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뇽 유수
1. 개요
아비뇽 유수는 1309년부터 1377년까지 7대에 걸쳐 교황의 거주지와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이전했던 시기를 말한다. '유수(幽囚)'는 '잡아 가둠'이라는 의미로, 교황이 사실상 한지에 유폐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1] 바빌로니아에 의해 유대 왕국이 사라지고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바빌론 유수'에 빗대어 붙여진 이름이다.[2]
카노사의 굴욕 이후 승승장구하던[3] 교황의 권위가 이후 십자군 전쟁 동안 절정에 이르렀다가, 전쟁의 패배와 흑사병, 세속 군주의 성장 등으로 급속히 떨어지는 와중에 결정적 타격을 받은 사건이다. 이로 인해 교황의 권위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 위클리프파, 후스파, 공의회수위설 등이 득세하였으며,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교황은 더욱 세속군주화되었다. 또한 이 사건으로 아비뇽은 신성 로마 제국에서 교황령에 속하게 되었다.
2. 발단
13세기 초 교황권은 정점에 달했으나 13세기 동안 유럽의 세속군주들은 영토의 확장과 관료제의 확립을 통해 13세기 후반에는 실권상으로 교황의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는 각국에서 관료제가 태동하고 영주들의 몰락이 확고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관료제와 세제의 확립으로 자연히 과세 대상인 인민의 파악도 활발해져 국경선의 중요성도 확고해지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국경과 영지의 세력권 자체가 선이 아닌 점이었고, 사람이 태어나서 자기 마을 밖으로 수 km 이상 밖으로 나가는 일 자체가 드물었던 시대라, 국경 지방의 경우 농노가 아닌 이상 프랑스인이 아침에 장터 가러 옆 동네 신성 로마 제국 영토로 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특히 프로방스는 당시까지만 해도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국경선이 확립이 된 이후부터는 통행세를 내야 했고 어길 경우 영토침공으로 간주했다. 물론 EU 시대인 오늘날은 또 그럴 일이 없어졌지만.
경제적으로도 12세기 이후 활발해진 영토의 개간으로 14세기까지 유럽 내에서 인구가 거주하지 않던 공지(空地)가 사라져 국경선의 확립에 일조했고 이렇게 성장한 농업 경제를 바탕으로 상품 화폐 경제가 부활하면서 장원제는 쇠퇴하는 반면 왕권은 확고해졌다. 그리고 왕의 권위는 이를 기반으로 성장한 경제력과 영토 확장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당시 뚜렷하게 성장하던 군주들 중에서도 프랑스의 필리프 4세는 당대의 막강한 군주 중에서 가히 원탑급이었다. 필리프 4세는 시대의 여세를 몰아 프랑스 내 군주권을 확립하기 위해 전쟁을 지속했으나, 군비가 부족했다. 이에 필리프 4세는 삼부회를 건립, 제3계급에 대한 과세 확장을 시도하는 한편 교회에 대한 과세를 시도했다. 이는 서임권을 놓고 논쟁을 벌였던 카노사의 굴욕 당시의 상황이나 교회 인사에 대한 재판권을 놓고 토마스 베켓과 대립한 헨리 2세의 상황과 달리 현실 그 자체인 경제권 차원의 접근이라는 점에서도 의미를 갖는다.
이유는 어렵지 않은데 백성들을 아무리 족친다고 한들 나오는 돈은 별로 없었고 영주들에게서는 이미 뜯을 대로 다 뜯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남은 곳은 교회뿐. 게다가 '''이미 힘 빠진 영주들에게 힘들여서 빼앗는 것보다 교회를 한번 건드려서 나오는 돈이 훨씬 많았다'''. 이때의 교회는 독자적인 교회 조직에 속해 있었으므로 세금을 내지 않았고[4] , 십일조는 봉건 영지든 왕의 영지든 상관 없이 거두어지는 교회 최대의 수입원이었다.[5] 또한 기부를 통해 구원받기를 갈망하는 영주, 국왕, 부호들의 헌납금도 막대했다. 교회만 굴복시키면 돈이 왕창 쏟아지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그러나 아직 교회의 권위는 건재한 상황이었고, 파문을 통해 실현되는 교회의 권위는 하인리히 4세[6] 와 존 왕의 사례[7] 를 통해 증명된 바 있었다. 결과는 불확실한 상황이었지만, 필리프 4세는 과감히 성직자 과세를 밀어붙였다. 자기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3. 전개
이에 프랑스 교회는 말 그대로 발칵 뒤집어졌다. 그들은 ''''감히 일개 세속군주 따위가 얻다 대고 신성한 교회에 과세질이야?''''라고 이를 바득바득 갈아대면서 자신들의 수장인 로마 교황에게 이를 알렸다. 당연히 격노한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필리프 4세와 계속해서 논쟁을 벌이며 교권의 세속권에 대한 우위를 주장했으니, 1302년 발표한 <우남 상크탐(Unam Sanctam)>이 이를 가장 잘 집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프랑스 국왕은 교황이자 황제.
1308년의 기록 중에서
'''하지만 곱게 있을 필리프 4세가 결코 아니었다'''. 이에 필리프 4세도 삼부회를 소집해 교황을 비난하면서 성직자 과세를 고착시키려 하였다.[8] 분노한 교황은 파문을 준비했지만 필리프 4세는 선수를 쳐서 교황에게 역으로 이단의 혐의를 걸고[9] , 필리프 4세의 심복 기욤 드 노가레가 지휘하는 병력을 파견해 로마 남동쪽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인 '''아나니'''로 가서 '''교황을 납치, 재판에 회부'''했다. 이것이 '''아나니 사건.''' 이 과정에서 70세를 넘긴 고령이었던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기욤 드 노가레에게 건틀릿을 낀 손으로 뺨을 맞았고, 학대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 이탈리아의 귀족들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교황을 구출했으나 보니파시오 8세는 이 사건의 충격으로 얼마 안 가 선종하였다. 이를 두고 당시에는 "보니파시오 8세는 여우처럼 교황의 지위에 올라 사자처럼 지배하고 개같이 죽었다."라는 말이 돌았다.
그 직후 프랑스 왕국은 교황 선출에 강한 압력을 가해 프랑스 보르도 지방 출신의 클레멘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했고 클레멘스 5세는 교황청을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옮겼다. 이곳은 당시 신성 로마 제국령이었지만 강 하나를 건너서 프랑스령과 맞닿아 있었던 만큼 프랑스의 입김이 매우 강하게 미치는 지역이었다.
클레멘스 5세 이후 추기경은 절대 다수가 프랑스인으로 뽑혔고, 자연히 교황도 전원이 프랑스인이었다. 로마에서는 계속 교황의 귀환을 요청했으나, 이미 조직 자체가 휘청거리게 된 교황령의 힘은 프랑스의 힘에 미치지 못했다. 이 시기 교황은 철저히 프랑스의 눈치를 살피며 활동해야 했다. 프랑스의 국왕들은 한결같이 교황이 한 번 뻘짓하기를 기다렸고 기껏 어렵게 교황이 반항했다 하면 프랑스의 국왕 입장에선 새로 교황을 뽑으면 그만이었다.
교황이 부재한 로마는 혼란에 빠졌고, 1347년에 호민관이 되어 권력을 장악한 콜라 디 리엔지 역시 권력을 얼마 유지하지 못했다.[10] 1353년, 교황은 추기경 알보르노를 파견하여 로마를 회복하려 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367년, 교황 우르바노 5세는 마침내 로마로 복귀하였으나 교황령 회복을 실패하고 1370년에 다시 아비뇽으로 돌아갔다.
근 70년 만에 그레고리오 11세는 교황령의 수호를 빌미로 로마로 돌아갈 명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1376년) 흥미롭게도 그레고리오 11세 자신은 사제 출신이 아니었는데 정치적 이유로 추기경-교황으로 올라간 경우였다. 고작 1370년부터 8년 재위했으나 여하간 그레고리오 11세는 해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11세는 로마로 돌아간 지 1년 만인 1378년 선종했다.[11] 향년 49세. 이 직후 로마에서는 프랑스인이 아닌 이탈리아인을 교황으로 뽑도록 압력을 넣었고, 결국 로마 출신 바르톨로메오 대주교가 추기경들의 투표로 우르바노 6세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프랑스가 아니었다.'''
4. 사건의 여파
4.1. 서방 교회의 대분열
이탈리아에서 물러난 프랑스 추기경 13명은 4개월 뒤 아나니에서 공포 분위기에서 결정된 교황은 무효라고 선언했고, 9월 20일에는 폰디에서 프랑스 출신 추기경인 제네바의 로베르(로베르트) 추기경을 선출해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로 옹립했다.[12] 이것을 '''서방 교회 대분열, 서구 대이교(The Great Schism)'''라고 부른다. 두 교황은 서로를 적그리스도로 칭하며 극렬하게 대립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백년전쟁 시기라'''(...) 말 그대로 전 유럽이 프랑스 교황 세력(친프랑스 반영국) vs 로마 교황 세력(반프랑스 친영국)의 두 패로 갈라졌다.
- 우르바노 6세 편: 잉글랜드 왕국, 아일랜드 왕국, 플랑드르, 북이탈리아, 신성 로마 제국, 헝가리 왕국, 폴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13] 교황령 등
- 클레멘스 7세 편: 프랑스 왕국, 스코틀랜드, 부르고뉴, 나폴리 왕국, 아라곤 왕국, 카스티야 왕국[14] , 키프로스, 사보이, 포르투갈 등
여기에 동방정교회가 우르바노의 공격적 신학보다는 클레멘스 쪽을 더 선호한 것도 또 다른 골칫거리가 되었다.
4.2. 15세기 초의 대혼란
이렇게 백년전쟁, 흑사병, 내전과 농민 반란들[15] 만 해도 막장인데 '''한술 더 떠서 교황들이 교황령과 나폴리를 서로 공격하고 민중을 학살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우르바노 6세 역시 비명횡사했다. 샤를 5세 같이 '현명왕'으로 기록되는 왕들도 이런 대립을 거들고 있었다. 현명왕이라는 호칭이 안 어울리겠지만, 당시 프랑스 관점에서는 현명왕 맞다(...).[16]
1398년에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벤체슬라스가 만나 교회 문제를 논의하려 하였으나 회담은 결렬되었고, 교회 대분열은 장기화 되었다. 서유럽에서 1300년의 성년 행사에 비해 1400년은 암울한 분위기로 시작되었다.
자연히 가톨릭 신자들은 현실에 대한 냉소에 빠져들었다. 존 위클리프의 롤라드파나 얀 후스 등 아예 교황의 권위 자체를 부정하는 세력들이 나타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 때문에 파리 대학을 중심으로 '전체 공의회만이 교회의 일치성을 회복시키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라는 주장을 펼치는 공의회수위파(Conciliarism)가 등장했고, 1409년 이에 힘입어 추기경들만이 투표에 참가했다는 것에 반발한 대주교 이하의 신분의 사제 및 양비론적 추기경들이 아비뇽의 베네딕토 13세와 로마의 그레고리오 12세를 모두 '''폐위시킨다고 전제하고''' 피사 공의회, 바젤 공의회 등에서 알렉산데르 5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기존 교황들이 사퇴를 하지 않았고, 결국 교황은 셋이 되었다.(...)''' 혼란의 와중에 알렉산데르 5세는 1년도 안되어 죽었고, 다음으로 볼로냐의 추기경이었던 요한 23세[17] 는 과거의 살인, 강간, 남색, 근친상간의 죄가 드러나 1415년에 폐위되었다. 그 충격이 컸는지 이후 20세기가 되기까지 교황들은 요한을 이름으로 택하지 않았다. 참고로 그해에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과로 얀 후스가 화형되었고 후스 전쟁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1423년 졸)를 끝으로, 전쟁 통에[18] 아비뇽 교황마저도 분열되어 '''이제 교황은 넷이 되었다.''' 심지어는 아예 베네딕토 14세라는 이름을 가진 대립교황이 '''2명이나 세워지기도 했다.[19] ''' 결국 그레고리오 12세는 지기스문트 황제의 콘스탄츠 공의회에서는 공인받았으나 이런 막장 시추에이션 작렬은 멈추지 않았다.
자, 당신이 15세기경의 가톨릭 신자라고 생각해보자. 흑사병(1350) 때문에 사람들은 떼죽음을 당하고, 거리에는 웬 사람들이 죄를 씻자고 채찍질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폭도로 돌변해 마을을 약탈하고[20] , 가톨릭 교회의 정신적 지주인 "교황들"은 서로 적그리스도라며 싸우고 있고, 그걸 부추기듯 영국과 프랑스도 전쟁 삼매경(1337 ~ 1453)에 빠져 있고, 교황을 못 믿겠다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농민들도 못 살겠다고 봉기하고[21] , 저 멀리 동쪽에서는 오스만이라는 이교도가 콘스탄티노플을 넘어 유럽으로 달려드는 상황[22] 이다.
이러한 개판 속에서 지기스문트 황제는 대분열의 종식을 위해 발로 뛰어,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공의회는 교황에 우선한다'[23] 라는 선언과 함께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하고 얀 후스를 처형했으나 여전히 복수의 교황이 존재했고, 후스를 처형하자 후스파에 경도되어 독일과 성직자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던 보헤미아의 농민들이 전투 마차까지 동원한 후스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분열 70년 만이자, 아비뇽 유수로부터 140년 만인, 1449년이 되어서야 니콜라오 5세는 당시 대립교황이던 펠릭스 5세[24] 를 추기경으로 서임함으로써 분열을 봉합할 수 있었다.
4.3. 결과
이런 막장 사건의 여파로, 결국 교황의 선출은 콘클라베가 담당하게 되었다.
이 시기 교황령의 산하에 있던 소국들은 사실상 독자적인 국가로 벗어나게 되는데, 페라라, 우르비노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이 시기에는 이러한 현실로 교권을 벗어나 인문주의에 기우는 사람도 늘어났고(페트라르카, 로렌초 발라 등) 이탈리아인들의 대륙 문화(스콜라 철학이 대표적)에 대한 반감이 더해져 이탈리아만의 독자적인 문화에 대한 추구가 심화되었다.
신곡, 데카메론 등의 속어 문학이 그 전조였고, 아이러니하게도 교황의 심장부였던 이탈리아에서 제일 먼저 시작된 르네상스는 그 절정이었다. 이때 교황청 산하에서 벗어났던 소국들이 큰 역할을 한 것도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반면 아비뇽은 아비뇽 유수를 계기로 프랑스 혁명까지 교황령에 소속되었다.
한편 교황은 교권으로서는 더 이상 자신들의 권위를 회복할 수 없었기에, 오히려 세속적인 르네상스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한편으로는 교권이 아닌 세속적인 물리력으로 교황의 위세 회복을 꾀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등을 불러 교회 미술을 흥하게 한 것이나 알렉산데르 6세와 그 사생아 체사레 보르자의 잦은 전쟁 참여[25] , '전사 교황' 율리오 2세의 전쟁 활동 등이 이때의 일이다.
그러나 이는 교황이 철저한 세속 군주로 전락했음을 보여주는 한편 정치적인 압도의 필요성을 더욱 끌어높였고, 결국 물리적으로는 사코 디 로마, 종교적으로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교황이 더욱 처절하게 몰락하는 단초를 마련했다.
메메드 2세에 의해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당하며 멸망했고, 같은 해 백년전쟁도 끝났다(1453년). 중세를 상징하던 교황권과 봉건영주, 그리고 동로마 제국이 모두 동시대에 망했다는 의미심장한 이야기. 이 때문에 흔히 중세와 근대의 분기점을 1453년으로 잡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아비뇽 유수는 훗날에 벌어지는 사코 디 로마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26][27]
또한 일단 교황이 로마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국왕은 자국 내 가톨릭교회에 대해서 강력한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른바 "갈리아 주의"의 시작으로 프랑스 교구 내에서 걷히는 헌금은 교황청으로 흘러들어가지 않게 되었으며, 성직자의 임명에도 프랑스 왕의 영향력이 커져서 교회 조직에도 교황의 영향력이 별로 미치지 않게 되었다.
1348년 아비뇽의 영주인 나폴리 여왕 조안나가 클레멘스 6세에게 아비뇽 시를 매각했다. 이 때문에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프랑스에게 몰수될 때까지 아비뇽은 교황령의 영토가 된다.
[1] 대다수의 서양사 용어 번역이 그렇듯이 일본에서 번역한 용어를 채택했지만, '유수'라는 한자어는 그 이전에도 동아시아에서 있던 단어이다.[2] 공교롭게도 두 사건 모두 70여 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원위치로 복귀할 수 있었다.[3]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이후 보복으로 로마로 쳐들어가서 교황을 퇴위시킴으로써 일시적으로 교황의 권위가 크게 떨어지기도 했었다. 카노사의 굴욕은 사실 황제권에 큰 타격을 주진 못했고 실제로는 보름스 협약 이후부터 교황권이 황제권을 앞지르게 된다.[4] 그 돈들은 교황청으로 흘러들어가 교황령의 권위를 키우는 데 쓰였다. 실제로 세속 국가의 성장 이전까지 교황청은 유럽 내에서도 수위급의 관료제(특히 경제 부문)를 구축하고 있었고, 적은 영토에 비해 세액도 다른 세속 국가들에 전혀 비길 것이 아니었다. 이는 중세에 명실상부하게 세속 왕국보다 교황청이 셌던 이유가 된다.[5] 늑대와 양피지 1권에서 과도한 십일조를 거두는 교회들로 인해 상인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등의 묘사가 등장하며 이때의 모습을 잘 반영했다. 판타지 소설이라 이때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티브로 삼았기 때문.[6] 다만 카노사의 굴욕은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황제도 교황에 못지않는 실력 발휘를 통해 그레고리오 7세를 나폴리로 쫓아내는 등 단편적인 황제의 패배만은 아니었다. 물론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영주들은 하인리히 4세의 파문을 명분 삼아 새로운 왕을 세우는 등 기회를 틈타 실컷 깽판을 치긴 했지만.[7] 존 왕의 경우에는 결과적으론 교황에게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파문 직후에는 오히려 존 왕이 방방 뛰며 잉글랜드 내의 모든 교회들을 압수하는 등의 반발을 했고 존 왕이 무릎을 꿇은 건 파문때문이 아니라 필리프 2세의 잉글랜드 침공을 인노첸시오 3세가 지지했기 때문이다.[8] 이건 딱히 프랑스만 그랬던 게 아니어서 영국의 에드워드 1세 역시 우남 상크탐을 상콤하게 씹어버렸다.[9] 필리프 4세의 심복 기욤 드 노가레가 작성한 보니파시오 8세에 대한 기소장은 전 교황이 살아있는 동안 불법적으로 교황의 자리를 찬탈하여 간통죄를 저지르고(교회는 교황의 신부라는 논리), 교황의 방에 온갖 짐승과 마귀를 불러들여 수간 및 마귀와의 교접을 행하고 교회의 재물을 착복했으며 살인까지 저질렀다는(사실 보니파시오 8세는 당대 기준으로도 상당히 부패한 인물이었고 교황 자리를 놓고 경쟁한 가문과 그 가문의 영지민들까지 멸문시켰던 전적이 있어서 최소한 마지막 둘은 조작은 아니다.) 등의 온갖 막장스런 죄목들로 가득했다.[10] 이후 1354년에 돌아왔으나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살해되었다. 바그너의 오페라 중 하나가 그의 이야기를 다룬다.[11] 오히려 임무를 해냈다(...)고 볼 수도 있다. 당시 관습으로는 전대 교황의 사망지에서 교황 선출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12] 클레멘스 7세는 애초에 이런 13명의 추기경들의 독자 교황 선출을 주도했던 추기경 가운데 한 명이었다. [13] 당시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핀란드는 칼마르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동군연합 상태에 놓여있었다.[14] 오늘날 스페인 지역[15] 자크리의 난, 와트 타일러의 난. 특히 영국의 와트 타일러의 난은 인두세에 반발해서 일어났는데 후술할 롤라드파에 큰 영향을 받았다.[16] 거기에 더해 백년전쟁 초반의 실패를 상당수 극복한 프랑스의 영웅이기도 하다.[17] 이후 교황 명부에서 삭제되어 20세기의 성 요한 23세와 겹치지 않는다.[18] 프랑스 왕국은 당시 샤를 6세가 죽고 샤를 7세가 성녀 잔 다르크가 활약할 때까지 그저 계승자 신분으로 즉위식을 치르지도 못하고 영국에 쳐발리는 시점이었다. 백년전쟁 참조. 참고로 잔 다르크는 로마 교황을 지지했다.[19] 대립교황 중 빅토르 4세도 1대와 2대가 있지만, 1대와 2대 사에이는 20여년의 격차가 있다. 베네딕토 14세는 같은 시기에 세워진 건 아니고 '선대' 베네딕토 14세가 선종하자 '후대'로 지명된 베네딕토 14세가 이름을 물려받은 것. [20] 당시 사람들은 흑사병을 치료할수 없었으며 귀족의 경우 별장이나 다른곳으로 피난갈수 있었지만 농민의 경우 집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농민들은 하느님께 회개를 한다는 목적으로 자신을 채찍으로 치며 걸어다녔다.[21] 자크리 반란(1358), 와트 타일러의 난(1381)이 대표적이며, 후스 전쟁(1419~1434)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하기도 한다.[22]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것은 1453년이었지만, 1370년대 이후 이미 동로마 제국은 오스만의 봉신국을 자처하고 없는 살림에 내전을 벌이는 등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무라트 1세와 바예지드 1세는 코소보 전투로 대표되는 동유럽권의 저항에 고전하기도 했지만 이 이후 발칸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계속해서 넓혀나갔다.[23] 이때 절정이던 공의회주의는 분열의 종식 후 1515년, 5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황 레오 10세가 '모든 공의회를 초월하는 교황이 있다'라고 선포하며 쇠퇴한다.[24] 가톨릭 역사에서 인정되는 마지막 대립교황이다.[25] 당시 이탈리아인인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교회 도덕에 맞으면 좋지만 그건 우선시할 게 아니고, 군주는 철저히 실리적으로 나가야 함. 체사레 보르자처럼만 잘 해서 우리 이탈리아도 통일 한 번 해봅시다 OK?"'''라고 쓴 점은, 교권의 탈피가 아이러니하게도 교황과 밀접히 연결되어 일어난 점을 암시해준다. 정작 이후 유럽 군주들은 왕권신수설에 의거한 것도 상당히 대비되는 상황.[26] 아무리 교황권이 땅에 떨어졌다지만 아비뇽 유수 때와는 달리 대립교황이 나타나는 막장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성공회의 등장은 막지 못했다. 그리고 사코 디 로마에서는 대립교황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이는 역으로 보면 아비뇽 유수 무렵에는 최소한 <교황이라는 자리>와 교황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서방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존중은 명확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종교개혁으로 가톨릭의 위신이 크게 손상된 이후에 벌어진 사코 디 로마 무렵에는 대립교황을 세우가 어쩔 필요도 없이 그냥 교황을 뚜까패도 상관없게 되었던 것.[27] 로마와 대조적으로 아비뇽은 이 유수 이후 지금까지 700여 년간 전쟁을 한 번도 겪지 않았다. 페스트가 1700년대 덮치기는 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때 안 털린 이유는 이 지역이 비시 프랑스 지역에 속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