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하이든
1. 소개
미국 前 남자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다. 스피드 스케이팅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며 은퇴 후 사이클 국가대표, 미국 스피드 스케이팅 대표팀 팀 닥터를 하기도 한 진정한 엄친아다.
2. 선수 경력
2.1. 주니어 시절
하이든은 1958년 6월 14일 미국 위스콘신주 매디슨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스포츠에 열성인 부모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스케이트와 아이스하키, 축구, 사이클 등을 고루 섭렵했다. 그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것이 스케이트였고 14세가 되던 해부터 본격적인 스케이트 선수로 나선다.
하이든은 18살이 되던 1976년 주니어 세계선수권에 출전, 1500m에서 주니어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1위를 차지했고 종합 순위에서도 2위에 오른다.[1] 하이든은 네덜란드, 노르웨이, 소련으로 대표되는 유럽세에 눌리고 있던 미국 빙상계에 희망으로 떠올랐다. 1977년에는 1500m, 3000m, 5000m 주니어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압도적인 성적으로 종합 우승을 했고 1978년에도 5000m 주니어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전종목을 석권, 2년 연속 종합 우승을 달성한다. 그러나 주니어 시절의 성적은 76/77시즌부터 본격적으로 데뷔한 '''성인무대 성적 앞에서 장난이 되어버린다.'''
2.2. 1977년~1979년
첫 주니어 세계선수권을 치른 후 하이든은 곧바로 1976 인스브루크 동계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선발되었는데 첫 주니어 시즌을 치룬 체력적 부담과 성인 데뷔무대가 동계올림픽이라는 심리적 부담 때문인지 1500m 7위, 5000m 19위에 머물렀다. 이듬해인 1977년, 하이든은 올어라운드 세계선수권, 스프린트 세계선수권을 모두 제패하며[2] 세계 빙상계를 경악으로 몰아넣는다. 그 때만해도 스케이트 선수들이 단거리, 장거리 모두 훈련했었고 또한 거리에 상관없이 최대한 많은 경기에 출전했었지만 그래도 단거리 주력이냐 장거리 주력이냐는 주종목 개념 정도는 있었다. 1970년, 스프린트 세계선수권이 신설된 후 '''한 해에 올어라운드, 스프린트 두 대회를 모두 우승한 건 지금까지 오직 하이든뿐이다.'''[3] 그리고 이 짓을 '''77년부터 79년까지 3년 연속'''으로 해버린다. 이 기간동안 1000m에서 2번, 3000m에서 2번 세계 신기록을 작성하였고 매년 최고의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에게 수여하는 오스카 마타이센 상도 하이든의 차지였다.
갑툭튀한 괴물 하나 때문에 가장 피를 본 선수가 노르웨이의 '''얀 에길 스톨홀트'''였다. 스톨홀트는 '''77년, 79년 올라운드 유럽선수권에서 종합 우승'''[4] 한 세계적인 선수였으나 올어라운드 세계선수권에서는 하이든에게 밀리면서 '''77년~79년까지 모두 종합 2위'''에 머문다. [5] 미국에서는 스피드 스케이팅이 비인기종목이라 전국적인 인지도를 갖지 못 했지만 유럽에서 하이든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고 '''무적의 하이든'''이라는 별명까지 갖게 된다.
하이든이 이런 말도 안되는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재능에 무지막지한 노력까지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비시즌인 여름내내 20km 달리기, 160km 사이클, 모래와 납이 든 90kg짜리 튜브를 허리에 감은 채 200회 이상의 무릎 굽혀 펴기로 하체를 단련했는데 이를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거기에 의사였던 하이든의 아버지가 자신이 창안한 호흡법과 근육단련법으로 아들을 지도했었다.
2.3. '''운명의 1980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
1980년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을 앞둔 미국 스포츠계는 하이든에게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었고 대회 조직위도 하이든을 개회식 선서 대표 선수로 뽑으면서 하이든 띄우기에 나섰다.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하이든은 1000m, 1500m에서 세계기록을 작성하고 스프린트 대회 4연패에도 성공하면서 컨디션이 절정에 올라있었다.
대회 첫 경기였던 500m는 하이든이 가장 취약한 종목이었다. 더욱이 같이 뛰는 선수는 당시 세계기록 보유자였던 소련의 예브게니 쿨리코프. 그러나 쿨리코프는 레이스 도중 살짝 삐끗하며 2위에 머물렀고 하이든은 올림픽 기록을 경신하며 쿨리코프와 0.34초 차이로 첫 금메달을 획득하였다.[6] 이튿날 5000m에서도 올림픽 기록을 작성하며 2위와 1.5초 차이로 두 번째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후 1000m에서는 2위와 1.5초차, 1500m에서는 빙판 위에 파인 홈에 자세가 흔들렸음에도 2위와 1.37초 차이의 압도적인 격차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7] 두 종목에서도 모두 올림픽 기록을 세우며 기록행진도 이어나갔다.
1980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에서의 하이든의 사상 최초의 전종목 석권이 눈앞에 닥쳐오자 전세계는 흥분에 들끓었다. 워싱턴 포스트는 "하이든 같은 근육을 갖고 있는 선수들은 있어도 하이든 같은 정신력을 갖고 있는 선수는 없다."고 극찬했고, 스피드 스케이팅 마지막 경기였던 10000m 경기에는 수만 명의 관중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정작 하이든은 그 날 컨디션이 썩 좋지 못 했다. 전날 밤 미국 아이스하키 대표팀이 소련을 꺾는 모습을을 생중계로 보고는 흥분한 나머지 잠을 제대로 못 잔 것이다.[8] 늦게 일어나서 빵 몇 조각으로 허겁지겁 아침을 때우고 경기에 나서야 했는데 이 경기에서 종전 기록을 무려 6초나 당긴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따버린다! 이로써 '''사상 초유의 전종목 석권'''이 실현되었다.[9]
그 결과 '''동계올림픽 최초의 5관왕'''이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유일하다. 또한 '''동계와 하계를 통틀어 개인 종목에서 5관왕을 한 최초의 선수'''다.[10] 스피드스케이팅 500m와 10000m를 동시에 우승한 것은 육상으로 치면 100m와 마라톤을 몽땅 우승한 것과 같은 위업이다. 스포츠 의학계에서는 더이상 이런 사례가 나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여기고 있으며, 의학을 전공한 하이든 본인도 "공부하면 할수록 내가 전종목을 석권한 게 더더욱 믿기지 않는다. 내 감독님만이 그 이유를 알까?"라고 인터뷰했다.
이 올림픽에서 미국은 금메달 6개로 소련(금메달 10개), 동독(금메달 9개)에 이어 종합 3위를 기록했는데 아이스하키 1개[11] 를 제외한 나머지 5개를 하이든 혼자서 따냈다. 종합 4위였던 오스트리아가 금메달 3개였으니 하이든 단독으로도 종합순위 3위였던 것이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 8개를 목에 건 마이클 펠프스가 단독으로 종합순위 10위였으니까 하이든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알 수 있다. 올림픽 후 하이든은 아이스하키 대표팀과 함께 백악관에 초청받아 지미 카터 대통령을 접견했다. 또한 오스카 마타이센 상을 4년 연속 수상한 것은 물론[12] 한 해 최고의 미국 아마추어 선수에게 수여하는 제임스 E. 설리번 상(James E. Sullivan Award)도 수상했다. 하이든은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지만 "근데 금메달 5개로 뭘 할수 있나요?" 라고 인터뷰 했을 만큼 소탈했고 자신의 명성과 인기를 이용해서 부를 쌓지도 않았다. 실제로 인터뷰를 제외한 수많은 상업광고나 방송출연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올림픽 직후 열린 올어라운드 선수권에서 종합 2위를 기록한 뒤 그는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은퇴를 선언한 뒤 그리고 새로운 도전을 준비했다.
2.4. 사이클 선수
사실 하이든은 스피드 스케이팅을 하면서도 사이클을 병행하고 있었다.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은퇴한 하이든은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 사이클 대표팀으로 선발되기 위해 맹훈련을 시작했다. 하지만 짧은 준비기간 때문에 결국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고 출전권도 얻지 못했다. 이후 미국과 서방국가가 올림픽을 보이콧하자 하이든은 "내가 만약 올림픽 출전자격을 땄다면 지미 카터 대통령의 방침을 거슬렀을 것이다. 스포츠와 정치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간지폭풍 발언을 남겼다.
하이든은 미국 최초의 크로스오버 스포츠맨 중 하나였다. 끝내 올림픽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1985년 전미 프로사이클 챔피언십에서 우승했고, 1986년 세계적인 도로 사이클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에도 출전했으나 골인까지 닷새를 앞두고 충돌사고로 아깝게 완주하지 못했다. 스피드 스케이팅만큼의 위상은 아니었지만 사이클에서도 그는 정상급 선수였다.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이룬 업적으로 1983년 미국 올림픽 명예의 전당, 1989년 미국 스피드 스케이팅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그는 1999년 미국 사이클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3. 수상 기록
4. 은퇴 이후
1984 사라예보 동계올림픽부터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까지 4차례 올림픽에서 TV 해설가로 활동했다. 위스콘신 대학교와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하이든은 1991년 스탠퍼드 대학교 의대를 졸업하며 아버지의 뒤를 따라 정형외과의사가 되었다. 1996년 레지던트를 마친 하이든은 NBA 새크라멘토 킹스의 팀 닥터로 10년 동안 일하였고, 미국 스피드 스케이팅 대표팀 팀 닥터로 2002년, 2006년, 2010년 동계올림픽에 참여했다. 특히 2009년 뼈가 부러지고 60여 바늘을 꿰매야 하는 큰 부상을 당한 J.R. 셀스키의 재활팀에 참여해 2010년 셀스키가 1500m와 5000m 계주에서 2개의 동메달을 따는 것을 도왔다. 지금은 성공적인 개업의로 돈을 엄청 잘 번다고 한다.
5. 기타
-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하이든은 대회 조직위로부터 성화 주자로 나서달라고 요청받았다. 처음 하이든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으나 나중에 그 성화를 최종 점화자인 1980년 아이스하키 대표팀 선수들에게 넘겨줘야 하는 사실을 알고는 참가를 거부했다. 하이든은 "조직위는 내가 스케이터로서 일군 업적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난 친구들과 TV로 개막식을 보겠다."고 조직위를 비난했다. 당시 미국 언론들은 하이든이 자기만 안다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동계올림픽 역사상 최고의 선수에게 푸대접을 했다며 하이든을 옹호하는 의견도 있었다. 또한 개인 종목 5관왕과 단체 종목 우승을 두고 뭐가 더 가치가 높은지에 대한 논쟁도 일어났다.
- 한 살 터울 여동생 베스 하이든도 세계 정상급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였다.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우승 2회(1978년,1979년)와 준우승 2회(1976년,1977년), 올어라운드 세계선수권 우승 1회(1979년)[13] 와 준우승 1회(1980년), 스프린트 세계선수권 준우승 2회(1978년,1979년)을 했다. 1980년 동계 올림픽에서는 발목 부상을 안은 채 출전해서 3000m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대회 직전 1000m, 1500m, 3000m에서 모두 세계신기록을 세우는 등 컨디션이 대단히 좋았기에 부상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1980년 스피드 스케이팅을 은퇴한 후 같은 해 열린 세계 로드 사이클 선수권 대회에 출전해서 우승해 버렸다. 1989년 미국 스피드 스케이팅 명예의 전당에 오빠와 같이 헌액되었다.
[1] 이 때 종합 1위가 한국의 '''이영하'''였다.[2] 장거리인 5000m, 10000m가 포함되어 있는 올어라운드 세계선수권은 장거리 주력 선수들이, 단거리인 500m, 1000m만 경쟁하는 스프린트 세계선수권은 단거리 주력 선수들이 주로 입상한다.[3] 년도에 상관없이 두 대회를 모두 우승해 본 선수는 두 명이 더 있다. 2006년, 2010년 동계올림픽 1000m 금메달리스트인 미국의 샤니 데이비스는 2005, 2006년 올어라운드와 2009년 스프린트에서 종합우승을 했고, 2018년 동계올림픽 팀추월 금메달리스트인 다카기 미호가 2018 올어라운드, 2020년 스프린트 대회에서 종합우승했다.[4] 이 때만 해도 아시아나 북미가 두각을 나타내기 전이라 스피드 스케이팅 강국은 몽땅 유럽이었고 따라서 유럽 1위가 곧 세계 1위였었다.[5] 스톨홀트는 하이든이 은퇴한 후까지 선수생활을 했지만 끝끝내 세계선수권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6] 이 때는 단 한 번의 레이스로 순위를 결정했다. 이후 1,2차 합산으로 방식이 바뀌었다가 2018 평창 동계올림픽부터 다시 단판제로 돌아간다.[7]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1위와 2위의 격차는 1000m 0.04초, 1500m 0.003초였다. 1000m와 1500m에서 1위와 1초 이상의 차이면 보통은 10위권 정도 성적이다.[8] 당시 소련 아이스하키 대표팀은 세계최강으로 NHL 올스타와의 경기에서도 2승 1패를 했다. 더욱이 당시에는 NHL 선수들이 올림픽에 나갈 수 없어서 미국 대표팀은 대학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미국 전문가들조차도 소련이 이길거라고 예상했다.[9]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에서는 이미 전종목 석권 사례가 있었다. 소련의 리디아 스코블리코바가 1964 인스브루크 동계올림픽에서 500m, 1000m, 1500m, 3000m에서 4개의 금메달을 땄다.[10] 이후 1992년 비탈리 셰르보(기계체조, 독립국가연합(국적은 벨라루스)), 2008년 마이클 펠프스(수영, 미국)가 개인종목 5관왕에 성공했다.[11] 레이크플래시드의 기적 맞다.[12] 이것도 하이든이 유일하다. 네덜란드의 아르트 스헹크, 독일의 군다 니만슈티르네만이 3번으로 그 뒤를 따르고 있다.[13] 이 우승이 현재까지 미국인의 여자 올어라운드 세계 선수권 마지막 우승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