이 쇠퇴하면서 점점 중요성이 낮아지게 된다. 무엇보다, 거칠고 위험한 훈련에서 발생하는 중요한 군사자원인 인마를 훈련에서 손실할 수 있는 격구는 실전보다는 안전하지만 여전히 감당하기 어려운 지출이었다.
4. 격구의 쇠퇴와 원인
기마궁술의 시대가 끝나고 '''총포류의 시대'''가 찾아오자, 격구 훈련은 전술적으로 매우 위험한 훈련이 되고 말았다. 이에 관해서는, 신립이 탄금대에서 일본의 조총 부대에게 기마궁수를 보냈다가 전멸당한 역사적인 교훈을 생각해보면 된다. 기마궁술은 근거리에서 목표물과 비비듯이 움직이며 회피해야 하므로 격구 훈련이 매우 훌륭한 군사훈련이었지만, 총포로 무장한 보병부대 앞에선 이러한 움직임이 훨씬 강력한 화승총의 최대위력이 발휘되는 10m 내외의 훌륭한 과녁이 되기 위한 몸부림이나 자살행위 정도가 되어 버렸으므로, 기마궁술과 함께 중요성이 낮아진 것이다.
결국 격구 / 폴로는 전 세계적으로 놀이에 필요한 경제력을 감당할 수 있으면서, 제국주의와 식민지 개척을 위하여 기마군인들의 육성을 장려할 필요가 있었던 서구권의 귀족들의 교양 스포츠로서 유지되고, 그 밖에는 일부 기마민족의 문화 스포츠로서 근근히 유지되게 된다.[5]
하지만, 과거 한국에서는 고려시대에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던 격구가 조선시대에 차츰 쇠퇴한 데에는 일반적으로 조선이 문치주의에 빠져 무예를 소홀히 하면서 격구 문화도 쇠퇴했다는 설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1#2 하지만 이는 큰 오해이다. 외국의 사례와 비교해보면, 조선후기로 생각했을때 최신식 천보총과 장갑차 개념의 최신식 화차 등을 중심으로 전략을 개편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군사 과학의 발달 과정에서 격구는 점점 쇠퇴했다. 조선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다양한 유목민족조차도 화승총을 사용하게 되면, 격구와 같은 기마궁술 상태의 거리감각과 탄력성을 기르기 위한 훈련이 쇠퇴하고, 화승총을 모든 전략의 중심으로 전술을 재편하는 경향성을 보였다. 즉, 기마훈련이 화약무기에 밀려서 경제적으로 도태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에서 격구는 당연히 중요성이 낮아졌다는 것이다.
격구가 쇠퇴한 이후에도 조선왕조는 일시적이였지만 천보총 같은 신식화약무기를 개발하고, 중세 수준의 탱크와 유사한 신식 화차의 다양한 개념들이 등장했으며, 화승총으로 러시아군을 놀라게 하고 프랑스 군인들을 물리치는 등,화승총 기술 육성에 의한 이득을 톡톡히 보았다. 즉, 군사훈련에서 격구를 퇴출한 조선왕조는 무예를 천시한 것이 아니라 '''활을 잘 쏘는 민족들이 화승총을 이용한 저격기술과 대응전략에 오히려 더욱 빠르게 적응하는''' 전형적인 18세기 군사력 변천과정을 따라갔던 것이다.[6] 실제로 무과 시험에서 격구가 빠지고 대신 들어온 과목이 조총과 편추[7] 같은 실전지향적인 훈련들이었다.
5. 비판
고려시대 격구에 대한 설명.
위의 영상이나 일부 무술 사이트들은 고려시대 격구를 지나치게 치켜세우며 잘못된 부분까지 칭찬하는 경향이 있는데, 격구로 벼슬을 올려주는 예시만 하더라도 군사행정의 문란을 부추기기 쉬운 비정상적인 사건일 뿐임에도 이를 격구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사례인양 칭찬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고려시대 격구는 나라를 지켜야할 군인들의 정치화, 중앙에서의 친목질 난립을 부추겼기 때문에 한국역사 최악의 정치실패 사례 중 하나인 무신정권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위 영상에서는 조선의 무술 천시로 사라졌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윗 문단에서 언급했듯 18세기 이후의 조총으로 무장한 보병 대열 앞에서는 자살이나 다름없는 훈련이 되었으며, 세계 여러 기마민족들도 모든 전술을 화승총 중심으로 변경하기 시작했다. 즉, 격구=군사력이라고 보는건 당대의 군사 과학적으로는 비경제적인 판단이다.
결국 격구는 아무리 효율적이라도 병사 개인의 무예 훈련일 뿐이며, 조선이 격구를 정규군 훈련에서 제외한 것은 18세기부터 발전하는 화약무기에 집중하기 위한 매우 과학적인 군사개편 과정이었다. 혹여 이런 주장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문에 문약한 조선이 어쩌고 하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정작 그 전쟁들에서도 가장 활약한 것은 '''조선의 화포기술'''이다. 조선 중기까지는 그러한 주장이 맞을 수도 있지만 격구가 쇠퇴한 시대는 화약무기에 대한 투자가 중요해진 시대였고, 조선중기와 후기의 문제는 무인중시 풍조 따위의 구시대적인 무술주의 이전에 오히려 '문명적인 진보능력, 외교능력, 상황적응력 쪽의 문제'가 훨씬 다채로운 구멍이었기 때문에 '문약한 조선의 군사력이 어쩌고' 하는 단순한 관점으로 까는 주장은 매우 낡은 역사관이다.
6. 기술
여느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격구에도 많은 동작과 기술들이 존재했다. 그 중 몇가지[8] 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할흉(割胸) : 공을 격구채로 뜬 후 격구채를 말의 가슴에 곧게 대는 동작
- 방미(防尾) : 격구채를 말꼬리와 나란히 하는 동작.
- 수양수(垂揚手) : 원심력 등을 이용해 (쥐불놀이하듯) 격구채를 위아래로 돌리고 흔드는 동작.
- 호접무(胡蝶舞) : 공을 공중에 던져올린 후 격구채로 받는 기술. 그 후 공을 미는 동작을 한다.
태조가 공을 운행할 때에, ..., 공이 문득 돌에 부딪혀 놀라 거꾸로 달아나 말의 네 발 뒤로 나왔다. 태조는 즉시 위를 쳐다보며 누워 몸을 돌려서 말꼬리에 부딪쳐 공을 치니...
이성계의 궁술에 관해서는 용비어천가를 감안해야 하지만, 격구가 기마궁술의 단련에 있어서 매우 효율적인 스포츠였다는 점에서 이성계의 궁술이나 격구 실력은 비범했다는 공통점이 있다.공이 왼쪽으로 빠지자, 태조는 오른쪽 등자에서 발을 빼고 몸을 뒤집어 쳐서 이를 맞히고 다시 쳐서 문밖으로 나가게 하니 그때 사람이 이를 횡방(横防)이라 하였다.[9]
7. 매체에서의 등장
드라마 태조 왕건에선 신검과 애술이 각 팀의 주장을 맡아 즐기는 모습이 잠시 나온다. 다만 말을 타고 하는 마상격구는 아니고 발로 뛰면서 하는 보행격구이다. 그래서 아래의 무신의 경우에 비하면 하키같은 스포츠에 가까운 묘사로 나오는데, 작중 아버지 견훤에게 이리 깨지고, 저리 깨지며 온갖 갈굼을 당하는 신검이 작중 유일하게 진심으로 즐거운 표정을 보인다. 해설에서는 '신검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격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라는 식으로 언급했는데, 아마 격구라는 스포츠가 상당히 오래된 것이라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10]
후속작 제국의 아침에는 스토리 상에 꽤 중요한 비중으로 등장하고 있다. 극 중반부에 주인공인 왕소 태자가 황제에 등극한 후, 호족들에게서 황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물밑에서 황제의 직할부대인 내군을 개편하려고 하는데, 핑계로 격구를 즐기는 것으로 위장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래서 한동안 내군은 격구부대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물론, 실제로 격구를 즐기기는 했으나, 이는 훈련 차원이 많았던 것으로 등장하며, 하키 형태의 격구와 더불어 마상 격구가 제대로 등장하는 것으로 나온다.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도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마상격구는 등장하지 않고 보행격구만 등장하며 세종을 비롯한 왕족들이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위나 아래의 예와 다르게 골프처럼 매우 정적이고 우아한 스포츠로 표현했다.
드라마 무신에서는 초반에 비중 있게 나오는데, 공놀이는 둘째치고 격구채로 상대 팀부터 때려 죽이고 보는 데스매치(...)마냥 과격하게 묘사됐다. 이걸 축구로 치면 골키퍼를 때려 패 최소 기절시키고 나서 마지막 마무리로 여유있게 골대에 공을 차넣는 식.[11] 물론 격구는 스포츠인 동시에 무예이기도 하고, 말을 탄 채로 몽둥이로 쓸 수 있는 막대를 휘두르며 엉키는 매우 위험한 종목인 것도 사실이긴 하다보니, 극중 최양백의 대사를 통해 원래 격구는 이렇게까지 과격하지는 않은데 무신정권 하에서 뛰어난 사병(私兵)을 뽑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다보니 도방에서 하는 격구만 이렇게 과격하다는 점을 밝혀 극적 과장에 대한 보험을 들어놓았다. 진짜 문제는 극중 과장보다는 격구중 착용하는 투구 양식이며 격구장 묘사가 스파르타쿠스 같은 로마 검투사들 묘사를 그대로 베껴왔다는 것이었다.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도 등장하는데 무신과 엇비슷한 경기규정으로 가긴 하지만 데스매치 수준까지는 아닌 격한 운동으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격구가 들어온 시점은 고구려 후기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드라마 속에서 나오는 격구라는 종목 자체는 역사왜곡인 셈이다.
애니메이션 장금이의 꿈에서도 임금인 중종을 포함한 민정호, 장수로, 윤환, 동이까지 격구를 즐기는 장면이 나온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원균과 이영남의 첫 만남에서 다루어진다. 경상우수사로 부임하자마자 부하들을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게 처벌하는 원균에게 이영남이 강력히 항변하자 원균이 그에게 격구대결을 제안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일대일 마상격구를 겨루게 되는데 이 역시 하키와 비슷한 느낌으로 묘사되었다.
8. 관련 문서
[1] 이 인물은 이렇게 거대한 격구장을 차려놓고 나선 (민족주의적 사관으로 까이는 수준이 아닌 현실적인) 김자점처럼 외적들과 몇번 싸웠다가 패배하니 그 격구를 통한 친목질과 군사력을 각종 향락이나 권력유지에나 쓰는 개인중시 쫄보 정치장군의 행보를 보인지라 별로 좋게 평가할 건덕지가 없다.[2] 혹은 "도보격구(道步擊毬)"라고도 한다.[3] 세종대왕이 젊었을 적에는 격구를 한 적이 있는데 이 때 한 격구가 이 격구다. 반면 태조나 정종이 한 격구는 마상격구로 추정.[4] 당장 부상위험이 제일 높은 스포츠들 중 하나이며, 한 경기 뛸때마다 그만큼 해당 선수의 수명도 단축된다고 볼수있는 종목인 럭비와 미식축구만 해도 그 위험성으로 인해 논란이 많은데 말위에서 스틱으로 공을 치고 서로 말을 탄 상태로 몸싸움을 벌이는데 이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다.[5] 심지어 전 세계적으로 총기의 보급으로 같은 도태 현상이 일어났는데, 기마민족들에게서도 폴로와 비슷한 스포츠의 중요성이 낮아지고 도태되는 지경이었다.[6] 당연하지만, 조선왕조가 기마궁술을 축소하고 화약무기를 선택한 것은 매우 과학적인 판단이었으며, 19세기 조선의 군사력 약화는 무예풍조(낡은 전술)과는 정반대로 서구의 사회수준과 이에 뒤따르는 발전된 외교적 사고를 따라가지 못한 점, 즉 '문명의 진보'가 늦었기 때문일 뿐, 무인중시 풍조 따위의 논점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심지어, 18세기의 조선이 겪은 군사적 위기조차 기마궁술이 아닌 화포기술 덕분에 이겼다. 즉, 시대에 뒤떨어진 격구 훈련을 포기했기 때문에 군사력이 약해졌다는 발상은, 육체단련풍조가 군사과학보다 우월하다는 의화단 운동 수준의 퇴보적인 역사관이다.[7] 말을 달리며 마상편곤을 이용해 목표를 타격하는 훈련.[8] 역사저널 그날 131편(16.07.03 방영분)에서 소개됨[9] 글로 읽어도 이해가 안 가는 위키러는 역사저널 그날 131편을 참고하면 좋다.[10] 실제로 드라마상에서 역사성(?)을 보이기 위해 극중 전개와 아무 관련도 없는 장면을 집어넣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박김치와 동치미가 고려 시대에도 있었다든가, 박술희가 뱀이나 개구리까지 즐겨 먹었다는 등등.[11] 물론 전근대시대 스포츠는 기본적으로 규칙이 느슨한 편이라, 격구가 아니라도 예를 들어 축구도 잉글랜드에서 옛날에 하던 초기 축구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거의 패싸움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