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수도
1. 개요
한 나라에서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 불가피한 사정이 발생해 기존의 수도가 심각한 위험에 처했을 때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수도를 잠시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좀 더 상황이 나빠지면 영토를 모두 잃고 아예 해외로 망명한 망명 정부가 된다.
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케이스는 한국 전쟁 당시 부산이 서울을 대신해 대한민국의 임시수도 역할을 했던 것이다. 임시수도 정부청사(現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와 경무대 역할을 대신했던 이승만 관저[1] 등 임시수도 당시 주요 시설이 모여있는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에는 임시수도기념관에서 부민사거리까지 이어지는 임시수도기념로를 조성해 이를 기리고 있으며 2016년부터 피란수도 부산야행 행사를 매 년마다 진행 중이다.[2]
2. 임시수도 목록
2.1. 현존하는 임시수도
- 타이베이 - 국공내전에서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 정권이 중국 대륙을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에게 빼앗고 1949년 국부천대한 이래, 대만이 본거지가 되자, 원래 수도 난징을 대신해 대만 섬의 타이베이를 임시수도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나날이 중국 대륙의 국력이 강해지면서 사실상 '본토 수복' 가능성이 희박해진 현재는 타이베이를 임시수도로 볼 것인지 정식 수도로 볼 것인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일례로 2008년 교과서 집필에서 '중화민국의 수도는 난징이다' 문구를 삭제하였다.[3]
- 티파리티(Tifariti) - 미승인국인 서사하라(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의 수도. 원래 수도는 모로코가 통치하는 '엘아이운’'이지만... 원래 임시수도는 '비르 렐루'였으나, 2011년, 티파리티로 천도했다. 그러나 진짜 정부 소재지는 알제리의 틴두프.
다만 해외인 알제리보다 서사하라 독립세력이 실질적으로 보유한 영토(Free Zone)#내에 위치한 티파리티의 상징성이 큰 지라.... 서사하라 공화국의 의회나 각종 공식 행사는 티파리티에서 열린다.
- 아덴 - 예멘의 내전 악화로 2015년 2월, 하디 대통령이 후티 반군이 장악한 수도 사나를 떠나 여기로 탈출, 임시수도로 선포했다. 그러나 4월 초, 후티 반군이 아덴까지 점령해 임시수도는 끝났다. 그러나 7월에 사우디아라비아의 개입에 힘입어 정부군이 재탈환했다.
2.2. 과거의 임시수도
2.2.1. 한반도
여러가지로 유명한 부산 지역. 6.25 전쟁 때에도 임시 수도로 정했던 부산.
- 신라의 명활성[4] - 475년~488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 위협을 경계해 옮겨 있었다.
- 여몽전쟁 기간 중
- 6.25 전쟁 기간 중
- 대전광역시 - 1950년 6월 27일 ~ 7월 16일. 대전전투 중 대구로 이동. 대전은 4일 뒤인 7월 20일 북한군에 점령되었다.
- 대구광역시 - 1950년 7월 16일 ~ 8월 17일. 다부동 전투 전후로 대구도 위험하다고 최종적으로 부산으로 천도했다. 기간이 짧아서 부산시에 비해 임시수도였다는 존재감은 낮은 편. 다만 다부동 전투에서 방어하는데 성공하고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대구는 끝내 한 번도 인민군에게 함락당하진 않았다.[5]
- 부산광역시 - 1950년 8월 18일 ~ 10월 27일, 1951년 1월 4일 ~ 1953년 8월 14일[6] . 임시수도였던 기간이 대전이나 대구보다 훨씬 길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의 전시수도로서는 부산이 가장 유명하다. 서울 탈환 이후 북진한 국군이 압록강에 도달한 다음 날인 10월 27일 환도가 이뤄졌으나, 1951년 1월 4일 1.4 후퇴로 서울이 재점령되자 다시 임시수도가 되었다. 그 후 UN군 반격으로 서울을 재탈환했지만 환도는 하지 않고 정전 후인 1953년 8월 14일까지 부산을 임시수도로 유지한다. 부산시는 이를 기리고자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에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관저를 임시수도기념관으로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 강계시 -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UN군이 38선을 넘어 평양을 향해 북진해오자 북한 정부는 1950년 10월 12일 평양에서 철수, 강계로 천도하였다. 이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38선 언저리로 내려가면서 평양을 수복했으나 제공권을 쥔 UN군 공군의 폭격이 너무 심해서 환도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강계로 임시수도로 활용하고 휴전 이후 평양으로 환도하였다.[7]
- 평양직할시 - 1948년 북한 정권 수립 이후 헌법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首部, 수도)는 서울시다"라는 조항을 포함시켰다. 대신 평양은 별도의 법률을 통해서 임시수도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1972년 북한 헌법 제6차 개정에서 서울을 평양으로 바꾸었다.
2.2.2. 세계
- 베이징 - 명나라 초기 3대 황제 영락제가 정난의 변 이후 난징에서 즉위한 뒤 연왕(燕王)시절 자신의 본거지였던 베이징으로 천도한 후 경사(京師)[8] 라고 불렀는데 이후 황제들의 치세에 여러번 난징을 다시 경사(京師)로 고치고, 베이징을 임시수도를 의미하는 행재(行在)로 고치는 등[9] 몇 차례 정식 수도와 임시 수도 지위를 오가다가 명나라의 정식 수도로 정착했다. 참고로 명대에는 난징에도 수도 베이징과 마찬가지로 중앙 관청들이 있었고, 베이징에서 쓰는 북방 관화 이외에 난징에서 쓰는 남방 관화가 따로 존재했다.
- 항저우 - 위에 언급된 행재(行在)의 시조.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들어서자 언젠가는 반드시 수도 카이펑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항저우를 행재라 하여 임시수도로 정했다. 실제로는 망할 때까지 계속 항저우에 있었으나, 명목상으로는 끝까지 임시수도로 남았다. 이 때문에 항저우의 궁성이나 관청은 크게 짓지 않았고 능묘도 초라한 편이었다.
- 뤄양 -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때 상하이에서 격전이 벌어지자 일본군이 장강을 따라 난징을 침공할 것을 우려한 장제스가 잠시 뤄양으로 수도를 옮겼었다.
- 청두 - 중일전쟁 때 충칭까지 함락되면 이곳이 수도가 될 예정이었으나, 충칭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국공내전 중 충칭이 함락되자 이곳이 최후의 수도가 되었으나, 군벌들이 기의를 일으켜 공산군에 항복함으로 공산군에게 넘어갔다. 청두가 함락되기 직전 장제스는 국부천대로 타이완으로 도망가게 된다. 이후 중화민국의 수도는 사실상 타이베이가 되었다. 이후의 수도 문제는 중화민국의 국가 정체성과도 연결이 되는 복잡한 문제인데 국부천대 및 양안관계 문서에 나와 있다. 사실, 청두의 임시수도로의 역사는 당나라때에 더 유명한데, 안사의 난, 황소의 난 때에 두 번이나 임시수도가 되었다.
- 리우데자네이루 - 이베리아 반도 전쟁 시기 포르투갈의 임시수도로 직선거리만 7,700km가 넘고 대서양과 적도 뛰어넘는 이 분야 레전드. 원래 수도인 리스본을 포함한 본토가 나폴레옹에게 점령되어 식민지 브라질로 수도를 옮긴 것이다. 브라질 독립 이후에는 브라질리아로 천도하기 전까지 정식 수도였다.
- 보르도 - 1910년대에 제1차 세계대전을 맞이한 프랑스군이 독일군에게 밀리자 프랑스 정부가 이곳으로 이전했다가 전시 체제의 안정화에 성공하면서 파리로 환도했는데, 1940년에 제2차 세계대전을 맞이한 프랑스군이 독일군에게 밀리자 프랑스 정부가 이곳으로 이전했다가 비시 프랑스 정부를 수립하면서 비시를 임시수도로 정했다.
- 욕야카르타 - 인도네시아 독립전쟁(1945~1949년)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의 임시수도였다.
- 부키팅기 -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와중인 1948년 네덜란드군이 인도네시아의 임시수도인 욕야카르타를 함락시키자 인도네시아는 수도를 부키팅기로 옮겨 항전을 벌였다.
- 텔아비브 - 1948년부터 1977년까지 이스라엘의 임시수도였다. 6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도시계획을 수립하여 1968년부터 1992년까지 국회의사당과 중앙정부청사와 대법원 및 복지부처와 공안기관(공안부+경찰청+소방청+교도청)과 이스라엘은행을 차례로 이전했다. 그래서 1977년에 이르면 예루살렘이 명실상부한 행정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국내외의 정세가 불안하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의 총력전에 대비하여 경제부처와 방위기관(국방부+육군청+해군청+공군청) 및 국유기업과 증권거래소는 여전히 텔아비브에 있다. 국제사회의 주권국가들 가운데 약 30여개국을 제외한 나머지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국가의 정식 수도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각국의 대사관들은 텔아비브에 상주하고 있으며, 예루살렘에는 현재 영사관이나 공사관처럼 대사관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기관들만이 상주했을 뿐 대사관이나 대사급 기관은 단 한 나라도 상주하지 않았으나 2018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는 내용의 예루살렘 선언을 발표하고 예루살렘으로 미국 대사관을 이전시켜 논란이 되었다.
2.3. 한때 고려되었던 임시수도
- 쿠이비셰프(현재명 사마라) -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향해 밀고 들어오자 소련 정부가 수도를 이곳으로 임시 이전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으나, 모스크바 사수를 결심한 스탈린에 의해 거부되었다. 다만 일부 요인이나 중요 기관 등은 쿠이비셰프로 이전하였다.
- 공주 장기지구 - 박정희 정권은 서울이 군사적으로 전방인 문제와 서울의 집중화를 해결할 목적[10] 으로, 통일 이후에는 서울로 환도한다는 전제조건 아래 비교적 후방 지역에 임시행정수도를 건설한다는 소위 백지계획을 세웠다. 1977년 '임시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키고, 충청지방의 논산, 보은, 공주, 천안(목천)[11] 등을 후보지로 검토하여 '공주 장기지구'를 임시행정수도 부지로 최종 낙점하였다.[12][13] 구체적인 도시계획[14][15] 과 도시 건설, 공공기관 이전 일정까지 준비했다. 그러나 1979년 말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위기 및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압박으로 인한 안보위기 등으로 추진동력이 떨어지다가, 결국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면서 백지계획은 유명무실해졌다. 다만 이 계획은 훗날 둔산신도시 개발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가 2004년 노무현 정권의 신행정수도 추진으로 이 계획은 간접적으로 계승되었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특별자치시)가 탄생하였다. 상기 각주에서 언급됐듯이, 현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특별자치시)의 대부분은 임시행정수도 계획의 동쪽 시가지에 해당된다. 당시 말단 실무자로 참여했던 김진애 의원의 포스팅. 박정희의 수도이전 계획과 현 행정도시의 입지 비교
2.4. 창작물에서의 임시수도
3. 관련 문서
[1] 현 임시수도 기념관 건물.[2] 사실 국가안보 측면에서 보자면 '''수도를 서울로 환도하지 않고 부산에 그대로 두는게 더 나았다'''. 현재 대한민국이 핵무기 외에는 모든 전력에서 북한을 압도함에도 안보 위협을 느끼는 것은 '''서울이 휴전선에서 너무 가까워 포격 사거리 안에 들어가고 기동방어가 불가능'''하다는 지리적인 불리함 탓이다. 그래서 판문점 선언 후 남북군사회담에서 북한측이 양측 병력을 뒤로 물리자는 제의를 했을때 대한민국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부산에 수도를 그대로 두었다면 설령 북한군이 남침하여 한강 이북을 북한군에게 일시 빼앗겼다 해도 기동방어를 통해 오히려 북한군을 끌어들여 섬멸할 공간의 여유가 충분했을 것이므로 훨씬 더 여유를 갖고 대북 군사전략을 수립할수 있었을 것이다.[3] 천수이볜 정부가 감행하였다.[4] 임시수도라기 보다는 고대 한반도 수도 특유의 전시성~평시성 체제에 가깝다. 수도 바로 근처에 전시에 농성할 수 있는 성을 쌓아 전시에 대비하는 것.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의 경우에도 국내성(평시성)과 환도산성(전시성) 이중 구조였고, 한성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 역시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북성(평시성)과 남성(전시성) 이중 구조였으며, 신라의 명활산성 또한 그런 역할을 하는 성이다.[5] 그래도 낙동강 전투 중에는 대구역 등지에 포격이 떨어지기도 했다.[6] 이 시기에 발췌 개헌(부산정치파동), 제2대 대통령 선거 등의 사건이 있었다.[7] 지금도 유사시 방어하기 힘든 평양 대신 개마고원 안쪽의 후방 강계가 임시수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대비가 되어있다고 한다.[8] '수도'를 의미[9] 물론 베이징을 행재로 고쳤을 때에도 황제들은 베이징에 머물렀다.[10] 서울 집중으로 인한 여러 가지 폐해(대표적으로 상하수도 문제)는 당시 정권에서도 큰 골칫거리라, 서울 편입 예정지였던 지금의 광명시 북부마저도 최규하 정부까지는 서울 편입을 보류했다가 전두환이 집권하자마자 배제했을 정도였다.[11] 천안(당시 천원군) 목천 지역은 훗날 독립기념관이 들어서게 된다. 행정수도 이전계획에 참여했던 김재익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독립기념관 입지 선정에도 관여하면서, 교통과 지세가 좋아 행정수도 후보지 중 하나로 삼았던 목천 지역(행정수도 이전계획 당시 명칭은 '천원지구')에 독립기념관이 들어서게 했다.[12] 정부종합청사·국회·대법원 등 수도 기능이 입지할 부지의 중심부가 당시 행정구역으로 공주군 장기면(현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에 해당되어, '장기지구'란 이름이 붙었다. 이 때의 부지는 현재의 공주시 신관동·월송동, 우성면·의당면 각 일부,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서부, 연기면·금남면 각 일부 등에 해당됐다. 즉, 당시 임시행정수도 계획의 동쪽 지역은 오늘날 세종특별자치시(행정중심복합도시)의 서쪽 내지는 중심부에 해당된다. 공주군 장기면의 대부분은 세종시에 흡수되었으며, 남은 3개리는 월송동에 편입되었다.[13] 장기지구는 원래 초기 검토 대상에는 없었으며, '공주지구'와 '대평지구'라는 2개의 지구의 각 일부였다. 이 중 대평지구는 공교롭게도 오늘날 행정중심복합도시와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정작 당시 선정위원들의 최종평가에서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가, 그 옆의 공주지구(현재의 공주시 시가지에 더 가까운 부지로, 역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음)와 절충해 만든 장기지구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게 되어 최종 확정됐다.[14] 심지어 1996년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주경기장을 포함한 스포츠타운 부지까지 지정되어 있었다.[15] 박정희 정부 때 테크노크라트로 유명한 오원철이 프로젝트를 총괄했으며, 참여한 전문가들로 경제학자이자 관료인 김재익·박승·김만제, 건축가 김수근, 건축·도시계획가이자 전 국회의원인 김진애 등이 있다. 특히 도시계획, 건축 등의 분야에서는 국가적인 대규모 프로젝트였음을 반영하듯, 당시 국내 최고의 전문가들(앞서 언급된 김수근을 비롯해 엄덕문, 윤장섭, 박병주, 주종원, 강병기, 황용주 등)이 대거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