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디아 코마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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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Nadia Elena Comăneci (루마니아어)
나디아 엘레나 코머네치[1]
'''국적'''
루마니아[image], 미국[image][2]
'''출생'''
1961년 11월 12일(63세)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오네슈티
'''신체'''
163cm, 45kg
'''종목'''
기계체조
'''주종목'''
이단 평행봉
'''은퇴'''
1981년
'''SNS'''

1. 개요
3. 불운한 삶
4.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5. 수상 기록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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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마니아계 미국인이며, 前 기계체조 선수이다.

2. 1976 몬트리올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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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지 표지
그녀는 완벽하다(She's Perfect)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이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개최된 제 21회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루마니아 대표로 출전했다. 7월 18일 몬트리올 체조경기장에서 기계체조 종목에서 2단 평행봉 경기를 펼쳤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딴[3] '코마네치'를 선보였고 착지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경기를 지켜본 관중들은 당연히 고득점을 받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그녀의 경기 점수가 전광판에 오르자 장내는 순간 술렁거렸는데 점수판에 올라온 점수는 고작 '''1.00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완벽한 경기를 펼쳤지만 심시위원들이 고작 1점이라는 최하점을 매긴 충격에 지켜보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코마네치 본인도 당황했고 급기야 코마네치의 코치가 말도 안 되는 점수에 항의하기 위해 일어서려는 찰나에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일어나더니 열 손가락을 펴 보이며 '''"1점이 아니라 10점! 10점 만점에 10점입니다!"'''라고 외쳤다.
이 당시의 전광판이 최대 9.99, 즉 한 자릿수까지 밖에 표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1.00으로 일부러 표기한 것이었다. 당시 체조 종목은 누구도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없다고 여겨져 9.99점을 만점으로 생각하고 전광판을 제작했기 때문에 두 자릿수 표기가 불가능했었던 것이 그 이유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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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코마네치는 이 경기를 통해 체조 종목 사상 최초로 10점 만점을 받게 되었다.[5] 그녀는 이 경기 이후로도 같은 올림픽에서 '''6번 더''' 10점 만점의 경기를 선보였다.[6]

많은 사람들이 아디다스의 Impossible is nothing으로 기억하는 이 광고는 실제 올림픽에서의 연기가 아니라,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코마네치가 연기한 평행봉 체조에, 광고 방영때였던 2005년 당시 미국의 최고 유망주였던 나스티아 리우킨(Anastasia Valeryevna Nasta Liukin)[7]의 경기를 합성한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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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는 1976년 대회의 10점 만점 이미지가 강하지만,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도 금 2, 은 2개를 차지하는 등 올림픽 2연속 금메달리스트로 활약했다.[8] 사실 그녀는 1976년에 만점을 받은 후 큰 역경을 겪어야 했다. 워낙 젊은 나이에 먼치킨 실력에 도달했기 때문에 1976년 이후에는 금방 목표를 잃었고, 루마니아 체조협회와 그녀의 코치 벨러 카로이 사이의 불화로 잠시 훈련을 하지 못해서 살이 급격히 불기도 하는 등 슬럼프로 고생했다. 그렇게 슬럼프로 힘들어하던 그녀에게 벨러 카로이 코치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이로써 코마네치는 1980 모스크바 올림픽 때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코마네치 본인에게는 최초의 10점 만점을 해낸 1976년 대회보다는 슬럼프를 이겨내고 부활한 1980년 대회가 더 값지고 기억에 남는 대회였다고 한다.
조금 더 알고 싶다면 이쪽을 참고해도 괜찮다. 또, 생애와 관련된 영상도 있다.

3. 불운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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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만난 나디아 코마네치. 이 때만 해도 나디아 코마네치는 루마니아영웅으로 극진 대우를 받았다.
당연히 루마니아 정부에서도 처음에는 그녀를 영웅대접 했다. 그러나 유년 시절부터 코마네치와 함께한 벨러 카로이 국가대표팀 코치가 미국으로 망명한 뒤 정부는 그녀를 연금하여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였고, 국제대회 출전도 불허하였다. 심지어 생필품을 잘 공급하지 않아 가족들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결국 그녀는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를 끌어내기 위한 구국전선의 행진이 한창이던 1989년루마니아에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당시 여권비자도 없었지만, "나디아 코마네치"라는 이름 하나로 일사천리로 망명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전설"과 다른 싸구려 옷에 서투른 영어에다가, 무엇보다 늙어버린 얼굴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은 급속히 식어버렸다.[9] 미국으로 망명 온 후 처음에는 엄청난 환영을 받았지만, 늙어버린 얼굴 때문에 체조 요정에 대한 환상이 깨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곧 퇴물 취급했고, 명성과 능력에 걸맞지 않는 싸구려 행사에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해 거의 막장으로 추락했다.[10] 사실 코마네치가 미국에 오자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은 이유는 세기의 연인이었던 체조 요정에 대한 환상이 깨져서인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망명을 도운 콘스탄틴 패니트라가 유부남이었기 때문이다. 코마네치는 세간에 도는 불륜설을 극구 부인하며 패니트는 그저 매니저일 뿐이다라고 주장했지만, 패니트의 부인이 남편이 집안을 돌보지 않고 코마네치하고만 돌아다닌다며 울며불며 인터뷰를 하는 등 여론은 코마네치의 망명을 애정의 도피로 몰고 갔다.[11]
코치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여론이 나빠지자 캐나다로 이주하는 등 고생스러운 30대를 보냈다. 그러다 캐나다에서 지금의 배우자이자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평행봉 금메달리스트 "바트 코너"를 만나게 되었다. 체조에 관한 모든 것과는 연을 끊고 살겠다고 다짐하던 코마네치에게 코너가 말하길, 스포츠에는 명예와 영광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고 설득했고, 코마네치는 이 말을 듣고 예전의 경험을 살려 체조 지도자로 재기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1996년에 루마니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지금은 기부를 중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6년 첫 아이를 출산했다. 현재 남편과 함께 체조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고 스페셜 올림픽 부위원장, 국제 체조 스포츠 잡지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영어 실력도 1980년대에 비해 크게 늘었다.

4.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 1984년 그녀의 일대기를 다룬 미국과 유고슬라비아 합작인 TV 영화 '나디아(Nadia)'가 미국에서 방영하였다. 국내에서는 1988년 7월에서야 서울올림픽을 얼마 안두고 갑자기 극장 영화로 개봉하더니만 겨우 3달도 안돼 1988년 9월 24일 토요명화로 <체조의 요정 코마네치>라는 제목으로 더빙되어 방영된 뒤로 더 방영된 적이 있으나 지금 더빙판을 구하기는 매우 힘들다... 영화 자첸 DVD까지 나와 구하기 어려운 건 아니지만 그런데 영화 자체는 왜곡이 많고 나디아 본인이나 루마니아에서 엄청 분노했다. 나디아는 그야말로 나에 대하여 멋대로 소설을 쓰고 조작한 엉터리 영화라면서 이걸 보고 무척 스트레스를 받아서 운동을 포기하고 싶었다고 한다.[12] 그녀가 쓴 자서전인 '미래의 금메달리스트에게'도 있으니 읽어보는 것도 좋다.
  • 참고로, 일본 예능 전국 공통의 필살기이자 비트 타케시의 상징인 코마네치!는 이 코마네치가 맞다. 1980년대 기타노 타케시가 코마네치를 보고 방송에서 그 어린 체조선수의 여성미를 어떻게 표현할까 하다가 코마네치가 입은 레오타드형 체조복의 하이레그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손을 양쪽 사타구니에 대면서 코마네치!라고 한게 꽂혀서 계속 써먹다보니 거의 이주일 선생의 "콩나물 팍팍 무쳤냐?"급의 유행어가 되었다. 초난강이 무릎팍 도사에 출연했을때 일본식 개그를 보여주겠다며 따라한게 바로 이 것이었다. 현장에 있던 강호동 등의 한국 연예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참고로 코마네치에게 로열티로 200만엔을 줬다고 한다. 크레용 신짱 극장판인 액션가면 대 그래그래 마왕에서도 이 동작이 등쟝한다. 아기와 나의 발렌타인 에피소드에도 이 동작이 등장한다.

5. 수상 기록


올림픽
금메달
1976 몬트리올
종합
금메달
1976 몬트리올
이단평행봉
금메달
1976 몬트리올
평균대
금메달
1980 모스크바
마루
금메달
1980 모스크바
평균대
은메달
1976 몬트리올
단체전
은메달
1980 모스크바
단체전
은메달
1980 모스크바
종합
동메달
1976 몬트리올
마루
세계선수권
금메달
1978 스트라스부르
평균대
금메달
1979 포트워스
단체전
은메달
1978 스트라스부르
단체전
은메달
1978 스트라스부르
도마
유럽선수권
금메달
1975 시엔
종합
금메달
1975 시엔
도마
금메달
1975 시엔
이단평행봉
금메달
1975 시엔
평균대
금메달
1977 프라하
종합
금메달
1977 프라하
이단평행봉
금메달
1979 코펜하겐
종합
금메달
1979 코펜하겐
도마
금메달
1979 코펜하겐
마루
은메달
1975 시엔
마루
은메달
1977 프라하
도마
동메달
1979 코펜하겐
평균대
유니버시아드
금메달
1981 부쿠레슈티
단체전
금메달
1981 부쿠레슈티
종합
금메달
1981 부쿠레슈티
도마
금메달
1981 부쿠레슈티
마루
금메달
1981 부쿠레슈티
이단평행봉

6. 기타


  • 루마니아와 미국 국적 모두 가지고 있는 이중국적자. 한국에는 1990년, 2004년, 2008년, 2010년 총 4번 내한했다.
  • 아놀드 슈워제네거와는 절친으로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다. 1991년 한 호텔에서 남편과 슈워제네거와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그만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갇혔는데, 당황한 그녀가 슈워제네거에게 "당신은 터미네이터니 어떻게 좀 해봐요."라고 외치자 슈워제네거가 진짜 양손으로 직접 고장 난 엘리베이터 문을 벌려 열어버렸다. 프런트 직원들은 그렇게 벌어진 문틈으로 세 사람이 나오는 걸 그 자리에서 보며 얼어붙었다.[13]
  • 공화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 관용적으로 '코마네치'라는 표기가 사용되나, 루마니아어 발음은 '[ˈnadi.a koməˈnetʃʲ\](나디아 코머네치)'에 가깝다. 미국식 영어로는 '[ˈkoʊməniːtʃ\](코머니치)'로 발음한다.[2] 1989년에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2001년에 미국 국적을 취득하여 복수국적자가 되었다.[3] 체조 경기는 국제 대회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술을 선보이면 본인의 이름이 그 기술명이 된다. 여홍철의 '여1' '여2', 양학선의 '양1'도 마찬가지다.[4] 이게 워낙 상징적인 이미지로 남아서 코마네치가 연기를 마치고 몇 분 후 도마에서 신기술로 10점 만점을 받은 넬리 킴을 기억하는 사람은 체조 팬이 아닌 이상 거의 없다. 이 올림픽에서 넬리 킴은 팀 종합, 마루, 그리고 도마에서의 금메달과 개인종합 은메달을 땄다. 참고로 코마네치가 최초 만점으로 유명해 지기 전, 그러니까 올림픽 시작 전까지만 해도 넬리 킴과 코마네치는 라이벌로 대등하게 경쟁하는 수준이었는데 이 만점 이후로 인지도가 넘사벽으로 차이가 나게 되어서 코마네치가 은퇴할 때까지 넬리 킴이 고까워한 티가 인터뷰에서 많이 난다. 팬들끼리도 누가 더 잘한다고 서로 싸웠었는데, 이러니 저러니 해도 둘 다 체조계의 레전드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5] 이후 12년이 흐른 1988 서울 올림픽에서는 리듬체조 우승자인 마리나 로바치는 모든 경기에서 만점을 받았는데 이 말을 다르게 얘기하면 코마네치의 10점 만점 이후 기계체조에서 만점을 한 번이라도 놓치면 금메달은 물 건너가게 되었다. 하지만 2008년부터 점수 체계가 바뀌어 10점 만점 제도가 폐지되고 난도 점수와 실시 점수를 합산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점수의 상한선이 없어졌다.[6] 올림픽 경기 당시에 경기를 할 때 무표정으로 일관해서 '작은 바윗덩어리', '냉정한 작은 벼룩' 등의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에 대해 코마네치가 2010년 내한 당시 인터뷰에서 언급하길, 공산주의 시절 루마니아의 사회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여 어린 시절부터 경기장에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경기에 임했는데, 오히려 이러한 풍조가 고도의 집중력과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한 체조 훈련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7] 러시아계 미국인이다. 아버지 발레리 리우킨은 1988 서울 올림픽에서 총 4개(금2, 은2)의 올림픽 메달을 따낸 선수였고, 어머니 안나 코체네바는 전직 리듬체조 선수 출신으로 1987 세계선수권 금메달리스트였다. 리우킨은 2008 베이징 올림픽 개인종합 금메달리스트이자 이단평행봉, 평균대, 단체전 은메달리스트이다. 다만 이후로 기량이 부진했다. 베이징 올림픽 이전에는 2005, 2007 세계선수권 평행봉에서 금메달을 땄고, 2005 세계선수권 이단평행봉에서 금메달을 땄다.[8] 아쉽게도 이 대회에서 그녀는 주특기인 이단평행봉에서 연기를 펼치다가 중간에 평행봉에서 떨어져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9] 망명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20대 후반이였지만, 얼굴은 30대 후반으로 보였다. 빨리 늙어서 안타까운 미녀.[10] 이때 찍었던 속옷 광고 사진은 지금 봐도 안습[11] 이 때문에 1990년대 초에 국내 신문에 보도된 코마네치에 대한 기사는 부정적인 기사가 대부분이다.[12] 영화에서는 1976년 대회 이후의 부진 때문에 그녀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자살하려고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코마네치의 자서전에는 이를 해명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13] 1991년이면 그 불후의 명작 터미네이터 2가 한창 흥행을 하던 시기다. 당연히 현실에서 터미네이터가 문짝을 찢듯이 나오면 누구든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