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멜다 마르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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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멜다 로무알데스 마르코스
Imelda Romuáldez Marcos
'''출생'''
1929년 7월 2일 (94세)
'''국적'''
필리핀 [image]
'''가족'''
배우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1남 3녀
'''직업'''
필리핀 하원의원, 기업가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3. 필리핀 대선 당시의 활약
2.4. 인류역사에 이름을 남긴 전설의 사치
2.4.1. 이멜다의 방에서 발견된 물품
2.4.2. 사치 행각
2.5. 이후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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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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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그녀는 8년 간 매일 구두를 갈아 신었다고 한다. 하루도 같은 구두를 신은 적이 없다.”'''

그녀의 전기 영화 ‘이멜다(Imelda)’의 도입부

필리핀의 현직 하원의원이자 기업가로, 지금도 최악의 독재자로 불리는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아내. 한때 장관직과 마닐라 시장직을 역임하면서, 필리핀 경제를 거덜내는 데에 일조했다.[1]
필리핀 국민들은 '''"마르코스는 용서할 수 있어도 이멜다는 용서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그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상당수.
2018년 11월 9일 필리핀 법원에 의해 최고 77년형 선고가 확정되었다. 이 판결에 따르면 공직을 박탈해야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멜다 측에서 항소할 것이기에 현재 공직은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2. 생애



2.1. 초기


결혼 전 이름은 이멜다 트리니다드 로무알데스(Imelda Trinidad Romualdez). 스페인 혼혈 혈통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멜다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가세가 점점 기울어졌고, 어려워진 형편에 이멜다의 아버지는 자식을 11명이나 두었기 때문에 빈번한 가정불화 속에서 힘든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이멜다는 자라면서 굉장한 미인이 되었고, 말솜씨도 매우 좋은 편이라서 인기가 굉장히 많았다. 마닐라에 유학할 당시 늘 곁에 남자들이 졸졸 따라다녔을 정도였으며, 특히 25살 때는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예뻤다고 한다. 그래서 미스 마닐라에 도전, 1등은 못했지만 뮤즈 오브 마닐라로 선발되었다. 이멜다는 그것을 바탕으로 상류 사회에 진입하였고, 사교계에서 상당한 유명인사가 되었다.

2.2.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의 만남


페르디난드와 이멜다는 파티장에서 처음 만났는데, 이멜다에게 페르디난드는 한눈에 반해 버렸다. 문제는 페르디난드가 이멜다에 비해서 외모나 키가 그다지 잘난 것도 없었고[2], 무엇보다도 페르디난드는 이멜다보다 12살이나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 이멜다는 페르디난드에게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이멜다와 결혼하기 위해서 기이한 행동을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매일 매일 이멜다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내는 것이였다. 그러나 이멜다는 아래 서술된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굉장히 사치욕이 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11일 동안 무려 11개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았는데도 페르디난드에게 넘어오지 않았다. 페르디난드는 프러포즈를 한 끝에 이멜다와 간신히 결혼했는데,[3] 당시 페르디난드는 이렇게 프러포즈를 했다고 한다. "이멜다, 언젠가 대통령의 부인이 될 생각은 없어요?"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의하면, 사교계에서 연애하던 상류층 부자 남자에게 버림받고 크게 낙심하여 몸과 마음이 다쳐 세상을 담쌓을 듯 실의에 빠진 이멜다를, 한결같이 옆에서 위로해주고 함께 해준 것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멜다는 자신을 사랑하는 일편단심에, 전도유망한 젊은 정치인인데다 가문도 끝내주는 페르디난드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한다.

2.3. 필리핀 대선 당시의 활약


이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필리핀대통령을 목표로 하자, 이멜다도 이를 위해서 열심히 뛰어 다녔다. 당시의 행적은, 이후의 막장행각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을 정도로 '''완전무결한 내조의 여신이자 현숙한 귀부인'''이었다. 우선 선거 유세현장에서 연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남편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그리고 저명인사들의 부인들의 모임을 조직해서 선거 자금을 마련했고, 성대한 연회를 열어 그녀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면서 페르디난드의 지지율을 높여 나갔다.
게다가 미스 마닐라에도 도전했던 사람이 남편의 당선을 위해서 필리핀 전국을 누비고 다니기까지 했다. 비행기를 타고 여러 지방들을 두루두루 방문하거나, 고무보트까지 타면서 지방으로 내려갔고, 거기서도 흙을 다 묻혀가면서 모내기를 하거나 농사를 도왔다. 이런 일들을 수천 개의 섬들을 왔다갔다하면서 할 정도로 열심히 했다. 1965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페르디난드는 이멜다에게 "내가 얻은 표의 3분의 1은 당신의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계엄령 선포 전까지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퍼스트레이디 직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성실한 양처이자 품위있는 영부인이었다. 하지만…'''

2.4. 인류역사에 이름을 남긴 전설의 사치


남편의 2기 재임기부터 점차 사치향락에 맛을 들이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그녀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게 된다. 이멜다는 계엄령 선포기간 동안 보건복지부 장관직과 마닐라 시장직을 지내게 되는데 그 기간 동안 '''남편과 함께 필리핀의 국가재정을 횡령하거나 과시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쓸모없는 사치성 사업을 벌여서 필리핀을 말아 처먹었다'''. 특히 남편의 계엄령 선포 이후로는 누가 신경쓰든 말든 쿨하게 대놓고 명품들을 쓸어담아갔다. 당연히 이멜다가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데 쓰이는 돈은 모두 국가재정에서 지출되었다.[4]

2.4.1. 이멜다의 방에서 발견된 물품


흔히 이멜다 마르코스가 사치스러운 사실은 알지만 얼마나 사치스러운지는 잘 모른다. 그래서 풍문으로 나도는 이야기나 그것들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게 정말로 사실이다. 아니, 알려진 이야기가 훨씬 더 진실보다 더 축소된 이야기다.'''
훗날 이멜다가 남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함께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을 때 이멜다가 살던 대통령궁 지하에는 가로 21m, 세로 21m나 되는 커다란 방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이멜다의 사치품이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당시 대통령궁을 방문한 영국의 사진기자 알렉스 보위는 대통령궁 지하에 있는 이멜다 마르코스의 옷장 속에 쌓여있는 세계 최일류 유명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한 최고급 의상과 구두, 핸드백, 그리고 장신구들을 보고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래는 마르코스 부부가 1986년 하와이로 망명했을 당시에 발견된 이멜다의 사치품 목록이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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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급 브랜드의 구두 3,000켤레. 심지어 이나 으로 장식된 구두는 기본이고, 그 1980년대에 배터리를 구두에 장착해서 당시에 움직일 때마다 빛이 나오는 구두까지 있었다고 한다.
  • 수백 벌에 달하는 최고급 의상
  • 길이가 2m가 넘는 대형 거울 옆에는 프랑스 루이비통 손가방이 가득 쌓여있었다.
  • 최고가의 파티용 장갑 68켤레
  • 각종 유명 브랜드의 팬티 3,500장
  • 최고급 이브닝 가운 2,000벌
  • 최고급 검은색 브래지어 500개에, 심지어 방탄이 가능한 브래지어까지 있었다.
  • 아직 뜯지도 않은 스타킹 박스 200개
  • 최고급을 자랑하는 수백 개의 보석상자. 그 중 한 보석에는 1만 9천 달러의 가격표가 붙은 보석도 발견되었다.
  • 방 한쪽에는 최고급 신상 명품 가방이 셀 수 없을 정도로 쌓여 있었다.
  • 서랍 속에 보관되어 있는 청구서들을 조사한 결과, 이멜다는 오전에 100만 달러, 오후에는 200만 달러어치의 골동품을 사들였다고 하는 충격적인 사실도 드러났다.
  • 청구서에 의하면, 이멜다는 10만 7천 달러의 이브닝 가운의 구입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탈리아의 유명 디자이너 발렌티노에게는 실크 드레스 6벌을 한꺼번에 주문하기도 했다.
  • 이멜다의 옷장에는 세계 각국의 드레스와 갖가지 색상의 의상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으며,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가격표가 그대로 붙어있는 구찌 핸드백들이 선반 위에 가득 쌓여 있었다.
  • 이멜다의 침대 옆에는 선반 가득하게 비디오 테이프들이 있었는데, 마닐라 영화제에 초청되어서 이멜다와 만난 적이 있던 미국의 배우 조지 해밀턴 주연의 <무적의 사나이 조>도 있었다고 한다.
'''이게 고작 한 방에서 발견된 사치품들이다. 즉, 저 사치품들을 사들이지만 않았어도 필리핀의 경제가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4.2. 사치 행각


  • 이멜다가 살았던 말라카냥 궁의 인테리어는 최고급이다. 말라카냥 궁의 바닥은 이탈리아대리석이며, 천장은 수정 샹들리에로 장식되었고, 욕실에는 황금으로 된 세면대가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도금이 아니라 순수하게 100% 황금으로 된 세면대라는 점이다. 그리고 침실에는 황금으로 도금한 이멜다의 동상이 있었는데, 이멜다는 자신의 황금 동상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고 한다. 물론 건물 안의 거의 모든 물건들은 최고급의 명품들로 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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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이멜다 마르코스가 살았던 말라카냥 궁
  • 필리핀 여행에서 유명한 관광코스인 코코넛 궁전이 있는데, 이 건물은 이멜다의 사치욕 때문에 만들어졌다. 1981년 코코넛 껍질을 파인애플이나 바나나 섬유로 건축 자재로 사용해서 만들어진 건축물로, 약 400억(!) 정도를 들여 지었다. 필리핀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만든 건물이었지만, 정작 이를 본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궁전이 너무 화려하게 지어졌다고 판단해서 코코넛 궁전에 체류하는 것을 거부했다. 마지막으로 말라까냥에서 마르코스 부부와의 국빈 만찬 때, 요한 바오로 2세는 "가난한 사람들의 요구를 무시하지 말라"고 마르코스 부부에게 설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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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넛 궁전
  • 마르코스 부부가 해외를 방문할 때는 전용 비행기 2대를 사용했는데, 그 중 1대는 자신들과 측근들을 태우기 위한 비행기였고, 나머지 1대는 자신의 드레스와 여행용 가방 200~300여개를 싣기 위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무엇을 가지고 다녔는지는 파악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양한 물품들을 싣고 여행을 다녔다. 보잉 707 정도만 되어도 2대까지는 필요가 없으니, 소형 비즈니스 제트기 기종일 가능성이 높다.
  • 이멜다가 덥다고 바기오에 가 있을때, 파티를 할 곳이 없다면서 "파티장을 지어달라"고 남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에게 떼를 썼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곳이 현재까지 바기오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국제 회의장인 '컨벤션 센터' 다. 한술 더 떠서 그 건물이 다 지어지자 파티를 하는데, 설탕이 모자라자 군용 헬기로 설탕을 실어 날랐다고 한다. 헛소문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결국에는 사실로 드러났다. 이런 식으로 약 1만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시설들을 무려 수십 개가 넘게 만들었다고 한다.
  • 파티를 좋아해서 매일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대한 연회와 수많은 파티, 그리고 특히 세계 굴지의 패션쇼는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물론 갈 때마다 돈을 신나게 뿌려댔다(…)
  • 뉴욕에서 쇼핑할 때에는 수행원 40명이 이멜다의 쇼핑을 보조했는데, 그 때 들고 다닌 옷가방의 수가 300개가 넘었다고 한다. 하루에 한 백화점에서 1만 달러가 넘는 쇼핑을 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6]
  • 뉴욕의 최고가 호텔에 묵으면서 매일 5천달러어치의 매일 매일 주문했다.
  • 파티 용도로 뉴욕에 별도의 아파트를 구입했고, 가구 인테리어 비용으로 약 150만 달러를 지출했다. 다시 말하지만 1980년대에 150만달러다.
  • 당시의 미국에서도 이멜다의 사치가 신기했는지, 미국 신문에 여러번 이멜다의 사치가 보도되었다. 특히 어느 날에는 미국 신문 1면에 이멜다가 나왔는데 그 제목이 "달러 잡아먹는 불가사리 이멜다"였다고 한다. 근데 이멜다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냥 좋아했으며, 그 신문 1,500장을 복사해서 주변 지인과 필리핀인들에게 뿌려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신문기자들이 "이거 영부인님 비난하는 기사인데요??"라고 했더니 그제서야 알아보고 황급히 복사를 취소시켰다고(…)
  • 뉴욕에서 500만 달러어치의 관광여행을 했다.[A]
  • 새로운 해변에 리조트를 조성한답시고 호주모래를 비행기로 실어 날랐다[A].
  • 맨해튼에 있는 건물들을 사들이는데 1억 2천만 달러를 쓰기도 했다[A].
  • 전설처럼 내려오는 에피소드 중에서 이른바 ‘치즈회항’ 사건이 있다. 1970년대, 이탈리아 로마에서 마닐라로 돌아오던 필리핀 에어라인에 탑승한 이멜다가 비행 도중 갑자기 기장에게 로마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는데 그 이유가 “로마에서 치즈 사는 것을 깜박해서”였다.(...)
  • 이멜다에게는 이른바 비틀스 스캔들이란 것도 있다. 1966년 한창 날리고 있던 비틀스가 서독과 일본, 그리고 필리핀을 도는 월드투어에 나섰는데.[7] 이멜다는 필리핀에 도착한 비틀스를 자신의 개인 파티에 초청했다가 거절을 당하자 TV에 나와 “낙심했다”며 눈물을 흘렸고, 다음날 이멜다의 지지자들이 호텔과 공항으로 몰려들어 거세게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비틀스는 가까스로 공항에 도착했지만 이멜다의 지시로 에스컬레이터가 중지됐고, 경호요원 등은 자취를 감춘 상태로 간신히 필리핀에서 탈출했다. 비틀스는 이후 이 사건에 대해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8]
  • 이멜다는 부동산 투자를 좋아했다. 일단 무조건 땅을 사놓고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그 부지를 재개발한 다음 땅값을 비싸게 팔거나, 해외의 수많은 부동산들에 투자했다.[9] 은닉시킨 재산만 해도 약 100억 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한국으로 따지면 10조원의 금액이며, 그 중에서 대부분의 부동산은 미국의 부동산이였다.
  • 이멜다 마르코스는 자신의 51번째 생일을 경축한답시고 동물원을 하루동안 무료로 개방했고, 상인들이 파는 생활필수품, 사실상 모든 필리핀 물품들의 가격을 10%씩 인하해서 팔도록 명령했다. 물론 상인들은 그 할인 가격을 다 고스란히 자기가 뒤집어 썼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이멜다가 모든 버스 운전사들에게 무료로 운행하도록 명령하자, 열 받은 운전사들이 운전을 거부하여 수많은 필리핀인들의 출근길이 막혀버리는 대혼란 상황이 발생했다.[10]
  • 하와이에서 망명 중일 때 이멜다 마르코스는 영국의 데일리 메일 지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3천여 켤레의 구두를 수집한 것은 필리핀산 제품의 판매촉진을 위해서지, 사치광이나 쇼핑광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신발은 필리핀 최대 수출품 중 하나이며, 내가 갖고 있던 신발은 모두 필리핀 제품이었다. 퍼스트레이디로서 국산 제품의 판매를 촉진시키는 것은 나의 의무다."라고 주장했다.[11] 물론 그 구두들이 실제 필리핀 제품인지는 알아서 생각하자.

2.5. 이후


어쨌든 이렇게 필리핀을 말아먹었으니, 1986년 민주화 혁명 이후로 필리핀에서 하와이로 사실상 쫓겨나다시피 했다. 당연히 위에 해쳐먹은 것만으로도 돌아올 자격이 없었지만, 1991년 필리핀 대법원의 사면을 받았고 이때를 기점으로 필리핀에 귀국한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234만표의 득표하여 건재함을 과시하였고, 1993년에 부패혐의로 기소되었다가 1998년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1995년, 이멜다는 외아들과 함께 총선에 출마하였다. 그 결과 아들은 상원의원, 자신은 하원의원에 당선됨으로서 '''성공적으로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이멜다 컬랙션이라는 패션 브랜드를 차렸는데, 기업가로도 대성공하여 '''영부인 시절 못지않게 돈을 무진장 끌어모았다.''' 거기에다가 딸을 일로코스 노르테 주지사로 당선시킨 덕택에, 현재까지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그래도 다행히 2010년에 베니그노 아키노 3세[12]가 대통령이 되면서 부정축재한 재산에 대한 환수작업이 진행되었기에 재산이 어느 정도는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부정축재 혐의로 환수당한 재산을 제외한 마르코스 일가의 남은 재산 역시 어마어마하다.''' 어느 정도인가 하니, 필리핀의 부촌에 마르코스 일가 소유의 고급 저택을 3채나 가지고 있을 정도다(…). 앞서 전술했듯 과거에 재산을 물쓰듯 써댄 이멜다가 사업을 하면서 전보다 재산을 더욱 불리고 있기도 하고, 마르코스 일가가 원래부터 필리핀의 오래된 명문가 중 하나로, 국회의원과 공무원으로 잘 나가고 있는 명문가이기 때문. 그리고 상술했듯이 이멜다는 해외 부동산이나 여러 사치품들을 사들이며 축재를 했을텐데, 이렇게 본국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재산들은 사실상 환수하기도 어렵다. 물론 이를 아는 필리핀 국민들은 아주 뒷목 잡을 지경이다.
2016년 총선에서도 일로코스 노르테 2구에 출마해서 99.0%(...)의 득표율로 재선되었다. 딸도 노르테 주지자에 여전히 당선. 그녀의 아들도 부통령에 출마해서 선거직전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기록해서 무난하게 부통령에 당선될듯 했지만 개표 중후반들어 여당인 자유당 루니 로브레도 후보에게 역전당하는 바람에 낙선되었다. 하지만 여전한 영향력은 발휘하고 있다는것은 증명했다.
그러다가 체포영장이 나와 정의가 구현되었다고 한다.# 다만 당장 구속되지도 않을것이고 항소를 할 것으로 보여 정의가 어떻게 구현될지는 오리무중이다.
2019년 7월 3일 이멜다의 구순 잔치에 참석한 일반 하객들 261명이 식중독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사고가 생겼다. 일반인에게 제공된 음식은 VIP 손님의 것과 달랐다고 한다.# ## 또한 환자들이 실려 가고 있는데도 공연이 계속됐다고 알려졌다.#

3. 기타


  • 비틀즈가 의도치 않게 퍼스트 레이디 이멜다 마르코스를 모욕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참사가 일어난 적이 있다. 공적인 자리는 피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던 비틀즈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비틀즈를 대신하여 대통령궁에서의 아침식사 초대를 정중하게 거절하자 이멜다가 생방송으로 분노를 표출해 국민들이 분개하는 일이 있었다.[13] 더군다나 정부의 지시로 모든 경찰들이 보호를 거부하면서 그들은 성난 국민들에게서 살아남아 필리핀을 탈출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비틀즈 멤버들은 공연 수익까지 모두 필리핀 당국에게 뺏기면서야 탈출할 수 있었다.# 이 일로 인해 비틀즈 멤버들은 큰 충격을 받아 월드 투어를 중단하고, 실험적인 음악 활동에만 집념했으며 필리핀 투어 직후 나온 앨범이 바로 록의 역사를 바꿨다고 평가받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이다. 이 때문에 비틀즈 팬들 사이에서는 이멜다 마르코스가 의도치 않게 세계 음악의 역사를 완전히 바꿔버렸다는 농담도 종종 나온다.


[1] 이멜다가 재산을 물 쓰듯 써대며 사치했음에도 여전히 마르코스 일가의 재산이 엄청난 이유가 이 때문이다.[2] 이멜다의 외모는 봐도 알 정도니 이하 생략. 이멜다의 키만 해도 172cm이었는데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170cm이었다.[3] 도서 <이멜다 마르코스>[4]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처럼 주변의 견제를 받지 않자 그녀의 욕망도 폭주한 것으로 보인다.[5] 1986년 3월 11일 동아일보 기사 중 일부[6] 당시가 1980년대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에 1만 달러는 엄청난 금액이며, 지금도 필리핀인들에게는 4년제 대졸 신입사원들의 3년치 급여이기도 하다. 특히 필리핀 명문대 졸업자의 경우 연봉이 한화로 310만원 정도로, 한국의 8분의 1쯤 된다.[A] A B C 2013년 2월 3일 the Asian지 뉴스 중 일부[7] 당시 필리핀의 국제적 지위는 상당히 높은 편에 속했다.[8] https://news.v.daum.net/v/20181118060046559?f=m [9] 사실 이런 사례는 정치가 후진적인 나라에서 매우 흔하다. 한국에서도 특정 정치인들 소유의 토지나 건물이 단지 소유주가 권력자라는 이유로 재개발된 것이 아니냐는 강한 의혹을 받는 논란이 여러 차례 있어 왔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런데 필리핀은 오죽할까?[10] 1980년 7월 3일 경향신문 중 일부[11] 1986년 4월 14일 동아일보 보도 중.[12]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과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의 아들.[13] 이 사실을 뒤늦게 안 폴 매카트니는 "국민들을 괴롭힌 독재자를 빡치게했다는게 너무 고소하다"라면서 이멜다를 조롱했다. 직설적인 성격의 존 레논은 아예 "그런 정신병동같은 나라에는 다시는 가지 않을거다"라고 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