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사언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1. 개요
조선 전기의 문신·문장가·서예가. 특히 초서체에 능했다.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이며 자는 응빙(應聘)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틀무시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돈녕주부(敦寧主簿)를 지낸 양희수(楊希洙)다.
위로 형 풍고 양사준(楓皐 楊士俊, 생몰년 불상)이 있고 아래로 동생 죽재 양사기(竹齋 楊士奇, 1531-1586)가 있는데, 이들 삼형제가 두루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세상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2. 생애
1540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45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문과에 급제한 직후 운정기(雲亭記)라는 글을 지어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삼등현감, 함흥부윤, 평창군수, 강릉부사를 지내고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 사정을 지낸 뒤 다시 외직으로 나와서 회양군수, 철원군수, 고성군수, 안변도호부사를 지냈다.
40여년의 관직생활동안 따로 가솔들을 위해 재산을 모으지도 않았으며,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 서예와 시문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으며, 금강산 만폭동에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 元化洞天)이란 친필을 남기는 등 자연을 즐기며 신선같이 살았다.
명종 때의 유명한 예언가 남사고(南師古)에게 천문과 역술을 배워 앞날을 능히 내다보았다고 하며, 임진왜란을 예언하여 사후에 다시 한 번 이름을 알렸다.
1582년 안변도호부사로 있을 때 안변에 있는 이성계의 증조부 묘인 지릉(智陵) 일대에 화재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황해도에 유배되었다. 1584년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오려 하였으나 유배지에서 병이 들어 결국 쾌차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1]
아들로 인천도호부사를 지낸 감호 양만고(鑑湖 楊萬古 / 1574 ~ 1654)가 있다.
그 유명한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하는 시조를 남긴 사람이다.
3. 관련 설화
양사언의 아버지 양희수는 장령을 지낸 송환정(宋環貞)의 딸 은진 송씨를 부인으로 맞았는데, 마침 양희수와 같은 마을에 살던 문화 유씨 처자는 세상에서 제일 가는 아들을 낳겠다는 뜻을 품었다. 백일 동안 장독대에 자리를 펴고 밤마다 알몸으로 누워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던 유씨 처자는 양희수의 재취부인으로 들어가서 얼마 뒤 양사언을 낳았다. 아들을 낳겠다는 목적은 이루었으나 재취부인의 자식으로서는 현달할 수 없음을 고민하던 유씨 부인은 양사언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남산 밑에 초가집을 짓고 시간을 보냈다.[2]
그러던 어느 날 임금이 야행을 나왔다가 갑자기 광풍과 폭우가 쏟아져 난처해졌다. 당황하던 임금 일행은 마침 유씨 부인의 초가집을 발견하고 거기서 비를 피했다. 유씨 부인은 이를 예견이라도 한 듯이 임금에게 진수성찬을 올렸다. 그 집에서 어린 양사언의 범상치 않은 기골을 보고, 임금은 장래에 큰 인물이 되리라 유씨 부인에게 양사언의 장래를 약속하고 궁궐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벼슬길에 오른 양사언은 금강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자연을 즐겼는데, 이 때문에 당대의 풍류인으로 이름을 알렸다. 전우치전에 따르면 단군의 옛 유적을 찾기 위해 산에 들어갔다가 화담 서경덕과 우사 전우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서경덕으로부터 천기를 예언한 예언서들을 받아 간직하며 읽고 또 읽었으며, 한편으로는 유명한 예언가인 남사고로부터 천문과 역술을 배워 통달했다고 한다.
이 설화가 실제처럼 알려지고 내용이 더 와전되어서, 마치 양사언이 첩의 자식인 서얼로 천대받고 풍류객으로 활동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위에 나왔듯이 양서언의 친모 유씨 부인은 첩이 아니라 정실부인이다. 조선시대에도 재취부인은 정실 부인으로 취급했으므로 그 자녀는 공적으로 전혀 차별받지 않았다.
[1] 평소 양사언은 '날 비(飛)' 자를 쓴 후 아들 양만고에게 맡기며 '이 글은 내가 혼신을 담아 쓴 글이고, 이 글이 써진 종이가 날아가면 나는 세상을 떠날 것이니 잘 보관하라.'고 당부했다. 어느 날 양만고가 집을 정리하다가 바람이 불어 그 종이가 날아갔는데, 그 시각에 유배지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오던 양사언이 병으로 객사했으므로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했다. 또는 금강산에 비래정이란 정자를 지어놓고 현판을 양사언이 직접 썼는데, 비 자만 마음에 들어 따로 족자를 걸고 보관했다. 양사언이 유배를 간 후 비래정에 광풀이 불었고 비 자가 써진 족자만이 사라졌다. 양사언 벗이 족자가 없어진 날짜와 시간을 따져보니 그가 귀양살이 하다 돌아오던 길에 세상을 떠난 때와 정확히 일치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2] 또다른 이야기도 있다. 양희수가 죽은 뒤 양사언과 양사기가 첩실의 자식이라 족보에 오르지 않음을 알자, 유씨 부인은 장자 양사준에게 족보에 올려달라고 간곡히 부탁한 후 자결했다. 그 후 양사준이 유씨 부인의 뚯대로 나이차 나는 두 동생을 족보에 올리고 문중을 설득하여 적자 대우를 해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