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V-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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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4 전투단 (독일어 : Jagdverband 44;야크트페어반트 피어운트피어치히''')
'''1945.03 ~ 1945.05.03'''
제2차 세계대전 말엽, 독일의 공군 루프트바페의 에이스 아돌프 갈란트 중장이 조직했던 최정예 전투비행단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말이였던 1945년 초 독일군은 육, 해, 공군 어느 하나 계속 패배하지 않는 때가 없을 정도로 막장일로를 달리고 있었다.[1] 그래도 축적된 전투경험과 몇몇 뛰어난 장비, 그리고 본토 수비를 위해 전의를 불태우던 일선 병사들의 분투로 간신히 하루하루 지탱하고 있었으나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의 수뇌부들 대부분은 이런 병사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뇌내망상과 신무기 집착으로 패배만 늘려가고 있었다.
그래도 당시 연구되던 비밀병기 중에는 약화될대로 약화된 군의 전투력을 그나마 현실적인 레벨에서 보완할 가능성이 있는 신무기도 있었는데, 제트전투기 Me262가 바로 그것이었다. 당대 어느 전투기보다도 빠른 속력을 자랑했던데다 무장도 튼실한 편이었던 이 기체라면 허구헌날 독일 본토에 폭탄을 투하하여 쑥대밭을 만들었던 B-17로 대표되는 연합군 공군을 요격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 기체의 우수한 성능을 살려 연합군의 폭격기를 잡는 요격기가 아니라 폭격기로 활용하겠다는 방침을 세우는 큰 실수를 저질렀고(Me262 문서 참조), 그런 히틀러의 영 잘못된 전략에 대해 항의해야 할 공군의 수장 헤르만 괴링 원수는 그저 자기 보신과 권력에만 집착하여 그 명령을 그대로 따르게 된다. 물론 Me262가 폭격기로 생산된다 해도 전투기와 크게 다를 바는 없었으며 각 부대에서 이를 다시 전투기로 만들어서 날렸으므로 결과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었다. 어차피 무장만 변경하면 되기 때문. 독일에 항공기와 파일럿이 부족했지 그것에 장착할 장비는 있었다.
이에 루프트바페가 자랑하는 스타 에이스이자, 당시 전투기대 총감을 맡고 있던 아돌프 갈란트 중장은 괴링에게 Me 262를 전투기로 전용 생산해줄 것을 강력히 촉구했지만 원래부터 자기 할말 다 하는 강직한 갈란트를 싫어했던데다, 그 무렵 자기가 추진하던 조종사 군기잡기 계획이 말아먹혀 일선 출신들에 대한 감정이 단단히 상해 있었던 괴링은 상관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갈란트의 모가지를 치게 된다. 게다가 괴링의 군기잡기 계획은 상식적으로 봐도 말이 안 되는데 괴링 자신이 잘못해서 발생한 공군의 손실을 일선 파일럿들의 무능 탓으로 돌리려 한 것이다. 각 전투비행단마다 한 명씩 차출해서 비겁죄로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는 '''10분의 1형'''[2] 수준의 공고가 떨어졌는데 전투기대 총감 갈란트는 물론이고 각 전투비행대장들이 모두 들고 일어났다. 이 때 갈란트 및 비행대장들의 반항한 방법이 어떠했냐면 군법회의에 회부할 명단에 '''자신들의 이름을 맨 위에 올려 놓았다.''' 이 때문에 괴링은 체면만 깎였고 결국 미운털을 이 기회에 좌천시킨 것이다.
뛰어난 선배 에이스 조종사이자 인간적으로도 존경할 만한 신사로서 일선 파일럿들의 큰형님과도 같은 존재였던 갈란트에 대한 괴링의 이러한 홀대는 곧 일선 파일럿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괴링이 갈란트를 처형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퍼지게 되자 사실상 당시 활동할 수 있었던 모든 일선 파일럿들이 들고 일어나 갈란트의 복직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에 이른다. 이때 이를 주도한 것은 갈란트를 보좌해서 서부 전선 전투기 부대를 지휘하던 귄터 뤼초였는데 그는 히틀러와의 담판까지 요구했으나 괴링과의 면담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괴링은 뤼초와의 면담 자리에서 갈란트의 무능을 성토했고, 뤼초가 이에 반박하자 '''"자네는 내가 강력한 독일 공군을 건설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겐가?"'''라고 소리쳤다. 뤼초는 이에 '''"아닙니다. 각하께서는 분명히 강력한 독일 공군을 건설하셨습니다. 폴란드와 프랑스에서는 많은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그러나 각하께서는 그 후로는 계속 낮잠만 주무셨습니다."'''라고 대답하여 '''괴링의 역린을 건드리다 못해 잡아 뜯어버렸다.'''
이에 괴링은 뤼초를 비롯해서 이러한 항명 사태를 주도한 이들을 모두 반역죄로 처형하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으나 상황이 상황이었으니만큼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했고 결국 갈란트를 일선 전투비행대장으로 좌천시키는 선에서 처벌을 그치게 된다.
전투기대 총감에서 일선 전투비행대장으로 좌천된 것은 분명 엄청난 홀대였고, 그나마도 괴링의 의도는 갈란트의 용명과 인망을 질투하여 '''"가서 전사해라"'''라는 것이 명백했던 것이었지만 갈란트는 이 상황을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 정도로 받아들였다. Me262는 등장시기가 늦었기는 하지만 요격기로의 운용할 수 있는 기체였고, 그가 지휘하게 될 부대는 이미 활동하고 있던 JG-7 비행단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제트전투기를 운용하는 부대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존경하던 갈란트와 함께 싸울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루프트바페 굴지의 에이스들이 '''그저 갈란트라는 이름값 하나만 믿고 그저 갈란트와 함께 싸운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우루루 몰려들었다. 심지어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병원을 탈출해서 갈란트에게 달려온 이들도 있었고, 루프트바페 창설 초기부터 교관을 맡았던 프란츠 슈티글러(Franz Stigler)[3] 같은 경우는 아직 도색도 제대로 되지 않은 Me262를 공장에서 억지로 끌어내어 그대로 타고 날아왔다고 한다. 결국 전 세계 공군 역사상 전무후무할 전설적인 슈퍼 에이스 부대가 탄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JV-44였다.
흔히 알려진 바와는 달리 JV-44는 제트전투기로만 이루어진 부대는 아니었다. Me262는 일단 이륙해서 엔진이 제 실력을 모두 발휘하기만 하면 당대 어느 전투기보다도 빠른 속력을 자랑했지만 이착륙시에는 너무하다 싶을 만큼 느렸던 데다 엔진이 물이 오르기까지도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그 동안 이들을 엄호할 기존 전투기 부대도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이착륙 때 취약한 건 다른 항공기도 마찬가지이고 비행장 주위는 당연히 대공 방어가 튼튼하게 되어 있는게 당연하다. 그러나 당시 연합군은 알베르트 슈페어가 자서전에서 '날씨가 갠 뒤 낮에 도로를 다니는 건 자살 행위'라고 표현할 정도로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했고 독일 공군은 자기 부대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신세였다. 게다가 갈란트 중장은 최초의 제트 전투기 부대였던 JG-7을 시찰하던 중, 자신보다도 낫다고 인정하던 지휘관 발터 노보트니 중령이 바로 그것 때문에 연합군에게 격추되어 전사하는 것을 보고 제트 전투기 부대의 호위 전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이에 갈란트 중장은 하인츠 자하센베르크를 지휘관으로 하는 Fw190으로 이루어진 호위부대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들은 기지의 대공포와 공조해서 기지 상공의 적기를 요격하는 임무 특성 때문에 기체 하부 전체를 적색과 백색의 줄무늬로 칠했다. 이 화려한 색상 때문에 파파가이 중대(Papagei staffel), 즉 앵무새 부대라고 알려졌으며 이들이 운용한 Fw190은 D형으로 포케볼프 계열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것이었다.
1945년 3월에 결성되어 전투를 치르기 시작한 JV-44는 4월 26일, 갈란트가 P-47 썬더볼트기에 피격당해 부상을 입으면서 그 전까지 Me-262 전환훈련부대로 훈련과 전투를 병행하던 EJG-2 3중대장이었다가 갓 JV-44에 합류한 하인츠 베르의 지휘를 받게 된다. 이후 이들은 5월 초까지 계속 분투하였고, 하인츠 베어(Heinz Bär)는 4월 29일, P-47기를 한대 격추하는 것을 시작으로 JV-44에서 4기를 격추, EJG-2에서의 격추기록을 합쳐 단 두 달 만에 제트기로 16기 격추를 달성함으로서 독일 공군 2위의 제트 에이스가 되었다. 하지만 결국 5월 3일 남아있던 24기의 Me262를 모두 파괴하고 연합군에 항복하게 된다.
그토록 멋있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부대였으니 만화나 소설이었다면 이후로 멋있는 스토리가 펼쳐졌을 테지만 이미 전황은 연합군에게 완전히 넘어가 있었고, Me262 카탈로그상의 성능이야 좋다고 하지만 제트엔진 기술이 아직 걸음마단계였고 그로 인한 단점도 많았기에 이들의 전과는 약 56기 정도로 사실 그리 크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 독일 공군의 제반 여건과 제공권이 모조리 연합군 측에 넘어갔었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작전기간이 단 두달에 불과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들의 전과는 이들이었기에 가능한 수준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제국 또한 일본 해군에서 에이스 파일럿들과 우수한 정비병들로 구성된 343 해군항공대라는 부대를 조직하였다.
'''제 44 전투단 (독일어 : Jagdverband 44;야크트페어반트 피어운트피어치히''')
'''1945.03 ~ 1945.05.03'''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말엽, 독일의 공군 루프트바페의 에이스 아돌프 갈란트 중장이 조직했던 최정예 전투비행단이다.
"그놈을 본다는 것은 정말 무서운 경험이다. 만약 독일이 이 신예기를 우리 폭격기 공격용으로만 썼다면, 물론 그랬어도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했겠지만, 엄청난 댓가를 지불했을 것이고, 현실처럼 쉬운 전쟁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연합군 조종사
2. 상세
제2차 세계 대전 말이였던 1945년 초 독일군은 육, 해, 공군 어느 하나 계속 패배하지 않는 때가 없을 정도로 막장일로를 달리고 있었다.[1] 그래도 축적된 전투경험과 몇몇 뛰어난 장비, 그리고 본토 수비를 위해 전의를 불태우던 일선 병사들의 분투로 간신히 하루하루 지탱하고 있었으나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의 수뇌부들 대부분은 이런 병사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뇌내망상과 신무기 집착으로 패배만 늘려가고 있었다.
그래도 당시 연구되던 비밀병기 중에는 약화될대로 약화된 군의 전투력을 그나마 현실적인 레벨에서 보완할 가능성이 있는 신무기도 있었는데, 제트전투기 Me262가 바로 그것이었다. 당대 어느 전투기보다도 빠른 속력을 자랑했던데다 무장도 튼실한 편이었던 이 기체라면 허구헌날 독일 본토에 폭탄을 투하하여 쑥대밭을 만들었던 B-17로 대표되는 연합군 공군을 요격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 기체의 우수한 성능을 살려 연합군의 폭격기를 잡는 요격기가 아니라 폭격기로 활용하겠다는 방침을 세우는 큰 실수를 저질렀고(Me262 문서 참조), 그런 히틀러의 영 잘못된 전략에 대해 항의해야 할 공군의 수장 헤르만 괴링 원수는 그저 자기 보신과 권력에만 집착하여 그 명령을 그대로 따르게 된다. 물론 Me262가 폭격기로 생산된다 해도 전투기와 크게 다를 바는 없었으며 각 부대에서 이를 다시 전투기로 만들어서 날렸으므로 결과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었다. 어차피 무장만 변경하면 되기 때문. 독일에 항공기와 파일럿이 부족했지 그것에 장착할 장비는 있었다.
이에 루프트바페가 자랑하는 스타 에이스이자, 당시 전투기대 총감을 맡고 있던 아돌프 갈란트 중장은 괴링에게 Me 262를 전투기로 전용 생산해줄 것을 강력히 촉구했지만 원래부터 자기 할말 다 하는 강직한 갈란트를 싫어했던데다, 그 무렵 자기가 추진하던 조종사 군기잡기 계획이 말아먹혀 일선 출신들에 대한 감정이 단단히 상해 있었던 괴링은 상관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갈란트의 모가지를 치게 된다. 게다가 괴링의 군기잡기 계획은 상식적으로 봐도 말이 안 되는데 괴링 자신이 잘못해서 발생한 공군의 손실을 일선 파일럿들의 무능 탓으로 돌리려 한 것이다. 각 전투비행단마다 한 명씩 차출해서 비겁죄로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는 '''10분의 1형'''[2] 수준의 공고가 떨어졌는데 전투기대 총감 갈란트는 물론이고 각 전투비행대장들이 모두 들고 일어났다. 이 때 갈란트 및 비행대장들의 반항한 방법이 어떠했냐면 군법회의에 회부할 명단에 '''자신들의 이름을 맨 위에 올려 놓았다.''' 이 때문에 괴링은 체면만 깎였고 결국 미운털을 이 기회에 좌천시킨 것이다.
뛰어난 선배 에이스 조종사이자 인간적으로도 존경할 만한 신사로서 일선 파일럿들의 큰형님과도 같은 존재였던 갈란트에 대한 괴링의 이러한 홀대는 곧 일선 파일럿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괴링이 갈란트를 처형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퍼지게 되자 사실상 당시 활동할 수 있었던 모든 일선 파일럿들이 들고 일어나 갈란트의 복직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에 이른다. 이때 이를 주도한 것은 갈란트를 보좌해서 서부 전선 전투기 부대를 지휘하던 귄터 뤼초였는데 그는 히틀러와의 담판까지 요구했으나 괴링과의 면담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괴링은 뤼초와의 면담 자리에서 갈란트의 무능을 성토했고, 뤼초가 이에 반박하자 '''"자네는 내가 강력한 독일 공군을 건설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겐가?"'''라고 소리쳤다. 뤼초는 이에 '''"아닙니다. 각하께서는 분명히 강력한 독일 공군을 건설하셨습니다. 폴란드와 프랑스에서는 많은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그러나 각하께서는 그 후로는 계속 낮잠만 주무셨습니다."'''라고 대답하여 '''괴링의 역린을 건드리다 못해 잡아 뜯어버렸다.'''
이에 괴링은 뤼초를 비롯해서 이러한 항명 사태를 주도한 이들을 모두 반역죄로 처형하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으나 상황이 상황이었으니만큼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했고 결국 갈란트를 일선 전투비행대장으로 좌천시키는 선에서 처벌을 그치게 된다.
전투기대 총감에서 일선 전투비행대장으로 좌천된 것은 분명 엄청난 홀대였고, 그나마도 괴링의 의도는 갈란트의 용명과 인망을 질투하여 '''"가서 전사해라"'''라는 것이 명백했던 것이었지만 갈란트는 이 상황을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 정도로 받아들였다. Me262는 등장시기가 늦었기는 하지만 요격기로의 운용할 수 있는 기체였고, 그가 지휘하게 될 부대는 이미 활동하고 있던 JG-7 비행단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제트전투기를 운용하는 부대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존경하던 갈란트와 함께 싸울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루프트바페 굴지의 에이스들이 '''그저 갈란트라는 이름값 하나만 믿고 그저 갈란트와 함께 싸운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우루루 몰려들었다. 심지어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병원을 탈출해서 갈란트에게 달려온 이들도 있었고, 루프트바페 창설 초기부터 교관을 맡았던 프란츠 슈티글러(Franz Stigler)[3] 같은 경우는 아직 도색도 제대로 되지 않은 Me262를 공장에서 억지로 끌어내어 그대로 타고 날아왔다고 한다. 결국 전 세계 공군 역사상 전무후무할 전설적인 슈퍼 에이스 부대가 탄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JV-44였다.
흔히 알려진 바와는 달리 JV-44는 제트전투기로만 이루어진 부대는 아니었다. Me262는 일단 이륙해서 엔진이 제 실력을 모두 발휘하기만 하면 당대 어느 전투기보다도 빠른 속력을 자랑했지만 이착륙시에는 너무하다 싶을 만큼 느렸던 데다 엔진이 물이 오르기까지도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그 동안 이들을 엄호할 기존 전투기 부대도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이착륙 때 취약한 건 다른 항공기도 마찬가지이고 비행장 주위는 당연히 대공 방어가 튼튼하게 되어 있는게 당연하다. 그러나 당시 연합군은 알베르트 슈페어가 자서전에서 '날씨가 갠 뒤 낮에 도로를 다니는 건 자살 행위'라고 표현할 정도로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했고 독일 공군은 자기 부대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신세였다. 게다가 갈란트 중장은 최초의 제트 전투기 부대였던 JG-7을 시찰하던 중, 자신보다도 낫다고 인정하던 지휘관 발터 노보트니 중령이 바로 그것 때문에 연합군에게 격추되어 전사하는 것을 보고 제트 전투기 부대의 호위 전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이에 갈란트 중장은 하인츠 자하센베르크를 지휘관으로 하는 Fw190으로 이루어진 호위부대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들은 기지의 대공포와 공조해서 기지 상공의 적기를 요격하는 임무 특성 때문에 기체 하부 전체를 적색과 백색의 줄무늬로 칠했다. 이 화려한 색상 때문에 파파가이 중대(Papagei staffel), 즉 앵무새 부대라고 알려졌으며 이들이 운용한 Fw190은 D형으로 포케볼프 계열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것이었다.
1945년 3월에 결성되어 전투를 치르기 시작한 JV-44는 4월 26일, 갈란트가 P-47 썬더볼트기에 피격당해 부상을 입으면서 그 전까지 Me-262 전환훈련부대로 훈련과 전투를 병행하던 EJG-2 3중대장이었다가 갓 JV-44에 합류한 하인츠 베르의 지휘를 받게 된다. 이후 이들은 5월 초까지 계속 분투하였고, 하인츠 베어(Heinz Bär)는 4월 29일, P-47기를 한대 격추하는 것을 시작으로 JV-44에서 4기를 격추, EJG-2에서의 격추기록을 합쳐 단 두 달 만에 제트기로 16기 격추를 달성함으로서 독일 공군 2위의 제트 에이스가 되었다. 하지만 결국 5월 3일 남아있던 24기의 Me262를 모두 파괴하고 연합군에 항복하게 된다.
그토록 멋있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부대였으니 만화나 소설이었다면 이후로 멋있는 스토리가 펼쳐졌을 테지만 이미 전황은 연합군에게 완전히 넘어가 있었고, Me262 카탈로그상의 성능이야 좋다고 하지만 제트엔진 기술이 아직 걸음마단계였고 그로 인한 단점도 많았기에 이들의 전과는 약 56기 정도로 사실 그리 크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 독일 공군의 제반 여건과 제공권이 모조리 연합군 측에 넘어갔었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작전기간이 단 두달에 불과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들의 전과는 이들이었기에 가능한 수준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제국 또한 일본 해군에서 에이스 파일럿들과 우수한 정비병들로 구성된 343 해군항공대라는 부대를 조직하였다.
3. 주요인물
'''"철십자 훈장 정도는 우리 부대의 배지에 불과했다."'''
- 아돌프 갈란트
주요인물의 총 격추수 뒤에 괄호 속 숫자는 Me-262로 격추한 기체 수다.'''"괴링의 가장 큰 실수는 Me262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사상최대의 실수이기도 했다. 그들은 아직 시험기였던 1943년에 이것을 보고는, 폭격기로 만들 결정을 했다."'''
'''거의 4개의 폭격 비행단이 262로 전환되어, 유일하게 적재 가능한 500 Kg 폭탄으로 영국을 공습했다. 262의 전투기부대는 유일한 비행단인 제 7 비행단과 갈란트 장군이 전투기 사령관에서 해임된 후에 지휘했던 262 비행대대뿐이었다.'''
'''논쟁이 있을 때마다 나는 말한다... 262로도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262가 1943년 말에만 등장했다면, 독일 상공의 공중전은 그모습이 달랐을 것이다. 262는 미국의 폭격기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을 것이고, 당시의 어느 전투기도 262에 대항할 속도를 내지 못했으므로, 미국은 대낮에 어디든지 마음대로 폭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 발터 크루핀스키
- 창설자/지휘관: 아돌프 갈란트 중장, 총 104기 격추(8기)
- 지휘관: 하인츠 베어(Heinz Bär) 중령, 총 221기 격추(16기)[4]
-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 소령, 총 301기 격추, 에리히 하르트만에 이은 격추수 루프트바페 제2위(=즉 세계 2위)
- 발터 크루핀스키(Walter Krupinski) 대위, 총 197기 격추(2기)
- 요하네스 슈타인호프(Johannes Steinhoff) 대령, 총 176기 격추(6기)
- 귄터 뤼초(Günther Lützow) 대령, 총 110기 격추(2기)
- 카를 비머잘 작센베르크(Heinz Wimmersaal Sachsenberg) 소위, 총 104기 격추
- 볼프강 슈페테(Wolfgang Späte) 소령, 총 99기 격추(5기)
- 한스 그륀베르크(Hans Grünberg) 중위, 총 82기 격추(5기)
[1] 1945년 초에는 아르덴 대공세가 종료될 시점, 즉 동부전선에서 차출된 25만의 귀중한 독일군 병력이 아르덴에서 모조리 소모되어나가고 연합군이 오토 모리츠 발터 모델 (Otto Moritz Walter Model) 원수의 B집단군을 루르지역으로 포위를 하고있었으며 소련군 또한 비스와-오데르 대공세로 그때까지 살아남은 동부전선의 독일군 병력을 폴란드에서 완전히 쫒아내고 독일 본토로 밀려들어가던 시기이다.[2] 데키마티오(decimatio)이다. 고대 로마군의 형벌 중 최악의 형벌로 부대원의 10명 중 1명 꼴로 제비를 뽑은 다음, 나머지 9명이 그를 '''때려 죽인다.''' 군법이 엄격한 로마군에서도 이 형벌은 너무나 끔찍한 형벌이기 때문에 이 형벌은 집단 반란과 같은 매우 심각한 범죄에 대해 내렸다. 게다가 이 형벌을 내리겠다고 선언'''만''' 하고 주동자들만 따로 처벌하고 끝낸 경우도 많았다.[3] 격추수는 불과 28기에 불과하지만 1943년 12월 미 제 8 항공군 소속 제379 폭격비행대 527비행대대 소속 찰리 브라운 소위가 조종했던 Ye Old Pub라는 애칭을 가진 B-17F 폭격기를 격추하려다 영국 방향으로 유도해 준 일화로 유명하다. 당시 폭격기의 상태가 심히 좋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파손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그는 당일 재급유 받기 전에 이미 B-17 2기를 잡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가 이 폭격기를 잡지 않은 이유는 이 폭격기를 사실상 격추되어 살려고 몸부림 치는 전투기 조종사들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JV27소속으로 아프리카에 있을 당시 자신의 편대장이 자신에게 만약 격추된 비행기에서 비상탈출한 조종사를 죽이는 행위를 하는것은 안된다고 배웠기 때문에 죽이려들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그는 네덜란드쪽에 비상 착륙 유도 수신호를 보냈는데 워낙 저쪽이 쫄아서 수신호를 못알아듣자 그냥 도버 해협까지 인도해주었다고 한다. 슈티글러 본인과 브라운 소위모두 살아남았고 전후 해당 폭격기 생존자들과 슈티글러는 재회하여 평생 친구로 지냈고 슈티글러와 브라운 모두 2008년 별세 했다고 한다. 이 유명한 에피소드는 수많은 에이비에이션 아트로도 남아 있다.[4] 독일 공군 제트 에이스 중 2위이다. 1위는 야간전투기 대대였던 NJG-11 10중대의 쿠르트 벨터 중위로, 44년 말부터 45년 초까지 주야를 불문하고 출격을 반복하면서 4발폭격기 4기와 모스키토 전폭기를 합쳐 최소 20기 이상 격추했음이 공인되었다. 다만 격추기록 다수가 야간 격추라 2위인 하인츠 베어와는 조건 자체가 다르므로 주간 에이스 1위로서 하인츠 베어를 구분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5] 그리고 이 결정 덕분에 하르트만은 전후 10년 가까이 소련에 억류되어 개고생을 하게 된다. JV-44로 갔던 동료들(귄터 랄,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 요하네스 슈타인호프)은 모두 전후 서독 공군에서 별을 달았는데 하르트만은 10년간의 공백에 F-104 항명 건이 겹쳐 대령으로 예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