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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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경제관료, 정치인, 외교관으로 대한민국 최장 재임 대통령비서실장[1] 으로 유명하다.
2.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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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흥은행장을 지낸 김교철과 최안자 부부. 오른쪽 뒤는 장남 김정호로 한일은행장을 지냈으며, 오른쪽 앞이 3남 김정렴이다.
1924년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김교철과 최안자의 3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논산으로 내려가 강경상업학교와 일본 오이타(大分)경제전문학교를 나와 1944년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입행하였다.
하지만 입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제 징용되어 1944년 규슈현 구마모토의 육군예비사관학교에 입교, 9개월만에 히로시마 소재 군관부 사령부에 배속되고 일제 패망 때까지 그 곳에 있었다.[2]
해방 후 치료를 받다가 귀국해 1949년 육군 준위로 임관하여 1952년 준위로 예편하였다. 한국은행 시절이던 1953년에는 29세의 나이로 1차 통화개혁을 전문(全文) 기안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으며, 1956년 한국은행 조사부 차장에 올랐다.
2.1. 박정희 정부
제3공화국이 출범한 이후 1966년 1월 21대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취임하였으나, 동년 5월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고 이에 대한 반발로 9월 22일 김두한의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똥물을 맞았고 이후 정일권 국무총리 이하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퇴임하였다. 곧바로 다음해인 1967년 10월 23대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으로 취임해서 1969년 10월까지 재직하였다.
이후 '''제갈조조''' 이후락의 뒤를 이어 1969년 10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무려 9년 2개월 동안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일하였다. 비서실장 임명과 관련해 김정렴 장관은 자신의 회고록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에서 본인이 청와대로 불려가 "각하, 저는 경제나 좀 알지 정치는 모릅니다. 비서실장 만은 제 적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야말로 국정의 기본이고 경제가 잘돼야 정치·국방도 튼튼하게 할 수 있다"면서 설득했다고 회고했다.
취임 직후 '청와대가 작아야 경제정책이 원활히 돌아간다'는 신념에 따라 가장 먼저 비서실을 축소하였고, 차관 이하 인사는 청와대가 하지 않고 장관들에게 위임했다. 그러면서도 장관급 인사들은 본인이 직접 챙겼다.
그리고 비서실장 재임 중 많은 일들에 관여했다. 수출입국·공업화 정책 수립, 중화학공업 건설, 방위산업 육성 등 산업 고도화 정책 수립과 실행을 주도했으며, 농업개발·산림녹화·새마을운동과 고속도로 건설, 의료보장제도의 추진에도 관여했다. 쌀 자급자족 달성, 8·3 사채동결, 부가가치세 도입,[3]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대덕연구개발특구 등을 주도해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 이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받으면서 이승만 대통령부터 2021년 현재까지 역대 최장수 재임기간을 달성한 비서실장이 되었다.
1978년 건강문제를 이유로 비서실장직을 사임하고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정확한 사유는 이렇다. 당시 시기 상으로 1977년 부가가치세를 도입 하였는데 이듬해 연말의 제1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부가세 철폐를 내세운 신민당과 무소속의 득표가 민주공화당을 앞서게 되어, 공화당은 이를 주도한 경제팀에 책임이 있다며 청와대에 건의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주도한 경제팀을 대거 교체하는 개각을 단행하였다. 제1참모로서 이에 따른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비서실장 사임 직후 곧바로 주일대사에 임명되면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후임 비서실장은 주 대만 대사[4] 였던 김계원.
공교롭게도 김정렴이 청와대를 떠난지 10개월 만에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당했다. 이 때문에 만일 김정렴이 계속 대통령비서실장으로 남았거나, 최소한 10.26의 현장에 있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5] 실제로 10.26 사태 당시 주 일본 대사로 일본에 나가 있던 김정렴이 급거 귀국했을 때, 그의 주위 지인들과 청와대 시절 동료들은 "당신이 청와대에 계속 남아 계셨다면 각하께서 이렇게 어이없이 돌아가시는 일은 없었을텐데..."[6] 라며 애통해 했다고 한다.
화폐개혁, 새마을운동, 산림 녹화사업에도 참여하는 등 주요 정책의 시행 및 사회 공헌에도 힘썼다.
2.2. 박정희 정부 이후
1999년부터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이사, 2007년부터 사업회 회장을 맡아왔다. #
2016년 11월 동아일보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비서실장 시절부터 최태민 일가의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다고 증언하여 안타까움을 밝혔다
2020년 4월 2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6세. 역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 아래 중화학 공업, 방위산업 건설에 매진했던 기술관료 출신의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 제2수석이 타계한 지 1년만의 일이다. 이로써 박정희 시대의 건설기를 함께 했던 산증인들이 대부분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3. 가족
부친부터 대대로 금융계에 몸담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아버지 김교철은 조흥은행장, 형 김정호는 한일은행장을 지냈으며 둘째 형은 식산은행(현 산업은행)에 다니다 6.25 전쟁 때 작고했다. 장남 김두경은 전 은행연합회 상무이사, 차남 김승경은 전 메트라이프생명 상무 및 전 새마을금고 연합회 신용공제 대표이사, 3남 김준경은 대통령실 금융비서관을 거쳐 2013~2017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을 역임했다. 사위는 전 현대증권 회장 김중웅이다.
형 김정호의 사위, 즉 조카사위가 김종인 전 국회의원이다.[7]
4. 기타
- 통치 말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하야하겠다는 의사를 자신에게 밝혔다고 증언한다. 헌법을 개정해 김종필을 대통령 후보 및 후계자로 내세워 제대로된 간선제로 변경해 김영삼,김대중과 붙여본다며... 대통령 비서실장계의 ‘살아 있는 전설’ 金正濂
- 경호실장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박정희 빼고 지위고하를 안가리고 오만불손 하게 굴었던 차지철도 쩔쩔매던 인물 중 하나가 김정렴이었다. 경호실 하기식에 오라고 해도 절대 들은 척도 안하던 꼬장꼬장한 성격이었고 박정희가 총애하던 관료였기 때문에 차지철도 감히 함부로 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비서실장 사직으로부터 불과 1년만에 10.26 사태가 벌어진 것은 그의 빈 자리가 얼마나 큰 비극으로 이어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5. 주요 저서
- <한국경제정책 30년사>(중앙일보), 정치 회고록 <아, 박정희>(중앙일보),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랜덤 하우스 코리아)(한국경제정책 30년사를 대폭 수정 증보 정리한 책)가 있다. 이 책들은 개발연대를 탐구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자료로 여겨지며,여러 한국현대사 및 경제사 연구에서 자주 인용되는 저서들이다.
6. 미디어에서
제3공화국에서는 배우 최상훈이, 제4공화국에서는 배우 신충식이, 코리아게이트에서는 배우 이묵원[8] 이 그를 연기하였다.
[1] '''무려 9년 2개월이다'''. 정일권 총리와 마찬가지로 아주 특수한 상황이나 개헌 없이는 사실상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2] 즉 원자폭탄을 맞고 돌아온 사람이다. 자세한 내용은 김정렴의 저서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참고'[3] 다만 부가세는 그가 물러나게 된 원인이 된다.[4]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고서 곧바로 주 대만 대사로 부임했다.[5] 김계원은 당시 중정부장 시절에 박 대통령의 신임을 잃고 비교적 한직인 주 대만 대사로 보직이동 되었다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추천으로 복귀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보니, 김계원은 김재규의 영향력 밑에 있었던 사람이다. 실제로 호형호제 할 정도로 김재규와 김계원의 친분은 컸기도 했고.[6] 차지철 항목에도 있지만 김정렴은 차지철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 인물이기도 했다.[7] 김종인은 이후 신군부에 협력해서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11, 12대 국회의원, 민주자유당에서 14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기용되나 싶었지만, 기용되지 않았다. 이후 민주당계 정당으로 갈아타서 17대 국회의원(새천년민주당, 비례)를 지냈었다. 2012년에는 보수진영으로 돌아와서 박근혜 대선캠프에서 일하다가 박근혜 대통령과의 불화로 다시 민주당계로 들어와서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을 지냈으며, 20대 비례 국회의원이 되었다. 특이하게도 김종인은 비례대표로만 5선을 지냈다.[8] 배우 강부자의 남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