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 차우셰스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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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부총리'''
'''본명'''
엘레나 차우셰스쿠
(Elena Ceaușescu)[1]
'''출생'''
1916년 1월 7일, 루마니아 왕국 듬보비차(Dâmboviţa) 주 페트레슈티(Petrești)
'''사망'''
1989년 12월 25일(향년 73세),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듬보비차 주 트르고비슈테(Târgoviște)
'''학력'''
초등학교 졸업
'''시민권'''
루마니아인
'''배우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정당'''
루마니아 공산당
'''재임기간'''
부총리: 1980년 3월 29일 ~ 1989년 12월 22일
'''종교'''
무종교(무신론)
1. 개요
2. 생애
2.1. 집권 이전까지
2.2. 집권 이후
2.3. 괴팍한 성격
2.4. 기타 엽기적인 행각들
2.5. 몰락과 처형
3. 평가
4. 여담


1. 개요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정치인. 1980년부터 1989년까지 루마니아 부총리를 역임했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부인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집권 이전까지


1916년에 루마니아 왕국 듬보비차(Dâmboviţa) 주 페트레슈티(Petrești)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으며, 이 때의 이름은 레누차 페트레스쿠(Lenuța Petrescu).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쿠레슈티로 이사가서는 직물 공장의 노동자가 되었다. 1939년 루마니아 공산당에 가입하였으나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공산당에서 남편이 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를 만났다. 니콜라에가 그녀를 보고 홀딱 반해버렸다고. 그러나 니콜라에가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결혼은 1947년에 들어서야 했다.
엘레나는 니콜라에를 공산당의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그의 단점들을 고쳐주었다. 특히 말을 심하게 더듬는 니콜라에를 위해 말더듬는 것을 교정하는 훈련을 시켰고 그 결과 완벽하지는 않지만 많은 부분이 고쳐졌다. 이렇게 엘레나는 니콜라에의 참모이자 조언자로써 부족함이 없었다. 이처럼 엘레나는 부인으로써 내조를 잘했고 니콜라에는 그녀에게 정신적으로 의존하게 되어버렸다. 이는 차우셰스쿠의 집권 이후 엘레나가 고속 승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2.2. 집권 이후


니콜라에가 1965년에 집권하고 대통령이 된 것을 계기로 엘레나도 공산당의 요직을 두루 거치기 시작했다. 엘레나는 남편을 따라 중국에 가서 마오쩌둥아내 장칭을 만났고, 장칭이 중국 정치에서 발휘하는 영향력을 보고 자신도 장칭처럼 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니콜라에는 엘레나밖에 몰랐으며 다른 여자를 굳이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고 그의 측근들이 증언한 것으로 보아, 실제로 그는 여자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1974년 젊은 시절의 동료였던 키부 스토이카가 실연을 당하고 자살하자 고작 그런 일로 목숨을 끊을 수 있냐며 경멸하기까지 했다.
니콜라에는 엘레나에게 의지하면서도 그를 두려워했다. 엘레나는 대중 앞에서는 니콜라에에게 충실한 아내였지만, 사석에서는 니콜라에를 남편으로 존중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대했다. 하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식사시간이나 약속시간에 늦기라도 하면 차우셰스쿠는 안절부절 못하고 시계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긴장하면 항상 그랬듯이 말 더듬는 습관이 튀어나왔고 땀까지 흘렸다."고 한다.
아무튼 엘레나는 점차 승진하여 당내 요직을 거쳤고, 최종적으로 1980년에 루마니아 부총리직에 올랐다.(서열 3위) 그리고 니콜라에처럼 엘레나는 점차 루마니아에서 숭배의 대상이 되어, '인민의 자애로운 어머니'라는 칭호를 얻었다. 엘레나의 초상화는 전국에 내걸렸고 니콜라에와 동급으로 관리를 받았다.

2.3. 괴팍한 성격


엘레나가 오늘날까지 큰 비판을 받는 이유는 니콜라에의 괴팍한 독재와 실정에 협력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그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니콜라에보다도 괴팍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엘레나를 모시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루마니아 인민 전부를 괴롭게 했다. 개인적인 내조에만 멈추었다면 그럭저럭 괜찮았을 테지만 엘레나의 학력 콤플렉스와 욕심이 화를 불렀다.
니콜라에가 최고 지도자에 오르자 그녀는 자신도 걸맞는 영부인이 되기 위해 1955~1959년 동안 화학 강좌에 참여했는데 당연히 공부는 제대로 안 했다. 다른 사람이 대리출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녀는 상당한 배려를 받았다. 어떤 젊은 교수 한 명은 그녀가 시험 중에 커닝을 했다고 쫓아냈다가 그 이후 오랜 시간을 공포에 떨어야 했다고 한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자기가 무식하니까 공부하겠다는 의지를 좋게 보고, 문제점도 영부인의 학력 세탁으로 적당히 눈 감아줄 수 있는 정도였다. 문제는 엘레나가 학력 세탁 정도로 만족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현장에 참여하면서 그 무식함이 현장을 고통스럽게 했단 거다.
화학 강좌 수강 후 엘레나는 루마니아 국립 화학연구소에 전임 연구원이 되었다. 그녀와 대화하기는 매우 힘들었는데 엘레나는 명령만 했지 토론은 기피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연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행정적인 것에만 힘을 쏟았다. 훗날 그녀가 죽은 지 몇 달이 지난 상태에서 인터뷰를 했지만 과학자들은 도청장치가 없다는 것을 여러 번에 걸쳐서 확인한 뒤에 증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습관 때문인지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눈치를 봤다고 한다. 다른 과학자들도 엘레나가 천박하고 악마 같았다는 점에 동의했으며 직원들의 복지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갖은 방법으로 경비를 삭감했으며 별의별 방법으로 시설에 들어가는 돈을 줄였다. 그녀는 자신의 무지가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 토론을 극단적으로 꺼렸다고 한다.
봉제공 출신이라 무식에 한이 맺혔는지 엘레나는 국립 화학연구소의 소장이 되자마자 논문(!)도 썼고 명함도 신나게 뿌렸다. 공식적인 명칭은 '위대한 과학자이자 화학자'였다. 또한 엘레나는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명예 박사를 요구했다.[2] 권좌를 물려줄 아들 니쿠 차우셰스쿠를 제외하면 자녀들의 직업이 핵물리학자, 수학자와 같은 이공계 관련 직업인 것도 이런 열등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엘레나에 대한 증오가 하늘을 찔렀던 루마니아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은 '''엘레나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악의 원천'''이라는 점이었다.
루마니아 공산당 당원이였던 에우젠 프로카는 엘레나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래도 차우셰스쿠에게는 인간의 냄새가 좀 남아 있었지만 엘레나는 철저한 악마였다."

"필리핀의 이멜다 마르코스, 아르헨티나의 에바 페론, 중국의 장칭을 섞어놓은 것 같았다."


차우셰스쿠의 전용 헬리콥터 조종사였던 바실레 말루찬 공군 대령은 "엘레나는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모두 우리들의 잘못이었으며, 헬리콥터 안 카펫에 보푸라기가 일어나거나 날씨가 나빠 카펫이 들춰지기라도 하면 모두 우리 탓이었으며 그녀는 아무도 믿지 않고 모두를 증오했다"고 한다. 훗날 말루찬 대령은 차우셰스쿠 부부가 민중들에게 체포당하는 것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차우셰스쿠 부부의 식탁에 다른 사람들은 초청되는 것을 꺼렸는데, 물론 차우셰스쿠 부부가 다른 사람들을 잘 초청하지도 않아서 그런 면도 있지만 결정적으로는 이유는 엘레나의 잔소리 때문이었다. 엘레나는 언제나 무슨 요리가 나오든 만족하지 못했으며 자신이 만든 요리가 맛있다고 언제나 이야기하며 요리사들에게 왜 자신처럼 잘 못 만드느냐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엘레나의 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사진사는 엘레나의 사진을 찍을 때마다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가 한 번도 만족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진을 보면 "왜 내 코가 높게 나왔어?"라거나 옷이 예쁘지 않으면 "사진도 못 찍는 머저리 같으니, 차라리 내가 찍는 게 더 잘 나오겠다."라며 쉬지 않고 잔소리를 했다.
거기에 의심도 많아서 대통령궁 직원들이 물건이나 음식을 훔쳐갈까 봐 계속 주방과 숙소를 돌아보며 직원들을 닥달했고 항아리에 든 요구르트를 훔쳐먹거나 독을 탈까 봐 항아리에 자물쇠를 채우기도 했다.

2.4. 기타 엽기적인 행각들


  • 지하에 대형 냉장고를 설치해 국민들이 아사할 지경에 이를 때에도 언제나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먹었다고 한다.
  • 루마니아 공산당에서 엘레나에게 부여한 정식 명칭은 '인민의 자애로운 어머니'.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엘레나는 "인민들은 마치 벌레와 같다. 아무리 먹여도 만족할 줄을 모른다."는 발언을 했다고...
  • 요르단 국왕 후세인 1세의 초청으로 요르단에서 휴가를 보내던 도중, 엘레나는 요르단 왕실 요트가 마음에 든다며 당장 달라고 요구했다. 그 요트는 다른 것도 아니고 후세인 1세가 자신의 딸에게 준 선물.... 후세인이 다른 요트를 즉시 선물하겠다고 약속해서 일을 매듭지을 수 있었다. 참고로 후세인 국왕은 그래도 국가간의 우호 증진을 위해 요트 이름을 '우정'이라고 짓자고 했는데, 차우세스쿠 부부는 요트를 받고 나선 이름을 '지도자'로 지었다(...). 공산 정권이 무너진 후 이 요트는 민간 여행사에 관광용으로 팔렸다.
  • 아들 니쿠가 한 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자 그녀가 탐탁찮았던 엘레나는 니쿠가 잠시 해외로 나간 사이 병사들을 시켜서 그 미녀를 윤간한 뒤 그 사진을 니쿠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 미녀가 나디아 코마네치라는 설은 사실이 아니다.

2.5. 몰락과 처형


1989년 동유럽 혁명의 영향을 받아 티미쇼아라에서 민주화 요구 시위가 일어나자 루마니아 정부는 이를 무력 탄압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전국민이 차우셰스쿠 독재에 질려 들고일어났고, 차우셰스쿠 부부의 괴팍한 행각과 푸대접에 질린 루마니아군이 차우셰스쿠를 버림으로서 차우셰스쿠 부부는 권좌에서 쫓겨나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엘레나는 자신의 행각으로 인해 남편 니콜라에와 동급의 범죄자 취급을 받아 혁명재판에 넘겨져 사형 판결을 받고 잔혹하게 총살당했다.
자세한 몰락 과정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참조.
한껏 증오를 받아서 처형된 뒤 장례도 대충 치러졌는데, 2010년에 제대로 된 묘가 만들어졌다.

3. 평가


'''가히 유럽판 장칭이라 할 수 있다.''' 남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보다도 더 잔학하여 국민들의 증오를 샀다. 얼마나 악명이 자자했냐 하면, 훗날 차우셰스쿠 정권이 붕괴되고 난 뒤에 한 인터뷰 중에서 차우셰스쿠가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라고 말한 차우셰스쿠의 최측근들마저도 그녀를 경멸하고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며, '''자식들마저도''' 중립적인 니쿠를 빼고는 전부 엘레나를 혐오했다.
2013년 여론조사에 의하면 차우셰스쿠 이전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한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에 대해서는 42.3%의 긍정과 39.1%의 부정적 답변으로 나뉘었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에 대한 질문에는 47.%가 '루마니아 역사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 '부정적이었다는 46.9%였다. 하지만 차우셰스쿠의 부인인 엘레나 차우셰스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답변이 '''80.2%'''로 월등히 높았다. 출처

4. 여담


엘레나의 올케였던 아델라는 훗날 죽기 직전에 엘레나가 독일군을 상대로 매춘부 노릇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변사람들은 엘레나는 그런 여자가 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개성의 소유자가 아니었으며 독일군들이 좋아할 여성이 아니었다는 주장. 아무튼 엘레나가 매춘부 노릇을 했든 안 했든 그녀가 최소한 니콜라에보다 이성관계가 복잡하다는 사실은 다들 인정했다.
[1] 출생 당시에는 레누차 페트레스쿠(Lenuța Petrescu). 나중에 엘레나로 개명하고, 니콜라에와 결혼하면서 성이 바뀐다. 원칙적으로는 '엘레나 체아우셰스쿠'로 적는 것이 맞지만 '차우셰스쿠'가 많이 쓰이다 보니 이 쪽이 표준으로 정해졌다. 물론 원 발음도 빨리 하면 나름 비슷하게 들리지만. 사실 루마니아어에서 ia와 ea는 둘 다 '야'처럼 발음하는데 어원에 따라 구분한다.[2] 영국 방문 당시 영국정부는 이러한 무리한 요구에 대해 고민하였는데, 권위있는 대학의 학위를 주는 건 그 학교의 위상을 무시하는 행동이고,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혹시 모를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결국 런던의 평범한 대학교의 학위를 수여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