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토 리쿠오
1. 소개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경영인.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GM이자 1980년대의 라이온즈와 지금의 호크스란 두 강팀을 만든 주인공'''.
다이쇼 시대(1912~1926)에 태어난 일본 야구인 중 가장 마지막으로 프로야구 감독을 지낸 인물이기도 하다.
2. 선수 시절
1926년 이바라키현 미토시에서 부유한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몸이 약했던 네모토는 가정교사인 변호사와 캐치볼을 하면서 야구에 눈을 떴고, 집 담벼락에 공을 던지고 받는 등 혼자서도 야구를 즐긴 덕분에 몸이 튼튼해 졌다고 한다.
이바라키 중학-호세이대학에서 포수로 활동한 네모토는 대학 졸업 후 사회인야구 가와사키 콜럼비아 팀을 거쳐 1952년 킨테츠 펄스에 입단하였지만 선수로서 눈에 띄는 성적은 거두지 못하고 1957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통산 성적은 186경기 출장, 70안타, 2홈런, 23타점, 타율 .189였다.
3. 지도자, GM 시절
은퇴 후 네모토는 킨테츠의 스카우트로 활동했고 1962~1966년 킨테츠 버팔로즈의 코치로 뛰면서 훗날 팀의 중심 타자가 되는 도이 마사히로[2] 를 육성했다.
3.1.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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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시즌을 끝으로 킨테츠 코치에서 물러난 네모토는 잠시 철강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주변 인맥을 통해 히로시마 카프의 코치로 다시 그라운드에 돌아왔고, 1968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새롭게 바뀐 팀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당시 도요공업이 카프의 모기업이 되면서 히로시마 구단주로 취임한 마쓰다 쓰네지는 "시즌 전패를 해도 상관없다. 팀의 기초를 만들어 달라"며 네모토에게 요청했고 오너의 지원을 받은 네모토는 팀의 체질 개선을 통해 만년 하위권이던 히로시마를 감독 취임 첫해인 1968년 시즌 리그 3위로 끌어올리는 성과를 보였다. 이는 1950년 팀 창단 이후 최초의 A클래스 기록 이었다.
그러나 이후 히로시마는 별다른 진전 없이 6위-4위-4위-6위로 계속해서 4위 이하의 하위권(리그 B클래스)를 맴돌았으며[3] 결국 네모토는 성적부진으로 1972년 6월, 시즌 도중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네모토가 히로시마 감독 시절 키워낸 기누가사 사치오, 야마모토 코지, 미즈타니 지츠오 등의 선수들은 1970년대 중반 고바 다케시 감독 시절 히로시마의 전성 시대를 이끈 주역으로 성장했다. 한편으로 히로시마의 배터리 코치이던 우에다 토시하루와는 야구관의 차이로 인한 의견 충돌을 일으키며 우에다가 히로시마를 떠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한 적도 있다.
3.2. 크라운라이터-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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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1977년 마이니치 방송의 해설가로 활동한 네모토는 1978년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영입되었고, 1978년 시즌 이후 구단이 세이부 철도로 매각되어 사이타마로 이전하면서 세이부 라이온즈로 팀명이 바뀐 1979년부터는 구단 관리부장까지 겸임하며 프런트진을 정비하면서 드래프트 번외라는 편법을 통해 당시 사회인야구의 유망주였던 마츠누마 마사유키, 히로히사 형제를 영입하고[4] 한신 타이거즈와의 대형 트레이드로 타부치 코이치, 후루사와 켄지[5][6] 를 끌어들인 데 이어 1980년 시즌 후엔 스기모토 타다시, 이시게 히로미치, 아키야마 코지, 이토 쓰토무, 쿠도 키미야스 등의 신인 스카우트로 전신 니시테츠가 팀 운영에서 손을 뗀 이후 바닥에서 헤메던 팀을 상위권으로 발돋움 시킬 발판을 마련 하였다.
1981년 시즌을 끝으로 네모토는 관리부장 직에만 전념하였고, 세이부의 구단주 츠츠미 요시아키는 네모토에게 구단 운영의 전권을 맡기며 네모토는 사실상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GM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명 유격수 출신 히로오카 타츠로에게 후임 감독직을 넘기고, 마찬가지로 요미우리의 프랜차이즈 포수였던 모리 마사아키 까지 수석 코치로 영입하여 세이부가 1980~1990년대에 걸쳐 일본시리즈 제패 8회(1982~1983[7] , 1986~1988, 1990~1992[8] )의 기틀을 잡는데 공헌하였다.
3.3.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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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세이부를 떠난 네모토는 라이벌 구단인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대표이사 전무 겸 감독으로 적을 옮기며 당시 일본 프로야구에 큰 파문을 남겼고, 세이부에서 하던 대로 공격적인 트레이드와 스카우트를 통해 세이부의 주력 선수이던 아키야마 코지와 쿠도 키미야스, 대형 유망주 조지마 겐지[9] , 마쓰나카 노부히코, 이구치 타다히토 등의 선수를 영입하여 팀을 상위권으로 올리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부임 첫해인 1993년엔 새로운 홈구장 후쿠오카 돔의 크나큰 그라운드에 적응하지 못한 선수들의 부진으로 최하위로 끝났지만, 이듬해인 1994년엔 시즌 막판까지 상위권 싸움을 벌였고, 결국 전반기 최하위였던 킨테츠 버팔로즈가 후반기에 타선 폭발로 무려 26승 8패란 말도 안되는 성적으로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공동 2위를 기록해 내는 바람에 불과 '''6모 차(...)'''로 하위권인 4위에 머물러야 했지만, '''69승 60패 1무, 승률 .5348'''로 난카이 호크스 최후의 A클래스 시즌이었던 1977년 이래 무려 17년만의 5할 승률과 60승을 찍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그 해 시즌을 끝으로 네모토는 감독 사임 후 구단 전무로만 일하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간판이라 할 수 있던 오 사다하루를 후임 감독으로 끌어들이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하고[10] 이후로도 다이에의 GM으로서 아무도 생각 못한 선수를 영입하는 등의 변함없는 맹활약을 보였다.
GM으로 재임하던 시절 네모토는 팬들이나 야구계 인물 등 구단 바깥에서의 비난에 아랑곳 않고 팀의 체질개선을 위해 남들이 보기에 비상식적인 스카우트와 트레이드를 감행하는 등 거리낌 없이 악역을 자처하며 "욕을 먹어도 내가 먹을 테니 자네들(선수단과 프런트)은 맡은 임무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서포트 해주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카와카미 테츠하루가 일본 야구계에서 '''"양지의 돈(Don, 두목)"''' 이라고 불린 데 비해 네모토는 '''"음지의 돈"'''으로 통했다. 카와카미는 감독 시절에 요미우리의 일본시리즈 V9를 달성하는 등 확실한 업적이 있던 반면 네모토는 감독으로서 뚜렷한 성적은 올리지 못했지만[11] 그가 영입하거나 육성한 선수들이 나중에 팀의 중심 선수로 성장하고 좋은 성적을 올리는 데 일조하는 등 이면에서 이룩한 공헌이 더 컸기 때문이다.
세이부 라이온즈의 실적에 주목하여 다이에 시절의 오너인 나카우치는 네모토를 감독 겸 구단 이사로 영입했다. 네모토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고 후에 치바 롯데 구단 대표와 오릭스 구단 본부장을 맡은 세토야마 류조는 아래와 같이 네모토의 감독 1년차인 1993년을 회상했다.
후쿠오카 돔 입성 원년인 1993년 시즌을 마치고 네모토는 승리에 집착하기 보다는 팀의 앞을 내다보고 팀의 손볼 곳을 파악하고 있었다. 감독, GM, 구단본부장, 대표이사 전무 등을 겸직하면서 이룬 성과가 아키야마 코지가 포함된 세이부와의 대형트레이드였다. 세토야마에 의하면 그때의 네모토는 더 큰 일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고 한다. 세토야마는 다음과 같이 이렇게 말했다.2월의 캠프 첫날입니다. 네모토 씨는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길 생각이 없다. 하지만 너희들 각자 알아서 성장해라. 몇 년 후에는 강한 팀을 만들겠다'고, 그런 반면에 팀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선수들에게는 꽤 신랄했습니다. '시즌이 끝나면 지금의 팀은 동호회이다. 그러면 안된다'며 팀을 바꾸기 위하여 혈액의 교체와 같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했고 프런트에 요청해 FA 선수의 조사도 실시하였습니다.
요미우리의 슈퍼스타였던 오 사다하루를 퍼시픽리그 구단으로 데려오는 것은 - 세이부 라이온스가 요미우리의 히로오카 타츠로나 모리 마사아키를 데려온 전례도 있었지만 - 지명도나 존재감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는 만큼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네모토는 야구계의 행사에서 오 사다하루를 만날때 마다 초대를 했고, 1994년 1월에는 네모토, 세토야마, 오가 참석하는 3명의 회식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영입 요청을 하였다. 그 뒤로 세토야마가 매달 1회씩 오와 식사를 하면서 협상을 진행했고 결국 같은 해 7월에 차기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사실 오는 요미우리 감독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요미우리 감독직으로의 복귀를 꿈꾸며 요코하마(現 DeNA)의 감독 취임 요청도 거절하고 있었다.[12] 오 사다하루는 다음과 같이 그 당시의 심경을 말했다.네모토 씨는 다이에에 입성한 때부터 나는 기초를 만든다. 그래서 강아지(오 사다하루)를 부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 사다하루씨를 데리고 와서 감독으로 임명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J리그가 발족했는데 이대로 가면 야구는 축구에 진다. 반격을 위해서는 ON대결 밖에 없다. 즉, 나가시마 시게오와 오 사다하루가 이끄는 요미우리와 다이에의 일본시리즈가 일본프로야구계를 북돋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네요.
1994년 10월, 네모토의 감독 사임과 왕의 차기 감독 취임이 발표되었고 계약 기간은 5년이었다. 네모토는 "어떤 일이 있어도 5년을 맡긴다"라고 말하고 GM으로서의 업무에만 전념하기 시작했다. 세이부에서 FA의 구도 기미야스, 이시게 히로미치 영입, 고마자와 대학 진학이 내정되어 있던 대형 포수 조지마 겐지의 1순위 강행 지명 획득 등 야구팬들을 놀라게할만한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났다. 대학 진학 지망 선수를 프로가 "차단"했다고 말들이 있었지만, 네모토는 조지마가 100% 대학 진학 희망 의사는 없다는 정보를 사전에 획득하고 지명한 것이다.처음에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진지하게 얘기주는 것을 알고 네모토 씨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요청했을 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평생 자이언츠"의 생각을 끊고 심기일전을 도모한다면, 당시 도쿄 돔이 홈구장이었던 닛폰햄이나 재경 구단 말고, 그렇다면 반대로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퍼시픽리그 구단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리하여 다이에의 유니폼을 입는 것도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타이밍도 좋았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보강 및 전력 정비가 순조롭게 이어졌지만 오히려 1994년보다 한 계단 하락한 5위(1995년) - 최하위(1996년) - 공동4위(1997년) - 공동3위(1998년) 등 실적이 나오지 않자 주위에서는 감독 교체 목소리가 점차 커져갔다. 세이부 시절의 성과를 다이에에서도 낼 수 있다고 보고된 네모토에 대한 반발과 비판도 있었다. 세토야마에 따르면 나카우치 오너의 마음도 중간에 흔들리고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네모토는 그러나 5년 계약 완수를 강조했다. 오 사다하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99년 1월에는 전년도 12월에 있었던 스파이 의혹 사건[13] 을 계기로 구단 사장으로 자기를 옮긴다. 그러나 불과 3개월 뒤인 4월 30일 심근경색으로 급서한다. 그리고 그 해 팀은 일본시리즈 제패를 완수했다. 호크스는 그 이후 퍼시픽리그의 강호가 되어, 구단 소유기업이 소프트뱅크로 바뀐 후에도 일본시리즈 6회(2011, 2014, 2015, 2017, 2018, 2019) 제패를 달성했다. 오 사다하루가 감독직을 퇴임하고 구단 회장이 되면 아키야마와 구도가 감독직을 잇고 있다. 모두 네모토가 세이부에서 획득한 인재들이다.아마 다이에 본사의 관계자는 "감독을 바꿔!"라는 말이 굉장히 있었던 것 같지만 네모토 씨가 노력해 준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걸렸지만 잘 참아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네모토가 남긴 것은 또 하나가 있다. 바로 12구단 유일이라고 하는 미야자키 캠프이다. 고치에서 미야자키 캠프로 이동한 것은 2003년 가을이지만, 네모토는 1995년부터 이미 이 곳에 다니기 시작하여 미야자키 시장과 교섭을 거듭했다. 1군과 2군이 동시에 연습 할 수 있는 환경은 당시 일본프로야구에서 선진적이고, 그 환경이 호크스 선수층을 두껍게 해 온 것은 틀림 없다. 또한 미국 메이저리그 구단의 팜 조직을 여러 번 시찰하여 현재의 3군 제도를 구상했다.
4. 사망
1999년 1월 다이에 구단 사장으로 취임하였지만 그해 4월 30일 급성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
오 사다하루는 네모토의 사망에 다음과 같이 애석함을 드러냈다.
네모토가 세상을 떠난 이후 다이에는 덕아웃에 시즌 내내 네모토의 영정을 걸고 시합에 임했고, 그 결과 1999년 35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며 네모토의 무덤 앞에 우승 트로피를 놓고 참배할 수 있었다. 그 해 일본시리즈 우승의 주축 멤버들은 대부분 네모토가 영입한 선수들 이었다.아마 네모토가 없었으면 다이에 호크스에서 이미 끝났을 것이고,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연결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호크스 뿐만 아니라 야구계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정도로 의미가 있는 잊지 못할 분이고 아까운 분을 잃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네모토는 2001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5. 이야깃거리
- 어릴 적에 유아 세례를 받은 동방 정교회 신자이다. 그래서 그의 유골은 도쿄 칸다 소재의 니콜라이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 OB 베어스가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어린이 회원을 모집하게 된 것에 아이디어를 준 인물이다. OB의 초대 단장인 박용민이 합동통신 도쿄 특파원 시절 당시 세이부 관리부장 이던 네모토와 친분을 쌓게 되었는데, 네모토는 박용민에게 "어린이 야구팬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어린이 팬 한 명은 온 가족을 데리고 야구장에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조언했고 이를 마음 속에 새겨들은 박용민은 구단 운영을 맡게되자 바로 어린이 회원 유치를 지시하여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 은퇴한 선수들을 잘 챙겨 주기로 유명했다. 평생 야구만 하다가 그만두고 지도자나 스카우트 등으로 재취업하지 못하여 사회에서 방황하던 전직 선수들을 구단의 모기업이던 세이부 철도나 다이에 유통의 계열사 취직을 주선해 주었고, 이를 감사히 여긴 선수들이 은혜를 갚으려고 각 지방에서 이름은 없지만 소질은 있던 야구 선수들의 정보를 수집하여 네모토에게 제공하면서 서로 윈윈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 네모토는 위에도 얘기한 평소의 마음 씀씀이 덕분에 인맥이 굉장히 두터웠다. 네모토와 알고 지내는 사람이 5천명에서 1만명은 될 거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고, 일본의 야구 전문 기자 곤도 타다유키가 싱가포르에 강연하러 갔을 때 어떤 사람이 "나는 네모토 씨랑 아는 사이이다" 라고 하여 도대체 네모토의 인맥은 어디까지 인가라며 놀라워 했다고 한다.
- 세이부 시절부터 공개 석상 등 남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특수 잠수정이란 별명으로 통했고, 신중한 성격 탓인지 직설적인 화법보다는 요점 주변에서 돌려 말하는 추상적인 이야기만 해서 네모토는 전속 통역이 있다더라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6. GM으로서의 특징
- 팀 내 스카우터들에게 "자신의 판단으로 무엇이든 하고 움직일 것"을 가르쳤다. 이는 "다른 사람과 같이 있지말고 혼자서 행동해라. 절대로 군집하지마. 함께 (선수를) 보고 있으면, 아무래도 같은 견해로 되어 버린다. 어쨌든 혼자서 보고 자신의 판단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것이 스카우트다"라고 말했다.
- 또한 프로야구선수에서 막 전업한 스카우터들에게 아마추어 선수를 볼 때 "시선을 낮출 것"을 주문했다. 프로야구선수의 전문적인 기술력과 체력을 기준으로 아마추어 선수를 보면 아마추어 선수들의 플레이가 한결같이 미흡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 스카우터들이 행여나 (선수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하거나 실패하더라도 묵묵히 뒤에서 받쳐주었다.
- 일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선견지명'이 있었다. 끊임없이 앞을 보는 것을 실천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현역 선수, 감독, 스카우터, GM 등 직책이 계속 바뀌어도 앞을 보는 것만은 변하지 않았다. 팀이 우승을 하면 그 이상으로 팀 전력을 업그레이드시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승승장구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고 실제로 실천을 했기 때문에 세이부의 1980년대 황금기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