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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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1. 개요
2. 생애
3. 일화


1. 개요


الحسين بن طلال (후세인 빈 탈랄)
1935년 11월 14일 ~ 1999년 2월 7일 (재위기간 : 1952년 8월 11일 ~ 1999년 2월 7일)
요르단 왕국의 전 국왕. 압둘라 1세의 손자이다. 1935년 11월 14일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요르단의 2대 군주, 전임 국왕인 탈랄 빈 압둘라(طلال بن عبد الله)의 아들로 태어났다.

2. 생애


아랍 최고의 명문가인 하심 가문 출신이다.고향 암만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뒤 알렉산드리아의 빅토리아 칼리지에서 중등과정을 공부했고, 그 다음에는 영국으로 유학을 가 해로우 스쿨을 졸업한 후 샌드허스트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1951년 7월 20일, 압둘라 1세와 함께 예루살렘알 아크사 모스크에서 금요예배를 드리던 중 팔레스타인 과격분자에게 총격을 받았다. 당시 15살이던 후세인은 살아남았지만 할아버지 압둘라 국왕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후세인이 살아남은 과정도 알고 보면 기적인데, 할아버지의 사망을 본 후세인은 바로 암살자를 추격했고, 이에 암살자가 자신을 향해 총을 발사했지만 천만다행으로 할아버지가 수여한 훈장 때문에 총탄이 빗겨나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그 후 그의 아버지 탈랄이 즉위했으나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는 바람에 얼마 안 가 1952년 퇴위해, 뒤를 이어 후세인이 왕위에 올랐다. 덧붙여 탈랄은 1972년에 사망했다.
후세인 국왕은 국왕으로 재임기간 동안 요르단의 인적자본을 발전시키는 일에 힘을 쏟았다. 이 덕분에 요르단은 중동국가 중에서 가장 발전된 교육시설과 의료시설을 갖추고 있다.
석유없는 국가의 비애[1][2]인 셈이지만, 그 대신 아랍에서 기후론 사람 살만한 곳이 꽤 되어서 아랍 왕족들이나 부유층들이 피서지를 많이 만들고, 더불어 고대 유적지들을 세계적으로 홍보하면서 요르단을 관광대국으로 발전시켰다. 더불어 이스라엘과의 관계도 가능한 합리적으로 유지하면서 평화협상을 하는 등 중동의 평화를 발전시키는데도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후세인 1세의 행적은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요르단은 국가의 출발부터가 영국의 외교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상당히 불안한 나라다. 인구의 구성 또한 60%가 팔레스타인인이고 40% 미만이 본토인인 베두인 족이며 대략 2% 정도가 체르케스인과 체첸[3]이다.[4] 즉 민족국가가 아니라는 말이다. 거기다 하심 가문 등 국가를 지배하는 왕실 지배층들은 요르단 출신이 아닌 아라비아 반도 출신이다.[5] 그래서 후세인 1세는 즉위 이후부터 이러한 자국내 정치적 불안정을 극복하고자 '민주주의 도입'이라는 도구를 활용하였다.[6] 그리고 1980년대 후세인 1세의 통치 후반기 경제위기가 찾아와 국내의 여론이 후세인 1세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재차 '민주주의 확대'라는 도구로 그 위기를 극복했다. 한편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다수당이 후세인 1세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댈 것 같으면 가차없이 의회를 해산했다. 현재 요르단이 아랍국가 중 민주주의가 그나마 정착됐다고 평가받는데에는 이러한 정치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외교적으로도 요르단 국내에 반미정서가 들끓어 친미정책 추진시 자신의 권좌가 위태로울 것 같으면 미국과의 관계도 끊어버렸으며, 반면에 국내에 반미감정이 없고 미국과의 관계가 자신의 권좌유지에 도움이 될 것 같으면 친미를 했다. 즉 후세인 1세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데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검은 9월 사건은 내부 치안의 유지라는 면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요르단 국내에서 무장한 채 국경을 넘어 게릴라전을 벌이거나 요르단 영내에서 로켓을 발사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해 이스라엘의 침공을 불러왔고, 조직을 결성하여 요르단 경찰과 군대의 통제를 거부하는 한편 요르단인들에 대한 폭력적 행동까지 벌였다.
그가 사망한 뒤에 아들 압둘라 2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압둘라 2세가 덕업일치의 밀덕후로 유명하지만 실은 후세인 1세부터 그랬는데, 후세인 1세의 취미가 사격, 복싱, 카레이싱, 서핑이었다. 심지어 보잉 747 조종 자격까지 갖고 있어 해외 순방시 전용기를 직접 조종하기도 했다. 아마추어 무선에도 일가견이 있었는데,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중동 사람과 교신을 나누고 좋아했다가 나중에 귀한 요르단 우표가 잔뜩 붙은 후세인 1세의 QSL 카드[7]를 받고 기절초풍했다는 에피소드를 무선인들 사이에서 간혹 들을 수 있다.

3. 일화


  • 인디아나 존스 3편 촬영을 적극 후원하면서 촬영지인 페트라를 관광단지로 키우는데 크게 공헌했다.
  • 1980년대 중후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요르단을 순방했을 때 그의 아내 엘레나가 뜬금포로 후세인 1세에게 "요트 내놔" 드립을 시전했다. 그런데 하필 그 요트가 이미 딸에게 준 선물인지라 후세인은 엘레나를 잘 달래서 그 요트와 비슷하게 생긴 다른 요트를 선물로 줬다. 후세인 1세는 친히 그 요트에 우정이라고 이름을 지어줬건만 엘레나는 그걸 갖고 루마니아로 귀국하자마자 그 요트의 이름을 지도자로 바꿔버렸다.
  • 그는 일부다처제이슬람 국가에선 특이하게도 4명의 아내를 둔 게 아니라 아내를 딱 하나씩 두고 3번 이혼했다. 아랍에선 이런 왕이 희귀한 편이라고 한다.[8] 게다가 그는 일부다처제를 금지시키고 여성들의 사회활동도 허가하는 등 꽤나 개방적인 세속적 정책을 취하여 여성 정치인과, 교수, 성직자까지 나왔다. 인권 등의 측면에 있어 아랍에서는 보기 드문 개혁적인 국왕. 게다가 1952년엔 입헌군주제를 선포해 현재 요르단은 입헌군주제 국가다. 그래서인지 아랍에 가서 여러 나라 군주들을 대놓고 씹고 욕하는 배짱을 보이던 이탈리아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가 유일하게 멋진 군주라고 칭했다.

[1] 사실 요르단 사막 영토 일부를 사우디아라비아와 교환했는데 그 사막에서 석유가 나왔다. 하지만 요르단 사람들이나 왕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 대신 간절히 원하던 항구(아카바)와 바다가 통하는 땅(해안선길이는 20여Km정도)을 얻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요르단은 관광대국으로 두둑히 돈을 벌기에 석유가 꼭 아쉬운 것도 아니다.[2] 자원의 저주라는 말도 있을 만큼 천연자원 위주로 경제가 운영되는 나라들은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내부적으로는 썩어 있는 경우가 많다. 호주 같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국영기업이나 왕족들이 죄다 해쳐먹고, 사회적 인프라 미비나 초중등 교육이 엉망인 경우가 대부분. 이런 점을 고려해보면 항구를 얻은 게 오히려 백 번 나은 결정이다. 요르단은 석유가 없었기 때문에 서비스업과 관광업이 발전했다.[3] 캅카스에 있는 러시아 소수 민족인 그 체첸인 맞다. 캅카스에 살던 사람들이 요르단에 다수 거주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1859년 러시아가 겨우 겨우 이맘 샤밀을 제압하며 체첸을 합병한 뒤 러시아는 체첸인들의 메카 순례를 권장, 지원해주었다. 문제는 끊어주는 출국 티켓이 '''편도'''. 그러니까 순례 끝난 뒤에 다시 돌아오지 말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추방인 셈. 왜 이렇게 했냐면 러시아는 체첸을 병합한다고 하도 고생했던터라 체첸인들의 수를 체첸에서 줄여보려고 순례를 권장한 것. 결국 순례를 위해 고향을 떠나게 된 체첸인들은 추방당하였고 주로 요르단에 정착하게 되었다.[4] 최근에는 시리아인들과 이라크인들이 내전을 피해서 많이 살고 있다. 현재는 다소 정세가 안정되자 시리아, 이라크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생기고 있다.[5] 상술한 후세인 1세의 할아버지 압둘라 1세도 메카출신이다.[6] 당장에 동쪽과 서쪽의 옆나라인 이라크와 이집트에서는 자신의 먼 친척인 파이살 2세와 파루크 2세가 1958년과 1952년에 군부 쿠데타로 총살당하거나 국외 망명 길을 떠나고, 이집트의 건너편 나라인 리비아에선 국왕이 해외에 나와있는 사이 카다피의 쿠데타로 권좌를 빼앗기고, 이라크의 건너편 국가인 이란에선 팔라비 왕조가 이란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고 몰락하는 일들을 보면서 자신의 지지층을 확보하거나 왕권을 영구히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민주주의 제도를 허용하는 수 밖에 없었다. 반면 남쪽의 사우디아라비아오만은 강력한 국왕중심의 통치력과 모든 고급장교단들과 고위 공직자들 대부분이 국왕의 최측근이나 왕족들로만 구성되어 있는데다 민심에 신경을 쓰며 빈틈이 없을 정도로 내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라크나 이집트, 리비아, 이란처럼 쿠데타나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붕괴될 환경이 조성되지 못했다. 당장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우드 왕가가 철권통치를 유지하는 이유가 국민들에 대한 경제지원과 족벌정치 때문이다.[7] 아마추어 무선인들끼리 교신을 나눈 뒤 서로 감사를 표하기 위해 교환하는 엽서. 이게 모이면 무선인들의 경력을 나타내는 귀한 컬렉션의 의미를 갖는다.[8] 참고로 사우디아라비아만 해도 20번 넘게 결혼한 왕도 있다! 아내를 4명까지만 두기에 그 수를 넘으면 이전 여자는 이혼하고서 새로 결혼한다든지 그랬다고 한다. 하지만 서류상으로만 이혼할 뿐 대우는 이혼 전과 동일하며 같이 데리고 살며 이혼한 아내는 호적상의 아내와 대우가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