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하르트만

 


1922년 4월 19일 ~ 1993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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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경력
2.1. 입대
2.2. 첫 전투
2.3. 현상금이 걸리다
2.4. 종전과 포로생활
2.5. 서독 공군
2.6. 이후
3. 하르트만의 전술
4. 기타


1. 개요


에리히 알프레트 "부비" 하르트만, Erich Alfred "Bubi" Hartmann[1], 제2차 세계 대전 독일 공군의 슈퍼 에이스 조종사이자 인류 역사상 최고의 격추왕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설적인 에이스인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과 더불어 전 세계 공군 역사에서 에이스를 논하는데에는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공식 격추 기록은 '''352기'''로, 격추 전과 300기를 넘긴 사람은 에리히 하르트만과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Gerhard Barkhorn) 단 2명뿐이다. 격추기록이 전부 소련군 항공기는 아니고 미군기 7기도 격추한 기록이 있다. 또한 최후의 격추기록 2기는 1945년 5월 8일, 즉 독일군이 연합군을 상대로 전투를 중지한 시점에서 세운 기록이고 한 전장에서 소련기와 미군기를 각 1기씩 격추하는 드문 경우이기도 하다. 그가 세운 352기의 격추 기록은 2차대전 참전 국가의 격추기록 1등 에이스들의 기록을[2]합쳐놓은 것보다 많다. 더 충격적인 것은 하르트만의 대부분 격추기록이 나치 독일 공군이 제공권에서 밀리기 시작할 때에 오히려 전성기를 누렸다는 점이다.
자신의 애기를 검은색 계통으로 도색하였으며 기수에 독특한 도색을 했던 것에서 유래해 붉은 군대가 '검은 튤립', '우크라이나의 검은 악마'란 별명을 붙였다. 이 도색만 보면 소련 공군 전투기들은 도망가기 바빴다고 한다. 그 때문에 나중에는 다른 도색을 사용했다고 한다. 비행대 소속의 아직 미숙한 신참 조종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신참들의 비행기에 검은 튤립을 그려넣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후의 하르트만 탑승기는 부인 우르슐라의 이름을 써 넣은 것으로 구분한다. 이후 서독 공군 복무 시절에도 F-86의 기수에 검은 튤립을 그려넣었다. 이후 그의 당시 복무 부대였던 JG-71 '리히트호펜'의 상징적인 마크로서 이 부대가 F-86을 운용하는 동안 전 기체가 같은 마크를 그렸다.

2.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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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하르트만의 검은 튤립 도장을 재현한 Bf109 G형''')[3]#

2.1. 입대


에리히 하르트만은 1940년 3월 15일 공군에 입대했다. 1942년 동부전선의 JG52(제52전투항공단, Jagdgeschwader52)에 배속된 이래로 계속 그곳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2.2. 첫 전투


세계 최고의 에이스 조종사로 악명을 떨쳤으나 모든 에이스가 그렇듯이[4][5] 처음부터 뛰어난 전과를 올리진 못했다. 다음은 첫 전투에서 에리히 하르트만이 한 실수'''들'''이다.
1. 손쉬운 표적이였던 IL-2 슈트르모빅을, 절호의 기습 기회를 잡아놓고 빗맞춰버렸다.[6]
2. 적기가 나타났다는 말에 적기를 피하려고 허둥지둥 구름 속으로 도망가다가 편대에서 낙오해버렸다.

3. 어딘지도 모를 하늘에서 헤매고 있다가 결국엔 연료가 다 떨어지고 말았다. 대충 불시착한 뒤 주변을 지나가던 육군 차량을 얻어타고 자대로 복귀했다.
4. 그런데 알고보니 구름 속에서 자신을 쫓던 그 '적기'는 바로 그가 잃어버린 편대장기였다. 편대장기에 탄 로스만은 무전으로 돌아오라고 수없이 소리쳤지만 하르트만은 말 그대로 패닉 상태에 빠져서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이다.
순전히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한 탓에 멀쩡한 전투기 한대를 맨땅에 갈아버린 죄로 그는 3일동안 비행금지령을 먹고 지상근무로 돌려진다. 그러나 이때 그의 한 가지 비범한 재능이 빛을 발했다. 그 재능이란 '''자신의 실수를 되돌아보고 절대로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었다.

2.3. 현상금이 걸리다


첫 공중전에서의 장대한 삽질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한 덕에, 하르트만은 352기를 격추시킨 세계 최고의 에이스 조종사가 되었고, 훈장을 무더기로 받았으며, 스탈린은 그에게 현상금을 걸었다.(인민의 적으로 유명한 한스 울리히 루델이나 호랑이 기수 오토 카리우스 등의 독일 에이스들은 대부분 목에 현상금이 걸려있었다.)
대전 말기 전투기대 총감 아돌프 갈란트가 톱 에이스 조종사들을 불러모아 직접 조직한 제트전투기 비행단 JV-44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았으나, 부대와 전우들을 떠날 수 없다며 거부한 전력이 있다.
다이아몬드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 수여 직전에 동료들과 함께 술을 퍼마셔 만취상태로 자기 모자를 잃어버리자 히틀러의 모자를 대신 쓰고다닌 일이 있었고, 그 후에도 권총을 차고 훈장 수여식에 나서면서 히틀러의 안전문제로 권총을 회수하려하자 "만일 각하가 나를 전혀 신뢰하지 않으신다면 다이아몬드 곡엽 검과 기사 철십자 훈장은 그 분의 모자에나 꽂아야 할 것 같소."라는 명언을 남긴 적이 있다.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는 일화이다.

2.4. 종전과 포로생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당시 JG52 사령관인 헤르만 그라프와 함께 미군에 항복하지만, 소련과 미국의 밀약에 의해 소련군에 부대 전체와 함께 인도되어 10년 동안 시베리아에서 유형생활을 하게 된다.
소련은 종전즈음에 '대전내내 동부전선에서 싸운 독일군 병사와 부대들은 설령 미군에 항복해도 자기네 포로'라는 협상을 한 상태였다. 이런 밀약을 인정하지 않은 사례도 꽤 많지만[7], 이 때문에 동부전선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전쟁영웅들 중 초급 간부들, 특히 공군의 슈퍼 에이스들 상당수가 소련에 인도되어 고초를 치렀다.
에리히 하르트만도 전쟁포로로 상당히 고초를 치렀다고 한다. 소련군들이 하르트만을 공산당 당원으로 돌리려고 하거나 여러가지로 소련에 협력하라고 시켰다. 그러나 전혀 말을 듣지 않고 독일을 위해 싸운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식의 발언을 해서 독방에도 자주 가고, 단식투쟁도 하는 등, 제대로 된 인간 대접은 못받았다. 결국엔 전범 누명을 뒤집어쓰고[8][9] 전쟁포로캠프에 10년 하고도 6개월간 잡혀있었다가 1955년에 석방되어 서독으로 돌아가 아내 우르슐라와 재회할 수 있었다. 하르트만은 전쟁 중 매일같이 아내 우르슐라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10]

2.5. 서독 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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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역을 마치고 1955년 고향으로 돌아온 뒤 신생 서독 공군에 지원했다. 전후에 복무한 JG 71 "Richthofen"(그 붉은 남작 리히트호펜 맞다. 당시 독일 대통령인 하인리히 뤼케가 리히트호펜을 기리기 위해 붙여줬다고 한다.)에서 하르트만은 상술했듯이 F-86의 기수에 '검은 튤립'을 그려넣었고, 해당 부대는 F-86을 운용하는 동안 똑같이 기수에 검은 튤립을 그려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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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기체는 베를린 항공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70년에 F-104의 운용에 요하네스 슈타인호프와 강하게 반대했다. JG52 출신 하르트만과 귄터 랄, 슈타인호프, 흐라박의 회고인터뷰를 모아 출판된 "The German Aces Speak II"에 따르면 세간에 알려졌듯이 F-104가 결함기라고 봤다기보다는 당시 서독공군의 훈련, 보급, 정비체계로는 F-104라는 조종과 유지정비가 까다로운 비행기를 감당하는것이 무리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 도입계획에 반대했다고 강제전역 당했다고 많이들 알려졌는데 그렇게 보는것은 다소 비약이 심한 이야기이다. 하르트만과같이 F-104도입에 강하게 반대했었던 슈타인호프는 공군 대장까지 진급했다. 하르트만은 강제 전역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선택으로 조기전역 했었는데, 자신과 슈타인호프, 랄의 증언에 의하면 개인적인 성격이 그렇게 정치적이지 못했었고 서독 공군에 복무한 유일한 다이아몬드 곡엽검 기사십자장 수여자에, 10여년간 소련 수용생활을 했던 걸로 공군 상층부에서 질투와 의심, 견제가 심해서 마음고생이 심했었다고 한다. 이후 F-104는 과부제조기로 악명을 떨쳤던걸 생각하면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일수도 있다. 물론 높은 손실률은 기체 자체의 문제라기 보단, 요격기라고 만든 물건을 온갖 임무에 다 투입한 것이 원인이었지만.

2.6. 이후


전역 후 비행교관으로 근무했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1993년뇌종양으로 사망했다. 당시 71세였다.

3. 하르트만의 전술


동료의 엄호를 받으며 기습적으로 접근해서 사격하고 튀는(Boom and Zoom) 전술의 대가였으며 오로지 이 전법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적당한 위치에서 철저하게 기습한 후 잽싸게 튀는 전술 하나만으로 세계 1위의 에이스 조종사가 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기동은 1940년대 초반 전투기 전술의 기본[11]이었지만 이 사람이 무서운 건 '''이렇게 싸울 수 없을 만한 상황에서조차 이렇게 싸울 수 있도록 미리미리 기동을 해 두고, 일격을 가한 후에는 욕심도 안 부리고 겁도 안 먹은 채 현장에서 빠져나가 적당한 위치를 다시 확보하고 또 치는''', 도전정신이 강한 전투기 조종사로서는 지키기 힘든 금도를 철저하게 지켰다는 데 있다. 하르트만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이러한 일격이탈 전법의 장점은 후방에서 덮치기 때문에 기습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고 가까이서 사격하기 때문에 명중률이 높으며 같은 이유로 탄약의 파괴력도 강하기 때문에 몇발만 명중해도 적기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점에 있었다.
하르트만은 적기에서 수십미터 거리까지 접근해서 사격하는 것을 선호했는데[12], 이처럼 적에게 너무 가까이 접근했다가 자기가 격추한 적기가 폭발할 때 뿌린 파편을 뒤집어쓰고 대파된 사례가 종종 있다.[13] 전쟁 후반 그가 지휘관이 되어 이끌었던, 그를 신처럼 여긴 후배 조종사들도 이 사격술만은 너무 위험하다며 꺼렸다고. 사실 사람들은 하르트만이 이런 근거리 사격을 선호한 이유를 그가 사격에 영 젬병이었기 때문으로 본다.

4. 기타


  • 전쟁 기간 전체를 통틀어 동료 전투기를 한번도 잃지 않았다고 한다. 352대의 격추 기록보다도 그는 이것을 진정한 자랑으로 생각했다. 위에서 말했듯이 본인이 불시착한 적은 몇 번 있다.
  • 종전 후 미군의 건카메라를 감상한 뒤 "일본군의 기체가 탄에 맞으면 간단하게 불타오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라는 감상을 남겼다.



[1] "부비"는 "아기". 동료들 가운데 나이가 제일 어렸고, 워낙 동안인지라 붙은 별명. 영어라면 Babe, 한국식으로 치면 '막내야~' 정도의 말이다. 전쟁 말 지휘관이 돤 후부터는 후배이자 부하 조종사들이 감히 하르트만같은 전설을 저렇게 부를 생각은 못했고 그냥 "소령님(Herr major)"이라고 불렀다고.[2]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핀란드, 캐나다[3] 세부 형식은 Bf109 G-10형이다.[4]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은 1940년부터 1942년까지 10기 밖에 격추 못할 정도로 늦깍이었고 한스 요아힘 마르세이유는 신병 시절에 8기 잡으면서 자기 비행기를 6번이나 갈아먹어 다른 사람들 다 소위 달 때 혼자만 소위 후보였다. 세계 최초로 격추수 200기를 달성한 헤르만 그라프 역시 프랑스 침공 때부터 참전했지만 바르바로사 작전에서야 간신히 첫 격추를 할 수 있었다.[5] 물론 투입되자마자 괴악한 기록을 올리면서 세상을 뒤집어놓은 에이스도 없는 건 아니다. 인류 역사상 기록된 슈퍼 에이스 중에서는 '''딱 한 명''' 존재한다.[6] 그는 이 전투 이후에 언제나 적기에 최대한 접근해서 사격을 가하게 된다.[7] 에리히 폰 만슈타인같은 사례가 대표적으로 소련에서 넘겨줄것을 요구하였으나 영국과 미국이 거부했으며 전쟁범죄에 연루되었음에도 가벼운 처벌만을 받았다. 실질적인 수형기간이 2년 남짓으로(18년형선고→2년뒤 외부에 나옴→4년뒤 완전히 석방) 비슷한 사례인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사형을 선고받은것에 비하면 처벌받은것도 아닌 수준이다.[8] 1997년에 러시아 정부가 에리히 하르트만의 전쟁범죄 기소는 위헌이었다고 인정했다.[9] 독일공군 전투기 조종사들은 막장이었던 육군과 달리 전쟁범죄에는 거의 연관성이 없었다. 대부분 공중전이었으니. 그렇다고 전범 기록이 없는것은 아니다. 폭격기 조종사들은 민간인들에게 무차별폭격을 퍼부었고 전쟁포로 사냥파티에 공군장교들이 참여한 기록도 적지 않다[10] 불행히도 1945년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병으로 아들이 1948년에 죽는 바람에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11] 예외가 구 일본 육해군 항공대와 이탈리아 공군이었다. 이 두 국가는 저속 선회전을 중시했다. 그러나 일본군, 이탈리아군도 그렇게 했던 이유는 적국의 항공기보다 강력한 엔진을 조달하기 어려워서 Boom and Zoom의 기본 전제조건인 상대적인 속도/에너지 우위를 확보하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그들도 그런 비행기가 있을 때는 무조건 저렇게 교전을 벌이는 것이 원칙이었다. 다만 이탈리아 공군의 경우 독일 기체를 다소 상회하는 항공기가 있긴 하지만, 나사 하나 빠진 항공기로 만들던 탓도 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고성능 기체에 저화력 무장 이라며 독일군이 당황했을 정도.[12] 당시의 표준적인 무장 영점거리, 즉 사격 거리는 대개 200m~300m정도였다. 하르트만의 경우 굉장히 가까운 것.[13] 이 때 한 번 불시착했었는데, 독일제 트럭이 다가 오길래 아군인 줄 알고 접근했다 소련군이자 아픈 척을 하며 연기를 했다. 이 후 이송 중 독일군의 공습에 트럭이 잠시 멈춰서자 감시병의 복부에 주먹을 먹이고 도망쳤다고 한다. 아버지가 의사였기 때문에 환자 흉내는 쉬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