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 마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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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前 야구 선수.
쿠와타 마스미, 마키하라 히로미와 함께 80년대 말 ~ 90년대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대표했던 간판 투수였다. 이 셋은 거인의 '세 기둥'(三本柱)이라 불렸다. 위의 둘과 묶이지 않고 단독으로 거명될 때의 별명은 일명 '''헤이세이의 대 에이스(平成の大エース)'''.
1989년 11연속 완투 기록중인 투구 영상.
투구폼은 현역시절 조계현을 보는 듯한 사이드암 스로와 스리쿼터 스로의 경계에 있는 투구폼으로, 일본에서는 사이토를 사이드암 스로로 보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1순위로 입단했다. 원래 요미우리는 고시엔 스타 아라키 다이스케[1] 를 1순위로 지명했으나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추첨에서 밀려서 사이토를 지명. 투타 양쪽에 모두 재능을 보였던 만큼 타자 전향 가능성도 제기되었지만, 당시 요미우리의 감독이었던 후지타 모토시는 사이토를 투수로 키우기로 결정하고, 투구폼도 사이드암으로 바꾸게 한다. 첫 해에는 2군에서 담금질만 하다가, 오 사다하루가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1984년에 1군에 데뷔했다. 프로 3년차인 1985년부터 12승 8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2.96의 호성적을 기록하며 재능을 과시하지만 이후 로테이션에 정착하지 못하고 불펜과 2군을 오가게 된다.
하지만 1989년, 오 사다하루의 후임으로 6년만에 다시 요미우리의 사령탑을 맡게 된 후지타 모토시는 사이토를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시킨다. 그리고 사이토는 일본프로야구 신기록인 '''11경기 연속 완투'''를 기록하는 등 20승 7패 평균자책점 1.62라는 경이적인 성적으로 사와무라 상을 거머쥐면서 센트럴리그를 대표하는 선발 투수로 거듭나게 되었고, 1990년에는 20승 5패 평균자책점 2.17이라는 호성적을 기록하며 2년 연속으로 다승 1위와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 센트럴리그 MVP에 올랐다. 1991년에는 11승 11패 평균자책점 3.38로 앞선 2년보다는 못한 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1992년에는 17승 6패 평균자책점 2.59로 다승왕을 차지하며 반등에 성공한다.
1993년에는 부상 때문에 규정이닝을 간신히 채우는 수준에 그쳤지만 1994년에 14승에 200이닝을 돌파하며 건재함을 과시했고, 1995년에는 18승 10패 평균자책점 2.70에 187개의 탈삼진으로 데뷔 후 첫 탈삼진 1위를 거머쥐며 자신의 두 번째 사와무라 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1996년에도 16승 4패 평균자책점 2.36의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2년 연속으로 사와무라 상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후 사이토는 내리막길을 타게 되는데, 1997년에는 부진과 부상으로 인해 1989년 이후 처음으로 규정이닝을 채우지 못했다. 1998년에 10승을 거두긴 했지만 이것이 마지막 불꽃이었고, 이후 3년간 10승을 추가하는데 그치며 2001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통산 성적은 426경기 113완투 180승 96패 11세이브 평균자책점 2.77. 사와무라상 3회 수상은 가네다 마사이치, 무라야마 미노루, 스기시타 시게루[2] 와 타이를 이루는 역대 최다 기록이다.
은퇴한 뒤 요미우리의 2군 투수 코치로 부임했고, 2003년 이후 코치직에서 물러나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다. 그리고 2006년에 다시 요미우리의 투수코치로 임명되었고, 2016년부터는 요미우리의 2군 감독을 맡게 되었다. 2군 감독직 수행 중 U-23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WBSC U-23 월드컵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2017년 전반기 종료 시점부터는 다시 1군 투수 코치를 맡는다.
선수 시절 팀의 간판스타 및 에이스로 활약했고, 코치로서의 경력도 길며, 무엇보다도 선수와 코치 생활을 모두 요미우리에서 한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이라는 점에서 언론상에서 1군 감독 후보로 여러 차례 거론되어왔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1군 감독과는 인연이 없다.
1. 개요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前 야구 선수.
쿠와타 마스미, 마키하라 히로미와 함께 80년대 말 ~ 90년대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대표했던 간판 투수였다. 이 셋은 거인의 '세 기둥'(三本柱)이라 불렸다. 위의 둘과 묶이지 않고 단독으로 거명될 때의 별명은 일명 '''헤이세이의 대 에이스(平成の大エース)'''.
1989년 11연속 완투 기록중인 투구 영상.
투구폼은 현역시절 조계현을 보는 듯한 사이드암 스로와 스리쿼터 스로의 경계에 있는 투구폼으로, 일본에서는 사이토를 사이드암 스로로 보고 있다.
2. 선수 생활
고등학교 졸업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1순위로 입단했다. 원래 요미우리는 고시엔 스타 아라키 다이스케[1] 를 1순위로 지명했으나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추첨에서 밀려서 사이토를 지명. 투타 양쪽에 모두 재능을 보였던 만큼 타자 전향 가능성도 제기되었지만, 당시 요미우리의 감독이었던 후지타 모토시는 사이토를 투수로 키우기로 결정하고, 투구폼도 사이드암으로 바꾸게 한다. 첫 해에는 2군에서 담금질만 하다가, 오 사다하루가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1984년에 1군에 데뷔했다. 프로 3년차인 1985년부터 12승 8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2.96의 호성적을 기록하며 재능을 과시하지만 이후 로테이션에 정착하지 못하고 불펜과 2군을 오가게 된다.
하지만 1989년, 오 사다하루의 후임으로 6년만에 다시 요미우리의 사령탑을 맡게 된 후지타 모토시는 사이토를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시킨다. 그리고 사이토는 일본프로야구 신기록인 '''11경기 연속 완투'''를 기록하는 등 20승 7패 평균자책점 1.62라는 경이적인 성적으로 사와무라 상을 거머쥐면서 센트럴리그를 대표하는 선발 투수로 거듭나게 되었고, 1990년에는 20승 5패 평균자책점 2.17이라는 호성적을 기록하며 2년 연속으로 다승 1위와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 센트럴리그 MVP에 올랐다. 1991년에는 11승 11패 평균자책점 3.38로 앞선 2년보다는 못한 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1992년에는 17승 6패 평균자책점 2.59로 다승왕을 차지하며 반등에 성공한다.
1993년에는 부상 때문에 규정이닝을 간신히 채우는 수준에 그쳤지만 1994년에 14승에 200이닝을 돌파하며 건재함을 과시했고, 1995년에는 18승 10패 평균자책점 2.70에 187개의 탈삼진으로 데뷔 후 첫 탈삼진 1위를 거머쥐며 자신의 두 번째 사와무라 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1996년에도 16승 4패 평균자책점 2.36의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2년 연속으로 사와무라 상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후 사이토는 내리막길을 타게 되는데, 1997년에는 부진과 부상으로 인해 1989년 이후 처음으로 규정이닝을 채우지 못했다. 1998년에 10승을 거두긴 했지만 이것이 마지막 불꽃이었고, 이후 3년간 10승을 추가하는데 그치며 2001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통산 성적은 426경기 113완투 180승 96패 11세이브 평균자책점 2.77. 사와무라상 3회 수상은 가네다 마사이치, 무라야마 미노루, 스기시타 시게루[2] 와 타이를 이루는 역대 최다 기록이다.
3. 지도자 생활
은퇴한 뒤 요미우리의 2군 투수 코치로 부임했고, 2003년 이후 코치직에서 물러나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다. 그리고 2006년에 다시 요미우리의 투수코치로 임명되었고, 2016년부터는 요미우리의 2군 감독을 맡게 되었다. 2군 감독직 수행 중 U-23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WBSC U-23 월드컵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2017년 전반기 종료 시점부터는 다시 1군 투수 코치를 맡는다.
선수 시절 팀의 간판스타 및 에이스로 활약했고, 코치로서의 경력도 길며, 무엇보다도 선수와 코치 생활을 모두 요미우리에서 한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이라는 점에서 언론상에서 1군 감독 후보로 여러 차례 거론되어왔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1군 감독과는 인연이 없다.
[1] '''다이쨩 열풍'''으로 유명했고,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이름의 유래가 된 선수. 그러나 야쿠르트로 간 아라키는 프로에서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한다. 오 사다하루의 와세다실업학교 후배이며, 2006년 손수건 왕자라는 별명과 함께 와세다실업학교의 첫 여름 고시엔 우승을 이끈 사이토 유키를 다룬 언론기사에서 많이 언급된 이름이기도 하다.[2] 초창기 주니치 드래곤즈의 에이스. 일본프로야구의 원조 포크볼 마스터. 주니치의 창단 후 첫 우승인 1954년 일본시리즈 당시 시리즈 MVP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