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증인/역사
1. 시초
19세기~20세기 초 미국 개신교 신앙운동을 배경으로 출발한 신흥 종교이다. 그런지라 역사는 그다지 깊지 않아 이제 1세기 반 정도 되었다. 서두에 나와있듯이 스스로 기성 교파에서 파생된 분파가 아니라 1세기의 초기 그리스도교를 재확립하였다고 주장한다.
그 시발점은 1874년, 미국인 찰스 테즈 러셀(Charles Taze Russell, 1852-1916)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게 재림했으며 "1914년 아마겟돈 전쟁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정치 세력이 멸망하고 천년왕국의 시작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끌어들여 세력화한 것. 주장의 기저에는 안식교의 지도자 J. H.페인트의 저서가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이나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태생이 성서 연구회 모임이기 때문에 이들은 '성서 연구생'이라고 불렸다. 문제는 지금 모두가 알다시피 1914년에 세상이 망한다는 예언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뭐, 세계 멸망에 버금가는 굉장히 큰 전쟁이 있긴 했다.
비록 이들의 주장대로 세상이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제 1차 세계대전과 시기가 일치했기 때문에 종교의 위세는 더 커질 수 있었다. 러셀은 이후 1916년 10월 31일 캘리포니아에서 설교를 한 후 집으로 돌아오다가 열차 안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기성 기독교계와 동떨어진 교리로 인해 여호와의 증인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많은 탄압을 받았다. 특히, 교리 중에 '''국가에 대한 충성 거부와 집총 거부'''가 문제가 되었다. 홀로코스트 기념관에서는 이 종교에 대한 조직적 탄압을 1870년부터 보고 있다.
2. 제1차 세계대전
2.1. 대한민국
한국에는 일제강점기 당시였던 1912년에 여호와의 증인 선교인 R.R.홀리스터가 전파하였다. 한국인 최초로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된 사람은 강범식이라고 한다.
3. 제2차 세계대전
수난시대란 말로 요약 가능하다.
3.1. 일본 제국 치하
일본 제국 치하의 한국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교세는 미미하였는데,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고작 신도 수가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이들은 천황 숭배를 거부하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한다는 이유로 일본 제국으로부터 탄압당했다.
이와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1939년 발생한 등대사 사건으로 대부분의 신자들(38명)이 검거되어 5명이 옥사하고 나머지 33명은 광복 이후에 풀려났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편찬한 독립운동사에 일제 말기의 주요한 저항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해방 이후 한국에서도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은 여전히 같은 이유로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는 것이 역설적이다.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은 민족을 위해서 저항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교리적으로 신사참배와 군복무를 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다만 21세기의 한국 정부는 민족주의적 운동이 아니더라도 일본 제국에 저항한 것은 포괄적으로 항일운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예를들어, 사회주의자들이 일제에 저항한 이유는 민족해방이 아닌 사회주의 혁명이었지만, 한국 정부는 이들의 저항 역시 항일운동사에 포함하고 있다.
3.2. 나치 독일 치하
나치 독일의 여호와의 증인 탄압을 다룬 위키백과의 영문명 문서
여호와의 증인 온라인 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는 나치 관련 기록물
미네소타 대학교, 홀로코스트와 인종청소 연구ㅡ독일의 여호와의 증인
1933-45년 동안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나치)의 강제 수용소에 끌려간 여호와의 증인들, JOHANNES S. WROBEL 저술[1]
미합중국 홀로코스트 기념관, 여호와의 증인ㅡ나치 시대의 희생자들
홀로코스트 시절의 여호와의 증인들(1933-1945)
"(네덜란드에서) 나치에게 극단적인 박해를 받은 것은 한 종교 단체. 즉, 여호와의 증인뿐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네덜란드 왕국」(Het Koninkrijk der Nederlanden in de Tweede Wereldoorlog), 네덜란드 역사가 루이 데 용 저.
"their courage and defiance in the face of torture and death punctures the myth of a monolithic Nazi state ruling over docile and submissive subjects."
"나치가 자행한 고문과 살인 앞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보여준 용기와 비타협정신은 나치 집권기 동안 사람들이 나치에게 복종했다는 세간의 인식을 환기시켰다." ㅡ시빌 밀튼(Sibil Milton), 역사학자
“[증인들은] 폭력 행위나 무력 행사를 하는 데 가담하기를 거부하였다. 증인들은 정치적 중립을 신봉하였고, 따라서 히틀러를 위해 투표하거나 히틀러식 경례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한 행동이 나치의 분노를 촉발하여 증인들이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데, 국가 사회주의가 그러한 거부 행위를 용인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ㅡ역사학 교수 로버트 P. 에릭슨, 유대학 교수 수재너 헤셸 저 「배신—독일 교회와 유대인 대학살」(Betrayal—German Churches and the Holocaust)
나치의 집단학살에서 살아남은 여호와의 증인 신자의 증언영상,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쇼아[2] 재단(USC Shoah Foundation) 제공[3]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나치의 박해,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영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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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이 독일 사회를 장악한 1933년 전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여호와의 증인을 상대로 악랄한 탄압을 일삼았다. '''단일 종교 상대로는 유대교와 함께 세계대전 시기에 일어난 대규모 종교 박해''' 수준으로 나치의 집권 기간 동안 본국 독일에서 신도의 절반이 넘는 13,000명이 수감되었고 4,500명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1,200~500명은 수용소에서 간수의 폭력행위와 굶주림, 질병, 생체 실험으로 사망하였으며 그중 250명은 처형당했다.[4] 희생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본국 외 네덜란드, 프랑스 등의 유럽 점령지에서의 탄압과 비공식 통계를 감안하면 이보다 더 많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죽거나 다쳤다.
나치의 공식 문서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을 '''IBV'''로 지칭했는데, 이것은 이들 조직을 가리키는 독일어 공식 명칭(Internationale Bibelforscher-Vereinigun, ‘만국 성경 연구회’라는 뜻임)의 약자였다. 나치는 증인들이 보라색 삼각형이 달린 죄수복을 입게 했으며(위의 영상 참고), 이 표시 덕분에 증인들은 수용소 내에 있는 동료 신자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3.2.1. 원인
제3제국이 이토록 극심하게 여호와의 증인을 탄압한 이유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침략전쟁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독일국방군, 나치친위대, 히틀러 소년단 등 독일의 어떠한 군사 조직에도 가담하지 않았으며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충성이나 나치식 경례를 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들이 이렇게 행동한 이유는 '''폭력에 반대하라, 세속 국가에 충성하지 마라는 교리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철저한 국수주의,군국주의 정권이었던 나치는 당연히 비폭력주의를 고수한 여호와의 증인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했다. 마찬가지 이유로 일본 제국 치하에서도 신도들에 대한 탄압이 일어났는데, 그중 한국에서의 사례는 '''등대사 사건'''이란 이름으로 독립운동사에 기재돼 있기까지 하다. 사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도 여호와의 증인은 전쟁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독일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은 적이 있다.
3.2.2. 전개
3.2.2.1. 1933년 ~ 1939년
여호와의 증인은 독일에서 비벨포르셔(성경 연구생)로 불렸다.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여호와의 증인들은 많은 성서 출판물을 배부하였다. 1933년에 여호와의 증인의 신도는 총 8만 3941명이었는데, 그 중 거의 30퍼센트가 독일에 살고 있을 정도로 신도들은 활발한 활동을 했다.[5]
나치 정부는 일찍이 1933년부터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표적으로 삼았으며 독일 전역에서 종교 활동을 금지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의 도덕관과 관행, 교리들은 나치의 이념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증인들은 누구나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하일 히틀러!”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히틀러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일어로 하일은 구원이란 의미다. 또한 증인들은 군대와 관련된 일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았는데, 나치 정권은 이를 반국가 행위로 간주하였다.
신도들은 나치가 집권한 1933년부터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불시에 가택 수색을 당하고 학교에서 퇴학당하였으며, 구타와 체포와 투옥을 당했다. 특히 나치돌격대의 격렬한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의 교세는 위축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신도들 중 일부는 나치의 종교 탄압을 성토하기까지 했다. 1939년 9월 1일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인원 중 5~10퍼센트가 여호와의 증인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1934년 2월 9일에, 여호와의 증인 지도부인 워치타워의 2대 협회장 조셉 F. 러더퍼드는 특사를 통해서 나치의 편협한 행동에 대한 항의서를 히틀러에게 보냈으며, 10월 7일에는 독일을 포함하여 50개국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히틀러에게 약 2만 통의 항의 서신과 전보를 보냈다. 1938년 이전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나치 독일과 타협하려는 태도를 보였다고 주장하는 쪽이 있다. 즉 러더퍼드의 항의서나 여호와의 증인들이 채택한 '사실 선언'에서 그러한 성격이 드러난다는 주장이다. 1934년, 여호와의 증인이 유대인 자본가에게 지원을 받고 있다는 중상모략이 제기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발표한 사실선언에는 '''우리의 책과 출판물을 주의 깊이 조사해 보면, 현 정부가 지지하고 표방하고 있는 매우 수준 높은 이상을 우리 출판물에서도 제시하고 옹호하고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란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이를 빌미로 일부 사람들은, 증인조직이 독일 사회에서 만연한 반유대 인종주의에 소극적으로 동조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냐고 주장한다. 그러나 엄밀히 살펴보면 이 부분은 나치 독일정부를 설득하기 위한 '표현상의 기법'일 뿐, 그들이 나치의 인종주의에 찬성하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 즉, 역사상의 어떤 잔악한 정부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내세우는 겉으로의 '이상'은 굉장히 인간주의적이며 행복한 사회를 추구하고 있는데, 나치 독일 역시, (그들의 속셈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인간세상을 궁극적으로 나아지게 한다는 목표를 천명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러더퍼드의 항의서는 이 '명목적인 이상주의'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궁극적으로 추구한다(겉으로)는 그 수준높고 깨끗한 인간사회를 위한 이상제시와 우리의 종교적 신념이 다를 것이 없는데, 굳이 우리 조직을 심하게 박해할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역으로'항변하는 표현 방법을 쓴 것이다. 그들은 그 '이상'의 유사함을 강조했을 뿐, 나치가 목적달성을 위해 사용하는 여타의 잔인무도한 도구들과 선동적 사상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명확히 했다. 당연히 나치의 겉과 속은 달랐기 때문에, 나치의 진심과 위배되는 증인조직은 박해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시간이 흐른 후, 여호와의 증인 지도부는 이러한 논란에 대해 1988년 발행한 깨어라 지에서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독일, ‘베를린’의 ‘히틀러’ 정부에게. 귀 정부의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학대로 인하여 전세계의 모든 선량한 사람들이 놀라고 있으며 하느님의 이름에 불명예가 돌아가고 있다. 이제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라.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귀 정부와 ‘나치스’당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ㅡ1934년 10월 7일 독일 관료들에게 보낸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의 항의 전보
그러나 탄압을 중단하려는 노력이 아무런 효과가 없자, 여호와의 증인들은 1934년 말부터 나치 독일에 대한 기대를 접고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1935년 4월 1일에, 여호와의 증인들의 활동에 대해 전국적으로 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1936년 8월 28일에는, 게슈타포가 탄압에 들어갔다. 1939년 무렵에는 6000명의 신도들이 수감되었으며, 수천 명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하지만 이전에 여호와의 증인의 동료였던 몇몇 사람들을 포함하여 소수의 비판자들은, 증인들이 히틀러 정부 초기에 그 정부와 타협하려고 했다고 비난합니다. 그들은 워치 타워 협회의 대표자들이 그 새 정부의 환심을 사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으며, 결국 600만 명의 유대인을 살육하는 원인이 된 나치의 인종주의적 사상을 적어도 얼마 동안은 지지했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워치타워 협회장인 조셉 F. 러더퍼드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독일의 상황이 염려스러운 나머지 독일 지부 사무실 책임자인 파울 발체라이트와 함께, 여호와의 증인이 독일 국민과 국가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히틀러 수상과 정부 관리들과 일반 대중에게 알리는 운동을 전개해 나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러더퍼드는 여호와의 증인에게 가해지고 있는 공격에 관해 히틀러가 모르고 있거나 종교 단체들이 증인들에 관해 히틀러에게 허위 정보를 제공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그데부르크 사무실에서는 독일 시민의 청원권을 사용하기 위한 대회를 마련하였습니다. 대회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상태에서, 독일 전역의 여호와의 증인이 1933년 6월 25일에 베를린의 빌메르스도르퍼 테니샬렌으로 오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5000명가량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정부가 과도기를 겪고 나라가 혼란에 휩싸이자, 증인들은 자기들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기를 원하였습니다. “사실 선언”을 통해 증인들은 자신들이 재정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유대인과 연루되어 있다는 비난을 단호히 부인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문서에서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우리가 활동을 위해 유대인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다는 비난은 우리의 적들이 지어낸 거짓 비난이다. 그러한 비난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바로 이 시간까지 유대인이 우리의 활동을 위해 기부한 돈은 단 한푼도 없다.”
돈에 관해 언급하고 나서 “사실 선언”에서는 계속해서 대기업의 부당한 행위를 규탄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하였습니다. “많은 나라 사람들을 착취하고 압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기업을 만들어서 운영해 온 사람들은 영미 제국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유대인들이었다.”
이 문장은 유대 민족 전체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이 문장이 잘못 이해되어서 감정을 상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면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당시 독일의 여러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유대인에 대해 적의를 갖도록 가르치고 있었는데 여호와의 증인들도 유대인에 대해 그러한 적의를 갖고 있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한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나치 시대에 증인들은 출판물과 행동을 통해 반유대주의를 배척하고, 유대인을 학대하는 나치의 행위를 규탄하였습니다. 증인들이 강제 수용소에서 자기들과 같은 처지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친절을 나타냈다는 사실은, 분명히 이러한 거짓 비난에 대한 강한 반증이 됩니다.
“사실 선언”에서는 증인들의 활동을 종교적인 성격을 띤 일로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습니다. “우리 조직은 어떤 의미로도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지 않다. 우리는 단지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서 물러서지 않을 뿐이다.”
“사실 선언”에서는 또한 정부가 한 약속을 상기시켰습니다. 증인들은 여러 가지 수준 높은 이상을 내걸었는데, 공교롭게도 독일 정부 역시 그러한 이상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였습니다. 그러한 이상 가운데는 가정에 관한 가치관과 종교의 자유도 있었습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사실 선언”에서는 이렇게 부언하였습니다. “우리의 책과 출판물을 주의 깊이 조사해 보면, 현 정부가 지지하고 표방하고 있는 매우 수준 높은 이상을 우리 출판물에서도 제시하고 옹호하고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며, 적당한 때가 되면 여호와 하느님께서 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그러한 수준 높은 이상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경우,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 이전부터 나치당원들이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였기 때문에 1935년부터 여호와의 증인의 포교 활동은 금지돼 있었으며, 독일과의 합병 이후에는 본국과 마찬가지로 여증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졌다. 1939년 3월,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아 트란스카르파티아를 점령한 헝가리에서도 종교 활동 금지령이 내려지고 왕국회관(여호와의 증인 교회)이 폐쇄, 신도들이 투옥되는 등 탄압이 일어났다.
3.2.2.2. 1939년 9월 ~ 1945년
"최근에 받은 감시 보고서 때문에 얘기하고자 할 게 있다. 바로 여호와의 증인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소련을 점령하고 시간이 지나 통치가 안정화되면, 영토를 분할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온갖 종교인들과 평화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겟지. 솔직히 여호와의 증인들은 병역과 전쟁협력에 반대한다는 점 외에는 아주 우리에게 협조적일 수 있다. 음주를 하지도 않지, 담배를 피지도 않지, 정직하다는 점에서 정말 훌륭한 일꾼이다. 값진 인력이 틀림없다."
Some information and observations of recent date have led me to draw up plans that I would like to bring to your attention. This concerns Jehovah’s Witnesses. . . . How are we going to govern and pacify Russia when . . . we will have conquered vast areas of its territory? . . . All forms of religion and the pacifist sects must be supported . . . , among all the others the beliefs of Jehovah’s Witnesses. It is well-known that the latter have characteristics incredibly positive for us : Apart from the fact that they refuse military service and anything to do with war . . . , they are incredibly reliable, do not drink, do not smoke; they are relentless workers and of rare honesty. For them the spoken word stands. These are ideal characteristics . . . , enviable qualities.
ㅡ하인리히 힘러, 게슈타포 책임자인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에게
유대인과 집시와 다르게, 여호와의 증인들은 전향서에 서명하여 신앙을 포기하거나 독일군에 입대하여 탄압을 피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이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부분이다.[6][7] 결국 이 시기 여호와의 증인들은 아우슈비츠, 다하우 수용소, 작센하우센 등의 여러 수용소에 끌려갔다."금지된 이 종파는 전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해 나가면서 불법 집회를 열고 '하느님의 증인들을 박해하는 것은 범죄이다', '여호와께서 박해자들을 영원한 멸망으로 벌하실 것이다'와 같은 구호가 적힌 전단을 붙이고 있다. 보안경찰이 성경 연구생들의 활동에 대해 더욱 강경한 조처를 취하고 있는데도, 그들의 활동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ㅡ독일 보안경찰(지허하이츠폴리차이)이 1941년 4월에 작성한 기밀 문서인 「네덜란드 보고서」(Meldungen aus den Niederlanden)
1937년 10월, 여호와의 증인이란 이유로 수감된 아우구스트 디크만(August Dickmann)은 1939년 9월 4일(전쟁 발발 삼 일 후) 신분증에 서명하라는 게슈타포의 요구에 불응하여, 독방으로 보내진 뒤 다른 모든 수감자들이 보는 앞에서 디크만 씨를 처형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한 수용소장의 요구로 15일에 다른 신도들과 친형제가 보는 앞에서 SS에게 총살당했다. 이틀 뒤 「뉴욕 타임스」지 독일 외신 보도에서는 “29세의 아우구스트 디크만이 ··· 이곳에서 총살 집행 대원들에 의해 총살당했다”고 게시하였다. 그리고 그가 “종교적 양심을 이유로” 군 복무를 거부했기 때문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점도 언급하였다. 그렇게 해서 아우구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가 공개적으로 처형한 최초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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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트 디크만, 1936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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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제이 샬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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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은 이와 같은 서약서에 서명해 믿음을 부인하기만 하면 석방시켜 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17세 때 여호와의 증인이 된 게르하르트 슈타이나허는 1939년 9월 15일, 양심에 따라 군 복무를 거부하고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슈타이나허는 빈에서 6주간 구금된 뒤에 독일 베를린에 있는 모아비트 교도소로 이송되어 미결 상태로 구금되었으며, 11월 11일, 첫 공판을 받는 첫날 슈타이나허는 '''전쟁을 방해한다는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종교적 신념을 따르는 것이므로 관대한 처분을 내려 달라고 청원하였으나, 1940년 3월 2일에 독일 제국 군사 법원은 사형 선고를 지지하였고 결국 4주 뒤인 3월 30일, 슈타이나허는 베를린의 악명 높은 플뢰첸제 교도소에 있는 단두대에서 처형되다. 당시 나이는 19세였다. 게르하르트 슈타이나허는 처형되기 단 몇 시간 전에 부모에게 다음과 같은 작별 편지를 썼는데 세 줄은 나치가 삭제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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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에 체포되어 겨우 19세의 나이로 아우슈비츠에 보내진 안제이 샬보트(Andrzej Szalbot)는 “군복무를 거부하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고 증언하였으며, 여호와의 증인들은 증인 조직에서 탈퇴한다는 뜻을 밝히는 동시에 그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선언하는 문서에 서명하기만 하면, 즉각 석방시켜 주겠다는 말을 들었으나 서명하지 않았다고 했다.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께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두 시간 전인 오후 7시에 제가 내일 아침 5시 50분에 처형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때가 결국 오게 되었군요. 주여 제게 힘을 주십시오. 정말이지 영은 간절하지만 육신이 약합니다. 저는 이곳 감방에 앉아 있습니다. 새벽 1시쯤 되었군요. 감방에는 저 말고도 두 명이 더 있습니다. 시간이 참 빨리 가네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대로 편지를 조금씩 쓰고 있어요. 밖은 춥고 또 눈이 내립니다. 주께서 부모님께 힘 주시길 빌어요. 저는 일하고 싶고, 그래서 열심히 일하고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하겠다고 말로나 글로나 약속했지요. 그렇지만 도저히 총은 쏠 수가 없어요. 바로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지요. 이제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곧 닥칠 일을 막을 수는 없지요. 힘내세요. 이 일로 약해지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두 분이 서로 더 가까워지셔야 해요.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저는 아직도 어린아이일 뿐이라서 주께서 힘을 주셔야만 견딜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힘을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저번에 3월 25일이라고 표시된 부모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25일, 부모님에게서 온 마지막 기별이군요. 새벽 3시 30분쯤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이토록 빨리 닥칠 줄은 몰랐습니다. [세 줄은 나치가 삭제했음] ··· 놀랐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1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거죠. 제 소지품을 받으시게 될 겁니다. 펜, 종이, 편지, 돈, 옷가지, 열쇠 등을 말이죠. 저의 진심 어린 안부를 조부모님께, 레지, 삼촌, 숙모, 할머니와 할아버지, 호크 씨 부부에게 꼭 전해 주세요. 함께 일하던 동료 모두에게, 저를 아는 모든 사람과 모든 친척에게도요. 아버지, 힘을 내시고 포기하지 마세요. 무너지시면 안 돼요. 다른 일에서 다 그러시듯 믿음에서도 강해지셔야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 서로 지원하면서 굳세고 강해지셔야 해요. 주께서 두 분을 보호하시고 능력과 희망을 주시고 모든 일에서 인도해 주셔서 두 분이 옳은 길에 고착하며 무사히 지낼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간청하세요. 저 역시 두 분을 위해 주께 간청하겠습니다. 그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우리가 정말 나약한 존재라는 걸 절실히 느낍니다. 이 순간까지도 제게는 생각을 바꿀 기회가 늘 있었습니다. 저는 일하고 싶지만, 도저히 총은 쏠 수가 없어요. 이제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께 저의 인사와 입맞춤을 전합니다. 저는 10만 번이라도 언제나, 부모님과 함께 있기를 열망하는 두 분의 게르하르트일 겁니다. 우리가 왕국에서 서로 다시 볼 때까지, 우리 네 식구 모두 다시 함께할 때까지. 기운 내시기 바랍니다.
백만 번의 입맞춤과 함께.
Queridos pais,
Bem, não há muito que dizer. Fui informado duas horas atrás, às 7 horas da noite, de que vou ser executado amanhã, às 5h50 da manhã. Chegou a hora, que o Senhor me dê forças. O espírito está disposto, mas a carne é fraca. Estou aqui dentro da cela sentado, é quase 1 hora da madrugada, dois homens estão aqui comigo, o tempo está passando rápido, estou escrevendo esta carta aos poucos, à medida que as ideias vêm à minha mente. Lá fora está frio, está nevando de novo. Que o Senhor lhes dê forças. Eu estou disposto a trabalhar, e já prometi oralmente e por escrito que estou disposto a trabalhar o máximo, sem reclamar. Mas eu simplesmente não posso atirar e tudo gira em torno disso. Agora, que seja feita a vontade do Senhor; o que tem de ser será. Sejam fortes, não deixem que isso os desanime, mas que vocês fiquem ainda mais unidos, não desistam. Ainda sou muito jovem e só consigo me manter fiel porque o Senhor me dá forças, e é isso que peço a ele. Recebi sua carta de 25 de março. Dia 25, as últimas notícias que recebi de vocês. Agora são 3h30 da madrugada. Nunca pensei que tudo isso aconteceria tão rápido. [Três linhas foram censuradas pelos nazistas.] . . . surpresa, assim ninguém sabe o que vai acontecer no próximo minuto. Vocês vão receber meus pertences. Canetas, papéis, cartas, dinheiro e roupa, chave e algumas outras coisas. Por favor, mandem um forte abraço para meus avós, Resi, o tio, a tia, vovô e vovó, o senhor e a senhora Hock. A todos os meus colegas de trabalho, todos os que me conhecem e todos os meus parentes. Pai, seja forte, não desista, não fique remoendo sua dor, mas seja forte na fé e em tudo mais. Mãe, seja forte, firme e apoiem um ao outro. Implore ao Senhor que ele te proteja, que te dê poder e esperança e que te oriente em tudo, para que a senhora continue no caminho certo e que nada de ruim te aconteça. Eu também vou orar por vocês. A hora está chegando, eu realmente me dou conta de como somos fracos. Até o momento, tive várias oportunidades de mudar de ideia. Eu quero trabalhar, mas simplesmente não posso atirar. Bem, agora vou terminar. Abraços e beijos, meus queridos pais, vou ser sempre o seu Gerhard, mais de cem mil vezes, queria muito estar com vocês. Mas logo nos veremos no Reino, onde nós quatro estaremos juntos de novo. Fiquem bem.
Um milhão de beijos.
유대인 대학살로 유명한 아유슈비츠 수용소에도 많은 신자들이 수감되었다. 1940년 6월부터 종전까지 5년 동안, 최소 110만명의 사람이 이곳으로 끌려갔는데 그중에는 400명 이상의 여호와의 증인이 있었는데,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국립 박물관 기록에 따르면, 최초로 아우슈비츠에 보내진 수감자들 가운데 여호와의 증인들이 있었으며, 그 수용소로 보내진 수많은 증인 가운데 35퍼센트 이상이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더불어 박물관 웹사이트에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의 역사에 관한 문헌에는 종교적 신념 때문에 수감된 여호와의 증인(수용소 기록에는 성경 [연구생]이라고 나옴)에 대해 간단한 언급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수감자들이 수용소의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 도덕적 원칙을 고수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볼 때 이들에게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은 서로 힘을 북돋워 주기 위해 매일 저녁 점호가 있기 전에 함께 만났으며, 다른 수감자들과 성경에 관해 토의하는 비밀 모임들도 조직하였다. 상당수의 수감자들이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고 한다.
1941년 나치에게 점령된 우크라이나에서도 격렬한 박해가 일어났는데, 여호와의 증인의 집들은 창문들이 박살나고, 많은 신도들이 심한 구타를 당했다. 겨울철에 어떤 신도는 성호(聖號)에 십자가를 긋지 않으려 한다는 이유로 찬물 속에 강제로 몇 시간 서 있거나, 막대기로 50대의 매를 맞기도 했다는 증언들이 있다. 이 기간 동안 나치 독일에 부역한 가톨릭과 개신교계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종종 고발했는데, 일례로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전 시간 봉사를 하던 일리아 호부차크가 가톨릭 사제의 밀고로 게슈타포에 의해 처형당하는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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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에 노이엔가메 강제 수용소를 짓는 일에 동원된 리하르트 루돌프. (지붕 위, 맨 오른쪽)
리하르트 루돌프란 신자는 나치 치하에서 9년간 수감 생활을 하면서 다섯 군데의 강제 수용소를 거쳤고, 그 가운데는 악명 높은 작센하우젠 수용소와 노이엔가메 수용소도 있었는데, 그 두 수용소에서 30만 명 이상이 수감 생활을 했으며 14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사망하였다. 1944년에 루돌프는 노이엔가메 강제 수용소의 부속 시설인 잘츠기터-바텐슈테드로 이송되었고, 종교적 신념 때문에 탄약 생산과 관련된 작업을 일체 거부했으며, 그로 인해 처형당할 위험에 처했다. 하지만 루돌프 씨의 종교적 신념에 감명을 받은 한 친절한 친위대 장교가 그를 식품 수송 트럭에 숨겨 준 덕분에 처형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8]
오스트리아에 있는 나치의 마우타우젠 강제 수용소에도 여호와의 증인 450명이 수감되었다. 수용자들을 인솔하던 사령관은 “성경 연구생은 여기서 한 사람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거다."라고 협박했지만, 신자 중 한 명인 마르틴 포에칭거는 다하우와 마우타우젠과 구젠에서 9년간 수감되었다가 살아남아서 나중에 뉴욕 브루클린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지도부 성원으로 봉사하였다. 그는 마우타우젠에 수감되어 있던 시절에 대해 “게슈타포는 우리의 믿음을 꺾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고 증언하였다.
마우타우젠에 있던 일부 증인들은 나중에 구젠으로 이감되었는데, 구젠 강제 수용소는 주로 “살인 수용소”로 운영되었다. 증인들은 강한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밤에 소규모로 모여 기억에 의존해서 성구들을 토의했으며, 한번은 성경을 한 권 구한 적도 있었는데, 그 성경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차례대로 돌려 보았으며 침대 밑에 숨겨 놓고 얼마 되지 않는 자유 시간에 읽곤 했다고 한다. 폴란드인 수감자 5명이 신자들과 성경을 공부했고 침례용으로 만든 길쭉한 나무 물통에서 비밀리에 침례를 받았다고 한다. 증인인 프란츠 데슈는 친위대 장교에게 성경의 소식을 전했고, 그 장교는 나중에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나치친위대(SS) 장교나 병사들이 여호와의 증인 수감자들의 설득에 넘어가 여증에게 동조하거나 신도로 입단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는 거다. 나치친위대 장교로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베벨스부르크 성에서 복무 중이던 고틀리에프 베른하르트의 경우, 니더하겐 강제수용소에 있던 에른스트 슈페히트란 여증 수감자에게 치료를 받았는데, 그가 자신에게 인사할 때 '하일 히틀러'라고 하지 않고 '안녕하십니까'라고 말하는 것에 의문을 품고 대화를 시도하였다. 슈페히트는 하일은 독일어로 구원이란 뜻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있기 때문에 하일 히틀러라고 말할 수 없다란 대답을 듣고 여호와의 증인에 호의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1945년 4월 연합군이 진군해오자 힘러는 니더하겐 수용소의 여증 신자들을 집단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베른하르트가 수용소 책임자를 제지하여 에른스트를 포함한 여증 신도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전후 이 장교는 아내와 함께 여증 신도가 되었다고 한다.
연합군의 승리로 세계 2차 대전이 막을 내릴 때까지 여호와의 증인들은 독일군과 소련군에게 전쟁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큰 박해를 받았
다. 이들이 강제 수용소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고 싶다면 아우슈비츠와 굴라그를 참조할 것.
3.2.2.3. 1945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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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5월 구젠 강제 수용소. 마르틴 포에칭거(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에 앉아 있음)가 석방 직후에 23명의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나치 독일이 패망하면서 독일 한정으로 수용소에 갇혀 있던 여호와의 증인들 중 생존자들은 강제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의 집총 거부 행위는 유럽 국가들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가 인정되는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평화 운동에도 기여하였다. 대한민국의 대체복무제 논의 때 찬성하는 쪽에서도 나치의 여증 탄압을 예시로 드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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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9월 18일, 작센하우젠에 수감되었던 890명 이상의 여호와의 증인을 기리는 명판이 이전에 수용소였던 건물의 바깥벽에 만들어졌고 디크만을 기리는 기념비 제막식도 있었다.
2009년에 독일 학생인 안-자클린 프리저가 연방 대통령이 ‘영웅’이라는 주제로 개최한 역사 경시대회(Heroes: Honored – Misunderstood – Forgotten)에서 수십 년 동안 사람들에게 포교 활동을 하고 차별의 폐해에 관해 자신이 몸소 경험한 점들을 알리기 위해 힘써온 리하르트 루돌프에 관한 전기와 인터뷰로 두 개의 상을 받았는데, 라인란트팔츠 주에서 수여하는 최우수상과 독일 연방에서 가장 우수한 세 명에게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고 한다. 루돌프는 2014년 102세의 나이로 독일에서 사망하였으며, 독일의 여호와의 증인 대변인은 “리하르트 루돌프 씨는 사랑하는 벗이자 동료 신자였을 뿐 아니라 매우 중요한 역사의 산증인이었습니다. 놀라운 믿음과 용기를 나타낸 그분의 생애는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됩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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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3일 일요일에는 오스트리아의 구젠 강제 수용소 기념관은 마우타우젠 강제 수용소와 구젠 강제 수용소에 나치가 수감시킨 약 450명의 여호와의 증인을 기리는 기념패를 공개하는 행사를 열었다. 오스트리아의 여호와의 증인 대변인은 “마우타우젠과 구젠 수용소에 수감된 증인들의 믿음과 용기를 이렇게 기억해 주는 것에 대해 우리는 감사합니다. 누구를 대하든 그리스도인다운 동정심과 친절을 나타내겠다는 그들의 결심은 악에 대한 승리였으며, 길이 기억할 만한 귀감이 됩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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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6일에 브란덴부르크 기념 재단은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에서 처형된 아우구스트 디크만의 사망 75주기를 기념하는 특별 행사를 열었다. 추모 행사는 디크만 씨 기념비가 있는 곳에서 시작될 것이며, 뒤이어 이전에 수감자들의 주방이었던 곳에서 연설이 있었고, 노이엥가메 강제 수용소 기념관 관장이자 작가인 데틀레프 가르베 박사가 초청 연사로 왔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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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아우슈비츠 해방 70주년 추모 대상에 여호와의 증인도 포함되었으며, 몇 개월 뒤인 2015년 5월 13일, 여호와의 증인인 게르하르트 슈타이나허를 기리는 기념패의 제막식에는 약 400명이 참석하였으며, 오스트리아 빈의 마이들링 구의 구청장인 가브리엘레 포타파가 거리에서 열린 이 기념패 제막식의 주 연사로 참석했다. 이 기념패는 슈타이나허 가족이 이전에 살았던 빈의 마이들링 구 레겐펠트가스 68번지 건물 외부에 설치되었다. 프로그램 주제는 “도저히 총은 쏠 수가 없어요”였는데, 이 표현은 슈타이나허가 나치에게 관대한 처분을 청원하며 했던 말이라고 한다. 계획된 행사에는 슈타이나허의 가족사를 보여 주는 전시회도 포함되었으며, 전시물 중에는 1976년에 발견된 작은 상자도 있었는데, 이 상자에는 이그나츠 슈타이나허와 루이제 슈타이나허 부부가 교도소에 있는 아들 게르하르트에게 보낸 28통의 편지 그리고 게르하르트가 부모와 함께 가진 신앙에 대해 확신을 표현하고 부모를 위로하려고 보낸 25장의 엽서와 편지가 들어 있었다. 빈의 주간지 「비너 베치르크스차이퉁」에 실린 한 기사에서는 이 행사를 보도하면서 이 일이 슈타이나허의 용기 있는 행동을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 낸 “훌륭한 기념 행사”이고, 슈타이나허가 “자기가 살면서 지켜온 원칙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라며 그를 칭송했다
3.3. 여담
여호와의 증인이 대한민국에서 가진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이 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나치와 일제가 여호와의 증인을 탄압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거나, 역사적 의미를 축소시키려고 한다.[9] 실제로 이 문서가 만들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극심한 문서 훼손 행위가 발생했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여호와의 증인은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전쟁범죄에 협력하길 거부하였으며, 그로 인해 이 종교의 교리가 어찌 됐든 간에 평화에 기여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