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츠루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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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臣鶴松(풍신학송)
서력 1589년 7월 9일 ~ 1591년 9월 22일
1. 소개
전국시대의 인물. 유명(젖먹이 때 이름)은 스테(棄). '버린 자식'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개똥이'같은 이름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영아 사망률이 높던 당시 널리 퍼져있던, 갓난아기의 이름을 천하게 지으면 오래 산다는 미신에서 붙여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53살의 늙은 나이에 요도도노사이에서 얻은 늦둥이 아들.
에도 시대 때부터 현재도 무정자증을 의심받고 있는 히데요시라, 츠루마츠도 요도도노가 다른 남성과 불륜으로 얻은 자식이라는 썰이 있다.[1]
1589년에 야마시로국의 요도 성에서 태어났고, 히데요시의 정실인 네네가 오사카 성에서 길렀다.
1590년 음력 11월 7일, 히데요시는 조선통신사(황윤길, 김성일)들을 접견할 때 츠루마츠를 안고 만났는데, 중간에 츠루마츠가 오줌을 싸자 이를 본 히데요시는 크게 웃었는데, 통신사는 이를 보고 불쾌해했다.
지금이야 정치인들이 아이와 함께 등장하면 친근하고 다정한 인상을 줄 수 있어 자주 행하는 편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선거운동이나 국경일 행사 등 대외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보여줘야 하는데 한하고 외교사절 등을 만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까지 아이를 대동하지 않는다[2] . 하물며 당시는 어린 아이는 제대로 된 사람으로 대우받기 어려웠던 시대였으며 공식적인 외교 석상에서 자신의 아이를 안고 들어온 것은 상당한 결례가 된 것이다. 게다가 히데요시는 츠루마츠를 데려온 그 자리에서 예복도 아니고 편복, 즉 평상복을 입고 들어왔었다. '''한 마디로 대놓고 외교사절로 온 조선 통신사와 조선을 깔보는 행위를 한 것이었다.'''[3][4] 조선으로 치면 조선 국왕이 곤룡포가 아니라 그냥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입는 한복(왕에게는 평상복)을 입은 채로 외국 사신들을 맞이하는 거나 다름없다.수길의 용모는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얼굴은 검고 주름져 원숭이 형상이었다. 눈은 쑥 들어갔으나 동자가 빛나 사람을 쏘아보았는데, 사모(紗帽)와 흑포(黑袍) 차림으로 방석을 포개어 앉고 신하 몇 명이 배열해 모시었다. 사신이 좌석으로 나아가니, 연회의 도구는 배설하지 않고 앞에다 탁자 하나를 놓고 그 위에 떡 한 접시를 놓았으며 옹기사발로 술을 치는데 술도 탁주였다. 세 순배를 돌리고 끝내었는데 수작(酬酢)하고 읍배(揖拜)하는 예는 없었다. 얼마 후 수길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자리에 있는 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편복(便服)차림으로 어린 아기를 안고 나와서 당상(堂上)에서 서성거리더니 밖으로 나가 우리 나라의 악공을 불러서 여러 음악을 성대하게 연주하도록 하여 듣는데, 어린 아이가 옷에다 오줌을 누었다. 수길이 웃으면서 시자(侍者)를 부르니 왜녀(倭女) 한 명이 대답하며 나와 그 아이를 받았고 수길은 다른 옷으로 갈아 입는데, 모두 태연자약하여 방약무인한 행동이었으며, 사신 일행이 사례하고 나온 뒤에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5권, 선조 24년 3월 1일 정유 3번째기사
그러나 츠루마츠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여 병치레가 잦았기에, 아버지 히데요시는 사찰에 기부를 하고 전국적으로 기도회도 올리고 지극이 정성을 쏟으면서 병약한 아들을 걱정하기도 했다. 이 덕에 일시적으로 몇 번 회복됐지만 이후 병세가 다시 악화되어, 안타깝게도 음력 1591년 8월 5일에 2년 2개월(3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그의 죽음은 생모인 요도도노와 네네 사이의 갈등을 고조하였다. 이때 히데요시는 촌마게를 자를 정도로 아들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고, 수하 다이묘들도 촌마게를 잘랐으며 운쇼우인을 세워 아들의 명복을 빌게 하고 이 절에 여러 물품을 하사했다.
더이상 후계자를 얻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포자기한 히데요시는 3개월 후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양자로 삼고, 1개월 후에는 후계자로 지명하고 관백 자리를 물려주고 후계자 계승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요도도노가 다시 임신을 하고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으면서, 도요토미 집안은 크게 흔들리게 된다.
2. 창작물에서
요절했기 때문에 역사상으로 나온 행적이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어서 창작물에서는 히데요시의 잔혹한 면에 비교되어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는 역할로 등장한다.
NHK 대하드라마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는 츠루마츠의 죽음이 조선출병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나온다. 슬픔으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져 명나라까지 이르는 대원정을 본격적으로 다짐하는 것으로 묘사.
스겐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 고우 ~공주들의 전국~에서 히데요시가 조선 통신사를 접견할 때 처음부터 히데요시에게 안겨서 등장하며, 중간에 츠루마츠가 오줌을 흘리자 히데요시가 신하들을 불러 어떻게든 하라고 했다. 신하들이 오줌이 묻은 자리를 닦는 사이에 조선 통신사들은 불쾌해서 자리에서 물러나며, 히데요시는 오히려 통신사들이 무례하다고 불쾌해한다.
신하들이 츠루마츠를 데려온 것에 대해 좀 그렇지 않냐면서 조선은 예로부터 예식, 상하 구별이 엄격한 나라라거나 그런 중요한 자리에 아이를 데려가는 것은 좀 아니라고 하자 히데요시가 츠루마츠는 나 관백인 히데요시의 자식이라고 말한다. 츠루마츠가 죽자 히데요시가 거짓말이라면서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자신의 곁을 떠난다면서 슬퍼한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갓난아기에서는 벗어난 모습으로 나오고 죽기 직전의 장면이 나오는데, 히데요시가 눈을 떠보라고 하자 눈을 떴다가 장난감인 말을 달라고 한다. 히데요시가 의사들에게 츠루마츠를 살려주라고 부탁하는 사이에 사망한다. 츠루마츠가 죽은 것에 대해 하늘이 혈육으로 흔적을 남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서 달리 흔적을 남길 수 밖에 없다고 하며, 친히 나고야로 갔다가 봄이 되면 조선으로 출격해 진히 전쟁을 지휘할 것이라고 한다.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갓난 아기의 모습으로 나오고 히데요시가 껴안으면서 이마에 뽀뽀를 하기도 하며, 오쿠이조메에서 히데요시가 츠루마츠에게 밥을 떠먹여주면서 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대제국을 이룩할 것이라는 말을 한다.
츠루마츠를 위해 전국의 다이묘들이 선물을 보내오는데, 그 와중에 시바타 카츠이에의 가신이었던 자가 히데요시를 암살하려 한다. 그 암살범을 죽인 후에는 히데요시가 츠루마츠에게 이 아버지 탓에 피맛부터 보면서 시작한다면서 불쌍하다면서 슬퍼하는 모습을 보인다. 히데요시가 조선 통신사를 접견하던 와중에 미츠키에게 츠루마츠를 자신에게 넘겨주도록 하면서 등장하며, 가토 기요마사가 검무를 추던 와중에 오줌을 싸서 히데요시가 다시 미츠키에게 건네준다.
히데요시가 이시다 미츠나리로부터 열이 떨어지지 않고 등 쪽의 종기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의사는 종기의 가벼운 증상으로 여겼지만 원인을 모르겠다고 했다. 얼굴에 크고 빨간 점과 같은 것이 나왔으며, 츠루마츠는 병 때문에 우는 모습을 보이고 히데요시도 크게 슬퍼하는 모습을 보인다. 얼굴에 빨간 점 같은 것이 사라져서 병이 호전되는 것으로 보이자 히데요시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요도도노가 아직 열이 남아있다는 말을 하고 히데요시는 츠루마츠에게 이 아버지를 놀래키면 안된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츠루마츠는 사망하고 히데요시는 츠루마츠가 죽은 것을 두고 애써 자고 있는 것이라 말하는데, 히데요시는 츠루마츠가 죽었다고 말하는 의원을 죽였다. 이를 보고 츠루마츠가 자고 있다는 말을 하는 의원에게는 깨울 수 있겠냐고 하다가 그 의원도 살해당하며, 나머지 의원들에게 츠루마츠를 깨우는 자에게 영지 100만석, 천하를 주겠다면서 절규한다.
결국 의원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히데요시에게 모두 살해당하며, 마에다 토시이에가 히데요시를 말려서 칼부림을 멈추면서 오열한다. 히데요시가 가토에게 조선 정벌을 위해 영주들에게 나고야 성으로 집결하라고 지시하며, 히데요시는 츠루마츠를 직접 안고 출정한다면서 조선을 정벌하면 츠루마츠가 기뻐서 금방 일어날 것이라는 말을 한다.
히데요시가 영주들을 나고야로 집결시켜 조선 침략을 시키는 와중에 오사카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일어나면서 츠루마츠를 찾는 모습을 보였다.
[1] NHK 대하드라마 사나다마루에서는 이런 히데요시의 불안과 그런 소문을 자신의 집 담장에 적은 놈을 찾아내 죽이려는 에피소드를 다룬 화가 있다. 히데요시도 자신이 씨 없는 수박인줄 알고 있고, 츠루마츠가 제 자식이 아니라는 의심을 한다. 고우 ~공주들의 전국~에도 나온다.[2] 당장 이명박의 서울시장 재임 당시 아들 이시형과 히딩크의 기념사진 촬영 문제로 상당한 비판을 받았음을 생각해 보자. 본행사도 아닌 식후 기념사진 촬영인데도 아들이 부적절한 차림으로 끼어드는 것을 웃으며 방치했다는 이유로 비판받은 것. 물론 현대 민주주의 사회와 달리 도오토미 히데요시 시대에 권력자의 아들은 곧 그 권력자의 후계자로써 정치적 지위를 가진다는 점은 감안해야 하나, 식후 행사도 아닌 본행사(접견)인데다 공식적으로 참여한 것도 아니고, 이시형과는 달리 오줌까지 싼 데다 국내적 행사도 아니고 외국 사신의 접견 자리였으니 심각한 결레로 여겨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3] 히데요시의 출신이 평민임을 생각하면, 일부러 그랬다기보다는 단순히 예절이란 걸 잘 몰라서 그런 듯하다. 불행하게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단순히 예절을 모르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지나친 욕심을 부렸다가 결과적으로 자신의 천하를 스스로 무너뜨려 버렸지만...[4] 작품에 따라서는 당시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하얀 소쿠타이를 입고 사모형 관모인 도칸무리를 쓴 격식있는 모습으로 조선 통신사를 맞이하는 걸로 묘사되기도 하는데(대표적으로 고우 ~공주들의 전국~과 징비록) 이는 조선왕조실록에 처음에는 사모(紗帽)와 흑포(黑袍) 차림으로 통신사를 맞이해 술을 나누다가 갑자기 방에 들어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아이를 안고 나왔다고 기록된 것을 고증한 것이다. 다만 츠루마츠를 안고 나오는 장면에서도 여전히 소쿠타이를 입고 있으면 그건 고증오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