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란도
1. 개요
碧瀾渡
고려시대 예성강 하류에 있던 국제 무역항이자 요충지이다. 6.25 이전에는 남한 땅이었으나 현재는 북한 치하에 있으며 광복 당시 행정구역 기준으로 황해도 연백군 해월면 벽란리 및 경기도 개풍군 서면 연산리 일대에 위치했다. 북한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배천군 문산리 및 개성특별시 구 개풍군 지역이다. 벽란'도'라고 해서 섬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으나, 섬 도(島)가 아니라 '''건널 도(渡)'''다. 건널 도(渡)에 나루(배가 다니는 좁은 물길)란 뜻도 있기 때문에 지명에 붙인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북쪽에 유목제국이 있었기 때문에[1][2] 조선시대와 달리 중원과 교류하는 바닷길의 활용이 매우 활발했다. 벽란도는 당시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과 거리가 가까웠고 수심이 깊어, 밀물을 이용하면 크고 작은 배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기에 고려시대의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그 중 가장 활발히 교류된 물품은 송이였다. 종이나 인삼ㆍ나전칠기 등을 수출하였고, 비단ㆍ약재ㆍ서적[3] 을 수입했다. 이 당시에는 개인과 개인의 무역보단 공무역이 중심이었다.
이곳에서의 무역이 상당히 활발하여 송나라, 일본의 상인은 물론이고 교지국, 섬라곡국, 마팔국에다가 대식국의 이슬람 상인들까지도 무역을 하러 왔는데 이때 이슬람권에 '고려'를 '꼬레아'라고 발음해 서양에 전하면서 우리나라의 영어이름이 '코리아'가 되었다고 추측된다. 물론 외국인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중국인이었으며, 최무선이 화약을 획득한 일화도 여기서 중국인 상인 이원(李元)을 통해서였다.
고려와 송의 교역루트는 크게 두가지로 북로와 남로가 있었다. 북로는 탕저우에서 황해를 가로질러 벽란도로 가는 루트였고, 남로는 명주에서 흑산도와 군산도, 그리고 태안반도를 거쳐 개경으로 들어가는 루트였다.
2. 명칭
원 이름은 예성항이라는 이름이었는데, 부근 언덕에 '벽란정'이라는 관사가 있어 송나라 사신들이 머물렀다. 하여 '벽란정'에서 따서 지명을 벽란도라고 바꾸었다.
3. 고려 이후
고려가 멸망된 뒤, 조선시대에는 국제 해상무역이 쇠퇴하고 그나마 중국과의 교역도 압록강을 건너는 육로 위주로 변하면서 벽란도도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잃었으며 조세미 등을 운반하는 도선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대한제국이 병합된 뒤, 일제강점기에는 철도같은 육로 교통이 발달하면서 운송 기능을 상실해버렸고, 남북 분단이 된 직후에는 38선 이남에 위치한 남한 지역이었으나 1953년 휴전 이후 지금은 북한에 속해있는 지역이다.
4. 위치
벽란도는 보통 예성강 하류에 위치해있으며, 벽란도의 옛 이름이 예성항이라고 알려져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의견이 제기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벽란도가 예성강 상류에 위치해있으며, 벽란도와 예성항은 엄연히 다른 항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벽란도는 개성 선의문 서쪽에 있었고 예성항은 그 남서쪽에 있었다고 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예성항이 벽란도의 하류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이에 따르면 '벽란도는 예성항 '''상류'''의 나루터'인 것이다. 현재 우리가 예성항과 벽란도를 같게 보는 것은 고려 말기 여·송 양국 사이에 국교가 끊어진 다음 예성항 언덕 위에 있던 벽란정이 없어지고, 예성항도 국제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이 정지되면서 그리 된 것이라고 한다.
5. 관련 문서
[1] 대표적으로 요(거란)과 금(여진)[2] 조선시대의 경우 북학의에 따르면 박제가가 살았던 조선 후기에는 황해를 건너는 해상 교역은 거의 차단되었고, 압록강을 건너는 육로로 명청과 주로 교류했다.[3] 주로 왕족이나 귀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