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테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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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위인들이 안장되는 국립묘지이다.[2] 비슷한 성격 건물로, 군사적인 업적을 가진 위인들이 안장되는 앵발리드가 있다.'''AUX GRANDS HOMMES LA PATRIE RECONNAISSANTE'''
'''조국이 위대한 사람들에게 사의(謝意)를 표하다.'''
입구에 있는 삼각형 부조 아래에 글귀
2. 역사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같이 본래는 교회였으나 여러 과정을 거쳐 프랑스의 역사적 위인들이 안장된 국립묘지가 되었다. 그 때문에 팡테옹의 정면 박공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밖에도 여러 위인들이 묻힌 점, 도시의 주요 랜드마크인 점 등이 웨스트민스트 사원과 유사하다. 팡테옹을 설계했던 건축가 자크 제르맹 수플로는 사후 반 세기 뒤 자신이 만든 이곳에 안장되는 영예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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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지구의 자전을 증명하고자 했던 푸코의 진자 실험이 이뤄진 장소로도 유명하다. 실험에 쓰였던 진자는 1855년 파리 국립 과학 연구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줄이 끊어져 파손되었고, 현재 팡테옹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3. 건축적 특징
파리의 국립묘지라는 상징성 이외에도, 건축학적으로 봤을 때 팡테온은 상당히 흥미로운 건물이다. 한 건축가가 각기 다른 양식의 건축을 통합하고자 했던 야심작이었지만, 그가 죽은 뒤 그 의도가 상당 부분 퇴색한 건물이기도 하다.
건축은 1757년에 시작되어 90년에 완성되었다. 팡테온은 원래 생 주느비에브(Sainte-Geneviève; 성녀 제노베파) 성당으로 건축된 것이다. 병으로 다 죽어가던 루이 15세가 제노베파에게 쾌유를 기도했고, 병에서 회복되자 당시 파리에서 제일가는 성당을 짓기로 결정한다. 건축가는 신고전주의 건축의 대표적인 인물인 자크 제르맹 수플로(Jacques-Germain Soufflot)가 임명되었다. 수플로는 1755년부터 성당을 설계하기 시작했는데, 상당히 대담한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생 주느비에브 교회를 짓기 이전에 로마에서 판테온 등을 공부했던 수플로는 당시의 분위기를 따라 지나치게 화려한 로코코 양식에서 보다 순수한 그리스/로마 시대의 건축에서 이상향을 찾았다. 이러한 것을 신고전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수플로는 천대받던 고딕 건축의 구조와 커다란 창에 주목을 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신고전주의와는 달랐다.생 주느비에브 교회는 고딕 건축의 밝음과 그리스 건축의 순수함을 조합할 것이다.
자크 제르맹 수플로의 조수였던 롱들레가 전한 수플로의 말.
이러한 것은 이 건물과 유사한 절충형 건축물인 영국의 세인트 폴 대성당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세인트 폴 대성당과 생 주느비에브 성당은 구조는 공중부벽(플라잉 버트레스) 등을 사용한 고딕적인 구조지만, 그것을 가벽으로 가려 은폐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세인트 폴 대성당의 경우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은 고딕을 혐오하면서 고딕식 성당을 공사 도중 바로크 식으로 개축한 것에 가깝지만, 수플로는 처음부터 고딕과 그리스풍 고전 양식의 통합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수플로는 구조적으로 육중한 벽으로 돔을 지탱했던 고전 양식의 구조를 버리고, 얇은 기둥들이 서로 연계되어 지탱되는 고딕식 구조를 추구했다. 이를 통해 교회 기둥들은 더욱 얇아지고, 가볍게 보일 수 있다. 외벽를 둘러싼 48개의 큰 창들을 내서 건물 안을 밝게 비출 수 있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인 평면은 고딕식의 긴 라틴 십자가가 아닌 그리스 십자가형의 중앙집중식 평면을 선택했고, 중앙에 돔을 건설하고, 세부적인 장식 역시 고전 양식으로 덧씌우려고 했다.
팡테옹, 세인트 폴 대성당, 이 두 건물 모두 도나토 브라만테의 템피에토의 외형과 유사한 돔의 외형을 가지고 있다. 팡테옹의 돔은 설계되면서 구조도 세인트 폴 대성당의 삼중 돔 구조와 유사하게 발전되었다. 다만 수플로가 세인트 폴 대성당의 돔을 참고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차이도 많다. 앵발리드와 세인트 폴 모두 외부 돔은 목재로 프레임을 짠 것인데, 팡테옹은 전체가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크고 무거운 돔은 중앙부의 얇은 기둥들로 떠 받쳐지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며 보이지 않는 외벽 부분에 숨겨진 공중 부벽등이 옆에서 추가로 지탱하고 있다.
아무튼 많은 설계 변경을 거치면서 차츰 교회는 건설되기 시작했으나, 1780년에 수플로가 사망하게 된다. 수플로가 사망했을 당시에는 아직 돔이 다 올라가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1790년에 설계대로 완성된다. 그러나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 이후 등장한 새로운 분위기는 이 건축물을 크게 변형시키게 된다. 1791년에 원 설계자인 수플로가 없는 상태에서 이 건축물은 왕의 성당에서 위인들의 묘지로 그 용도가 바뀌게 된다. 이름도 팡테옹으로 바뀌게 되었고, 묘지와 밝은 건물이 안 어울린다고 판단되어 건물을 둘러싼 48개의 창을 벽돌로 막아버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성당 외벽의 창 장식들은 다 사라지고, 외관의 종교적인 조각들 역시 전부 폐기되었다. 심지어는 1790년대 말에 돔을 제거하거나 피라미드 형태로 개장하는 재설계안도 나왔었지만, 다행히 실현되지는 않았다. 참고로 교회 근처에 세워졌던 종탑도 이 때 철거되었다.
몇 년 뒤에는 더 안좋은 사실이 밝혀진다. 돔 아래 중앙부를 둘러싼 기둥들에서 균열이 발견됨에 따라 이 성당의 구조가 돔을 지탱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된 것이다. 결국 1806년에 돔 아래의 아치 부분을 받치는 기둥을 버팀벽으로 교체하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고, 구조물은 원형보다 육중해질 수 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때 건물의 장식과 조각들은 새로 설치되었다.
이러한 변화들 때문에 이 건물은 수플로가 목표로 했던 밝고 가볍게 보이는 느낌의 건축물에서 크게 후퇴하게 된다. 결국, 수플로의 이상은 온전히 실현되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테온은 훌륭한 건물이며, 파리의 대표적인 18세기 건물로 꼽히고 있다.
이 건물의 정면은 판테온에서 따왔다. 정면에서 입구를 바라보면, 로마의 판테온과 매우 흡사한 것을 알 수 있다. 내부로 들어가보면, 1층은 전시실로, 이곳에 잠든 여러 인물들을 기리기 위한 예배당 등이 있다. 무덤인 만큼 내부는 어두운 곳도 있다. 으스스하기보다는 마치 박물관이나 기념관 같은 분위기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지어진 건물인 만큼, 석조건물의 느낌이 색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다.
국립묘지라고 해서 한국의 현충원,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와 같이 풀밭에 비석이 가지런히 늘어선 모습을 상상하면 곤란하다. 장엄한 건물 안에 여러 위인들과 명사들의 석관들이 방별로 배치된 형태이다.
4. 안장자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여러 묘비에 쓰여진 글을 읽으며, 그 속에서 우리가 아는 아이작 뉴턴, 찰스 로버트 다윈 등을 찾을 수 있듯이 이곳 팡테옹에서도 여러 묘비에 쓰여진 글을 읽으며, 우리가 아는 여러 위인들을 찾아 볼 수 있다.[3] 퀴리 부부,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장 자크 루소, 볼테르 등이 이곳에 묻혀 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에 사망한 위인들만을 안장하는 것이 원칙이나 장 자크 루소, 볼테르 등 몇 명의 예외가 있다.
대부분 18세기 초창기에 안장된 장 자크 루소나 볼테르 같은 경우는 따로 대리석관을 제작하여 안장했으나, 19세기 이후부터는 카타콤처럼 벽에 관이 들어갈 광중을 파고 관을 안장한 다음, 석관 반쪽 모양으로 제작한 석재 뚜껑을 덮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이 석재 뚜껑에는 해당 위인의 이름과 생몰년이 새겨져 있다.
프랑스 대통령은 팡테옹 안장 여부를 결정할 권한이 있으며 통상적으로 임기 중 한 번의 위인을 이장하여 팡테옹에 안장할 권한을 갖는다. 프랑수아 올랑드 재임기에 레지스탕스 경력의 여성 4명을 동시에 이장한 것을 볼때 인원수가 정해져 있지는 않은 모양.
1791년부터 현재까지 안장된 사람들은 아래와 같으며, 취소선이 그어진 사람들은 팡테옹에서 이장당한 사람들이다.
4.1. 18세기
4.2. 19세기
4.3. 20세기
4.4. 21세기
5. 기타
- 2009년 11월,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는 진보 성향의 작가 알베르 카뮈의 팡테옹 안장 계획을 발표했었다. 프랑스 국립묘지 안장에 관한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결정권이 대통령에게 부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충분히 실행 가능한 구상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사회 여론은 대통령의 계획 철회를 요구했다. 사르코지와 같은 반 진보적 인물이 카뮈의 안장을 이야기하고 결정한다는 것은 적절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대통령의 정치적 구상은 무산되었다.
- 샌드박스형 게임 사보추어에서는 미션 지역 중 하나로 나온다. 사이드 퀘스트 중 심리학을 전공한 중국계 레지스탕스인 닥터 쾅(Dr. Kwang)의 마지막 임무로, 사보추어 세계관에서는 독일군들이 이 건물을 자그마치 대공 요새로 마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다. 옥상 주변에 이런저런 구조물을 설치해놓고 각종 대공포[30] 들을 잔뜩 깔아두었으며, 특히 돔을 개조하여 구스타프 열차포 저리가라 할 수준의 대구경 대공포를 설치해두고 있다. 목표는 당연히 이 대공포를 파괴하는 것. 들어가보면 이 건물이 얼마나 철저히 마개조를 당했는지를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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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쾅이 언급하기를, 사실 대공요새로 쓰기엔 영 아닌 판테온을 굳이 이렇게 마개조해서 사용하는 이유는 사실상 선전용에 더 가깝다고 한다. 파리의 유명 장소를 이런 식으로 멋대로 헤집어놓아서 프랑스 국민들의 자존심에 먹칠을 하고, 또 대외적으로도 '프랑스는 우리꺼임'하는 식으로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흡사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헐리고 동물원으로 개조된 창경궁과 같이 현지인의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한 정책이였던 것.[31] 닥터 쾅이 판테온의 대공포를 파괴해달라는것도 바로 이런 상징성을 깨부수기 위해서였다. 물론 실제 역사적으로는 이런 꼴이 된 적은 전혀 없다.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파리가 탈환될 상황에 처하자 아돌프 히틀러가 당시 파리를 관리하던 디트리히 폰 콜티츠 보병대장에게 파리를 파괴하라고 시키긴 했지만 사보추어보다 훨씬 더 뒤의 시간대이며, 콜티츠는 결국 히틀러에게 거짓 보고만을 올리고 파리 파괴공작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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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쾅이 언급하기를, 사실 대공요새로 쓰기엔 영 아닌 판테온을 굳이 이렇게 마개조해서 사용하는 이유는 사실상 선전용에 더 가깝다고 한다. 파리의 유명 장소를 이런 식으로 멋대로 헤집어놓아서 프랑스 국민들의 자존심에 먹칠을 하고, 또 대외적으로도 '프랑스는 우리꺼임'하는 식으로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흡사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헐리고 동물원으로 개조된 창경궁과 같이 현지인의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한 정책이였던 것.[31] 닥터 쾅이 판테온의 대공포를 파괴해달라는것도 바로 이런 상징성을 깨부수기 위해서였다. 물론 실제 역사적으로는 이런 꼴이 된 적은 전혀 없다.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파리가 탈환될 상황에 처하자 아돌프 히틀러가 당시 파리를 관리하던 디트리히 폰 콜티츠 보병대장에게 파리를 파괴하라고 시키긴 했지만 사보추어보다 훨씬 더 뒤의 시간대이며, 콜티츠는 결국 히틀러에게 거짓 보고만을 올리고 파리 파괴공작을 거부했다.
[1] 남성 74명, 여성 5명[2] 포르투갈 리스본에도 팡테옹이 있으나 이 문서에서는 프랑스 파리의 팡테옹을 설명한다.[3] 잔 다르크의 경우는 화형당한 후 영국 측에서 재를 센 강에다가 버렸기 때문에 시신을 찾을 수도 없어서 안장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으나 대신 벽화로 그녀의 일생을 그려서 기록했다.[4] 프랑스의 정치가, 사상가.[5] 루이 16세에게 뇌물을 받은 혐의로 퇴출[6]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7] 프랑스 혁명 전쟁 당시, 베르됭 요새의 지휘관으로 연합군에게 항복을 거부하다 죽은(자살이라는 설도 있고, 살해당했다는 설도 있다) 군인.[8] 프랑스 혁명기 정치가이자 법률가. 귀족출신이면서도 평민쪽에 가담한 인물로,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했다가, 왕의 근위대 출신에게 암살당했다. 여담으로 게임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 등장한다. 암살목표(...)로.[9] 당피에르 후작. 귀족 출신의 프랑스 혁명군 장군으로 라미예 전투에서 전사했다.[10] 프랑스 대혁명 이후 공포 정치를 폈던 정치가.[11] 스위스 출신의 계몽주의 철학자. 대표작으로 <사회계약론>, <에밀>이 있다.[12] 루이나 공작. 프랑스 혁명 당시 제3신분(평민)에 가담했던 귀족.[13] 가족의 요청으로 이장.[14] 콜랭쿠르 백작. 나폴레옹의 측근이자 군인, 외무장관이던 아르망 드 콜랭쿠르의 아버지이다. 이사람은 아무래도 아들덕에 안장된 감이 있다. 정작 아들은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에 죽어서...[15]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화가. 다비드의 스승.[16] 프랑스의 법률가, 정치가. <나폴레옹 법전> 편찬에 참여.[17] 프랑스의 항해가. 1766년부터 3년 동안 세계일주를 하면서 남태평양 일대의 타히티 섬, 사모아 제도, 뉴헤브리디스 제도 등을 탐방했고 미국 독립전쟁에도 참가했다.[18] 프랑스의 건축가. 생 주네비에브 교회(훗날의 팡테옹)의 설계자.[19] 프랑스 대통령. 라자르 카르노(하인리히 폰 큄멜 문서에 나오는)의 손자이다.[20] 프랑스의 교육자. 현재 사용하는 6점 점자의 창시자.[21] 프랑스의 법률가. 세계인권선언 초안 작성에 참여했으며 1968년 노벨평화상 수상.[22] 프랑스의 경제학자, 외교관. 일명 유럽연합의 아버지. 모네 플랜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다국적 경제 재건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유럽연합의 시초가 됨.[23] 프랑스의 수학자. 기하화법의 발명자.[24] 왼쪽은 빅토르 위고, 오른쪽은 에밀 졸라.[25] 레지스탕스 지하 조직원, 저항 라디오 방송인, 1944년 게슈타포에 체포 후 고문을 받는 도중 창 밖으로 투신자결했다.[26] 첩보원, 저항세력 포로 구출, 종전 후 인류학자가 됐다.[27] 전쟁 전 교육부장관, 망명정부 건설 시도 중 나치에 체포, 1944년 감옥에서 살해.[28] 샤를 드골의 조카딸. 저항 세력 정보 조직의 핵심으로 체포된 후 1945년까지 수용소에 감금됐다.[29] 제1차 세계대전을 온몸으로 경험하며 글로 기록한 프랑스 작가[30] 다른 대공포들은 파괴하면 사이드 미션용 오브젝트로 취급되어서 돈이 들어오는데, 여기의 대공포들은 오브젝트로 취급되지 않아서 돈이 안 들어온다. 애초에 미니맵에 오브젝트로 표시되지도 않는다.[31] 사보추어 세계관에서는 실제로 같은 이유로 독일군들이 여러 서적이나 그림 등 예술품들을 소각 처분하려고 든다는 묘사가 있고, 지하무덤의 NPC인 마르고트 보네르도 이 점을 지적하면서 주인공에게 독일군의 이런 반달짓을 막아달라고 부탁한다. 대표적으로 마르고트가 주는 개선문 지키기 퀘스트가 바로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