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미도
五斗米道
1. 개요
도교의 한 원류. 후세에 장천사(張天師)라 불리우게 되는 장릉(張陵, 34-156)이 서천 지방에서 영험한 학명산(鶴鳴山)에서 도를 닦고 경전을 정리하여 청성산으로 들어가 만든 도파이다.
당시 오두미도라 불리던 이유는 입교하기 위해선 쌀 다섯 두[1] 를 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중앙정부에서는 미적(米賊)이라 불렀다. 하지만 적도라고 해서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니며, 죄를 범한 것을 속죄 받고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기로 서약하여 병을 치유하는 도교의 양생법을 충실히 따르던 종파로 병든 사람의 집에서 쌀 5두를 거두는 것을 법도로 했고, 이를 오두미사(五斗米師)라 불렀다.
사실 오두미도는 삼국시대 초기에 일시적으로 쓰인 이름이다보니, 역사적으로는 '천사도'라는 명칭을 더 많이 사용한다.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태평도와는 신[2] 앞에서 죄를 회개하여 병을 치유한다는 점에선 유사하지만 당시 사회에 대한 대응 방법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인다. 태평도는 사회에 만연한 죄의 근원을 부패한 후한 정부로 간주하여 이를 타도하고 태평도의 교리에 입각한 종교국가를 형성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실행한 반면, 오두미도는 중앙정부와 직접 대립하기보다는 한중이라는 외곽지역에서 자신들의 이상에 입각한 독립적 사회를 형성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점이 중요한 차이점이다. 이 차이점이 태평도가 당대에 이미 사라진 반면 오두미도는 후대에까지 그 맥이 이어진 원인이 된다.
현대 교단 종교로서의 도교의 원류는 삼국시대의 태평도와 오두미도의 양 갈래로 보는데, 태평도는 황건적의 난으로 인해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으므로 초창기 도교의 연구에 있어선 비교적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오두미도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거기다 장로가 항복하여 중원으로 이동한 뒤 그때까지도 남아있던 태평도의 신자들과 교리를 흡수했으므로 태평도 연구에 있어서도 오두미도의 자료가 큰 역할을 한다.
2. 역사
2.1. 삼국시대의 독립 세력
삼국시대에는 창교자의 손자인 장로(張魯, ? ~ 216년) 가 한말의 혼란을 틈타 한중(漢中, 지금의 섬서성 남부)을 점거하고 제정일치의 독립세력을 형성하였다.
하지만 전략에 이르길 희평 연간(한영제의 연호 172년 5월에서 178년 3월)에 요사한 도적들이 크게 일어났는데 삼보(三輔, 관중)에 낙요(駱曜)가 있었다. 광화(178년 3월부터 사용하여 184년 12월에 황건적의 난이 비로소 진압되자 개원) 연간에 동방에 장각이 있었고 한중에는 장수가 있었다. 낙요는 백성들에게 면닉법(緬匿法, 도교에서 사용하는 은신법의 일종)을 가르치고 장각은 태평도를 만들고 장수가 오두미도를 만들었다. 뒤에 장각이 주살당하고 장수 역시 장로에게 죽었다. 즉 오두미도를 처음 만든 건 전략에 따르면 장수다.
조용한 방을 만들어 하늘앞에서 죄를 회개한다는 교리에 따라 회개와 고백만을 위한 '정실(靜室)'이란 건물을 짓고 그 방에 병자를 거처하게 하여 자신의 죄를을 생각하게 했으며 신자 중에 간령(姦令),좨주(祭酒),귀리라는 간부급 지위를 두었는데 좨주가 도덕경을 익히면 간령으로 승급되었다고 한다 .한편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주로 하는 귀리는 신자로 하여금 병든 사람의 이름을 적고 죄를 자백하는 의사를 설명하게 했다고 한다. 또한, 천지수(天地水) 삼신에게 지은 죄를 회개하고 앞으로 죄를 짓지 않을 것을 서약하는 '삼관수서(三官手書)'라는 세 통의 서약문을 산꼭대기, 땅 속, 물 속에 두어 3신에게 맹세하는 의식이 있었다.
더불어서 회개를 위한 집단 의식(儀式)으로 '노자오천문(老子五千文)'을 읽게 하고 다리나 도로건설 등의 공공사업 봉사를 통해 죄를 씻을 수 있다고 보았다. 더불어 의사(義舍)라는 무료숙박시설을 설치했는데 공짜로 가져갈 수 있는 음식인 의미(義米)와 의육(義肉)등을 비치하여 나그네나 굶주린 자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여기에 소요되는 식량은 신자들의 기부로 충당했고 이 역시 죄를 없애는 공공봉사로 봤다. 단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이 탐할경우 신의 벌을 받는다고 여겼다.
장로가 한중에 있을때에 이르러 그 백성들이 장수의 사업을 믿고 따르는 것으로 인해 마침내 증식하였다. 교사(教使)는 의사(義舍)를 만들어 쌀과 고기를 비치해서 행인들을 멈추게 하고 작은 잘못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은닉해주어 오두미도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면 죄를 면해주었다. 월령에 의거하여 봄과 여름에는 살생을 금지했고 술도 금지했다. 유민중에 이 땅에 의지한 사람들은 감히 받들지 않을수 없었다.
이러한 종교조직을 통해 한중을 풍족하고 평화롭게 다스렸기에 중앙 정부에서도 그를 인정하여 한녕태수를 맡겼다. 현대의 연구결과로는 오두미도가 추구한 제정일치의 이상국가[3] 에 당시 인근에 많이 거주한 저족(氐族)등의 이민족들도 다수 존재했다고 본다. 기록에도 '민과 오랑캐가 함께 즐긴다'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였는데 연구자들은 이를 오두미도가 추구한 상부상조의 지역공동체적 사회와 이민족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원시공동체 사회가 일정부분 유사성을 띄었끼에 가능했다고 본다.
단 익주의 유장과는 선대부터 얽힌 치정관계(…)의 문제 때문에 늘 사이가 좋지 않았다.
215년 조조가 한중으로 친정을 하자 장로는 곡물창고를 모두 불사르고 도망치자는 부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단지 열쇠만 걸어놓은 채 파중으로 피신하였다. 이를 본 조조는 "백성을 도탄에 빠트리지 않으려고 하다니 과연 대단하다."라고 감탄한 뒤 투항을 권유하였다. 이를 받아들인 장로를 장군으로 삼고 다시 이 지방의 통치를 맡겼다. 이는 조조가 도가와 연관이 있었기에 가능하기도 했을것이다.
2.2. 삼국시대 이후
조조가 오두미도의 전파를 용인했기 때문에 오두미도는 끊기지 않고 계속 전파될 수 있었으며 장로의 아들인 장성 때 본산을 용호산으로 옮기자 천사도(天師道)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대제주와 제주들이 독립하여 분파하기 시작하였다고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남아있지 않다.
이후에 남북조시대에 들어서는 구겸지가 북천사도(北天師道)와 육수정이 남천사도(南天師道)로 세우면서 분파되고 천사도를 지식인들 계층까지 받아들이게 되는데 수, 당을 거치면서 이를 합치고 또한 도교의 상청파(上淸派), 영보파(靈寶派), 정명파(淨明派) 등을 합쳐서 정일교(正一敎)라 불리게 된다.
원, 명, 청 시대까지 도교의 중대한 계파가 되어 지금도 천사도를 믿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다.
3. 현대
현재는 64대 장천사인 장원선이 2008년 우화(羽化, 도교에서 사망을 높이는 표현)한 뒤 후계자들 간의 갈등 때문에 장천사 자리가 비어있다고 한다.
4. 관련 문서
- 운명의 붉은 실 - 동아시아권의 미신인 이것이 여기서 유래되었다는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