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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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회의의 기록화. 이 그림은 헨리 키신저의 1994년 저서 <외교>(Diplomacy)의 표지에도 실렸다.
앞줄 우측에서 악수를 하고 있는 사람 가운데 왼쪽 인물이 비스마르크다.
"작금의 유럽은 화약고이고, 지도자들은 무기고 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뿐이야. 작은 불씨 하나가 우리 모두를 집어삼킬 전쟁을 일으킬 거야. 언제 그 폭발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일어날지는 말해줄 수 있지. '''발칸에서 벌어질 저주받을 바보짓'''이 그 폭발을 일으킬 거야." - 오토 폰 비스마르크
1. 개요
1878년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종결 이후 산 스테파노 조약의 체결로 인해 형성된 강대국 간의 대립을 조정하고자 같은 해 베를린에서 열린 열강 간 조정회의이다.
2. 배경
19세기 중반 이후로 발칸 반도는 유럽 열강 사이의 각축장이었다. 러시아 제국은 범슬라브주의를 기치로 발칸 반도에 거주 중인 슬라브족들을 규합해 남하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이것을 막고자 했다. 이러한 대립으로 생긴 가장 대표적인 사태가 1853년부터 1856년까지 3년간 진행된 크림 전쟁. 크림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은 패하여 개혁을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의 세르비아인들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목적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보스니아 지역의 반란에 호응해 불가리아인들 역시 반란을 일으키자 오스만 제국은 무자비한 탄압으로 대응한다. 이에 러시아 제국은 슬라브족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1877년에서 1878년까지 2년간 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은 러시아 제국의 압승으로 끝났고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맺어진 산 스테파노 조약의 결과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세르비아가 독립국으로 인정된 것은 물론이고 불가리아 역시 사실상의 독립국이 된다.
이러한 러시아 제국의 남진은 기존 유럽의 강대국들에게는 결코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가 중동 지역에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침해할까봐 두려웠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자신들의 발칸 반도에 대한 영향권을 침해받는다고 여겼기에 매우 불편해했다.
이에 독일 제국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주도 하에 베를린 회의를 개최하게 된다.
3. 왜 비스마르크는 베를린 회의를 개최하였는가?
독일 제국은 발칸 반도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외교적 중재를 자처한 까닭은, 유럽에서 평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독일 제국에게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보불전쟁 이후 독일의 외교정책을 요약하자면 '프랑스 왕따시키기'였다. 이 중에서도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맺은 3제 동맹이 핵심이었다. 문제는, 유럽 내에서 분쟁이 생기면서 전쟁과 같은 혼란이 생기면 프랑스에게 우방국이 생길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것. 이는 비스마르크에게 최악의 상황이었으므로 이를 막고자 베를린 회의를 개최한 것이다.
또한 독일은 발칸 반도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중재자로 활동하면서 '평화를 사랑하는 독일', '영토욕심이 없는 독일'과 같은 이미지를 각국에 심어줄 수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매력적인 요인이었다. 실제로 비스마르크는 베를린 회의 개최 연설에서 "우리 독일은 이 위기상황을 통해 어떤 이득도 얻으려고 시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헨리 키신저는 이 시기 독일이 고립주의를 채택하기에는 너무나 강대국이 되었기 때문에, 최대한 잠재적으로 적국이 될 수 있는 국가들과 관계를 만들어놓고자 베를린 회의를 개최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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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스테파노 조약에 따른 각국의 영토 변화(왼쪽)와 베를린 회의를 통해 확정된 각국의 영토 변화(오른쪽)
- 루마니아 왕국, 몬테네그로 공국, 세르비아 왕국은 산 스테파노 조약과 마찬가지로 독립국으로 승인되나 산 스테파노 조약에서 각국에게 배정되었던 일부 영토를 오스만에게 반환한다. 여기서 루마니아 왕국은 도브루자 지역을 얻는 대신 크림 전쟁에서 얻은 남부 베사라비아 지역을 러시아 제국에게 반환한다.
- 러시아 제국 역시 기존의 조약대로 카르스, 아르다한 등의 아르메니아 지방 일부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할양받는다. 대신 원래 할양하기로 되어있던 베야지트와 엘레슈키르트 등의 일부 지역은 러시아가 오스만에게 반환한다.
- 불가리아는 러시아의 위성국이 아니라 오스만 제국 치하로 돌아간다. 대신에 자치를 허용한다.[1]
- 보스니아는 오스만 제국의 치하 아래 남으나, 오스만의 나머지 영토가 고립되어 있는고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관리한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와 나머지 오스만 영토를 연결하는 산자크[2] 지역에 군대를 주둔할 권리를 갖는다.[3]
- 원래 불가리아에 할양하기로 되어 있던 동루멜리아와 마케도니아는 너무나 복잡한 민족구성으로 인해 자치를 허용하되, 오스만 제국 안의 영토로 존속한다.[4]
- 테살리아와 에피루스 일대에 대한 그리스의 영유권 주장을 인정하며 그리스와 오스만 제국 양국은 조속히 영유권 분쟁을 해결한다.[5]
- 각국은 자국 영토 내에 존재하는 소수 민족들에게 법적인 권리를 보장한다.
- 조약의 일부는 아니나, 키프로스는 이 회의에서 오스만 제국을 지지해준 대가로 영국이 실효지배하게 된다.[6]
5. 여파
비스마르크는 이 베를린 회의를 통해 발칸반도를 둘러싼 서유럽 열강과 러시아 간의 갈등을 간신히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는 봉합책에 불과했으며, 이 때 해결되지 않고 억눌러진 발칸 반도의 민족 분포 및 국경 문제는 발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비극을 겪은 끝에야 간신히 일단락 되었으며, 결국 70년 뒤에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경계선 바깥에 있는 유고슬라비아 각 구성국 인원들이 모두 학살'''당하고 나서야 분쟁이 마무리되었다. 크로아티아 일대에 살던 세르비아인들은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이 무너지면서 1/3은 크로아티아한테 학살, 2/3은 세르비아로 추방되었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살고 있던 무슬림 보슈냐크인들은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양쪽에서 대대적으로 학살당한 끝에 데이턴 협정으로 각 민족별로 구획을 정하고 게토처럼 거기서만 거주하게 되었다. 게다가 몰도바(위에 나온 베사라비아) 문제는 '''2021년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물론 저 시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발칸반도의 모든 민족들을 각각 독립시키는 것 또한 전혀 현실적이지 못했다. 설령 (이미 비현실적인 가정이지만) 강대국들이 대승적으로 양보해서 발칸반도 민족들을 각각 독립시켜주려 하더라도 이미 여러 민족들이 같은 지역에서 서로 뒤섞여서 살고있었으므로 어떻게 국경선을 정하든지 다수민족과 소수민족이 같은 국경 내에 공존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원래부터 태생 자체가 10개가 넘는 민족들이 포함된 다민족 국가였고, 헝가리처럼 독자적인 의회가 존재하고 자치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지역들도 있었다. 통치에 어려움이 많긴 했지만 그럭저럭 그런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대안 역할은 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는 이 때 차지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두고두고 골치를 앓다가 결국 황태자가 암살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비스마르크가 언급한 이 "바보짓"을 기폭제로, 전 유럽은 전화에 휩싸이게 된다.
오스만 제국은 더 이상 유럽 열강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는 게 분명해졌고, 여전히 자신의 영토를 지킬 힘이 없는 상태로 붕괴가 약간 늦춰지기만 했지 결국 붕괴가 조만간 일어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 회의는 결국 오스만 입장에서도, 또는 발칸 반도 민족들의 입장에서도 외교적 미봉책에 불과하게 되었다.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는 나름대로 상당한 이익을 보았다. 하지만 독일은 비스마르크가 실각하고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 만큼의 외교적 수완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붕괴를 피할 수 없었다.[7]
러시아 제국은 300년에 걸쳐 지리한 러시아-튀르크 전쟁을 펼친 끝에, 드디어 대승을 거두고 막대한 전리품을 얻는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또다시 서유럽 국가들의 방해에 의해 남방 진출을 봉쇄당했으니 러시아 입장에서는 분노가 치밀어오를 수 밖에. 베를린 회의에 참가한 러시아 외무장관 알렉산드르 고르차코프는 베를린 회의를 자신의 외교관 경력상 최악의 날이었다고 회상했고, 러시아 전역이 서유럽에 대한 분노로 치를 떨 정도였다. 그리고 3제 동맹은 박살나게 된다.
이렇게 보면 비스마르크 역시 낭패를 본 것이 아닐까 싶지만, 노련한 비스마르크는 러시아가 분노에 차서 3제 동맹을 탈퇴하더라도 다른 유럽 국가 중 그들의 우방이 되어줄 국가가 없기에 러시아가 다시 3제 동맹으로 복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까지 감안하고 회의를 진행한 것이다. 실제로 3제 동맹은 1881년에 복구된다. 즉, 비스마르크는 3제 동맹과 유럽 내 강대국 간 균형 유지라는 양대목표를 동시에 성취한 셈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는 앞으로 독일이 처할 대외정치의 모순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했다. 우선 비스마르크의 '우리 독일은 이 위기상황을 통해 어떤 이득도 얻으려고 시도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태도는 전 유럽을 만족시킬 만한 게 아니었다. 특히 러시아 제국은 독일 제국의 처신에 매우 분노했는데, 러시아 황실은 독일(프로이센) 황실과 오랜 친분을 맺고 있었으며[8]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러시아가 친프로이센 정책과 중립적인 태도로 도움을 준 일 때문에 프로이센의 후신인 독일이 러시아에게 이득을 줄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독일에게 뒤통수를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유럽에 대해 러시아 전역이 분노했지만 특히 독일을 향한 분노는 심각해서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독일제국의 카이저인 빌헬름 1세에게 분노의 서한을 보내고 독일-러시아 접경지대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할 정도였으며, 이는 독일과 러시아 양측 모두 서로의 관계를 재검토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삼제동맹 복구는 순전히 비스마르크 개인의 외교 역량에 따른 결과이지 모순된 독일의 대외정치 상황에 대한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게다가 독일 내부 문제로 인해 그 복구된 삼제동맹 속에도 모순은 존재했다. 당시 유럽이 그랬듯 독일에서도 민족주의가 기승하여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은 그저 '대독일주의'의 일부 정도로만 인식되었고, 러시아와의 동맹 또한 러시아가 독일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것 때문에 독일에 대한 신뢰가 깨진 상황에서 우방이 없어 꾸역꾸역 삼제동맹에 복귀한 것에 불과했던게 다시 재구축된 삼제동맹의 실태였다. 그런 상황에 있었으면 어떻게든 다시 독일은 러시아와의 신뢰구축에 적극 나섰어야 했지만, 지배층인 융커들의 입김에 영향을 받은 독일 정부는[9] 이들의 경제적 기반을 위협하는 러시아 곡물에 관세를 매기는 등 사실상의 대러시아 경제 제재를 지속했다. 당연히 러시아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이를 갈 수밖에 없었지만 전 유럽 국가로부터 왕따 취급을 받아 견제받고 있었으므로 울며 겨자먹기로 독일과의 동맹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그나마 비스마르크 재임기에는 독일이 처한 모순된 외교안보 상황을 그의 절묘한 외교술로 억누를 수 있었으나, 결국 빌헬름 2세의 제위와 비스마르크의 퇴임 이후에는 이 모순이 폭발하고 만다.[10] 빌헬름 2세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편만을 들어주고 러시아와의 재보장 조약 연장을 거부하며 러시아를 배척하자, 이에 러시아는 독일 통일 후 꾸준히 독일 상대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프랑스와 접촉하여 1894년 동맹을 맺게 된다. 영국과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며 프랑스를 고립시키자는 비스마르크의 외교 대전략은 이렇게 붕괴되었으며, 그렇게 독일은 양 국가에 의해 포위당하게 되었다. [11]
독일 입장에서 프랑스는 독일 통일 이후 쭉 적국이었다 치고, 권력층인 융커들의 이익을 위해 러시아까지 적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면 '''최소한 영국하고는 친하게 지냈어야 했다.''' 하지만 세계 정책으로 대변되는 빌헬름 2세의 적극적인 제국주의, 팽창주의 성향은 당시 세계의 패권을 쥐고있는 영국의 심기까지 제대로 건드렸다. 원래 영국은 프랑스와는 몇백년 동안 서로 대립하는 사이었고, 러시아와도 유라시아 대륙 곳곳에서 대립하는 사이었으나 독일의 국력이 성장하고 독일이 팽창주의를 부르짖음에 따라 영국은 1904년 프랑스와 협상을 맺었고 1907년 러시아와 협상을 맺어 삼국 협상이 형성된다. 결국은 독일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고 이는 독일 제국의 몰락 중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6. 관련 문서
[1] 이후 1908년 완전 독립한다. 그러나 현대 불가리아에서는 산 스테파노 조약으로 자치를 시작한 시기를 독립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2] Sandžak.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사이에 위치한 좁은 회랑 지역으로 지명은 오스만 제국의 행정구역 이름인 예니 파자르 산자크(Yeni Pazar sancağı)에서 유래했다.[3] 이후 보스니아는 1908년에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을 빌미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로 합병되며 산자크는 1912~1913년의 발칸 전쟁의 결과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절반으로 분할한다.[4] 이후 동루멜리아는 1885년 불가리아에게 합병되고 마케도니아는 1912~1913년의 두 차례의 발칸 전쟁의 결과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이 갈라먹는다.[5] 베를린 회의에서 다른 안건은 다 수용했던 오스만은 이 안건 만큼은 죽어도 반대를 외쳤다. 그 결과 그리스와 오스만은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으며 강대국들은 그리스에게 영유권 주장을 일부 포기하라고 압력을 가해 1881년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체결, 그리스는 테살리아의 대부분과 에피로스 남부의 아르타 지방을 손에 넣었다.[6] 이후 1914년에 영국에 합병된다.[7] 물론 비스마르크의 유럽 구상 자체가 그와 같은 천재가 아니면 유지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8] 러시아 황실인 로마노프 가문 자체도 독일계 혈통을 지닌 가문이었으며, 귀족들도 독일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또한, 독일인이 차르가 되기도 했다.[9] 비스마르크 본인부터가 융커였고, 이들은 독일제국의 전신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프로이센 공국,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 프로이센 왕국 시절에 이르기까지 대대손손 막대한 권력과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10] 애당초 빌헬름 2세가 지나친 욕심으로 크게 말아먹은 것이지 비스마르크의 전략 자체가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최소한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를 여전히 중용하고 그 이후에도 그냥 그러한 기조를 유지했다면 이후의 유럽 정세는 독일에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을 막고 독일이 분단되지 않고 지금도 입헌군주국으로 남았을 수도 있었다.[11] 사실 러불 동맹 자체가 매우 어색한 형태이긴 했다. 미국에 이어 유럽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였던 프랑스가 제국이자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국가인 러시아와 동맹을 맺은 것이다. 전혀 다른 성격의 두 국가가 단지 전략적인 이유로 동맹을 맺게한 것인데다가, 게다가 핵심 열쇠를 쥐고있던 영국은 그 이후 러일전쟁 때까지도 기본적으로 러시아와 대립적이었다. 영국이 러영협상 후에도 1차대전 개전 막판까지 중립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