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광도

 

1. 개요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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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양광도 행정구역 변천사'''
관내도
(關內道)
중원도
(中原道)
하남도
(河南道)
(995)

양광충청주도
(楊廣忠淸州道)
(1106)

양광주도
(楊廣州道)
충청주도
(忠淸州道)
(1171)

충청도
(忠淸道)
(1217)

양광도
(楊廣道)
(1314)

충청도
(忠淸道)
(1356)
楊廣道
고려시대의 행정구역 5도 양계 중 하나.
고려시대 성종 15년(995)에 설정된 10도 체제에서 현재의 황해도, 경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관내도(關內道) 지역에서의 개경 이남, 현재의 충청북도와 유사한 중원도(中原道), 충청남도와 유사한 하남도(河南道)를 현종 시대에 5도 양계 체제로 개편할 때 만들어진 행정 구역이다. 현재의 서울, 경기도, 충청도 지역에 속하는 기호지방(경기+호서)의 기원이 되었다. 이름은 서울 이북의 양주시와 남한산성이 있던 광주시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광주시 지역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점은 이전 통일신라한주와 같지만 세부적 영역은 상당히 달라졌다.
동쪽으로는 강원도의 원주시평창군까지 포함하였으며, 남쪽으로는 충청북도영동군, 옥천군을 제외한 충청북도, 서천군금산군, 논산시 일부를 제외한 충청남도까지 포함하며 전라도경상도와 경계를 이루었다. 다만 시대에 따라 명칭의 변천이 있었다.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 충청도[1]로 불린 적도 있고, 조선시대 경기도 지역을 주로 커버하는 양광주도와 충청도 지역을 주로 커버하는 충청주도로 나뉘어진 적도 있다.
고려 시대 중기 이후에 문벌 귀족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이 지역에서 많은 관료가 배출되었다.[2] 사실상 고려를 지배하던 세력이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서경 길지설이 묘청의 난으로 쇠퇴한 이후에는 남경 길지설이 유행하였고, 문종 치세에 현재의 양주 인근에 남경을 설치하며 이 지역에 힘을 실어줬다.
문종 23년(1069년)에 개성 중심의 고려시대 경기가 확장되어, 지금의 황해도 동부와 함께[3] 남쪽 한강 일대까지 경기의 일부에 속하게 되었다. 정작 도의 이름은 양광도지만 이름의 어원 중 하나인 양주가 여기에서 벗어나 경기에 속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양광도에서 경기로 편입된 지역은 지금의 서울(강남, 송파, 강동 제외), 인천, 부천, 김포, 광명, 시흥, 안산, 화성 서부(구 남양군), 안양, 과천, 군포, 고양, 파주, 의정부, 양주, 동두천, 포천, 구리, 남양주 일대에 속한다. 1104년에는 숙종이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여 진지하게 천도하려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이후 고려 말에는 더욱 천도하자는 분위기가 강해졌는데, 이유는 왜구의 준동으로 인해 수도 개경이 위협받는 상황이 계속 벌어지는 것과 예성강의 퇴적 현상으로 개경의 수운 활용이 난감해지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공민왕은 남경에 궁을 증축하려 했으며, 우왕 때는 일시적으로나마 왕이 남경에 거둥하였다. 공양왕 때에도 왕이 일시 머물렀으며, 서경과 마찬가지로 분사를 두려고 하였다. 서울이 조선의 수도가 된 것도 갑자기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렇게 수백년 동안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렇게 고려 시대에 중요 역할을 하던 양광도는 조선 시대에 남경 길지설을 바탕으로 기호 지방으로 불리며 조선 통치에 큰 역할을 하였다. 고려 초기에 평안도 일대의 패서 지역 출신이 고려의 건국에 기여한 것을 제외하고 고려 중기부터 조선을 거쳐 현재에는 서울특별시, 세종특별자치시[4]가 한국의 중심지로 기능하는것을 보면 무려 천년 가까이 한국 역사를 지배한 것이다.
양광도는 그 영역만 놓고 봤을 때 조선시대 기호 지방의 전신이지만, 굳이 양광도의 법적인 후신을 따지자면 경기도보다는 충청도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에 5도 양계와 분리된 특수한 행정구역으로 있었던 경기 지방의 영역을 확대해서 경기도로 만들고, 이에 따라 영역이 축소된 양광도에다가 일부 전라도, 경상도 군들을 추가로 붙여서 충청도로 개칭한 것이기 때문. 마침 고려시대에 양광도가 잠시 충청도로 불린 적이 있기도 하다.
기호지방의 역대 광역행정구역중 지리적 경계선과 상당히 일치하는 행정구역이다. 현재의 경기도와 비교하면 큰 산으로 단절된 가평은 교주도에 속했고, 원주와 평창은 남한강으로 연계되니 양광도에 속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교통망에 한계가 있었고 중앙집권화가 약했기 때문. 조선시대에는 관찰사를 파견하기 좋도록 영역이 조정되었다.
주요 대도시로는 현재 서울의 강북에 해당하는 양주(楊州)가 있었다. 양주는 후에 남경(南京)으로 승격되었다. 그 다음 행정구역인 목(牧)으로는 지금의 강남과 광주에 해당하는 광주(廣州), 지금의 강원도 남부와 충북 충주 일대를 관할했던 충주(忠州), 지금의 충남 일대와 청주 일대를 관할하던 청주(淸州)가 있었다. 충주는 몽골의 침입을 막아낸 공으로 1247년부터 일시적으로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되었다.
그 다음 행정구역인 부(府)로는 지금의 인천 북부와 부천을 관할하던 부평(富平)[5]과 천안(天安)이 있었다. 원 간섭기 때에는 공주(公州)와 홍주(洪州)가 목(牧)으로 승격하였고 이는 조선 시대까지 이어진다.

[1] 조선시대의 충청도보다 관할 구역이 넓었으며, 반대로 조선 충청도에는 포함된 일부 지역들이 이 때는 전라도와 경상도에 속해있는 등 이름만 같았지 조선 충청도와 여러모로 차이가 많다.[2] 태조 대부터 인종 시절까지는 본관 말고 출생지만 따지면 이 지역이 제일 많았다.[3] 대략 현대 북한의 황해북도와 비슷한 영역이 개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에 포함되었다.[4] 단 세종시는 현대에 건설된 신도시로 서울만큼의 위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5] 당시에는 수주(樹州)라고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