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컴의 윌리엄

 


'''William of Ockham'''[1]
1285년?~ 1347년 또는 1349년


1. 개요


영국철학자, 신학자.
'오컴 출신 윌리엄' 이지 윌리엄 오컴이 아니다. 중세 시대에 은 귀족들이나 가질 시기라 이름은 윌리엄이며, 오컴은 성이 아니라 고향 마을의 지명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응하는 후기 스콜라 철학을 대표한다. 보통 서양 철학사에서 '중세의 끝물'에 해당하는 대표적 철학자 중 하나라고 여겨진다. 오컴의 철학 가운데서도 특히 유명한 것은 '''오컴의 면도날'''.
프란치스코회 수도자였기에 신학자이기도 하고 당대 반대파에 의해 이단으로 고소당하기도 했는데, 일부 명제에 대해선 이단성이 있다고 판단받긴 했지만 공식적으로 가톨릭에서 이단으로 선고받진 않았다. 특이한 점은 아비뇽 유수 시기에 대립교황 니콜라오 5세를 매우 열렬히 편들었다는 사실이다.[2] 교황 요한 22세와 대립교황 니콜라오 5세가 병립한 시기에 가톨릭 세계는 대부분 요한 22세를 지지했으나, 윌리엄은 니콜라오 5세가 스스로 대립교황이라고 인정하고 퇴위할 때까지 일관되게 지지하였다.

2. 유산



2.1. 형이상학


중세 보편 논쟁에서 '''속성'''에 대한 '''유명론(唯名論)'''을 발전시킨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하나다.
중세 유명론의 선구자 중 하나인 콩피에뉴의 로스켈리누스는 술어 "인간"에 해당하는 별도의 추상적 속성 같은 것은 없으며, 그저 인간 한 명 한 명이 있을 뿐 '인간 자체'라는 것은 그저 "인간"이라는 말소리일 뿐이라고 주장했다고 전해진다. 그 제자인 아벨라르두스는 다만 물리적인 말소리 그 자체는 될 수 없으며, 말소리들이 공유하는 언어적 의미가 바로 속성의 정체라고 주장했다.
윌리엄은 이런 선대 유명론자들의 핵심적인 통찰에는 동의하되, 우리가 말하고 쓰는 언어의 의미는 심적 언어(verba mentalia)에서 유래한다고 봤다. 곧 윌리엄에 따르면 속성이란 심적 언어의 개념(conceptus)이다. 이하 윌리엄의 언어철학 항목 참조.
현대에는 유명론= 근대적 방식(via moderna) =오컴주의 하는 식으로 뭉뚱그려 표현되곤 한다. 유명론이란 이름 자체가 당시엔 오컴의 윌리엄처럼 기존학문방식에 대해 비판하는 후기 스콜라시대 새로운 철학자들을 두고 실재론자들이 명명한 것이다. 14-15세기에 걸쳐 1960년대까지 북유럽의 기존의 스콜라철학 비판자들을 가르켜 유명론자로 불렀다. 그러나 현대의 연구로는 반(反)실재론 성향으로 묶이는 학자들은 서로간에 내용상이나 학문적 유사점인 별로 없다고 판단한다. 무슨 소리냐면 '''유명론이든 실재론이든 중점은 교리나 철학주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논리전개방식'이기 때문이다. 윌리엄을 비롯한 반(反)실재론자들은 크게 두 가지 노선으로 나뉜다. 윌리엄을 비롯한 새로운 길(via moderna)[3] 노선, 근대 아우구스티누스주의 노선(The modern Augustian school)으로 나뉘는데 후자 근대 아우구스티누스주의 노선은 방법론에 한하여 새로운 길(via moderna)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오컴주의를 비롯한 새로운 길 노선과 전혀 다르다.'''

오컴의 윌리엄의 학문적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세 최고의 논쟁인 보편논쟁을 이해해야 한다.우선 중세 대표 스콜라 철학자과 기존 옛길(via antiqua)의 대표자격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온건 실재론을 주장했다. 교부시대부터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교회철학에선 일자 또는 보편자라는 존재하며, 이는 기독교의 절대자와 설명할 수 있는 개념으로 보았는데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을 거슬러가다 보면 원인 중의 원인, 모든것의 원인, 즉 "제1원인" 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제1원인론이 옳다는 것이다. 또한 중세시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신학에 유입되며 그의 운동물리학의 개념인 '부동의 원동자' 즉 신의 존재를 논증하는데 개별실체를 새로이 형상과 질료로 설명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를 적극 받아들여서 중세 가톨릭 교회의 신학관을 정리하고 세계관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윌리엄은 이러한 실재론적 견해를 비판했다. 개별실체를 설명하는 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라는 개념이 끼어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복잡한 수사로 전개되는 옛길에 반대하여, 신학과 철학적인 덕목은 단순성에 있다고 주장했다.

2.2. 오컴의 면도날


유명론 철학을 옹호하는 논증에서 윌리엄은 '필요 이상의 개념을 설정해서는 안된다'는 원리에 호소한다. 해당 원리는 형이상학뿐만 아니라 다른 철학분야, 나아가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학문 일반에서도 널리 받아들인다.

2.3. 언어철학


『논리학 대전(Summa logicae)』 등의 저작에서 윌리엄은 아리스토텔레스포르피리오스의 영향 하에 언어의미에 대한 영향력 있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심적/정신적 언어(verba mentalia)''' 개념을 체계적으로 제시함도 윌리엄이 독창적으로 기여한 바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2.4. 신학


결국 보편이란 개념은 신학에 전적으로 불필요한 가설이라고 보아 제거되었다. 이후 서유럽에서 근대적 방식이 점점 영향력을 펼침은 윌리엄의 유산이다. 그의 사상의 한축은 하느님의 두 힘 사이의 변증법이다. 이런 사고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의 방식을 대조할 수 있게 되었다.
위에는 간단하게 설명하였지만 보편 논쟁은 중세 철학의 오랜 논쟁이다. 특히나 보편의 유무, 하느님의 의지 속 보편의 유무 등 층위도 다양하다. 윌리엄의 유명론은 실재론이 하느님의 권능을 제한한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보편이 존재할 경우, 하느님의 권능은 만물에 미치지 못하고 보편을 거처야만 한다. 명제를 하나 들어 단순화 시켜보면 하느님은 자신이 만든 법칙을 벗어날수 없는가에서 실재론의 입장에선 그럴 수 없다고 봐야한다. 신은 결코 네모난 원을 만들 수 없다. 오컴의 윌리엄과 오컴주의 학자들은 하느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원인과 결과에서 자유롭고,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을 인간의 이성과 언어로 재단할 수 없다고 본다.
윌리엄이 죽은 후로도 윌리엄의 방법론은 엄청난 파급력을 가져온다. 마르틴 루터만해도 윌리엄의 열렬한 추종자라 그를 나의 스승(Magister Meum)!이라 부를 정도. 새로운 길은 기존 학문 질서에 대항하여 새로운 학파를 개설 되었고 당연히 종교개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신학적 방법으로 모두 윌리엄의 새로운길 노선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마르틴 루터는 신학적으로는 윌리엄을 비롯한 새로운길 학자들과 1510년 중반에 완전히 결별했다. 루터의 신학 이신칭의는 기존의 아퀴나스 학문과 오컴주의를 모두 비판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으로 돌아간 것이다.

2.5. 참고 문서


[1] Ockham(Occam)은 윌리엄이 살던 영국 지명이다.[2] 본 문서의 과거판에서는 윌리엄이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편들었다고 하였으나 이는 잘못이다.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는 윌리엄이 죽은 지 약 30년쯤 되는 1378년에 즉위했으므로''', 윌리엄은 그런 인물은 알지도 못했다. 클레멘스 7세는 아비뇽 유수가 끝난 직후에 벌어진 서구 대이교 때 등장하였다.[3] 또는 근대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