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렌 크로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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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Warren Livingston Cromartie
ウォーレン・クロマティ
워렌 리빙스턴 크로마티
생년월일
1953년 9월 29일
국적
미국
출신지
미국,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
포지션
외야수, 1루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73년 드래프트 1순위
몬트리올 엑스포스 지명
소속팀
몬트리올 엑스포스 (1977~1983)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4~1990)'''
캔자스시티 로열스 (1991)
SNS

'''1989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선수(MVP)'''
1988년
카쿠 겐지
(주니치 드래곤즈)

'''워렌 크로마티'''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0년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4년 센트럴리그 최다 승리타점[1]'''
1983년
하라 타츠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20승리타점

'''워렌 크로마티'''
'''(요미우리 자이언츠)'''
'''14승리타점'''

1985년
랜디 바스
(한신 타이거스)
22승리타점[2]
'''1986년 센트럴리그 최다 승리타점[3]'''
1985년
랜디 바스
(한신 타이거스)
22승리타점[4]

'''워렌 크로마티'''
'''(요미우리 자이언츠)'''
'''18승리타점'''

1987년
코바야카와 타케히코
(히로시마 도요 카프)
16승리타점
'''1989년 센트럴리그 수위타자'''
1988년
쇼다 코조
(히로시마 도요 카프)
.340

'''워렌 크로마티'''
'''(요미우리 자이언츠)'''
'''.378'''

1990년
짐 파쵸렉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326
'''1989년 센트럴리그 최고 출루율'''
1988년
오치아이 히로미츠
(주니치 드래곤즈)
.418

'''워렌 크로마티'''
'''(요미우리 자이언츠)'''
'''.449'''

1990년
오치아이 히로미츠
(주니치 드래곤즈)
.416

1. 소개


1970대 중반에서 1990년대 초까지 활동했던, 미국의 야구선수.
야구선수로서의 시작과 끝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기록했지만,[5] 일본 프로야구에서 전성기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의 소속팀이었던 요미우리에서는 팀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2. 선수 시절



2.1. 메이저리그/마이너리그


1953년 미국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레로이도 텍사스 주립대학교에서 미식축구팀 쿼터백으로, 이후 니그로 리그에서 내야수로 활동했던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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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을 앞둔 1973년에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지명을 받았고, 4년 동안의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쳐 1977년부터 외야수로 메이저리그에 출장하기 시작했다. 1980년부터는 1루수로 포지션을 옮겼다. 1981년에는 팀의 내셔널리그 챔피언 결정전에도 주전으로 출장했다.

2.2. 일본프로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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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제50대 4번타자'''
1983년 시즌을 끝으로 자유계약선수가 되었고, 일본 최고의 명문 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당시 요미우리는 전설적 홈런왕 왕정치가 감독으로 재임 중이었다.[6] 크로마티는 일본에서의 첫 시즌인 1984년에 10경기 연속 타점을 기록하며 팬들을 열광시켰고, 1986년까지 입단 후 3년 연속으로 시즌 30개 이상의 홈런을 날렸다. 1987년 일본시리즈에서 세이부 라이온즈와 대결했는데 크로마티가 중견수 수비 시에 보인 약점을 간파한 모리 마사아키 감독과 이하라 하루키 3루 주루코치는 중전안타 시 1루주자를 홈베이스까지 보내는 과감하고 공격적인 주루지도를 하여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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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87년 6월 구마모토 현 리브와쿠 후지사키다이구장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경기에서 상대 투수인 미야시타 마사미(宮下昌己)와 빈볼 시비로 싸움이 벌어졌고, [8][9] 이 사건으로 그는 2,000달러가 넘는 벌금과 7경기 출전정지의 징계를 받았다.[10] 이듬해인 1988년에도 엄지손가락 부상으로 49경기만 출장하는 데 그치면서, 부진을 거듭했다. 이 해 호시노의 주니치가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거인은 3위까지 고꾸라졌다가 겨우 2위로 마치는 바람에 왕정치 감독이 해임되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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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해인 1989년, 크로마티는 타율 .378에 15홈런, 78타점의 맹타를 기록하며 그해 요미우리의 센트럴리그 - 일본시리즈 우승의 1등공신으로 활약했다. 이 공로로 센트럴리그 MVP도 차지하며 생애 최고의 해를 기록했다. 참고로 이 시즌의 크로마티는 '''시즌 규정타석을 채운 시점에서 4할 타율을 유지(!!!)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남은 경기에 모두 결장해도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4할타자'''가 될수도 있었지만 팀이 리그 우승을 다투는 판국에 중심타자가, 그것도 용병이 개인기록때문에 그런 짓을 한다는걸 용납할수 있을리가 없었고 결국 남은 경기에서 페이스가 떨어져서 최종적으로는 4할 달성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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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요미우리에서 1년을 더 활동하여 팀을 1990년 다시 일본시리즈에 진출시키는 데 기여했다. 1991년에는 메이저리그로 복귀하여 캔자스시티 로열스 소속으로 활동했지만, 20경기 동안 타율 .313, 홈런 1개, 타점 20에 그쳤다. 결국 시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퇴를 선언했다. 이로써 그의 야구선수 경력은 끝났다.
통산 성적은 메이저리그에서 11년 동안 타율 .281, 안타 1,104개, 홈런 61개, 타점 391점 등을 기록했다. 일본 통산 성적은 7년 동안 타율 .321, 안타 951개, 홈런 171개, 타점 558점 등을 기록했고, 올스타전에도 3번(1985년, 1989년, 1990년) 출장할 정도의 인기를 누렸다. 특히 센트럴리그 MVP를 차지한 1989년에는 타격, 최다안타, 출루율의 3관왕까지 차지했다.
선수 시절 등번호는 항상 49번을 달았다.

3. 은퇴 이후


은퇴 후에는 코치, 방송 등의 다양한 활동을 했다. 세미리그팀의 감독도 맡은 바가 있지만 상해사건에 휘말려 그만 두어야 했다. 그러한 특기(...)를 살려서 프로레슬러로 전직하기도 했다. 프로야구 마스터스 리그에도 참가한 적 있다.
몬트리올 엑스포스에서 뛰었던 선수라서 그런지 몬트리올을 연고로 한 메이저리그 구단 재유치 활동에 열성적이다. 크로마티는 'Montreal Baseball Project'라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 모임은 몬트리올 메이저리그 팀 재유치라는 목적달성을 위한 단순한 활동을 넘어서 몬트리올 내 야구팬들에게 야구 강습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등 나름 야구를 통한 봉사를 실천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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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로서 전성기를 보낸 일본 요미우리 시절의 경험을 담은 자서전 <일본에서의 장타>(Slugging It Out in Japan)를 펴내기도 했다.
일본을 진심으로 사랑했는지 2018년 4월에는 어느 방송국의 도쿄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일본에 돌아왔고, 2019년 8월부터는 요미우리의 임시 타격코치를 맡으면서[13] 요미우리와 동행하는 느낌을 보여주더니 2020년에는 아예 요미우리의 2군 고문 역할을 맡으면서 정식으로 요미우리에 복귀했다. 다만 시즌 후 재계약을 하지 않으면서 요미우리와의 인연은 다시 끝. 다만 크로마티 본인은 일본에서 계속 유튜버 등의 활동을 하겠다고 밝혔다.
2020년부터는 유튜버 활동도 한다. 구독자는 3만 6천 명 정도로 유명세에 비해서는 적지만 그래도 조회수는 꽤 뽑아주는 듯. 일본에서 전성기를 맞은 선수인데다가 요미우리 고문 시절에 시작한 유튜버라 주 타깃은 일본인인 듯. 크로마티 본인의 대사는 영어지만 자막은 전부 일본어고 스태프도 일본인으로 보이며 크로마티도 인삿말 정도는 일본어로 한다.[14]

4. 여담


만화 돌격 크로마티 고교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기도 히다(...) 그런데 크로마티는 자신의 이름을 맘대로 쓴 작가를 고소하기도 했다(...) 작품 중에서 선수와는 무관하다는 자막을 내보낼 것을 조건으로 작품의 공개금지 신청은 취하했으나, 똑같이 작품에 이름이 쓰인 찰리 매뉴얼랜디 바스,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 등과 같이 추가로 민사소송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매뉴얼, 바스, 데스트라데는 크로마티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소송은 포기했다고.
선수 시절, 특히 요미우리 시절에 작품에 등장하는 크로마티 고교 이상의 막장으로 툭하면 폭행상해를 일으키기도 했다. 위에도 등장한 1987년 주니치 투수와의 빈볼 난투가 대표적. 이후에도 성질머리를 고치지 못했는지 여러차례 충돌을 일으켰다. 그래도 호쾌한 타격과 재미있는 셀러브레이션 등으로 요미우리팬들에게 무척 인기가 많았던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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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싸움 25년만에 재회한 미야시타 마사미와 함께(...)[15] 참고로 미야시타 이 양반은 은퇴 후 가업인 쌀장사를 이어받았는데, 본인의 홈페이지에도 선수 시절 크로마티와의 난투극 동영상을 올려놓는(...) 대인배적 기질을 보여주고 있다.[16][17]
요미우리 시절 홈런을 치고 홈인할 때, 만세(반자이) 포즈를 즐겨 취했다. KBO 리그에서 몇몇 외국인 타자들(예: 한화의 제이 데이비스)의 거수경례 홈인과 비슷한 셈인데, 좋은 성적과 더불어 일본팬들에게 친숙한 모습으로 기억되는 데 일조했다.
위에 서술된 대로, 불같은 성격 외에도 쇼맨십도 있어서인지 이러한 기행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아래 링크 영상의 51~52분 부분에서 볼 수있다.
https://youtu.be/t5sbuhhMgMg?t=3075

[1] 1981~1988년까지 양대리그에서 승리타점(결승 타점)이 가장 많은 선수에게 주던 타이틀로, 1989년부터 양대리그 모두 타이틀을 폐지, 센트럴리그에서만 특별상 형식으로 시상하다가 2000년을 끝으로 완전히 폐지되었다.[2] 역대 최다 승리타점 기록(현재는 비공식기록)[3] 1981~1988년까지 양대리그에서 승리타점(결승 타점)이 가장 많은 선수에게 주던 타이틀로, 1989년부터 양대리그 모두 타이틀을 폐지, 센트럴리그에서만 특별상 형식으로 시상하다가 2000년을 끝으로 완전히 폐지되었다.[4] 역대 최다 승리타점 기록(현재는 비공식기록)[5] 그래도 메이저리그에서도 10시즌 동안 1100경기 이상 출장했으며, 통산 1,100안타를 넘겼고 통산 OPS도 7할대 중반을 기록했다. 즉 일본에 용병으로 가는 선수 치고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성적을 냈던 것이다. 보통 일본에 용병으로 가는 선수들도 한국에 용병으로 오는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마이너 옵션이 있는 3년 기준으로 메이저와 마이너를 오가면서 타자는 대타/대수비, 투수는 패전처리 불펜/임시선발을 하다가 3년이 지나면 이후 1~2년 동안 AAA에서 뛰다가 아시아행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크로마티는 메이저 경력에서 10년 중 6년을 당당히 주전으로 뛰었다. 2020년에 일본에서 거물 용병으로 꼽혔던 저스틴 보어보다 통산 기록이 좋고(홈런 제외), 헤라르도 파라와 비슷한 급이다.[6] 크로마티는 일본에서 활동하던 시절 태어난 둘째 아들의 이름을 '코디 오 크로마티'로 지었는데, 이는 왕정치(일본명 '오 사다하루') 감독에 대한 존경의 뜻을 담은 것이었다.[7] 이런 경우 보통 2루나 3루에서 멈추게 한다.[8] 상대 투수의 공에 맞은 후, 사과 요구에 응하지 않자 화를 못이기고 주먹을 휘둘렀다. 이 사건이 벌어진 후, 나고야 구장에서 치러진 요미우리의 원정경기에서는 분노한 주니치 팬들과 크로마티가 충돌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다수의 경호원들이 배치되어야 했다.[9] 참고로 몸에 맞는 공에 모자를 벗어 사과하는 관습이 있는 일본프로야구에 익숙한 크로마티는, 나중에 주니치의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투수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모자를 벗는 등 사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지시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10] 사실 1989년에 엄청나게 정교한 타격으로 타격왕에 OPS 10할을 기록하였지만, 크로마티가 20홈런 이상을 기록한 해는 1987년이 끝이었다. 일본에서의 7년 중 후반 3년은 10-15-14홈런을 기록했다. 다만 1988년에는 시즌의 2/3 가까이 날려먹은걸 감안하면 파워히터에서 중장거리포로 변신(?)하게 된 건 1989년부터였떤듯. 사실 크로마티는 30홈런을 치면서도 25~30개의 2루타를 치던 스타일이라 그냥 장타력이 떨어진 것일수도 있다(...).[11] 나중에 왕정치가 네모토 리쿠오의 설득으로 요미우리가 아닌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감독을 맡게 되고 지금까지도 호크스 회장직을 지키고 있는 걸 생각하면 나름 야구사를 바꾼 복선이 된 셈이다.[12] 우측의 등번호 8번은 다들 알다시피 하라 타츠노리. 왼쪽의 등번호 22번은 당시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이적해와서 포수로 뛰던 나카오 타카요시인데, 재밌게도 이 3명은 전부 센트럴리그 MVP를 수상한 바 있다.(나카오=1982년, 하라=1983년, 크로마티=1989년)[13] 공식 직함은 없었고 유니폼을 입은 것도 아니었지만 선수단과 계속 동행했다. 다만 무급이었다고 한다.[14] 간혹 스태프와 일본어로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 걸 보면 일본어는 할 줄 아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영어로 진행하는 듯. 하기야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7년을 했고 은퇴 후에도 도쿄 특파원으로 1년, 요미우리의 임시코치와 고문 역할로 1년 반 가량 일본 체류 경험이 있는데다가 중간에도 이런저런 활동으로 일본에 여러 번 왔으니 본인이 어지간히 일본어를 멀리한 게 아닌 이상 못 할 수가 없다. 비슷한 이유로 일본에서 오래 체류한 알렉스 라미레스, 이승엽, 프란시스코 카라바이요(일본프로야구에서는 2년 반 정도밖에 없었지만 독립리그에서 거의 10년을 뛴 선수다.), 천관위 등도 일본어가 유창하다.[15] 미야시타는 1983년부터 7년 동안 주니치에서 활동했는데, 1986년과 1987년에 각각 3승, 5승을 거둔 것이 시즌 최고 기록이었고, 결국 1991년 세이부에서 은퇴할 때까지 통산 10승에도 미달한 평범한 투수였다. 때문에 본인 스스로의 성적보다는 '크로마티와 싸운 투수' 정도로 기억되고 있다.[16] 홈페이지 이름이 미야시타 상점이지만 가게 이름이 아니라 그냥 홈페이지 이름이다. 실제로 음식점이나 상점을 운영하는 건 아니고 쌀, 달걀, 밀가루 도매업을 하고있다.[17] 해당 동영상의 1분 23초 장면에 호시노 센이치 당시 주니치 감독이, 왕정치 요미우리 감독에게 주먹을 쥐어보이는 모습을 보여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는데, 후에 호시노는 "싸우려는 의도가 아니고, '주먹으로 때린 건 너무한 것 아니요?'라는 뜻을 전달하려다가 그런 것"이었다고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