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책
'''Weltpolitik'''
1891년 카이저 빌헬름 2세가 새로 도입한 독일 제국의 외교 정책. 건함 경쟁으로 상징되는 제국주의 일변도의 적극적인 대외 팽창으로, 기존까지 비스마르크가 전개한 현상 유지 및 소극적 대외 활동으로 점철된 현실 정책(Realpolitik)과는 대비된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더불어 절묘한 외교술로 독일 제국의 건국을 이끈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독일이 여기서 더 팽창을 추구하면 기존 유럽 열강들의 반발을 살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따라서 비스마르크가 권력을 쥔 기간 내내 독일은 유럽 내 세력 균형추를 자칭하면서 식민지 팽창에 소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특히나 비스마르크는 이 시기 전세계의 제해권을 장악한 패권국가였던 영국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1]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러시아 등 유럽 국가와 동맹을 맺으면서 보불전쟁에 패하여 독일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하지만 1890년, 헤게모니 싸움 끝에 비스마르크가 사임하고 젊고 혈기왕성한 빌헬름 2세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독일의 외교 정책은 180도 뒤바뀐다. 이 젊은 황제는 독일이 국력에 걸맞는 국제적 위상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강한 불만을 드러내었고, 국격을 드높이고자 적극적인 팽창주의 정책을 추구한다. 팽창을 향한 첫 단추는 해군력 증강이었다.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이 이끄는 독일 해군 수뇌부는 황제와 자본가들의[2] 적극적인 지원 아래 영국 해군력의 70%까지 독일 해군의 규모를 증강한다는 계획을 수립한다.
이러한 독일의 적극적인 해군 확장은 영국에게 상당한 위협이었다. 전통적으로 강한 해군력에 의존하여 대영제국을 수립한 영국 입장에서 독일의 도전은 도저히 묵인할 수 없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막강한 육군을 자랑하는 독일군이 유사시 해군을 동원해 영국 본토에 상륙할 수 있다는 공포심이 생겼던 것. 결국 영국 역시 '영국 해군은 세계 2,3위의 해군 국가의 해군력을 합친 것보다 규모가 커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해군법에 의거하여 해군력을 증강하면서 독일의 도전에 응했고, 이에 따라 양국의 건함 경쟁은 가속화된다.[3]
한편 독일은 식민지 확보에도 열을 올린다. 비스마르크 제도를 비롯한 태평양 일대의 군도에 식민지를 확보한 데 이어, 1897년에는 청나라로부터 산둥 반도를 조차한다. 그리고 독일은 중동 지역으로의 세력 확보에도 열을 올려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를 철도로 잇는 이른바 3B 정책을 수립한다.[4]
'''외교의 천재 비스마르크의 정책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빌헬름 2세의 야심찬 계획은 유럽 전역에 어그로만 끌고 외교적 고립을 유발하면서 실패하였다. 게다가 빌헬름 2세의 쓸데없는 의지 탓에 독일은 '''공격적 대외 정책 → 다른 열강들의 반발로 실패 → 깎인 체면을 회복하기 위해 새로운 외교적 어그로 → 실패'''라는 악순환만 계속 했고(...) 독일의 입지는 시간이 갈수록 약화되었다.
비스마르크가 통치할 시기 독일은 결코 고립된 국가가 아니었다.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같은 배를 탄 동맹의 일원이었으며, 러시아와는 상호 안보 조약을 맺었고, 영국-스페인-포르투갈과도 대서양 협정을 체결하여 프랑스를 완벽히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데 성공했었다. 하지만 세계 정책으로 인하여 국제 정세는 정반대로 전개된다. 독일의 팽창에 두려움을 품은 러시아는 프랑스와 러불동맹을 맺으면서 독일은 동서 양면에 적을 두게 되었고, 급기야 오랜 세월 고립주의를 견지해온 영국 역시 독일의 팽창에 겁을 먹고 수백년간의 경쟁자였던 프랑스, 러시아와 손을 잡고 삼국 협상을 성사시키면서 독일은 완벽한 왕따가 되어버린다.
삼국 동맹이 있기는 했지만, 이탈리아 왕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프랑스나 대영제국, 러시아 제국과 같은 열강과 상대가 안된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했다.[5] 삼국 동맹 자체도 결함이 심각했다.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가 앙숙지간이었던 것.(...) 오스트리아 제국 내부에 소위 미수복 지구라 불리는 이탈리아인 거주지역이 남아 있었다.[6] 때문에 이탈리아 내에서는 오스트리아를 무찌르고 리소르지멘토를 완전히 끝마쳐야 한다는 담론이 계속 나왔다. 군사적으로도 두 국가는 아드리아 해를 사이에 두고 건함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이탈리아 입장에서는 프랑스 역시 가상적국에 가깝기는 했다지만 어찌됐든 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의 군사적 기능에 의존하기보다는 방관에 가까운 자세를 취했다. 이렇듯 삼국 동맹은 제대로 된 군사동맹으로 작동하기 어려운 요소가 컸다.
그리고 빌헬름 2세의 이 현실성 없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의 가장 큰 원인'''이 되어 필연적으로 독일 제국을 양면전쟁의 위험에 빠뜨리게 만들었다.
1. 개요
1891년 카이저 빌헬름 2세가 새로 도입한 독일 제국의 외교 정책. 건함 경쟁으로 상징되는 제국주의 일변도의 적극적인 대외 팽창으로, 기존까지 비스마르크가 전개한 현상 유지 및 소극적 대외 활동으로 점철된 현실 정책(Realpolitik)과는 대비된다.
2. 배경
본디 수많은 군소 공국들이 자리 잡고 있던 중앙유럽 지역은 30년 전쟁 이래로 유럽 내에서 힘의 공백지임과 동시에, 프랑스-러시아-오스트리아 등 수많은 강대국들 사이에 위치한 완충지대였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대왕 이후로 눈부시게 성장한 프로이센 왕국이 1871년 이 지역을 통일하고 독일 제국을 수립하면서 이야기는 달라졌다.요컨대, 우리는 그 누구도 압도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양지바른 곳에 우리의 자리가 마련되기를 요구할 뿐이다.(Mit einem Worte: wir wollen niemand in den Schatten stellen, aber wir verlangen auch unseren Platz an der Sonne.)
1897년 12월 6일, 당시 독일 제국의 수상 베른하르트 폰 뷜로우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더불어 절묘한 외교술로 독일 제국의 건국을 이끈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독일이 여기서 더 팽창을 추구하면 기존 유럽 열강들의 반발을 살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따라서 비스마르크가 권력을 쥔 기간 내내 독일은 유럽 내 세력 균형추를 자칭하면서 식민지 팽창에 소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특히나 비스마르크는 이 시기 전세계의 제해권을 장악한 패권국가였던 영국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1]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러시아 등 유럽 국가와 동맹을 맺으면서 보불전쟁에 패하여 독일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하지만 1890년, 헤게모니 싸움 끝에 비스마르크가 사임하고 젊고 혈기왕성한 빌헬름 2세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독일의 외교 정책은 180도 뒤바뀐다. 이 젊은 황제는 독일이 국력에 걸맞는 국제적 위상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강한 불만을 드러내었고, 국격을 드높이고자 적극적인 팽창주의 정책을 추구한다. 팽창을 향한 첫 단추는 해군력 증강이었다.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이 이끄는 독일 해군 수뇌부는 황제와 자본가들의[2] 적극적인 지원 아래 영국 해군력의 70%까지 독일 해군의 규모를 증강한다는 계획을 수립한다.
이러한 독일의 적극적인 해군 확장은 영국에게 상당한 위협이었다. 전통적으로 강한 해군력에 의존하여 대영제국을 수립한 영국 입장에서 독일의 도전은 도저히 묵인할 수 없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막강한 육군을 자랑하는 독일군이 유사시 해군을 동원해 영국 본토에 상륙할 수 있다는 공포심이 생겼던 것. 결국 영국 역시 '영국 해군은 세계 2,3위의 해군 국가의 해군력을 합친 것보다 규모가 커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해군법에 의거하여 해군력을 증강하면서 독일의 도전에 응했고, 이에 따라 양국의 건함 경쟁은 가속화된다.[3]
한편 독일은 식민지 확보에도 열을 올린다. 비스마르크 제도를 비롯한 태평양 일대의 군도에 식민지를 확보한 데 이어, 1897년에는 청나라로부터 산둥 반도를 조차한다. 그리고 독일은 중동 지역으로의 세력 확보에도 열을 올려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를 철도로 잇는 이른바 3B 정책을 수립한다.[4]
3. 결과
'''외교의 천재 비스마르크의 정책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빌헬름 2세의 야심찬 계획은 유럽 전역에 어그로만 끌고 외교적 고립을 유발하면서 실패하였다. 게다가 빌헬름 2세의 쓸데없는 의지 탓에 독일은 '''공격적 대외 정책 → 다른 열강들의 반발로 실패 → 깎인 체면을 회복하기 위해 새로운 외교적 어그로 → 실패'''라는 악순환만 계속 했고(...) 독일의 입지는 시간이 갈수록 약화되었다.
비스마르크가 통치할 시기 독일은 결코 고립된 국가가 아니었다.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같은 배를 탄 동맹의 일원이었으며, 러시아와는 상호 안보 조약을 맺었고, 영국-스페인-포르투갈과도 대서양 협정을 체결하여 프랑스를 완벽히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데 성공했었다. 하지만 세계 정책으로 인하여 국제 정세는 정반대로 전개된다. 독일의 팽창에 두려움을 품은 러시아는 프랑스와 러불동맹을 맺으면서 독일은 동서 양면에 적을 두게 되었고, 급기야 오랜 세월 고립주의를 견지해온 영국 역시 독일의 팽창에 겁을 먹고 수백년간의 경쟁자였던 프랑스, 러시아와 손을 잡고 삼국 협상을 성사시키면서 독일은 완벽한 왕따가 되어버린다.
삼국 동맹이 있기는 했지만, 이탈리아 왕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프랑스나 대영제국, 러시아 제국과 같은 열강과 상대가 안된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했다.[5] 삼국 동맹 자체도 결함이 심각했다.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가 앙숙지간이었던 것.(...) 오스트리아 제국 내부에 소위 미수복 지구라 불리는 이탈리아인 거주지역이 남아 있었다.[6] 때문에 이탈리아 내에서는 오스트리아를 무찌르고 리소르지멘토를 완전히 끝마쳐야 한다는 담론이 계속 나왔다. 군사적으로도 두 국가는 아드리아 해를 사이에 두고 건함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이탈리아 입장에서는 프랑스 역시 가상적국에 가깝기는 했다지만 어찌됐든 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의 군사적 기능에 의존하기보다는 방관에 가까운 자세를 취했다. 이렇듯 삼국 동맹은 제대로 된 군사동맹으로 작동하기 어려운 요소가 컸다.
그리고 빌헬름 2세의 이 현실성 없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의 가장 큰 원인'''이 되어 필연적으로 독일 제국을 양면전쟁의 위험에 빠뜨리게 만들었다.
4. 관련 항목
[1] 이 시기의 독일을 상징하는 슬로건이 바로 '''식민지보다는 화학!!!''' 실제로 독일은 우수한 화학자들을 대거 배출하면서 화학산업에서 세계 정상에 선다.[2] 독일 자본가들이 해군력 증대를 환영한 이유는 크게 3가지이다. 우선 해군력 증대 과정에서 각종 국가 사업 수주 등을 통해 떡고물이 많이 떨어질 것이 자명했으며, 또한 식민지를 개척하면 그 식민지는 독일의 상품을 내다 팔 수 있는 독점적인 시장이 될 수 있었다. 또한 독일의 부르주아들은 프로이센의 융커들을 지극히 혐오했기 때문에, 융커들이 대거 자리잡은 육군을 견제하고자 해군 확대를 지지해줬다.[3] 결론적으로 건함 경쟁은 영국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애초에 독일이 단기간에 전통의 해군 강국 영국을 따라잡는게 그리 녹록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무리한 해군 증강으로 인해 재정 적자가 심각해졌기 때문. [4] 이 3B 정책은 중동에 이해관계가 깊었던 러시아와 영국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는 바람에 지지부진해진다. 천신만고 끝에 독일은 1914년 6월 영국을 설득하는데 성공하면서 드디어 계획을 실행에 옮기나 싶었는데, 첫 삽도 뜨기 전인 같은 해 7월 1차대전이 터지면서 망했어요.[5] 이탈리아는 열강 최약체 취급을 받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GDP 규모 자체는 프랑스와 엎치락뒤치락할 정도로 잠재적 국력은 괜찮았다지만 군사력 면에서는 반세기 전 빈 체제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약화된 상태였다.[6] 트렌토 및 쥐트티롤, 이스트리아 반도, 달마티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