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치스

 



'''소크라치스의 역임 직책'''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카르페지아니
(1978~1979)

'''소크라치스'''
'''(1979~1986)'''

에지뉴
(1986~1987)

'''소크라치스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팀 수상'''




'''개인 수상'''



'''베스트팀'''
1982 · 1983 · 1984

''' 브라질의 前 축구선수 '''
''' 이름 '''
'''소크라치스'''
'''Sócrates'''
''' 본명 '''
소크라치스 브라질레이루 삼파이우 지소자 비에이라 지올리베이라
Sócrates Brasileiro Sampaio de Souza Vieira de Oliveira
''' 출생 '''
1954년 2월 19일 /
브라질 파라 주 벨렘
''' 사망 '''
2011년 12월 4일 (향년 57세)
''' 국적 '''
브라질
''' 신체 '''
193cm
''' 직업 '''
축구선수 (미드필더[1] / 은퇴)
소아과 의사
''' 소속팀 '''
보타포구 FC (1974~1978)
'''SC 코린치안스 (1978~1984)'''
ACF 피오렌티나 (1984~1985)
CR 플라멩구 (1986~1987)
산투스 FC (1988~1989)
보타포구 FC (1989)
가포스 타운 AFC (2004)
''' 국가대표 '''
60경기 22골 (브라질 / 1979~1986)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별명'''
공포의 의사[10]
'''가족'''
동생 하이

1. 소개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5. 사망
6. 기타

[clearfix]

1. 소개


'''Give my goals to a better country.'''

'''더 좋아진 나라에 내 골을 바치리라.'''

'''"소크라치스는 '유니크'한 선수였습니다."'''

지쿠

브라질의 前 축구 선수이자 소아과 의사
본명은 소크라치스 브라질레이루 삼파이우 지 소자 비에이라 지 올리베이라(Sócrates Brasileiro Sampaio de Souza Vieira de Oliveira)로 조금 길다. 소크라치스는 그의 아버지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따서 지어준 이름이다.[2] 어째 유래가 된 이름의 주인공하고 닮게 늙어버린 건 자랑인지 안 자랑인지 좀 애매하게 되었다.[3] 클럽통산 396경기 207골. A매치 60경기 22골.
1980년대 세계를 풍미한 슈퍼스타로,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특유의 곱슬머리헤어밴드, 턱수염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1974년 보타포구 FC에서 데뷔한 이후 1978년까지 주전 멤버로 활약 100골이 넘는 득점을 기록하고 1976년에는 주립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맹활약을 펼쳤다. 이 활약으로 소크라치스는 SC 코린치안스로 이적하는데 1978년 주립 리그에서만 20골을 넣으며 그 다음 시즌에는 주립 리그 우승까지 차지한다. 그후 1982년-1983년 주립 리그 2연패를 달성, 1983년에는 남미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브라질 최고의 미드필더로 이름을 날린다. 코리치안스에서 297경기에서 172골을 득점하는 괴력을 발휘하여 코리치안스의 전성기를 이끌며 팀의 레전드가 되었다.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세리에 A ACF 피오렌티나에서 뛴 적이 있었는데, 이 당시 국가대표팀 동료였던 지쿠우디네세 칼초에서 뛴 바 있다. 이후 CR 플라멩구산투스 FC를 거쳐 1989년 보타포구에서 선수생활을 정리했으나, 2004년 '''50세의 나이'''에 잉글랜드 아마추어 지역 리그의 가포스 타운과 1달간 계약을 맺어 타드캐스터 알비온과의 경기에서 후반 35분 교체 출전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image]
[image]
소크라치스는 1979년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하여 숙명의 라이벌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2:2 무승부를 이끌었고 파라과이전에도 페널티 킥으로 득점했으나 브라질은 3위에 머물렀다. 그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지쿠-소크라치스-호베르투 파우캉-토니뉴 세레주로 이어지는 이른바 '''황금의 사중주'''로 24경기 무패행진을 달리며 1982년 스페인 월드컵 우승 후보로 꼽히게된다.[4]
[image]
1982년 스페인 월드컵 당시 소크라치스는 팀의 주장을 맡아 참가했는데, 브라질은 1차 리그를 전승으로 통과하여 2차리그에서 이탈리아, 아르헨티나와 같은 조에 편성되었다.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를 3:1로 가볍게 제압했으나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는 파올로 로시에게 해트트릭을 허용하며 3:2로 역전패 당해 허무하게 탈락했다.[5]
1983년 코파 아메리카에 역시 참가했으나 결승전에서 우루과이에게 패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이후 1986 멕시코 월드컵에도 출전했는데 D조에서 스페인을 1:0, 알제리를 1:0, 북아일랜드를 3:0으로 꺾으며 3전 전승으로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다. 폴란드와의 16강전에서는 전반 30분에 소크라치스 본인이 페널티 킥으로 선제골을 넣었고 결국 브라질은 폴란드를 후반전에만 3골을 퍼부으며 4:0으로 박살내고 8강에 진출한다.

8강전은 미셸 플라티니가 이끄는 프랑스였고 시작하자마자 카레카의 선제골로 프랑스를 압도한 브라질이었으나 전반전이 끝나기 전에 플라티니가 만회골을 넣어 경기는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후반전에는 피터지게 겨루고도 득점이 없었으며 연장전도 마찬가지였다.[6] 결국 승부차기를 하게 되었다. 소크라치스는 1번 키커로 나섰으나 실축하였고[7] 결국 프랑스에게 패해 탈락하였다. 이후 소크라치스는 국가대표에서 은퇴하였다.

3. 플레이 스타일




탁월한 시야를 보유해 경기장 곳곳에 위협적인 패스를 뿌려주는 역할을 했으며, 경기를 읽는 능력도 뛰어났다. 게다가 양발잡이에 몸싸움 능력까지 갖추었으며, 노룩 힐패스 등 엄청난 테크닉까지 보유하고 있었으니 가히 플레이메이커의 정석이라고 불려도 무방할 정도.

4. 엄친아


소크라치스는 밀루틴 이브코비치와 더불어 극히 드문 축구선수 출신 의사이다. 히베이랑 프레투 의과대학(Faculdade de Medicina de Ribeirão Preto)에서 의학박사 학위와 소아과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여기에는 자신이 인텔리 가문 출신인 것이 영향을 크게 끼쳤으며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철학박사 학위까지 취득하였다. 덕분에 여러 분야에 걸쳐 상당한 양의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은퇴 후 소아과 의사로서 진료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문, 잡지에 칼럼을 싣거나 축구 관련 소설을 쓰고 군부 독재에 반대하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축구 해설가로도 활약하였으며, 전술에 의존하는 현대 축구를 비판, 축구를 예술의 하나로 보는 낭만주의자였다.
또한 본인의 이름처럼 피델 카스트로체 게바라, 존 레논과 같은 당시의 혁명가들을 존경한다고 여러 차례 밝히기도 했다.

5. 사망


<color=#373a3c> '''말년의 소크라치스'''
의사였지만, 애주가에 골초였던 그는 당연히 건강이 좋을 리 없었고, 2011년 8월 19일 알코올 과다 섭취로 인한 위장 출혈 증세로 자가호흡이 힘들 정도로 위독해져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열흘 뒤 퇴원했는데, 그 해 12월 1일 패혈증으로 인한 쇼크 증세로 인해 다시 병원에 입원했고, 결국 12월 4일에 향년 5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소크라치스의 사망 이후인 12월 30일에는 상파울루의 모룸비 스타디움에서 소크라치스의 사망을 추모하는 자선 경기가 열렸으며, '지쿠의 친구들' 팀이 '브라질의 스타들' 팀에 7:5 승리를 거두었다.

6. 기타


  • 소크라테스가 코린티안스에서 뛸 당시에 브라질은 군부 독재 시기였는데, 소크라테스는 팀의 운영 방식에 민주주의 시스템을 도입한 뒤 경기때마다 군부 독재에 반대하는 유니폼을 입고 나와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이후 코린티안스가 성공을 거두자 브라질 내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결국 군부 독재가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들어서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 참고.
  • 축구선수 중에서는 드물게 애주가골초였는데,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때에는 하프타임 때마다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선수 시절 당시에는 하루 평균 말보로 담배 3갑을 피웠다고 하며 축구 은퇴 후 의사로 복귀하고 나서도 금연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쯤이면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
  • 여담으로, 선수 시절 아일랜드의 더블린 대학교에서 유학을 했다는 설이 세계의 많은 미디어 매체에 보도되어 정설로 받아들여졌었는데, 정작 더블린 대학교에서는 이를 부인했다.
  • 동생인 하이(1965년생) 역시 축구선수다. 형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선수였으나 형보다는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교체멤버로나마 월드컵에 출장해 우승을 차지한 건 동생쪽이었다. 형과는 11살 터울로 나이 차이가 좀 있는데다 형이 국가대표를 은퇴한 이듬해인 1987년 국가대표로 데뷔했기에 형제가 동시대에 국가대표 선수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 과거 무한도전티에리 앙리가 출현했을 때 앙리가 당시 정준하의 헤어스타일을 보고 소크라치스가 떠오른다고 말했었다.
  • PES 2018에서 브라질리언 레전드로 출시되었는데 볼배급, 피지컬, 슛팅에서 좋지만 그 놈의 체력 때문에 반쪽짜리 선수 취급을 받고있다.[8] 18-19시즌에는 pes대신[9] FIFA 19 icon으로 등장했는데 pes에서 안좋았던 스태미너가 80대로 나왔다..
[1] 공격형 미드필더[2] 소크라치스의 아버지 역시 의사였으며, 취미가 철학 공부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을 좋아했다. 소크라테스의 형제들도 모두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이름을 갖고 있다.[3] 소크라테스는 추남으로도 유명하다.[4] 현재도 역사상 가장 강한 축구 팀 10위안에 들어갈 정도다.[5] 그 당시까지만 해도 조 1, 2위까지만 다음 라운드 진출권이 주어졌다. 16강 제도가 생긴 대회는 1986 멕시코 월드컵이다.[6] 경기 종료 직전에 페널티 킥이 나왔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킥의 달인 지쿠의 슛이 프랑스의 골키퍼 조엘 바에게 막혔다.[7] 프랑스에서는 플라티니만 실축하였다.[8] 아무래도 그가 골초였다는 것을 반영한 듯하다... 전반이 끝나면 체력이 거의 안 남는다... [9] pes에선 그의 동생 하이가 레전드로 출시됐다! 형을 닮아 큰 키와 피지컬, 더블터치라는 개인기와 2선침투 덕분에 레전드 2군 상위권 정도의 인기를 가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