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발(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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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당시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 노란색이라고 한다.
1. 개요
2. 상세
3. 재현
4. 시발 세단
5. 여담
6. 모형화


1. 개요


6.25 전쟁 휴전 직후인 1955년미군이 내다버린 윌리스 MB 지프들을 주워다가 완전히 해체한 후 쓸만한 부품끼리 긁어모아서 다시 조립해 만든 영운기로, 당시 법제에서는 자동차로 인정받았다. 때문에 형태도 지프 스타일, 즉, SUV이다.
제작사는 국제차량제작 주식회사. 국제차량제작소는 자동차 정비업을 하고 있던 최무성, 최혜성, 최순성 3형제가 세운 회사로 1947년에 설립되었다. 1955년 8월에 이 차를 제작했고 이 차 외에도 아래에 나오는 9인승 세단형 차량도 제작했다. 그러다가 1963년 5월까지 새나라자동차와 경쟁을 하다가 끝내 망했다.

2. 상세



※ 전영선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1]의 인터뷰.
상술했듯이 버려진 미군 지프를 가져다 만들었기 때문에 디자인이나 구동 계통이 윌리스 MB와 같다. 그리고 워낙 열악한 환경에서 차를 만들다보니 초기에는 천막에서 생산했을 정도이고 제작 기간도 수개월이 걸릴 정도였다. 쌍용차의 전신인 신진자동차도 이 모델 베이스로 생산했으니 현재의 코란도로 유산이 넘어간 셈.
엔진의 경우 함경도 아바이라는 별명을 가진 김영삼[2]이 주도해서 엔진을 철저히 역설계를 한 뒤 주조 방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자사의 자동차 부품들이 멋대로 활용되고 복제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미국 자동차 회사 관계자가 시발차 공장에 와서 엔진 만드는 광경을 보고 뜻밖의 의미로 경악했다고. 그래서 그는 '''"당신들 정말 대단하군요. 하지만 이런 짓은 당장 그만둬야 할 겁니다."''' 라면서 칭찬과 경고를 함께 날려주고 갔다고 한다.
이름은 시발#s-1 문서의 1번과는 한자가 같은데(始發), 최초로 국산 기술로 자동차를 만든것을 기념하자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식 상표는 'ㅅㅣ-ㅂㅏㄹ'. 모음 길이를 구별하던 시대라 그런지[3] 그냥 '시발'이 아니라 '시-발'이라고 하이픈을 넣어서 쓴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이름이 순전히 욕 하나 때문에...(이래도 감이 안 온다면 이름을 '''The Beginning, The Origin, The First''' 라고 해보자. 확실히 좋은 뜻이긴 하다. 심지어 현대 제네시스도 따져보면 비슷한 뜻이다.) 라디오 광고도 있는데 로고송이 놀랍게도

'''시발, 시발, 우리의 시~발 자동차를 타고 삼천리를 달리자'''♬

라는 가사이다(...) 안타깝게도 이 로고송은 악보와 음원마저도 유실된 상태다. 해당 영상. 남아있었다면 나름대로 유명한 곡일 텐데 안타까운 부분. 그래도 기억하고 있는 어르신이 있을지도?
위 전영선 소장의 인터뷰에서도 언급되는 부분이지만, 그 당시에도 시발이라는 말의 어감 때문에 아이들이 이 로고송을 부르고 다니는 것을 들은 어머니들이 어디서 그런 욕지거리를 하고 다니냐며 야단을 치는 해프닝이 종종 있었다는 모양.
1955년 8월 출시 당시 이 차량은 최초에는 인지도가 낮고, 유선형의 다른 자동차와는 달리 사각형의 투박한 디자인인지라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4], 6.25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년 10월에 개최한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 출품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이 시발자동차는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인지도가 대폭 상승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이 차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오히려 상류층에서 더 인기가 있었다. 심지어 시발차를 생산하기 위하여 주문자에게서 받은 돈만 1억 환이 넘었다고 하며,(당시 판매가는 약 90만 환) 시발차를 프리미엄까지 얹어서 팔려고 시발계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 후 1962년에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에서 닛산에서 개발한 자동차인 블루버드와 동일한 부품을 수입해서 생산한 '새나라' 가 등장하면서 시발차는 새나라에 비해 품질, 디자인, 성능 등에서 밀리다보니 판매량 저하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시발차는 약 3,000대가 넘게 팔린 것으로 보인다.

3. 재현


안타깝게도 실제 생산할 당시의 차는 현재로서는 단 한 대도 존재하지 않는다.[5] 즉 남아있는 거라고는 죄다 재현품.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삼성교통박물관에 2대[6], 광주 버스터미널(유스퀘어) 중앙에 1대, 제주도 세계자동차박물관에 1대가 전시 중이다. 자동차 대여 업체인 금호상사에도 한 대가 있다. 광화문광장 옆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도 1대 전시되어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당시 제작자의 증언 등이 있어 재현은 온전하게 할 수 있었다는 것. 시대가 시대인지라 흑백사진뿐이라 도색을 못할 뻔했는데 다행히 했다. 제작자의 증언에 따르면 에탄올 버전도 만들려 했다고.이게 바로 시발차, #2 그리고 네이버 자동차에도 뜬다!
2019년 12월, 보배드림에 방치된 시발자동차의 사진이 올라왔다.# 사진이 찍힌 곳은 대전에 위치한 정일모터스라는 정비공장 옆이다. 하지만 이 차량은 1993 대전 엑스포 당시 전시된 재현차량이다. 즉, 오리지널이 아닌 레플리카.
야인시대 107화에서도 복제품이 잠깐 나온 바 있다.
제주도에서 1960년 초에서~1970년까지 시발택시 모델이 현역으로 사용되었다.#

4. 시발 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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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세단의 모습. 디자인은 1956년식 플리머스 벨베디어나 동시대의 머큐리 몬터레이를 참고한 모양이다. 형태만 보면 어찌 왜건처럼 생겼다.
대한뉴스에 따르면 국제차량제작소에서는 파생 모델로 세단을 제작해 판매한 것으로 보인다.# 이 차량은 9인승으로 월 100대까지 생산이 가능했으며 천장이 낮은 것을 빼고는 미제 승용차와 비교해도 뛰어나다고 설명됐다. 시발 계열의 자동차 부품들은 자체 제작되어 국산화를 60프로까지 달성했다고 한다. 심지어 엔진도 미국산을 복제해서 주물로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엔진 도사로 불리던 김영삼이 이 회사에서 일했었고 윌리스제 직렬 4기통 2.2리터 고데빌 엔진을 복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최고시속은 130km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급격한 자동차 증가로 석유 파동을 우려한 이승만 정부가 1957년 5월 8일 자동차의 수를 제한하는 긴급조치를 발동하면서 시발 세단의 생산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 여파로 판매량도 상당히 저조했으며 남아있는 차량도 단 한 대도 없고 복제품조차도 없다.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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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버스
시발 픽업
  • 시발차를 만든 국제차량제작소는 이 사진처럼 버스도 제작했다. 명칭은 시-발듸-젤뻐쓰(...). 하체와 엔진은 폐차된 미군 군용트럭의 것을 이용하고 차체는 드럼통을 펴서 제작한 버스이다.
  • 시발 픽업트럭도 만들었지만, 단 2대만이 생산되었다. 이유는 당시 시발과 시발 세단의 인기가 높아서 상대적으로 수요가 없었던 픽업을 대량생산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 필리핀에도 이 차처럼 군용 지프를 개조해서 만든 대중 교통수단인 지프니가 있다. 이쪽은 아직도 현역이다.[7]
  • 항공기 판으로는 해취호가 있다. 사실 한국의 극초기 개발 항공기들은 죄다 추락하거나 어디서 주워온 외국제 부품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항공우주 기술이 그만큼 수준높은 기술이니 별 수 없지만.
  •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최병조 명예교수(1953년생)의 회고에 의하면, 어릴 때 놀다가 시발택시에 치인 적이 있다고 한다.[8] 회고담에서 "시발택시"라고 명확히 진술하는 것을 보면, 그 시대의 한국인들에게 확실히 네임드 차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오원철이 박정희에 의해 공무원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여기에서 공장장으로 일하였다. 이때의 경험으로 방산산업과 각종 민수산업이 나름 효율성 있게 돌아가도록 한 현실 경험을 쌓을 수 있던 것이며, 시발자동차가 한국현대사에 아직도 가려진 의의가 많다는 뜻이다.

6. 모형화


모형화된 제품은 전무하다. 박물관 전시용 모형이 수작업으로 만들어졌을 뿐 양산되는 제품은 없다.
용인에 있는 삼성 자동차 박물관에서 기념품으로 판매하는 완구가 유일하다. 가격대가 저렴한지라 바디가 플라스틱이고 문열림 기능이 없는 통짜여서 모형이라고 하기엔 초라한 수준이다. 그래도 완구 특유의 귀여움이 느껴진다. 1970년대 학교 문구점에서 파는 듯한 느낌의 케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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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으로 재현하려면 이걸 사다가 도색만 다르게 하면 된다. 이 제품은 아카데미과학제 M151A2 '''하드탑 트레일러 지프'''이다. 단 M151A2 무트 지프는 윌리스 지프 다음 모델로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온 모델이다. 윌리스 지프의 부품을 모아서 만든 시발을 얼추 흉내만 내는 수준.
3D 이노 메탈로 재현된 금속모형도 있는데 완구용보다는 장식용에 비중이 크기 때문에 문열림기능과 바퀴구동기능이 없다. 색상이 실차 그대로 재현되어 비교적 디테일이 뛰어나지만 조립난이도가 높은 편이다.#

[1] 全永先. 1939년 대구 출생. 대구 계성고등학교와 계명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1964년 하동환자동차에 입사한 이래 신진자동차, 새한자동차, 동아자동차, 쌍용자동차 등에서 하동환 A60, 새한 BD098, BF101, 동아 HA20, HR252 등 주로 국산 버스 차종의 개발 및 디자인에 참여하였고, 1992년 은퇴하여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를 설립하고 지금까지 자동차의 보존 및 복원에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다.[2] 前 대통령과는 다른 사람이다. 한국 자동차 공학 1대급 엔지니어인데 본인은 정규교육을 받은적이 없지만 교회에서 한글과 일본어를 배웠고 일본의 기계설계 책들로 독학을 하고 나중에 일본으로 직접 가서 기계설계와 엔진설계, 주조까지 배웠던 사람이다.[3] 진짜 이게 반영됐다면 당시에만 해도 그 욕과는 다른 발음으로 취급됐을 것이다.[4] 폐차된 지프를 재활용하여 조립하였기에 현역 당시 생산시기별로 디자인이 가지각색이어서 완전히 똑같은 지프 형태가 아니다. 심지어는 드럼통을 자르고 펴서 차체를 만들고 지프 차대에 폐기된 타 미제 승용차의 부품도 사용했었다.[5] 도시미관 유지 및 새로운 자동차관리법의 시행으로 남아있던 시발 차량은 1968년 이전에 모두 폐차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시발 차량의 폐차를 알리는 신문기사.[6] 그나마 실차에 제일 가깝다.[7] 특히 마닐라 쪽의 지프니가 시발차와 유사하다.[8] 서울대학교 법학, 제59권 제1호(2018), 18~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