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총지
王寵之
(?~1067)
1. 개요
고려의 관료. 문종 시기에 문하시중에 오른 배향공신이다.
2. 생애
본관은 강릉이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강릉 왕씨는 태조의 아들인 원보 왕윤(王裕)이라는 인물을 시조로 한다. 왕총지는 현종(재위 1009~1031) 시기에 과거에 급제한 뒤 관직이 여러 차례 바뀌어 기거사인이 된다. 정종(재위 1034~1046)시기에 우승선 급사중이 되고 정종 5년(1039) 도병마부사 박성걸과 함께 동계#s-2 정변진(靜邊鎭)에 성을 쌓을 것을 상주한다.
정종 6년(1040) 이자연이 지중추원사에 임명될 때 왕총지는 중추원지주사에 임명된다. 지원사의 품계는 종2품, 지주사의 품계는 정3품이었다. 부석사원융국사비에 따르면 이듬해인 중희 10년(1041)에 중추지주사 병부시랑 왕총지가 고승 결응(훗날의 원융국사)을 만나 왕사#s-2로 삼으려는 정종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중추원)지주사 예빈경으로 전임되기도 했으며, 정종 10년(1044)에는 동북로병마사 참지정사 김영기와 함께 왕명을 받아 장주(長州)와 정주(定州)[1] , 원흥진(元興鎭)[2] 에 성을 쌓는다.
문종 원년(1047) 서북면중군사 겸 행영병마사가 되고 문종 3년(1049) 수사공 상주국이 더해진다. 문종 4년(1050) 전쟁이 없는 시기일수록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취지의 상주문을 올린다. 문종 5년(1051) 내사시랑에 임명된 뒤에도 겸하던 병마사에서 사직하려고 글을 올렸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왕총지는 내사시랑으로 있는 동안 식목도감사 최충과 함께 원칙대로 씨족을 기록하지 않은 과거 급제자 이신석(李申錫)이 관직에 임명되는 것을 문제삼았다. 문하시랑 김원충과 판어사대사 김정준은 급제자 본인에게는 죄가 없다고 변호했고, 문종은 이를 따랐다.
문종 7년(1053) 이자연과 함께 문하시랑평장사에 임명된다. 문종 12년(1058) 개성 목감직(목장의 감독) 이계가 사적으로 이인, 가달을 보내 병사 김조를 체포하려 하자, 병사가 체포를 피하려다 강에 투신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상서형부에서는 목감직 이계에 의한 협박치사범죄이므로 싸워서 죽인 것과 같이 논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자연도 형부의 주장에 동의했다. 그러나 왕총지는
라고 하며, 이인을 주범으로 하되 교수형은 감하고 가달은 공범으로, 목감직 이계의 죄도 이치에 맞게 무겁게 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종은 협박치사죄를 적용하는 것은 규정된 조례가 아니므로 목감직에서 제명하고 땅을 거두게 했다.협박치사는 물가가 내려다보이는 낭떠러지를 밟고 있다가 공박(恐迫)에 의해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병사 김조는 스스로 물에 빠진 것이므로 이와 같지 않습니다.
문종 14년(1060) 수태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이듬해 문종 15년(1061)에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로 승진한다. 중서령으로 물러났던 왕총지는 문종 21년(1067) 죽는다. 시호는 경숙으로 문종 34년(1080) 수태사 중서령에 추증되고, 선종 3년(1086) 문종의 묘정에 배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