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디 바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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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부터 1982년까지 메이저리그에서 뛰었으며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일본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즈에서 활약한 前 프로야구 선수, 前 미국 오클라호마 주 주 의회 상원의원.'''하느님, 부처님, 바스님''' (神様, 仏様, バース様)
한신 팬들에게는 지금까지도 '''신(神)적인 존재'''[1] 로 남아있는 선수로, 비단 한신 팬들 뿐만 아니라 일본의 모든 야구 팬들에게도 '''역대 최강의 도우미(史上最強の助っ人)''' 라는 이미지로 남아 있는 선수다. 한신 올드팬 들은 1960년대 한신의 에이스로 활약한 외국인 투수 진 바키와 바스를 묶어 '''한신의 역대 최강 외국인 투타''' 라고도 부른다.
같은 용병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있었던 워렌 크로마티와 라이벌 관계를 구축했었다.
2. 선수생활
미국 야구계에서 그는 전형적인 AAAA리거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72년 드래프트에서 미네소타 트윈스에 7라운드 전체 152번째 지명을 받았고 마이너리그에서 뛰어난 파워와 출루능력을 보여주었지만 영 메이저리그에서 자리잡지는 못했다. 메이저리그 통산 9홈런에 불과한 타자이지만 마이너리그 통산 238홈런을 때려냈다는 것으로 바스의 미국 시절 커리어를 요약할 수 있다. 이렇게 오랜 기간 메이저에서 자리잡지 못하던 그에게 한신 타이거즈의 오퍼[2] 가 들어왔고 1983년 드디어 일본 무대에 선을 보이게 되었는데, '''전설의 막이 올랐다.'''
일본프로야구 최강의 외국인 타자로 이름을 날린 건 두말할 것 없이 역대 최고수준의 타격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랜디 바스의 통산 기록 아들의 병 때문에 갑작스럽게 미국으로 떠난 1988년을 제외한 풀타임 5시즌 중 가장 못한 시즌의 OPS가 첫 해인 1983년의 0.971이고 홈런은 5시즌 뛰고서 통산 202홈런에 1986년도 기록은 거의 배리 본즈나 테드 윌리엄스가 일본에 강림한 수준의 임팩트.
다만 바스라고 항상 순조로운 모습만 보인 것은 아니엇다. 83년에는 초반의 부상과 리그 적응 문제로 고전하기도 하면서 113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했고, 1984년에는 아버지의 병환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미국에 귀국하는 바람에 4주 정도를 결장해 104경기에 출장했다. 뛰어난 타격 능력을 보여주며 한신의 중심타선의 축으로 자리잡기는 했지만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매스컴 사이에서 교체설이 돌기도 했고[3] , 그렇게 대망의 1985년 시즌이 밝았는데...
바스는 단숨에 각성하며 양대리그제 시행 후 한신 타이거즈의 '''유일한 1985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그 해에 랜디 바스는 174안타, 54홈런, 134타점, 타율 0.350로 센트럴 리그 용병 최초로 타격삼관왕에 오른다.[4][5] 이 해에 기록한 54홈런은 2001년 터피 로즈가 55홈런을 기록할 때까지 그 동안 왕정치가 1964년 55홈런 일본신기록을 세우고 난 뒤에 기록한 최다홈런 기록이었으며, 센트럴리그 최초의 외국인 홈런왕이기도 했다.(왕정치를 일본 야구팬의 어느 누가 외국인 선수로 보던가?)
물론 그 당시 일본프로야구에서 암묵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던 '''왕정치 홈런 기록 보호 작전'''으로 왕정치의 기록을 깨지는 못했지만... 당시, 시즌 마지막 두 게임을 남겨놓고서 요미우리와 붙게 되었는데, 당시 요미우리의 감독은 왕정치. 그리고 바스는 왕정치의 홈런 기록에 1개차인 54개로 따라잡은 상황이었다. 잘만하면 홈런 기록을 갈아치우게 될 상황에서, 결국 요미우리는 에이스인 에가와 스구루를 제외한 투수들이 승부를 피하면서[6] 치졸하게 감독의 시즌최다홈런 기록을 지켜내게 되었다. 왕정치는 후에 '나는 고의사구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고 하였고, 이 말은 맞는 말이긴 하다.[7] 하지만 리그 순위와 상관없는 게임에서 자기 편 투수들이 랜디 바스와 의도적으로 승부를 피하는 것을 보고 묵인했다는 점에서 변명에 가깝다.[8]
요미우리 투수진은 감독의 홈런기록을 지켜내긴 하였으나, 볼넷남발로 인해 결과적으로 바스의 출루율이 올라가게 되어, '''최고출루율''' 타이틀을 선사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9]
물론 랜디 바스와 함께 전설적인 클린업 트리오를 구축했던 카케후 마사유키, 오카다 아키노부또한 팀의 첫 일본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바스-카게후-오카다로 이어지는 '''백스크린 3연발의 전설'''은 한신팬들의 마음속 깊이 남아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85년 4월 17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한신 고시엔 구장 홈 경기에서 3-1로 뒤지고 있던 7회말 투아웃 상황. 당시 요미우리의 선발투수였던 마키하라 히로미는 7회까지 1실점으로 한신의 타선을 잘 틀어막고 있었다. 바스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에는 주자를 1-2루에 두고 있었으나, 당시 바스의 타율은 '''0.133'''에 '''홈런0개.''' 누가 예상하더라도 마키하라가 무난히 이닝을 마무리하고 내려 갈 줄 알았으나... 전설의 대역전극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3번타자 바스가 당시 마키하라 히로미[10] 가 119구째로 던진 초구 실투를 받아쳐 '''센터 백스크린'''으로 날리는 쓰리런 홈런으로 역전, 4번타자인 카케후 마사유키가 또다시 '''센터 백스크린'''을 넘기는 솔로홈런[11] , 그리고 마지막으로 5번타자인 오카다 아키노부도 역시 '''센터 백스크린'''으로 넘기는 솔로홈런을 날려서 역전승을 하게 되었다. 참고로 당시 바스는 시즌 시작후 타율 0.133로 꽤나 막장(...)이었으나 이 시합에서의 홈런을 계기로 당해 타격삼관왕 등극에 시동을 걸게 된다. 그리고 한신도 질주하여 한신 타이거즈 팬들의 숙원이었던 일본시리즈 우승도 달성한다.
이듬해인 1986년에는 일본프로야구 한시즌 최고타율 기록인 '''0.389'''의 대기록을 수립한다.[12] 비율스탯은 '''.389 .481 .777 OPS 1.258'''로, OPS는 1974년 오 사다하루의 1.293에 이은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2위 기록이며 장타율은 2013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779로 갱신하기 전까지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1위 기록이었다. 이외에도 176안타, 47홈런, 109타점을 기록하며 2년 연속으로 타격 3관왕을 기록하는 등 리그를 초토화시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센트럴리그 MVP는 히로시마의 에이스 키타벳푸 마나부에게 돌아갔다. 키타벳푸도 18승 4패 평균자책점 2.43으로 투수 2관왕을 차지한 훌륭한 투수였고 소속팀인 히로시마의 우승을 이끈 주역이긴 했지만, 바스만큼 압도적인 성적은 아니었다. 일본프로야구의 MVP라는 게 원체 리그 우승팀 선수에게 주는 경향이 강한 타이틀이긴 하지만, 일본의 야구 팬들 사이에서는 당시 투표인단 중에서 외국인에게 2년 연속 MVP를 주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정설로 통하고 있다.
어쨌든 한신 팬들은 바스가 앞으로도 계속 한신의 타선을 이끌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바스는 1988년 아들의 지병인 수두증 문제로 인해 구단과 갈등을 빚다가 해고당해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 이후 은퇴한다. 계약상 '가족의 병원치료가 필요할 경우, 구단이 이를 부담한다'는 내용이 있었으나, 한신은 거액의 병원비 지불을 꺼려하여 바스를 해고했다고 한다. 이후 한신 구단 대표가 도쿄의 한 호텔에서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바스와의 재계약 문제로 인한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렇듯 바스가 떠난 이후, 구단 내외의 분위기는 매우 흉흉했다.
...'''그리고 한신 타이거즈는 1987~2002년까지[13] 롯데 자이언츠의 8888577, 난카이 호크스의 20년 연속 B클래스와 맞먹는 초유의 암흑기를 지내게 된다.'''
일본프로야구 통산 기록은 614시합 출전 / 통산타율 .337 / 통산출루율 .418 / 743안타 / 202홈런
3. 이모저모
- 1985년에 일본프로스포츠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여태까지 몽골 스모선수인 아사쇼류와 하쿠호를 제외하면 이 상을 수상한 유일한 외국인 선수. 적어도 서양인 중에선 유일하다. 더구나 팀 단위로도 수상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스한테만 준걸 보면 일본 야구계를 넘어 스포츠계에 있어 바스의 입지가 어떤지 대충 가늠할 수 있다.
- 한신 타이거스의 암흑기가 시작된 원인(?)도 랜디 바스. 1985년 첫 우승을 기념하기 위해 오사카 시민들은 한신 선수들을 닮은 사람들을 도톤보리 강에 던져버리면서 자축하였는데, 랜디 바스는 외국인이니 닮은 사람을 찾을 길이 없었다. 이에 군중들은 근처에 KFC 앞에 서 있는 할랜드 샌더스 인형을 강에 집어던졌고 커넬께서는 한신에 저주를 내렸다.
- 바스는 일본생활에 잘 적응한 정도가 아니라 소속구단인 한신을 정말 사랑했고 귀화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은퇴 뒤엔 한신에서 코치를 하는게 꿈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들의 치료문제 때문에 구단에서 나몰라라 하는 바람에 한때 귀화까지 하려고 했던 랜디 바스는 엄청난 배신감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은 개선됐지만 이때 한신 프런트는 막장 오브 막장이었다.
- 미국으로 돌아간 뒤엔 고향 오클라호마로 돌아가 농장 경영과 야구 보급 등에 힘쓰다 2004년에 민주당 소속으로 오클라호마 주 의회 상원의원[14] 으로 당선되어 임기 제한이 되는 2018년까지 상원의원직을 역임했다. 임기 제한인 4선에 성공하며 상원의원 중 가장 오랫동안 재임하는걸 보면 보면 정치가로서의 능력도 상당한 것 같다. 다만 고향에서는 동료 의원들마저도 자신이 일본 야구에서 어떤 레전드급 활약을 했는지는 잘 모른다고 한다. 오클라호마 상원 홈페이지에 있는 정보에 따르면 현재 주 상원의원직과는 별개로 농장을 경영하고 있는걸로 보이고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스카우트로 일한적도 있는 모양이다.#
- 한신의 막장 대우와는 별개로 일본 프로스포츠계에 있어 레전드나 다름 없는 사람이라 그런지 자주 일본을 방문하고 있다. 일본프로야구 OB팀들의 모임인 프로야구 마스터스 리그에도 선수[15] 로 등록되어 있으며, 방송 출연이나 광고 촬영도 종종 하고 있다.2011년 프로야구 오너즈 리그(プロ野球オーナーズリーグ) 게임 광고에 출연한 모습 간간히 주의회 의원 활동으로 오클라호마 농축산물 판촉을 방일중 하고는 했다.
- 일본어 등록명 バース에 관련된 뒷이야기가 있는데, 물고기 배스 등을 표기할 때의 bass는 보통 장음이 없는 バス로 표기한다. 처음에도 バス로 등록하였으나, 일본어로 버스(bus)도 バス로 표기하기 때문에 혹여나 바스가 부진하거나 부상이라도 당하면 '한신 버스 고장' '한신 버스 엔진 스톱' 등으로 버스사업도 운영하는 모기업 한신에 나쁜 이미지가 갈 것을 우려해 급히 バース로 등록명을 변경했다고 한다.
4. 바스의 재래와 바스의 재래의 재래
랜디 바스가 이렇게 엄청난 활약을 한 선수였기 때문에 간사이지방 언론은 한신 타이거스에 새로운 용병 선수가 입단할 때마다, 바스처럼 활약해줄 것을 기대하면서 '''바스의 재래'''(バースの再来)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 말을 들은 선수들만 지금까지 수십 명 이상.## 그런데 이 바스의 재래라는 말을 들은 선수마다 하나같이 먹튀가 되거나 유리몸이거나 한 시즌만에 쫓겨났기 때문에 일본팬들사이에서는 바스의 재래 혹은 바스2세라는 말은 '바스처럼 불운하게 퇴단한다' 또는 '(안좋은 의미로)바스처럼 전설이 되었다'를 뜻하게 돼버렸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용병들의 '''사망플래그'''
'''바스의 재래의 재래'''(バースの再来の再来)는 이 선수도 앞서 바스의 재래라는 말을 들었던 선수처럼 또다시 먹튀 용병이 되었다는 팬들의 자조적인 비아냥.[16] 두 표현 다 일본의 야구팬들에게는 상당히 유명한 말이다.
2016년 일본시리즈에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소속 투수 앤서니 '''바스''' 선수가 구원등판으로 3승을 기록하고 6차전에서 적시타를 때려내며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하자 바스의 재래, 사실상 한신우승 드립이 흥하기도 했다. [17]
여담으로 니코니코 대백과의 바스의 재래 항목을 보면 그렇지 않았던 선수와 구단 역사에 남을 명 선수 항목이 있다. 여담으로 아롬 발디리스도 그렇지 않았던 선수 항목에 있다(...)[18] 명 선수 항목에는 세실 필더, 맷 머튼, 크레이그 브라젤[19] , 마우로 고메즈 등이 있다.
5. 관련 문서
[1] 참고로 한신팬들은 랜디 바스의 이름 뒤에 항상 様(사마)라는 존칭을 붙인다.[2] 한신은 외국인 타자 최종후보로 바스와 부머 웰즈를 저울질했으나 최종적으로 왼손타자인 바스를 택했다. 부머도 하술하겠지만 일본에서 대단히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다.[3] 84년 오프에 감독으로 취임한 요시다 요시오 감독이 바스의 잔류를 강력하게 구단에 요청했다고 한다.[4] 최고출루율부문과, 당시의 타이틀이었던 최다승리타점부문을 포함하면 '''타격오관왕'''.[5] 퍼시픽리그 용병 최초의 삼관왕은 같은 니시노미야에 있던 한큐 브레이브스의 부머 웰즈가 1984년 수상한 바 있다. 참고로 이 해 한큐는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했고(일본시리즈에선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패배) 이것이 한큐 시대의 마지막 우승이 되었다.[6] 기록상으로는 고의사구에 해당하지 않는다. 고의사구가 성립되려면 마지막 네번 째 볼을 포수가 일어선 상태에서 받아야 하기 때문. 실제로 이 해에 바스가 얻어낸 기록상의 고의사구는 불과 '''5개'''이다. 오히려 타율 3할8푼9리를 기록한 그 다음해의 고의사구가 18개였다. 고의사구는 아니었다. '''단지 포수를 앉혀놓고 도저히 칠 수 없는 볼을 던졌을 뿐.'''[7] 실제 지시를 내린 것은 당시 투수코치였던 호리우치 츠네오였다고.[8] 후에 호크스 감독을 맡았을 적의 터피 로즈 때도 침묵했다. 마찬가지로 이 때도 배터리코치인 와카나 요시하루 등이 '''알아서''' 지시를 내렸고 호크스 투수들이 기록상 고의 사구가 아닌 바깥쪽 한참 빠지는 볼, 바운드 볼 등 도저히 칠 수 없는 공만 던졌다.[9] 하지만 사사구 개수 또한 3할8푼9리를 친 그 다음해가 훨씬 많았다. 아무래도 그 다음해의 바스가 완전체에 가까왔기 때문.[10] 참고로 마키하라 히로미는 요미우리에서만 19년 통산 159승 통산 방어율 3.19라는 우수한 기록을 남긴 대투수로, 이 시점에서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구속 기록자였고(155km/h) 이후에는 퍼펙트 게임을 기록한 적이 있어 '미스터 퍼펙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참고로 현재까지 NPB에선 마키하라가 마지막으로 퍼펙트 게임을 기록한 투수다. 対 한신전의 통산 전적은 38승 10패 10완투의 절대우위인데 어째선지 이 날은 와장창 두들겨 맞았다.[11] 사실 이날 카케후의 홈런은 백스크린 왼쪽을 살짝 벗어나서 엄밀히 말하면 백스크린은 아니지만 워낙 이 세타자의 홈런이 임팩트가 커서 백스크린 3연발로 쳐주는거다.(...)[12] 기록수립 당시까지의 일본프로야구 시즌 최고타율은 장훈이 1970년에 기록한 0.383 이었다. 16년만의 기록 경신. [13] 이 기간 동안 한신은 리그 우승은 커녕 A클래스도 '''1992년 딱 한 번, 그것도 교진군과 공동 2위로''' 했다. 그 이외엔(...)[14] 연방 단위의 미국 상원이 아니라 오클라호마 주 의회의 하원과 상원 중 상원이다. 주 의회부터가 양원제이기에 가능한 일.[15] 팀은 오사카 로망즈[16] 90년대 한신에서 4년 연속으로 4번 타자를 맡았던 외국인이 시즌 도중에 쫓겨났다(...)[17] 앤서니 바스는 선발 요원으로 데려왔으나 부진하여 시즌 중 불펜으로 전향했던 선수로 37경기 14선발 8승 8패 6홀드에 평자 3.65를 기록했다. 그러나 2016 시즌 이후 재계약에 실패하여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복귀 이후 트리플 A에서 주로 뛰면서 땜빵으로 메이저에 올라와 2년 동안 18경기에 등판했다. 2019년에는 메이저리그에서 꽤 오래 버티면서 44경기에 출장했고 시즌 후 1년 150만 달러에 연장계약을 맺으며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18] 발디리스는 한신에선 망했지만 어차피 육성선수 입단이라 기대치가 없었고, 다른 구단으로 옮긴 후에는 준수한 중장거리포이자 주전 3루수로 6년간 뛰면서 나름 롱런한 용병타자로 역사에 남았다. [19] 2010년에 47홈런 117타점에 OPS 9할 대를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