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각

 


申恪
(? ~ 1592년)
1. 개요
2. 임란 중
3. 대중 매체에서


1. 개요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 승리를 거두었으나, 장계 제때 안올려 처형된 비운의 장수.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평산(平山).
생년이 없는 것치고는 전반부 생에 대한 기록이 간략하나마 많은 편이다. 전란 전 중앙군과 지방군을 비롯한 무반직 요직이란 요직은 대부분 역임했으며, 이덕에 문반이라 군 지휘에 약한 도원수 김명원을 보좌 겸 실질적인 지휘를 담당할 부원수에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호부사(종3품), 상호군(정3품 당하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정3품 당상관), 영흥대도호부사(정3품), 경상도 방어사(종2품),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종2품), 팔도부원수(종2품) 등을 지냈다.

2. 임란 중



2.1. 해유령 전투


왜란이 터지자 신각은 부원수 자격으로 도원수 김명원과 함께 한강 방어 임무를 맡았으나 중과부적에 병사들의 사기도 땅에 떨어져 있어 방어전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도원수 김명원은 군을 물려서 재정비하려 했으나 도원수가 군을 물리려는 시도를 한 것만으로도 군이 와해되어 버렸다. 한강 사수가 실패로 돌아가자 신각은 최대한 병력을 수습해 양주로 후퇴한 뒤 유도대장 이양원,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혼과 합류했다.
그리고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일대인 해유령 근처에서 왜군 소부대를 기습, 70명을 참하여 '''임진왜란 중 조선군 최초의 육전 승리 기록'''을 세운다. 규모가 작아 무시되는 경향이 있지만 연일 패보만 이어지는 상황 중에 귀중한 승리임은 부정할 수 없다.

2.2. 억울한 죽음


그러나 당시 파천 과정에서 온 혼란으로 김명원과 신각은 연락이 두절되어 김명원은 조정에 이양원을 따른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쳤다고 장계를 올린다. 5월 18일 비변사에선 신각을 군법으로 다스릴 것을 청했고, 선조는 이를 받아들여 선전관을 보내 신각을 처형하게 한다. 그리고 잠시 후 해유령 전투의 승전보가 올라오자 그제서야 선조가 다시 선전관을 보내 신각을 죽이지 말 것을 명령하였으나, 이미 신각은 처형된 뒤였다. 예상 못한 대규모 침공으로 개전 이전 온건한 입장에 있는 신하들이 발언권을 잃고 전면 패주로 인해 일선 장수들에 대한 강경론이 제기된 시점인데 운 나쁘게 제대로 걸려버렸다.
당시 조정이 파악한 전세는 부산광역시, 김해시, 밀양시, 상주시, 충주시경상도와 그 경계에서 왜군을 막을 요충지들이 모조리 함락되었다는 사실과 싸우다 달아나는 장수들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것이다. 당장 왜군이 첫 침공한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불과 사흘만에 도성에 알려졌다. 이마저도 원래 봉수 체계로 따지면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봉화 전달은 기상 상태가 최고로 이상적일 때 2시간, 최대 12시간 정도 걸린다. 이를 감안하여 봉화의 일일 보고는 아침에 출발하여 해질녘에 목멱산 봉수대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짜여졌는데 봉화를 잘못 올려서 이렇게 늦은(?) 것.[1] 뒷날 병자호란 때도 증명되지만 양난 당시의 봉수 체계는 이론상으로나 설계대로 작동하는 신세가 되었다. 어쨌거나 당시 조선 조정은 의외로 사태를 굉장히 빨리 파악하고 있었는데 우선 17일 보고를 받자마자 즉시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해 상주로 보냈고, 곧바로 상주에서 이일의 패전 소식이 들리자마자 신립을 삼도순변사로 보내 패배해 도주한 이일 이하 말 안 듣는 자는 모조리 처형하라 명한다. 그리고 27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삼도순변사 신립이 패하자 그 소식이 하루만인 28일 조정에 들어가 벌써 파천 논의가 시작되고 있었다.[2] 이렇게 신속하게 정보를 받아 대응을 한다고는 하는데 정작 들어오는 정보들 다수는 어디가 어떻게 함락되고 일본군이 조선이 미처 대응하지 못할 정도의 미친 속도로 진격하고 있다는 사실과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도주하면 양반이고, 대부분의 장수들이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적전도주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이러다 보니 신각이 도주했다고 보고한 김명원을 크게 질타할 수가 없었다. 신각과 연락이 끊어진 상황에서 정황상 가장 합당한 사안으로 보고했기 때문이다. 선조 역시 도주했다는 보고를 받았고 비변사에서도 참수를 주장하니 달아난 장수를 참하라 명한 것 뿐. 왜 비변사에선 부원수란 고위직 급인 신각을 처형하라는 결정을 그렇게 쉽게 내리고, 반대한 신료가 아무도 없었을까? 도망간 장수가 너무 많아서 다 죽일 수는 없지만 본보기를 보여 일벌백계할 필요는 있다는 여론이 조정 대신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각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우호적인 의견은 혼란한 상황에서 연락이 제대로 닿지 못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주와 탄금대서 몇번이나 죽을 뻔했고 모진 고생 끝에 평양에서 거지꼴로 합류했던 이일조차 장계는 꼬박꼬박 제대로 올렸다는 걸 감안하면 신각의 책임이 없다고 하기는 힘들다. 해유령 전투의 결과가 신각 처형 전에 곧바로 조정에 알려졌고, 선조가 재빨리 처형 명령을 취소했음에도 늦은 것으로 봐선 전투 보고서인 첩서(捷書,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보고하는 글)를 신각이 조금만 더 일찍 올렸다면 신각은 얼토당않은 사형을 면하고 최초 승전의 공을 크게 치하받았을 것이다.
임진일록에 따르면 김명원은 최소한 12일까지는 신각의 소재지를 파악하고 있었는데 김명원 입장에서 신각의 소재지를 파악하지 못한 기간은 13일에서 15일(16일의 승전 보고는 올라갔으므로)이므로, 상관에게 3일간 소재를 알리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죽음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하여간 정말로 재수없게 죽은 인물. 징비록에서는 그에게 90살 노모가 있었기에 사람들이 더 안타깝게 여겼다고 서술되어 있으며, 선조 수정실록도 '신각이 비록 무인(武人)이기는 하나 나라에 몸바쳐 일을 처리하면서 청렴하고 부지런하였는데, 죄없이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겼다.'라고 적었다.
그가 왜란 이전 조헌의 말을 듣고 황해도 일대의 방비를 어느 정도 해 놓은 덕택에 훗날 황해도 연안성에 쳐들어온 일본군이정암이 이끄는 의병 부대가 물리칠 수 있었다. 당초 조헌은 선조에게 왜침이 있을 것이니 '''왜놈 사신 목을 베고 수도를 공격하소서'''라고 했으며 그 후 돌아와서 권징과 신각에게 편지를 보내 왜침이 있을 것이라 했는데 권징은 무시하고 신각은 받아들였다. 이때 권징은 평안감사, 신각은 연안부사였다. 사실 신각이 방비를 많이 했지만 이정암도 신각이 해놓은 방비에 더해서 준비를 해 놓았기에 버틸 수 있었다.
본디 유순한 성격으로 도원수라는 직책에 충실했을 뿐 전시 행정가로서도 성실한 데다 유능했고 남을 모함하거나 해코지하는 일이 없었던 김명원은 고의는 아니었다지만 멀쩡한 장군을 죽게 만든 데 책임을 느꼈는지, 정유년에 선조가 작정하고 이순신을 쳐내려 했을 때는 이원익, 정탁과 함께 이순신의 처형에 대하여 끝까지 동조하지 않았고 그의 구명과 재기용에 힘을 썼다.

3. 대중 매체에서


아무래도 신각이 잘 안 알려진 인물이다 보니 임진왜란을 다룬 매체에서는 무용에 뛰어나며 혈기왕성한 젊은 장수 이미지로 잘 등장한다. 마침 도원수 김명원이 당시로는 나이가 많은 노인이였고, 맹꽁이 서당 등 부정적인 평가가 많아 나이 든 무능높으신 분들 기믹으로 잘 등장해 그에 대조되게끔 신각은 젊게 나오는 편이다. 그러나 전란 전에도 여러 무관직을 역임한 것으로 보아 의외로 나이가 꽤 있을 수도 있다.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배우 박경환이 연기하였으며, 18화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는 신각의 이야기가 다루어졌다. 그러나 실제와는 달리 싸우지 않으려는 김명원과 의견충돌을 일으켜 겁쟁이 도원수의 말을 따를 수 없다며 나가 싸운 것으로 되어있고, 김명원은 명령불복종이라며 선조에게 장계를 올렸으며, 선조는 명령체계가 엉망이라 지금까지 진 것이라며 일벌백계로 삼아야 한다며 신각을 처형하라고 명령한다. 또한 모든 대신들이 신각의 처형을 찬성했던 것과는 달리, 여기서는 선조 혼자 처형을 고집하고 다른 신료들은 반대하는 것으로 나온다. 역사랑 달라 논란이 되었던 부분.
김성한의 소설 7년전쟁 2권 마지막 챕터 '비극의 장군 신각'에 등장하는데, 억울한 죽음 이후 선전관이 도착하자 신각의 부하들이 조정에서는 무슨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냐며 어이없어한다.

[1] 그나마 영남에서 한양 쪽이 아니라 영남에서 호남으로 이어지는 파발 체계는 신속하게 작동한 걸로 보인다. 4월 13일에 쳐들어온 왜적에 대한 공문을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4월 15일 밤에 받아볼 수 있었다.[2] 이건 선조실록의 기록이고, 수정실록은 각각 28일과 29일로 적고 있는데, 정확한 날짜와 관련없이 어쨌든 탄금대 전투 종료 하루만에 도성에 소식이 들어가 파천 논의가 벌어졌다는 것은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