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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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源哲
1928 ~ 2019
1. 소개
2. 일생
3. 미디어에서


1. 소개


대한민국의 전 관료.
김정렴 전 비서실장과 함께 박정희 정부 시절 기술관료로 활약했다. 주로 활동한 분야는 1970년대 중화학공업, 방위산업 부문이었다.

2. 일생


1928년 황해도 풍천군[1]에서 출생했다.[2]
광복되던 1945년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46년 경성공업전문학교가 국립서울대학교로 통합되면서 1948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문부[3]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학부로 진학하여 1951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6.25 전쟁 기간에는 공군기술장교 후보생으로 입대했고, 1957년 소령으로 전역했다.
이후 최초의 국산 자동차인 시발자동차에서 공장장으로 재직하다가, 5.16 군사정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회 조사과장으로 기용되었고, 1개월 후 상공부(현재의 통상자원부) 화학과장으로 옮겼다. 제3공화국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절부터 경제 정책의 실무 분야에서 활약했다.
그의 행적은 1972년 청와대 제2경제수석비서관에 오르면서 정점에 달했다. 그는 당시 박정희 정부의 경제 정책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중화학공업방위산업의 건설 계획을 총괄적으로 입안, 추진하는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다. 여기에는 율곡사업으로 명명된 각종 방위력 증강 계획, 번개사업으로 알려진 국산무기 개발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정희 시대의 핵무기 개발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충청남도 공주군연기군의 장기지구(당시 장기면, 현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에 임시 행정수도를 건설하는 일명 백지계획도 총괄했는데, 재미있게도 해당 지역은 20여년 후 노무현 정부 당시 행정중심복합도시로 건설된 세종특별자치시의 일부 지역이 되었다.[4] 다만 이땐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사망하면서 계획이 무산되었다. 당연히 신행정수도 건설기획단장이 될 것이라 예상했던 오원철의 활동도 여기까지가 마지막이였다.
1980년대 새로 집권한 5공 신군부 세력으로부터 부정축재자로 몰려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이후 12년 동안 자택에서 칩거해야만 했다. 부정축재 여부를 떠나, 박정희 정권에서 방위사업의 책임자로 오래 있으면서 전두환 등 신군부와 알력이 생긴게 원인이 됐다는 말도 있다. 이후 1992년 기아경제연구소 고문으로 활동했고, 당연히 박정희 시절 동조한 고위관료였던만큼 그 시절을 높게 평가한 다수의 저서와 언론 기고를 통해 박정희 시대 정책 등 여러 비화들을 알렸다.
본 항목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과학과 기술> 2009년 11월호의 내용에서 다수 인용했음을 밝힘.
2019년 5월 말, 향년 91세로 사망했다.

3. 미디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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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게이트에서는 배우 연규진, 제4공화국에서는 배우 양영준, MBN의 대한민국 정치비사 1부에서는 강승원이 그를 연기하였다.

[1] 출생 당시는 송화군에 속했다. 조선시대까지는 풍천군이었던 곳으로 1909년에 송화군에 합병되었다가 1967년 과일군으로 분리되었다.[2] 그의 어머니는 유명한 건달 이화룡의 누이 이성룡 씨였다.[3] 서울대 출범 초기, 서울대에 통합된 전문학교들은 3년제였기 때문에 학사 과정의 4년제와 구분하여 '전문부'로 구분하였다.[4] 훗날 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한 행정수도 건설 계획은 지역 균형발전에 초점을 두었던 반면, 박정희 정부의 경우 휴전선과 서울의 인접성으로 인한 방어상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고 차이점을 설명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