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사업
1. 개요
대한민국 국군이 1970년대와 2010년대에 진행한 무기 개발·획득 사업이다. 약 40년의 격차를 둔 사업이기 때문에, 이름은 같아도 그 내용은 판이하게 다르다. 70년대의 번개사업은 보병용 소화기를 위주로 한 개발 사업이고, 10년대의 번개사업은 정밀유도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진행된 사업이다.
어떻게 보면 이 차이는 40년 동안 국군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2. 1970년대의 번개사업
이하의 1970년대의 1, 2차 번개사업에 대한 글은 본 게시물과 링크를 참고로 하였음을 알린다. 출처로는 "당시 연구 팀원 중 한 명인 구상회 박사의 회고록"을 기반으로 했다.
2.1. 1971년의 1차 번개사업
2.1.1. 발단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0년 8월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설립한다. 북한의 거듭된 대남 도발로 인해, 국산 무기 개발 및 생산능력 확보와 같은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참고로 해당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1970년 이전 60년대 후반에는 1968년에 일어난 '''1.21사태'''나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과 같은 굵직한 북한의 대남도발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그런데 설립한지 1년이 조금 넘은 1971년 1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은 김정렴 비서실장을 통해 ADD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지시를 내린다. 그 지시란 다음과 같다.
자, 다시 위의 연도를 보자. '''1971년이다.'''
해당 무기들은 대부분 이미 개발된지 30년에서 40년은 된 물건들로 신무기들은 아니었으나 당시 대한민국으로선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무턱대고 새로운걸 만들기 보다는 일단 기본부터 하고 시작하자는 의도로 사료된다.
당시 1971년 대한민국의 제반 사정은 정말이지 열악했다. 구상회 박사의 회고록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 더해 이런 이야기도 있다.당시 국내 공업은 한 마디로 가내공업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예를 들면 공작기계 분야는 직조기의 형틀 주조가 고작이었고, 단조기술은 차량정비용 공구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며, 통신산업도 야전 전화기를 겨우 만드는 데에 머물러 있었다. 가공 능력도 금성사(현 LG)의 라디오용 금형 제작이 고작이었고, 재봉틀 시계 자전거 및 자동차의 반제품 조립이 공업력의 전부였다.
방산 분야는 더욱 한심한 상태였다. 경남 양산에 미국 지원하에 M-16소총 공장을 건설중이었으나 완공되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상태였고, 총열을 가공할 수 있는 설비는 대전의 국제특수금속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브로칭 머신」 한 대가 전부였다.
즉, 국내 제반 상황도 열악한 상황인데 이때는 제대로 된 복사기 하나 대여할 수 없어서 외국인의 것을 그것도 편법으로 가져다 써야 하던 매우 열악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번개사업 중에는 매일 100쪽이 넘는 사업 보고서를 청와대, 국방부 및 관계기관에게 제출해야 했는데, 이 복사기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당시엔 미국 제록스사와 우리 정부 사이에 복사기에 대한 임대차계약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기관은 복사기를 대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국방과학연구소를 세운 이후 미국의 기술 지원을 받았는데, 이중 패터슨 대령의 사무실 위치가 국방과학연구소에 있다는 것으로 서류를 꾸며서 자신의 사무실에 있는 복사기를 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한마디로 말하자면 저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의 요구였다. 게다가 시한을 충분히 줘도 어려운데 기한이 '''연말까지'''였다. 11월에 알려줘놓고 연말까지 가져오라고 한 것이다! 당시 연구원이었던 서정욱 박사는, 이런 불가능 수준의 과업을 던져준 것에 대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던 ADD에 대통령 턱 밑에까지 칼날이 들어오는 판국에 늬들은 일 안하고 뭐하냐라고 경고장을 내민 것이라고 회고한다.#
2.1.2. 까라면 깐다
허나 어쩌겠는가, 저 시절은 '''배째라고 드러누우면 진짜로 배가 따이던''' 시절이었다. 높으신 분이 까라면 까야 하는 법. ADD의 연구원들은 정말로 깠다(…). 약 40일간 피땀 흘려 이것들을 진짜 만들어낸 것이다. 지시를 받자마자 시제품 설계·제작에 착수, 정말 번개같이 작업을 진행해서 12월 14일에 시제품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이들에게 가장 어려웠던 과제는 4문의 바주카였다고 한다. 도면을 구하려 육군 병기감실에 연락하자 제공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고, (...) 수경사에서 운용하던 실물을 한 문씩 빌려와 수치를 실측하고 마모된 오차를 수정해가며 역설계를 한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안습한 일화. 당시 이들은 제대로 된 자료가 없다보니, 바주카를 보면서 재질 분석을 했었다. 그마저도 빌려온 물건에 손상을 줘서는 안되니 '''육안 관찰과 비파괴 검사를 통해 수행'''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이들은 성공했다. 12월 15일, 겨우 시제품들을 완성하고 한 숨 돌린 것이다.
2.1.3. 계속되는 고난
하지만 그들의 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으니… 이 사업을 관할한 오원철 수석비서관이 문제였다.
시제품이 완성된 당일, 오 수석이 국과연에 방문해 시제품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그가 보고를 받은 바로 다음날, 갑자기 전화로 대통령 앞에 시제품을 진상하라고 지시한 것. 한숨 돌리려던 찰나에 갑자기 벼락이 떨어진 꼴이라, 연구원들은 세수도 못하고 꾀죄죄한 꼴로 시제품을 들고 청와대로 끌려들어갔다. 다행히 대통령으로부터 치하의 말을 듣고 간신히 풀려났지만… 다음 날, 다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2.1.4. 끝이 아니다
전화로 내려진 지시는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다. '''시제품으로 당장 실사격을 하라는 지시'''였다. 최대한 노력을 들였다곤 하나, 40일만에 만들어진 시제품으로 당장 실사격이라니…
실사격시험 일정은 하필이면 12월 24일. 다시 위의 날짜들을 보자. 시제품 완성이 12월 15일, 청와대에 시제를 들고 간 게 16일이다. 17일에 전화를 해서 7일 후에 실탄으로 시험사격이 결정됐다고 말한 것이다.
2.1.5. 대망의 실사격
운명의 날, 12월 24일. 결국 이 시제로 실사격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제가 군용 규격 소재로 만든 게 아닌, '''창틀용(!) 알루미늄 합금으로 만든 물건'''이었다는 점이다. 이걸 만든 연구원들은 당연하게도 포신이 과연 버텨줄지 걱정할 수밖에 없었고, 혹여나 포신이 파열하는 등의 사고에 대비해 안전설비를 철저히 해두었다.
문제는 그 불안한 기류를 느꼈는지 이 사격을 위해 차출된 병사가 겁을 먹고 사격을 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져버렸다. 결국 개발 책임자였던 구상회 씨(전 ADD 부소장)가 사수가 되어 직접 발사를 하게 된다. 다행히도 결과는 성공. 사고나 고장 없이 바주카는 멀쩡히 발사되고 표적에 박혀 폭발했다. 나머지 시제품들도 모두 발사를 실시했고, 아무 이상 없이 작동했다. 1차 번개사업은 성공한 것이다.
2.2. 1972년의 제2차 번개사업
2.2.1. 새로운 시작
2차 번개사업은 1차에 비해서는 다소 순탄하게 이루어졌다. M101 105mm 곡사포 등의 품목이 추가되고 수량이 조금 늘었을 뿐, 기간도 72년 1월부터 3월 말까지의 3개월이었기 때문.
게다가 미군이 기술지원팀을 ADD에 파견하고, 이들을 통해 각종 기술 자료를 얻었고, 도면들도 FMS(대외군사판매)를 통해 입수하게 되어 일이 여러모로 순탄해졌다. 덩달아 연구원들도 활기를 띄고, 사업도 잘 굴러간 것.
그리고 이들은 다시 이전과 같은 실사격 시연을 하게 된다. 그런데…
2.2.2. 시연회 대사건
1972년 4월 3일, 이전과 같이 로켓포와 대전차지뢰의 시연을 하게 된 ADD 연구진들. 이번에는 실감나는 시연을 위해 폐 전차 두 대를 준비해 표적으로 삼았다. 화려한 퍼포먼스를 위해 전차 포탑 안에 휘발유가 담긴 봉지를 넣는 등의 연출을 가미했고,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런데 대전차 지뢰 시연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폐전차 밑에 매설해둔 대전차지뢰를 터트렸는데, 이 전차에서 발생한 무한궤도의 파편들이 '''대통령을 비롯한''' 참관인들이 앉아있는 관람석으로 날아온 것이다. 대통령은 딱히 놀라지도, 무어라 나무라지도 않아서 어쨌든 현장에서는 그냥저냥 별 탈 없이 넘어갔다. 하지만 경호실에서는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지뢰 개발책임자였던 김직현 박사를 심문한 것이다. 불순한 의도가 있던 것 아니냐는 것.
물론 그런 것은 아니었고, 지뢰가 폭발하지 않을까봐 두 개를 매설했다가 둘 다 성공적으로(…) 터진 바람에 화력이 너무 강했던것이 원인이었다. 후일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다'고 회고했다니, 다행히 김 박사는 별 일 없이 풀려난 듯 하다.[2]
2.3. 번개사업, 그 이후
이렇게 번개사업은 성공을 거두었다. 여러 질곡을 겪었지만 어쨌든 성공적인 결과를 얻고, 무기 국산화의 길을 연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어지는 또 다른 사업이 극비리에 진행된다. 71년 12월 24일, 실사격 시연이 끝난 후, 당시 사업 책임자였던 오 수석이 구상회 박사에게 대통령의 극비 명령으로 백곰사업을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주요 내용으로는 독자적인 국산 무기 개발체제를 확립하고 지대지 유도탄을 개발하되, 1단계는 75년 이전 국산화를 목표로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미사일 개발 과정 중에 "미사일 자료가 없어서 합참 정보국에 연락하여 자료를 구해달라는 요청을 했고 이후 미국과 유럽에 주재하는 무관들이 그곳 잡지와 일간지에 난 유도탄 관련 기사를 보내줬는데, 별 도움은 안 됐지만 그 성의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는 카더라가 있다. 그러나 이후 백곰사업은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 전두환이 집권하고 대번에 짤라버린다.
혹자는 이 번개사업을 한국식 공밀레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ADD가 설립된 이후 (알려진) 최초의 사업이고, 그 과정 역시 매우 하드코어했으니 말이다(…).
또한 번개사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무기 국산화의 길을 열었지만, 반대로 비판도 받는다. 높으신 분들에게 '시간과 예산을 덜 줘도 아랫사람들은 까라고만 하면 까내주는구나'라는 인식을 심어버린 좋지 못한 선례라는 것.
3. 2012년의 번개사업
3.1. 개요
2012년부터 진행된 한국군 신형 미사일 개발 사업이다.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이에 대한 대응용으로 긴급 소요제기 되어 사업 명칭 만큼이나 번개처럼 진행된 사업이다.
3.2. 사업 내용
연평도 포격 사건 직후 비밀리에 청와대의 직접 지시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보통 각 군과 합참의 소요제기로 시작돼서 국방부가 주도하는 일반적인 국산무기 개발에 비하면 대단히 이례적이다.2012년 하반기에 몇몇 내용이 언론에 흘러나왔으나, 개발성공이라는 기사부터 사실상 실패에 온갖 비리투성이라는 기사까지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감사원이 이 사업에 대해 특별감사를 실시해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한 것은 확인되었다. 언론에 의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는 번개 사업은 실제로는 3개의 사업으로 구성 된다.
- 130mm급 지대지 유도탄 사업
- 사거리 100km급 단거리 탄도탄 사업
- 지상기반 항법시스템(일종의 지상 기지국을 이용한 GPS 시스템)
3.3. 사업실패
'''문제는 사업을 번개불에 콩구워 먹은 것이 화근.'''
북한 무력도발에 대응하는 긴급소요제기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유도무기 개발에는 시일이 걸린다. 아무런 언급도 없다가 갑자기 1, 2년안에 완성시키라고 하니 국방과학연구소나, 업체들이나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고 한다.
특히 130mm급 로켓 개념은 남아도는 구룡로켓을 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로켓을 소폭 개조하여 유도키트를 다는 형태로는 기한을 맞출 수 없어 로켓 추진부까지 새로 개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정치적인 이유로 급하게 진행된 탓에 성과를 내지 못하고 결국 탐색개발 수준에서 번개사업은 끝났다. 이 중 항법시스템과 사거리 100km급 단거리 탄도탄 사업은 제 성과가 못나왔다. 이후 공개사업으로 전환되어 '차기 전술유도무기' 라는 사업명칭으로 일반 획득사업으로 따로 추진한다. 이 중 재검토로 지속적인 소요제기가 나타난 분야는 새로운 사업으로 전환되어, 어느정도 성과는 인정받게 되었다.
3.4. 소요제기, 사업전환
위에서 언급한 성과적인 부분 중 130mm급 유도로켓 사업은 탐색개발에서 실용성이 증명되어 소요제기가 이어졌고, 번개사업에서 벗어나 공개사업으로 전환, 지속적인 개발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130mm 유도로켓은 여럿 플랫폼에 대한 소요가 있었으며, 스파이크-NLOS 미사일 도입으로 해안포대 사업이 우선적으로 추진되었다.[4] 그리고 이중 함대함 버전으로 변경되어 차기고속정 PKX-B에 탑재되기로 하였는데, 신형 고속정에 해성 대함미사일만 탑재하자니 정작 북한군 고속정이나 소형 선박 공격용으로는 과무장이다 싶어서 나온 방안이라고. 2013년 12월 6일 방위사업청의 제149회 사업관리분과위원회 해당 무기의 개발 우선협장 업체로 LIG 넥스원을 승인하면서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3.5. 비룡 130mm 유도로켓
번개사업을 실패로 끝마치고 기존과 다른 소요제기로 초반 지대지에서 지대함 플랫폼으로 개발로 결정.
자세한 내용은 비룡 130mm 유도로켓 항목 참조.
3.6. 전술지대지유도무기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소요제기로 인하여 공개 일반사업으로 전환. 2014년에 업체선정을 하여 2020년까지 개발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전술지대지유도무기 참조.
[1] 비슷한 것으로 미국이 1944년 만들었던 완전자동개조형 시제품 T20(이후 이 설계가 M14 소총으로 이어진다)이 있다.[2]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날던 새도 떨어트린다고 할 만큼의 권세를 자랑하며 칼춤을 추어대던(…) 경호실이라 할지라도(참고로 당시 경호실장은 그 유명한 피스톨 박), 이런 중요한(그것도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사업의 주요 책임자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을테니.[3] 장사정포 공격용 등으로도 필요이유를 가져다 붙이기는 하는데, 대부분의 북한군 장사정포가 갱도포 형태이기 때문에 이러한 탄도탄으로는 공격이 어렵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장사정포, 대응용으로는 약간 무리가 있다.[4] 단, 스파이크 미사일은 이스라엘 같은 사막지대에서 운용되던 미사일이라 정작 해무가 짙게 끼는 서해5도 환경에서 제성능을 발휘하지 못하여 문제가 되었다는 기사가 나온바 있다. 이후 이 부분을 개량하여 도입하였는지는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