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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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에 소재한 신라의 산성. 1979년 사적 제264호로 지정됐다.
2. 조사 내용
충청도 일대는 고대에 이른바 '중원(中原)'으로 불리던 곳으로 삼국시대 5~6세기 삼국의 주도권 쟁탈전을 벌이던 시점의 주무대였다. 그러한 바 중원지역에는 삼국시대의 성곽의 축조 밀집도가 굉장히 높은 편인데, 온달산성 또한 그러한 여러 사례 중 하나이다.
산성의 이름에서부터 온달이라 명명되었다. 고구려와 신라의 6세기대 주요 격전지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특히 아단성을 되찾아 오겠다고 했던 온달이 그 전쟁터에서 죽은 만큼 온달의 사망지, 아단성의 위치라는 측면에서 주목된 바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아단성의 유력한 후보로는 온달산성과 아차산성이 있다.
온달산성이 자리한 영춘면의 구 명칭은 을아단(乙阿但)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기록된 전설에서 온달이 을아조(乙阿朝)를 지키기 위해서 성을 쌓았다는 내용과 부합한다. 또 한편 온달산성이 구 아단성이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이들은 온달이 적시했던 공격목표는 죽령의 이서 지역이기 때문에 충청도 일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타당하다는 것이다.[1]
충청도 일대 중원지역의 향방을 보더라도 온달이 분개했던 시점은 6세기 후반으로 신라가 점차 중원지역으로 치고 올라오던 시점이다. 특히나 단양 적성비에도 나와있듯이 550년 즈음에는 공히 중원지역 인근으로 진출한 야욕을 드러내었다. 5-6세기 무렵 신라가 축성한 산성들이 충북, 경북 북부, 강원도 남부지방에 걸쳐 있다.
한편 아차산성이 백제의 책계왕대에 축조되었다는 기사가 있긴 하다. 하지만 아차산성은 현재까지의 조사내용으로 볼 때 신라산성이다. 그나마도 고구려 와당이 출토된 적이 있기 때문에 백제와 관련 있을 가능성은 더 떨어진다. 물론 아차산성을 포함한 일대에서 백제토기가 지표상에서나마 채집되므로 아차산성을 추가 발굴조사할 필요야 있겠지만, 현 시점에서는 지금의 아차산성을 책계왕 당시에 축조했다는 아차성(阿旦城[2] )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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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산성의 북벽. 세장방형의 석재로 촘촘하게 쌓아올렸는데, 성벽의 구축 방식 자체는 삼년산성과 유사하다.
온달산성 자체적인 함정도 있다. 온달산성은 누가봐도 빼박 신라 산성이라는 점이다.[3] 성벽의 형태는 물론 구조적으로도 단양 적성비와 함께 만들어진 단양 적성, 보은 삼년산성과 거의 같은 구조, 같은 입지이다.[4] 또 수구문지를 비롯하여 체성부의 외견상의 구조 등 모든 것이 빼박 신라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특히 성 내부에서 바깥으로 배수하기 위한 시설 및 수구문지의 구조를 볼 때 전형적인 신라 스타일인데, 성벽 전체가 신라 스타일이라 단순 개축으로 바꾸었다고 보기가 어렵다.[5] 물론 기존에 고구려 성이 있었지만 허물어져서 새로 쌓았을 수도 있고, 목책성 정도에 불과했는데 신라가 석성으로 개축하였을 가능성도 당연히 배제할 순 없다. 그래도 명백한 신라산성이라는 점은 온달의 사망지일 가능성이 아차산성보다 떨어지게 한다.
더군다나 온달이 590년에 사망했다고 친다면, 신라의 군사적인 진출과정에서 이미 6세기 후반, 7세기에는 고구려와 한탄강 등지에서 전선을 형성했다. 고구려의 호로고루[6] , 무등리 1, 2보루 등이 대표적이다. 신라 역시 한탄강 남쪽 칠중성, 육계토성[7] 을 두는 등, 고구려와 신라의 성곽들의 대치한 양태가 확인되었다. 물론 온달이 경기도 북부의 전선을 돌아서 강원도 방면을 통하여 충청도로 갔을...... 수도 있겠으나, 6세기 후반을 넘은 시점에는 충청도는 물론 경기 남부 일대에 신라 산성이 주요 거점마다 박힌 뒤였다.
온달 항목의 추가적인 설명에 나오듯, 온달의 사망지는 아차산성과 온달산성 둘 다 일장일단의 근거와 약점이 있는 유력후보임은 분명하다. 진전된 성과는 아차산성의 최신 발굴성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3. 그 밖에
온달산성이 소재하고 있는 산 아래, 온달산성의 초입 좌측으로는 온달동굴이 있다. 천연의 석회동굴로써 온달산성으로 인해서 온달동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입장료를 내고 관람할 수 있다.
4. 관련 유적
충북, 대전 일대는 소위 '''중원지역'''이라고 지칭되며 삼국시대 5~6세기의 각축장이었던 만큼 관방시설이 굉장히 많다. 중원지역의 삼국시대 산성들이 실제로 유네스코에 등재될 가능성은 낮지만 '''중부내륙 산성군'''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등재'''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5. 바깥고리
- 한국어 위키백과 : 단양 온달산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단양온달산성
- 고고학사전 : 온달산성
- 답사여행의 길잡이 12 - 충북 : 온달산성
- 답사여행의 길잡이 12 - 충북 : 단양 온달산성
- 대한민국 구석구석 : 단양 온달산성
- 대한민국 여행사전 : 온달산성
- 두산백과 : 단양 온달산성
6. 사적 제264호
남한강이 보이는 성산의 정상부근을 돌로 둘러쌓은 산성이다. 온달산성은 고구려 평원왕(재위 559∼590)의 사위인 온달장군의 이야기가 이 지방에 전해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성이 언제 쌓아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전기에 이미 성산성이란 이름으로 있었던 기록이 있다.
벽의 안팎을 모두 비슷한 크기의 돌로 가지런히 쌓아 올린, 둘레 683m의 소규모 산성이다. 성 안에는 삼국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며, 우물터가 남아있고, 성벽 바깥부분에는 사다리꼴 모양의 배수구가 있다. 남서쪽 문터의 형식과 동문의 돌출부는 우리나라 고대 성곽에서 드물게 보이는 양식으로 주목할 만하다.
성의 북동쪽 남한강의 강변 절벽 아래에는 온달굴이라는 석회암 동굴이 있고, 성을 바라보는 북쪽 강 건너의 산에도 온달과 관계되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성벽의 보존 상태가 좋아, 축성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1] 물론 아차산성도 아주 넓게 보면 포함되긴 한다.[2] 삼국사기에서는 단(旦)으로 표기했다.[3] 온달산성이 고구려에 의해서 쌓아졌다고 말하는 것은 구전 설화 및 여지도서의 기록 등을 미루어 본 것이지 고고학적인 사실관계로 본다면 고구려 산성의 특징이라고는 치성(雉)을 둔 점 말고는 없으며, 그나마도 전술적 요소지 특정 국가의 방식이라고 볼 수 없는 요소이다.[4] 다만 지형적, 군사적 관점에서야 어느 나라가 와서 지었어도 당연히 그 입지를 택했을 부분이긴 하다.[5] 원래 고구려 산성이 있었다면, 거의 성 전체를 뜯어고친 셈이다. 고구려 산성에도 배수시설은 있었을 텐데...[6] 물론 그 이전에 대 백제 진출 거점으로 축조되었으나 나중에 다시 대 신라전에서도 사용된다.[7] 고구려가 축조했으니 이후 신라가 점령했다고 추정하는 토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