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레 가브리엘 리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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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레 가브리엘 리케, 미라보 백작
Honoré Gabriel Riqueti, comte[1] de Mirabeau
(1749~1791)
프랑스의 정치가. 프랑스 혁명 초기의 중심 인물 중 하나였다.
혁명 초기에 구성되었던 국민 의회의 의장을 맡았다.
1749년 3월 9일에 프랑스의 하급 귀족이자 경제학자인 미라보 후작 빅토르 리케[2] 의 아들로 태어났다. 3살 때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흉터가 남았으며 몸집은 크고 땅딸막했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의 손에 의해 18살 때 군사학교로 보내져 조셉 라그랑주[3] 등에게 지도를 받고 길버트 엘리엇[4] 등과 같이 수학한다.
그는 당시의 귀족들 중에서는 드물게 자유주의적 견해를 지니고 있었으며, 비상한 웅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좋아하고 방탕하고 낭비가 심한 성격 덕에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심지어는 아버지의 손에 의해 귀족 사회에서 추방당하기도 했다.[5] 이후 그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각종 신문에 글을 기고하였고, 옆 나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에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동문인 길버트 엘리엇, 벤자민 프랭클린[6] , 등의 인사들과 사상적인 교류를 나누었다. 이후 1788년에는 자주 드나들던 프로이센을 바탕으로 한 '프리드리히 대왕 하의 프러시아 군주국에 대해'라는 책을 내놓으면서 '더욱 완전한 자유'가 국가의 번영에 도움이 된다는 이론을 주장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어느 정도 명성을 얻어 삼부회의 3신분의 대표 자리를 획득한다.[7] 이후 1789년에는 '프로방스 신문'을 발간하여 본인의 사상을 기고하기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면서 3신분의 대표에 있던 미라보는 혁명의 중심 인물로 떠오르게 된다. 그는 국민 의회의 수장이 되었으며,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의 작성과 가결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영국식 혁명을 지향하였으며, 프랑스 혁명이 이에 기반하여 온건하게 진행되기를 원하였다.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폭동에 대해서는 강경한 진압을 하였다.
하지만 1790년이 되면서 프랑스의 상황은 안 좋아지기 시작한다. 주위의 여러 나라들이 왕을 권좌에서 끌어낸 프랑스의 상황을 시시각각 지켜보고 있었고, 프랑스 내에서도 자코뱅당을 비롯한 과격 세력들이 슬슬 정치력을 갖추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라보는 자코뱅당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온건파에 속했으며, 정작 이후의 과격파들은 그를 당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국민위병의 사령관으로 군사력을 갖고 있던 라파예트와 연대하여 힘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지만, 최대한 의회의 범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 루이 16세 측에서도 미라보에게 손을 쓰기 시작한다.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행진이 벌어지자 왕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구를 통해 미라보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미라보는 왕당파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는 그 대신 왕과 의회의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그는 왕이 베르사유를 떠나지 못하도록 보호하였는데, 이는 파리에서 왕이 분쟁이 휘말림을 막는 것과 동시에 왕이 혁명을 피해 피신하는 것을 막는 의도도 있었다.[8] 한편으로 그는 의회에서 주장하는 봉건제 폐지를 지지했으나, 왕정의 폐지에는 반대하였다. 그의 뛰어난 언변을 바탕으로 미라보는 이 역할을 의장을 맡은 동안 잘 수행해냈다. 하지만 그는 왕을 혁명의 편으로 돌아서도록 설득하기 위한 일종의 '당근'으로 성직자들이 교회가 왕에게 충성 맹세를 하도록 하는 법안을 제출하게 되고, 이는 성직자들이 국민 의회에 등을 돌리는 결과가 되어 국민 의회를 크게 분열시키고 만다. 여기서 더 나아가 미라보는 군사를 동원하여 이를 강제로 수행하게 함으로써 성직자들을 지지하던 지방 농민들이 반혁명운동에 가담하는 결과까지 낳고 만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그 동안의 방탕한 생활이 독이 되어 그는 1791년 4월 2일 밤에 파티를 벌이고 다음 날에 42세의 나이로 급사하고 만다. 그리고 그의 부재는 왕과 의회 사이의 대화 창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했으며, 그 결과 프랑스 혁명은 본격적으로 과격화되기 시작한다.
사후 팡테옹에 안장되었으나, 라이벌이었던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그와 왕실 사이의 연결 관계가 발각되어[9] 1793년 11월에 그의 유해는 팡테옹에서 철거되고 만다. 그 후 유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진게 없어서 불명. 참고로 역대 팡테옹 매장자중 유해가 강제로 철거된 유이한 사람.[10]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 미라보 백작
Honoré Gabriel Riqueti, comte[1] de Mirabeau
(1749~1791)
1. 개요
프랑스의 정치가. 프랑스 혁명 초기의 중심 인물 중 하나였다.
혁명 초기에 구성되었던 국민 의회의 의장을 맡았다.
2. 초기 생애
1749년 3월 9일에 프랑스의 하급 귀족이자 경제학자인 미라보 후작 빅토르 리케[2] 의 아들로 태어났다. 3살 때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흉터가 남았으며 몸집은 크고 땅딸막했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의 손에 의해 18살 때 군사학교로 보내져 조셉 라그랑주[3] 등에게 지도를 받고 길버트 엘리엇[4] 등과 같이 수학한다.
그는 당시의 귀족들 중에서는 드물게 자유주의적 견해를 지니고 있었으며, 비상한 웅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좋아하고 방탕하고 낭비가 심한 성격 덕에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심지어는 아버지의 손에 의해 귀족 사회에서 추방당하기도 했다.[5] 이후 그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각종 신문에 글을 기고하였고, 옆 나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에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동문인 길버트 엘리엇, 벤자민 프랭클린[6] , 등의 인사들과 사상적인 교류를 나누었다. 이후 1788년에는 자주 드나들던 프로이센을 바탕으로 한 '프리드리히 대왕 하의 프러시아 군주국에 대해'라는 책을 내놓으면서 '더욱 완전한 자유'가 국가의 번영에 도움이 된다는 이론을 주장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어느 정도 명성을 얻어 삼부회의 3신분의 대표 자리를 획득한다.[7] 이후 1789년에는 '프로방스 신문'을 발간하여 본인의 사상을 기고하기 시작한다.
3. 프랑스 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면서 3신분의 대표에 있던 미라보는 혁명의 중심 인물로 떠오르게 된다. 그는 국민 의회의 수장이 되었으며,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의 작성과 가결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영국식 혁명을 지향하였으며, 프랑스 혁명이 이에 기반하여 온건하게 진행되기를 원하였다.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폭동에 대해서는 강경한 진압을 하였다.
하지만 1790년이 되면서 프랑스의 상황은 안 좋아지기 시작한다. 주위의 여러 나라들이 왕을 권좌에서 끌어낸 프랑스의 상황을 시시각각 지켜보고 있었고, 프랑스 내에서도 자코뱅당을 비롯한 과격 세력들이 슬슬 정치력을 갖추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라보는 자코뱅당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온건파에 속했으며, 정작 이후의 과격파들은 그를 당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국민위병의 사령관으로 군사력을 갖고 있던 라파예트와 연대하여 힘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지만, 최대한 의회의 범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 루이 16세 측에서도 미라보에게 손을 쓰기 시작한다.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행진이 벌어지자 왕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구를 통해 미라보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미라보는 왕당파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는 그 대신 왕과 의회의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그는 왕이 베르사유를 떠나지 못하도록 보호하였는데, 이는 파리에서 왕이 분쟁이 휘말림을 막는 것과 동시에 왕이 혁명을 피해 피신하는 것을 막는 의도도 있었다.[8] 한편으로 그는 의회에서 주장하는 봉건제 폐지를 지지했으나, 왕정의 폐지에는 반대하였다. 그의 뛰어난 언변을 바탕으로 미라보는 이 역할을 의장을 맡은 동안 잘 수행해냈다. 하지만 그는 왕을 혁명의 편으로 돌아서도록 설득하기 위한 일종의 '당근'으로 성직자들이 교회가 왕에게 충성 맹세를 하도록 하는 법안을 제출하게 되고, 이는 성직자들이 국민 의회에 등을 돌리는 결과가 되어 국민 의회를 크게 분열시키고 만다. 여기서 더 나아가 미라보는 군사를 동원하여 이를 강제로 수행하게 함으로써 성직자들을 지지하던 지방 농민들이 반혁명운동에 가담하는 결과까지 낳고 만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그 동안의 방탕한 생활이 독이 되어 그는 1791년 4월 2일 밤에 파티를 벌이고 다음 날에 42세의 나이로 급사하고 만다. 그리고 그의 부재는 왕과 의회 사이의 대화 창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했으며, 그 결과 프랑스 혁명은 본격적으로 과격화되기 시작한다.
사후 팡테옹에 안장되었으나, 라이벌이었던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그와 왕실 사이의 연결 관계가 발각되어[9] 1793년 11월에 그의 유해는 팡테옹에서 철거되고 만다. 그 후 유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진게 없어서 불명. 참고로 역대 팡테옹 매장자중 유해가 강제로 철거된 유이한 사람.[10]
4. 기타
- 젊은 시절 여러 신문에 글을 기고한 경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글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특히 동시대의 인물인 토마스 제퍼슨이 그의 글솜씨를 특히 부러워하고 아꼈다고 한다.
- 웅변 능력도 뛰어났다고 하며, 절제되고도 친절한 말솜씨를 바탕으로 간단히 대중들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방탕하고 낭비벽이 심한 젊은 시절의 습관을 버리지 못해 이 점이 그의 커리어에 장애물로 작용한 적도 많았다고 한다.
- 그의 죽음에는 왕이나 과격파 등의 다른 세력이 개입했다는 설이 꾸준히 제기된다. 특히 왕이 그를 독살했다는 가설이 많다.
- 진정남 나폴레옹에선 성병을 앓고 있어 이걸로 죽었다고 나온다. 그리고 나중에 왕실과 연루된 게 드러나자 시체는 무덤에서 꺼내져 길거리에서 내뒹굴어 썩어가는 비참한 신세를 당한다.
-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서는 프랑스 암살단의 그랜드 마스터. 즉, 멘토로 등장. 실제처럼 온건한 혁명을 지향하는 것으로 그려지며, 템플 기사단과도 전쟁이 아닌 대화, 협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설을 따라 독살당해 죽는다. 단, 범인은 왕도 과격파도 아닌 다른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팡테옹에 안치된 그의 유체에서 암살단 유물을 가로채려는 로베스피에르와 템플 기사단보다 먼저 유물을 찾아야하는 협동 미션도 있다.
- 성녀전기에서는 실제 역사상보다 오래 살아서 주인공에게 도움을 준다.
[1] 불어로 백작을 뜻한다.[2] 대표적인 중농학파 경제학자 중 하나로 경제학의 역사에 있어서 최초의 '학파'를 이루었던 사람 중 하나.[3] 물리학도라면 누구라도 알 라그랑주 역학의 창시자.[4] 당대 영국의 거물 정치가로, 의회 의장을 맡았다.[5] 심지어는 사드 후작과도 친했다고 한다![6] 미국 독립 전쟁이 한창이던 시점이며, 당시 그는 프랑스에 외교관으로 머물고 있었다.[7] 그의 태생은 귀족이었으나 앞서 언급된 여러 이유로 그는 귀족으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고, 본인도 귀족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8] 이게 괜한 우려가 아닌게 미라보가 죽고 몇달도 안되어서 터진게 바렌느 배신사건이다.[9] 루이 16세에게 뇌물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오고간 편지가 튈르리 궁에 숨겨져 있다가 밝혀진 것이다.[10] 또다른 사람은 장폴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