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시/역사

 




1.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백제 22년(온조왕 40)부터 214년(구수왕 1)까지는 술천성이 있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장수왕 때에는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여 골내근현이 되었다. 그 뒤 신라 진흥왕 때 잠시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660년(무열왕 7) 천녕군(川寧郡)에 술천성을 축조하였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는 황효라 불렸고 기천의 영현으로 되었다.

2. 고려


태조 때 황려현으로 개칭되었다. 1018년(현종 9)강원도 원주에 이속되었다가 1031년에 다시 경기도로 귀속되었다. 고종 때에 영의로, 충렬왕 때 여흥으로 개명되었다가 다시 군으로 승격되었다. 우왕 때 군에서 부로 승격되어 황려라 불리다가 공양왕 때 다시 여흥군으로 강등되었다.

3. 조선


태종 때 태종비 원경왕후의 내향이라고 해서 다시 부로 승격되었고 1413년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예종세종영릉이 이장되면서 천령현이 폐지되어 여흥에 병합되면서 목으로 승격되었다.

4. 일제강점기


1914년 원주군의 지내면과 서면이 여주군에 편입되어 강천면이 되었고, 주내면이 여주면으로 개칭되었다. 1941년 10월 1일 여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5. 대한민국


1963년 1월 1일 개군면이 양평군으로 편입되었다. 1970년 12월 16일에 금사면 산북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1989년 4월 1일에 산북면으로 승격되었다. 1992년 3월 2일에는 북내면 오학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95년 3월 1일 강천면 대둔리가 강원도 원주시로 편입되었다.

5.1. 시 승격


시 승격의 전초전 격으로 2007년 북내면의 오학출장소를 여주읍에 편입시켰다. 여주읍 인구가 5만을 넘겨야 시 승격 요건을 갖출 수 있기 때문. 오학출장소와 여주읍은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있기에 무리수라는 말들이 많았으나 그냥 강행...
2012년 말부터 시 승격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한창 홍보할 때에는 도로 곳곳에 시 승격을 찬성하는 단체들의 현수막이 가득했으며 군립 도서관 책상 유리 밑에 홍보물을 펼쳐 끼워놓고 홍보물을 책상마다 비치하는 등, 공공시설 곳곳에 홍보물을 붙여놨다.
시로 승격되면 농어촌특별전형이 없어지니 당연히 학생·학부모들은 반대했다. 여주군 측에서는 교육 예산을 늘리겠다고는 하지만…글쎄…여주군 홍보물에는 이 문제에 대해 우리 아이들의 대학 입학을 특혜를 받지 말고 제대로 보내야 한다고 적혀있다(…). 농어촌 지역에서 학교 교사로 근무하면 승진에 가산점을 받게 되는데 이것도 없어지게 되니 여주를 떠나는 교사가 적지 않을 것이다. 학생, 학부모를 비롯한 청·장년층의 반대가 심했으나 노년층 인구가 많다보니 여론조사에서는 찬성이 반을 넘었다.
아무튼 여주는 시 승격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어 시 승격엔 문제가 없어 보였다. 결국 2013년 3월 26일 국무회의에서 시 승격을 의결했고, 2013년 5월 7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경기도 여주시 도농복합형태의 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안>이 통과됨으로써[1], 2013년 9월 23일[2] 여주시로 승격하여 경기도의 28번째 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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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읍은 3개 동으로 분동되었다.
여주는 시로 승격됐으나 단독 선거구는 아직까지 회복하지 못했다. 2000년 여주군 시절이 마지막 단독선거구였다.
[1] 국회 의안정보시스템[2] 원래는 공포 후 6개월 뒤에 승격되는 것이었으나 여주군민의 날이 9월 23일인 점을 감안해서 시행일을 '2013년 9월 23일'로 변경하는 것으로 수정 의결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상위 주석 링크의 안전행정위원회 심사 보고서와 본회의 심의 회의록에서 4페이지 박성효 안전행정위원장 대리의 제안 설명 및 심사 보고를 참고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