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바이마르 공화국 총선
1919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 이후 1933년 나치의 집권이전까지 실시된 총선 결과를 다루는 문서이다.
1차 대전 종전 이후 독일 11월 혁명에 의해 처음 수립될 바이마르 공화국의 의회를 선출하기 위해 시행된 선거. 독일 역사상 최초로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었으며, 여성들의 참정권이 인정되고 선거연령이 25세에서 20세로 낮아졌다. 당시 투표율은 83%를 기록하였다. 헤르만 뮐러가 이끄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37%득표율을 기록하며 승리하였으며 초대 총리로 필리프 샤이데만이 취임하였다.
제헌의회 수립 이후 제정된 헌법에 따라 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치러진 선거로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을 주도했던 독일 사회민주당, 독일 중앙당, 독일 민주당의 흑적황 연합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제1당인 사회민주당이 독립사회민주당과의 연정 수립에 실패하면서, 독일 중앙당을 중심으로 독일 민주당, 독일 인민당의 소수연정으로 콘스탄틴 페렌바흐 내각이 성립했다.
1924년 5월 4일 여권인 독일 중앙당,독일 인민당,독일 민주당,바이에른인민당의 의석은 소수연정이었던 이전보다 더 줄어들었지만, 사회민주당과 독일공산당 등 야권의 분열로 3당이 소수연정을 유지한다.
1924년 12월 7일 빌헬름 마르크스 총리의 중앙당을 중심으로 한 소수 내각이 야권의 반대로 연정 유지가 난항을 겪자, 7개월만에 의회를 해산하여 실시된 선거이다. 제2여당이었던 독일민주당을 중심으로 기존 여당이었던 중앙당, 독일민주당에 제2당이었던 독일국민당과 기존 연정이었던 바이에른인민당이 연합하여 한스 루터 내각이 성립하였다.
1928년 5월 20일 치러진 선거로, 오토 벨스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이 22석을 늘리며 선전하였다. 사회민주당과 독일민주당, 중앙당, 독일인민당이 연립해 헤르만 뮐러 내각이 성립하였다. 그리고 나치가 최초로 원내 진입에 성공하였다.
1930년 9월 14일에 치러진 선거로 헤르만 뮐러 내각이 내분과 세계 대공황으로 인한 디플레이션으로 붕괴되면서 치뤄진 선거이다. 초인플레이션과 초디플레이션이 연속으로 발생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에 실망한 국민들에 의해서 나치당과 공산당이 크게 선전하였고, 나치즘 광풍의 시작을 알리는 선거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민주정당들이 힘을 잃고 나치당과 공산당의 극한대립으로 치닫으며 의회에서 내각을 성립시키는 데에 실패하자 1932년 7월 31일에 다시 치뤄진 선거이다. 나치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처음으로 원내 1당에 등극하였다. 하지만 과반에는 미달하였고, 다른 정당들이 연정을 거부하면서 3개월 뒤 선거는 다시 치뤄지게 된다.
이전 선거에서 나치와 다른 정당간의 연정 거부로 내각이 성립되지 못하자 11월에 다시 치뤄진 선거이다. 나치당이 여전히 원내 1당이었지만 과반에는 실패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내각 수립에 어려움이 생겼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쿠르트 폰 슐라이허를 총리에 임명했다. 하지만 전 총리였던 프란츠 폰 파펜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기 위해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할 것을 계속해서 건의했다. 히틀러의 극단성에 총리 임명을 계속해서 거부하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파펜이 히틀러를 길들일 수 있다고 설득한 끝에, 결국 이듬해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하게 된다.[1]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에 임명되면서 의회 해산을 명령하여 다시 치뤄진 선거이다. 나치의 돌격대와 친위대가 사민당과 공산당 후보들을 공격하고 당사에 난입하며 테러를 자행하였다.[2] 중앙당 계열 신문에서 이를 비판하자 나치 정부는 중앙당까지 탄압하였다.
선거 6일 전인 1933년 2월 27일에는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발생하였다. 나치당 정부는 이를 공산당의 소행으로 몰면서 공산당이 정부 전복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선전했다.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에른스트 텔만 공산당 당수를 포함한 공산당 간부 4,000여명을 체포한다.
사회민주당은 탄압받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선거를 치뤘으나, 이전 보다 1개의 의석수만 감소하는 등 지지율은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나치당의 광풍을 막기에는 한참 역부족이었다, 나치당은 43%의 지지율을 기록해 최다 의석을 획득하며 압승하였고, 같은 흑백적 투쟁전선 소속인 독일 국가인민당의 의석수를 합치면 과반을 넘는 수치였다. 나치당과 국가인민당이 연립정부를 수립한 후 공산당 간부와 의원들을 체포한 채 사민당의 반대[3] 에도 불구하고 전권 위임법을 나치당과 국가인민당 그리고 가톨릭 중앙당등 나머지 정당들의 지지를 받아 찬성 441표 반대 94표로 통과시킨다. 이는 나치당 국회의원에 의해 의회 규칙 변경 등 비합법에 가까운 수단을 사용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 수권법이 통과되고 그 결과 나치는 반대 세력이나 유대인의 인권을 자유자재로 박탈할 수 있었고, 더 이상 어떤 세력도 나치당을 견제할 수 없었다. 이후 나치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해산되었고, 나치당만 존재할 수 있는 상태에서 선거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실상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선거이다.
1. 초대 총선
1차 대전 종전 이후 독일 11월 혁명에 의해 처음 수립될 바이마르 공화국의 의회를 선출하기 위해 시행된 선거. 독일 역사상 최초로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었으며, 여성들의 참정권이 인정되고 선거연령이 25세에서 20세로 낮아졌다. 당시 투표율은 83%를 기록하였다. 헤르만 뮐러가 이끄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37%득표율을 기록하며 승리하였으며 초대 총리로 필리프 샤이데만이 취임하였다.
2. 1920년 총선
제헌의회 수립 이후 제정된 헌법에 따라 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치러진 선거로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을 주도했던 독일 사회민주당, 독일 중앙당, 독일 민주당의 흑적황 연합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제1당인 사회민주당이 독립사회민주당과의 연정 수립에 실패하면서, 독일 중앙당을 중심으로 독일 민주당, 독일 인민당의 소수연정으로 콘스탄틴 페렌바흐 내각이 성립했다.
3. 1924년 5월 총선
1924년 5월 4일 여권인 독일 중앙당,독일 인민당,독일 민주당,바이에른인민당의 의석은 소수연정이었던 이전보다 더 줄어들었지만, 사회민주당과 독일공산당 등 야권의 분열로 3당이 소수연정을 유지한다.
4. 1924년 12월 총선
1924년 12월 7일 빌헬름 마르크스 총리의 중앙당을 중심으로 한 소수 내각이 야권의 반대로 연정 유지가 난항을 겪자, 7개월만에 의회를 해산하여 실시된 선거이다. 제2여당이었던 독일민주당을 중심으로 기존 여당이었던 중앙당, 독일민주당에 제2당이었던 독일국민당과 기존 연정이었던 바이에른인민당이 연합하여 한스 루터 내각이 성립하였다.
5. 1928년 총선
1928년 5월 20일 치러진 선거로, 오토 벨스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이 22석을 늘리며 선전하였다. 사회민주당과 독일민주당, 중앙당, 독일인민당이 연립해 헤르만 뮐러 내각이 성립하였다. 그리고 나치가 최초로 원내 진입에 성공하였다.
6. 1930년 총선
1930년 9월 14일에 치러진 선거로 헤르만 뮐러 내각이 내분과 세계 대공황으로 인한 디플레이션으로 붕괴되면서 치뤄진 선거이다. 초인플레이션과 초디플레이션이 연속으로 발생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에 실망한 국민들에 의해서 나치당과 공산당이 크게 선전하였고, 나치즘 광풍의 시작을 알리는 선거이다.
7. 1932년 7월 총선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민주정당들이 힘을 잃고 나치당과 공산당의 극한대립으로 치닫으며 의회에서 내각을 성립시키는 데에 실패하자 1932년 7월 31일에 다시 치뤄진 선거이다. 나치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처음으로 원내 1당에 등극하였다. 하지만 과반에는 미달하였고, 다른 정당들이 연정을 거부하면서 3개월 뒤 선거는 다시 치뤄지게 된다.
8. 1932년 11월 총선
이전 선거에서 나치와 다른 정당간의 연정 거부로 내각이 성립되지 못하자 11월에 다시 치뤄진 선거이다. 나치당이 여전히 원내 1당이었지만 과반에는 실패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내각 수립에 어려움이 생겼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쿠르트 폰 슐라이허를 총리에 임명했다. 하지만 전 총리였던 프란츠 폰 파펜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기 위해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할 것을 계속해서 건의했다. 히틀러의 극단성에 총리 임명을 계속해서 거부하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파펜이 히틀러를 길들일 수 있다고 설득한 끝에, 결국 이듬해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하게 된다.[1]
9. 1933년 3월 총선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에 임명되면서 의회 해산을 명령하여 다시 치뤄진 선거이다. 나치의 돌격대와 친위대가 사민당과 공산당 후보들을 공격하고 당사에 난입하며 테러를 자행하였다.[2] 중앙당 계열 신문에서 이를 비판하자 나치 정부는 중앙당까지 탄압하였다.
선거 6일 전인 1933년 2월 27일에는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발생하였다. 나치당 정부는 이를 공산당의 소행으로 몰면서 공산당이 정부 전복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선전했다.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에른스트 텔만 공산당 당수를 포함한 공산당 간부 4,000여명을 체포한다.
사회민주당은 탄압받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선거를 치뤘으나, 이전 보다 1개의 의석수만 감소하는 등 지지율은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나치당의 광풍을 막기에는 한참 역부족이었다, 나치당은 43%의 지지율을 기록해 최다 의석을 획득하며 압승하였고, 같은 흑백적 투쟁전선 소속인 독일 국가인민당의 의석수를 합치면 과반을 넘는 수치였다. 나치당과 국가인민당이 연립정부를 수립한 후 공산당 간부와 의원들을 체포한 채 사민당의 반대[3] 에도 불구하고 전권 위임법을 나치당과 국가인민당 그리고 가톨릭 중앙당등 나머지 정당들의 지지를 받아 찬성 441표 반대 94표로 통과시킨다. 이는 나치당 국회의원에 의해 의회 규칙 변경 등 비합법에 가까운 수단을 사용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 수권법이 통과되고 그 결과 나치는 반대 세력이나 유대인의 인권을 자유자재로 박탈할 수 있었고, 더 이상 어떤 세력도 나치당을 견제할 수 없었다. 이후 나치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해산되었고, 나치당만 존재할 수 있는 상태에서 선거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실상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선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