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마사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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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일본프로야구 선수이자 지도자. 현역 시절 소속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V9 당시 주전 포수로 팀을 받쳤고, 감독으로서는 세이부 라이온즈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본명은 모리 마사히코(森 昌彦) 였으나 1986년 '''마사아키'''(祇晶)로 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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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중학생 때부터 시작하여 원래 포지션은 내야수였다. 고교 시절 2학년에 포수로 전향했고 3학년 때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으나, 첫 경기에서 타구를 가랑이에 맞고 기절하여 경기 도중에 그라운드를 떠났다. 도쿄6대학에서의 플레이를 꿈꾸며 릿쿄대학 진학을 염두에 두었으나 집안 사정으로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계약금 50만엔에 요미우리에 입단하였다. 월급 3만 중 일부를 어머니께 계속 송금했으며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자세도 이 무렵에 양성되었을지도 모른다.
두 명의 동기생 포수와 함께 입단했으며 그 중 한 명인 가토는 주쿄고등학교[2] 를 그 해 여름 고시엔 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모리를 포함한 3명의 신인 포수는 경쟁을 벌였다.
입단 후 5년간 무명의 세월을 보냈다. 에이스 투수들은 경기가 없는 날 숙소로 찾아와 2군 포수를 앉혀놓고 투구 연습을 실시 했는데 에이스 투수 벳쇼 타케히코가 "너 받어!"하면 다리 밑으로 같이 이동해 벳쇼의 피칭을 받는 등 맹렬한 연습을 했다. 모리는 '프로라는 곳이 이런 곳'임을 이 때 깨달았다고 한다. 후지모토 히데오가 폭스바겐 차를 끌고 오는 모습에 눈부심을 느꼈으며 이것이 과연 거인의 대스타의 모습임을 알았다.
1군에는 은퇴를 앞둔 히로다와 호타, 준족, 강견의 후지오 시게루가 있었다. 입단 동기들, 1군 레귤러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수비력 향상만이 우선임을 알게된 후 투수리드, 볼배합, 블로킹, 캐칭, 도루저지 등을 가다듬는데 집중했다.
미즈하라 시게루,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의 신임을 받으며 후지오를 중견수로 밀어내고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했다. 빠른 두뇌회전, 늘 연구에 노력하는 자세, 상대 타자의 약점과 상대팀 배터리의 볼배합을 모조리 기억하는 암기력 등 우수한 기량을 갖춘 당대 최고의 포수로 명성을 날렸다. 또한 캐칭 기술도 좋아서 폭투 내지 패스트볼은 좀처럼 허용하지 않았고, 이러한 모습으로 그의 표면적인 성적에 비해 팀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막대하여 선수 시절에 이미 '''"V9의 두뇌"'''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또한 강견을 바탕으로 높은 도루 저지율을 자랑하며 도루를 시도하는 상대 팀 주자는 전부 죽는다(잡힌다)는 의미에서 '''"몰살의 모리"'''라는 별명도 있었다. 부상에도 강해 좀처럼 결장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카와카미 감독은 그를 안주시키지 않기 위해 계속 아마추어계에서 우수한 포수들을 영입하였고, 모리는 카와카미 감독의 그러한 행태에 대해 '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인가?' 라고 생각 했지만 영입된 새로운 경쟁 포수들에게 절대 뒤쳐지지 않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주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3]
일본 시리즈에서 상대할 퍼시픽리그의 전력을 분석하기 위해 난카이 호크스의 라이벌 포수 노무라 카츠야 집에 방문하기도 했다. [4]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한 날이면 모리는 축하연에 참석하지 않고 노무라가 어딨는지를 주위에 묻고, 노무라를 만나기 위해 귀경하고는 했다. 리그 우승의 순간 퍼시픽리그 우승팀의 정보 분석이 바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리의 성실한 자세를 높이 삼아 1967년 일본시리즈[5] 에서 모리가 MVP로 선정됐을 때 가와카미 감독은 누구보다도 기뻐했다고 한다.
모리는 투수의 컨디션이 나쁘면 즉시 감독과 코치에 보고했다. 투수가 안타나 실점을 허용했을 때 책임을 절대 자신의 탓으로 하지 않고 전적으로 투수에게 돌렸다. 모리가 주전 포수가 되고 나서 투수들이 벤치에 돌아오는 속도가 빨라졌다고 코치가 폭로한 적이 있는데, 모리가 저런 보고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와카미 감독은 그런 모리의 비정한 보고가 승부처에서 도움이 됐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동료 3루수 나가시마 시게오는 이런 모리의 모습을 맘에 들어하지 않았으며, 이는 모리가 마치 책임회피를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동갑인 모리와 나가시마는 현역 시절에 서로 격려의 말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을만큼 불화가 있었다. 이 때 같이 호흡을 맞춘 투수로 가네다 마사이치, 후지타 모토시등이 있다.
1963년은 그에게 참 힘든 시즌이었다. 132경기에서 마스크를 쓰면서 타율은 .198, 홈런은 단 4개를 기록했다.[6] 니시테츠 라이온즈와의 일본시리즈 3차전 도중, 고라쿠엔 구장의 백스톱에서 어느 팬이 파울타구를 그라운드로 돌려주려다가 가족과 함께 경기를 관람중이던 3세 소녀의 후두부를 직격하는 큰 사고가 발생했는데, 경기가 끝나고 이를 안 모리가 달려들어 필사적으로 간호한 바람이 있어 다행히 큰 일까지는 가지 않은 적이 있다. 일본시리즈 4차전에서는 니시테츠 타자의 파울타구에 맞아 팔뼈 염좌 진단을 받았으며, 일본시리즈 직전에 탄생한 장남이 감기로 생후 100일 남짓으로 생을 마감했다.[7] 모리는 낙담했지만 이러한 일들이 큰 영향을 주어 '나는 보리 같은 것. 밟혀도 밟혀도 일어나겠어'라는 말버릇대로 야구에 몰두해 주전 포수의 아성을 공고히 했다. 만년 8번타자였던 모리는 어느덧 ON포의 뒤를 잇는 5번 타자로 급부상하여 타선의 핵심이 됐다.
1966년에는 신인 투수 호리우치 츠네오의 개막 13연승을 어시스트했다. 이 때 호리우치 츠네오는 긴장을 푼답시고 백스톱에 공을 던지는 등 모리를 아연실색케 한 일화가 있다. 이 해에는 도쿄 6대학리그에서 타격 3관왕을 차지한 거물신인 오하시가 입단했고 다들 모리는 이제 끝이라고 여겼지만 모리는 그 이후에도 무려 8시즌을 더 주전으로 포수 마스크를 썼다.
타율은 높지 않았지만 결정적인 승부처에서 필요할 때 한방을 쳐 주는 클러치 능력이 뛰어났다. 같은 시기 1루수 오 사다하루, 3루수 나가시마 시게오와 함께 팀의 일본 시리즈 9연패에 기여했다. OH포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뛰어난 포수 능력으로 '''"그늘의 MVP"'''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8]센트럴 리그 - 일본 시리즈 10연패 달성에 실패한 1974년 시즌[9] 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나가시마 시게오도 모리와 같은 해에 은퇴했다.
V9 시절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해 평하기를, 당시의 거인은 전문가들이 모인 집단이었으며 파벌이나 그룹 같은 건 없었다고 한다. 선수의 자존심도 높아 평소에는 선수 각자 자신의 포지션에서는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는 강한 신념을 가졌지만 게임에 들어가면 똘똘 뭉쳤다. 이렇게 팀을 유지하는 고삐를 쥔 것은 가와카미 감독이었으며, 모리가 현역 시절에는 말도 못 붙일만큼 어려웠지만 감독과 포수 관계로 변화하고 나서는 태연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선수 모두 부상에 강했으며, 오 사다하루나 나가시마 시게오조차 부상을 당해도 표를 내지 않았다. 모리는 본인이 골절, 탈구 등의 부상을 입어 공 1개를 받을때마다 머리까지 아픔이 전해져 왔지만 시즌 종료까지 마스크를 쓰고 계속 플레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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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이던 1972년 부터 요미우리의 배터리 코치를 겸임했다. 은퇴 후, TV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요미우리 팀 선배 히로오카 타츠로가 감독을 맡은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1978년과 1979년에 팀의 배터리 코치로 활동하면서 1978년 스왈로즈의 사상 첫 센트럴리그 우승,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한다. 이후 1979년 히로오카가 최하위로 떨어진 팀 성적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자 자신도 코치직에서 물러나 잠시 TV 해설위원으로 돌아갔다가, 1982년부터 1984년에는 다시 히로오카 감독이 이끄는 세이부 라이온즈의 수석 겸 배터리 코치를 3년간 역임했다. 엄격한 관리와 통제로 대표되는 히로오카 감독의 '''관리야구''' 코칭 스타일에 따라 선수들의 경기장 밖에서의 사생활까지 관리하여 '모리 KGB', '모리 CIA'라는 원성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모리도 그 당시 히로오카의 이러한 방침을 선호하지 않았으며[10] 후에 히로오카와의 갈등을 빚으며 세이부의 코치직을 내려 놓았다. 다시 야인으로 지내던 중 1986년, 히로오카가 떠난 세이부 라이온즈의 감독직을 맡았고 이때 현재의 이름으로 개명했다.
감독 재임 기간 동안 '''퍼시픽리그 우승 8회'''(1986년 ~ 1988년, 1990년 ~ 1994년[11] )와 '''일본시리즈 우승 6회'''(1986년 ~ 1988년, 1990년 ~ 1992년)의 대업을 달성했다. 이 당시의 세이부는 네모토 리쿠오 단장의 총 지휘 하에 우수 선수를 많이 영입했다. 쿠도 키미야스-와타나베 히사노부-궈타이위엔(일본명 가쿠 타이겐), 황금기 말기에 합류한 신진 에이스 이시이 타케히로 등이 포진한 강력한 선발진에, 카토리 요시타카와 시오자키 테츠야 등이 버틴 불펜투수들이 돋보였다. 야수에도 내야의 사령탑이었던 유격수 이시게 히로미치를 리더로, 안정된 수비가 돋보였던 2루수 츠지 하츠히코, 이시게가 부상으로 인해 3루수로 전향하며 유격수를 맡은 타나베 노리오, 고교 졸업 후 첫 시즌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긴 기요하라 가즈히로, 호타준족의 대명사 아키야마 코지, 거포 스위치 히터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 모리의 후계자이자 명포수 이토 쓰토무 등이 맹활약하던 그야말로 황금기였다.
그러나 1994년 일본시리즈에서는 현역 시절 친정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6차전을 앞두고 요미우리 구단의 모기업인 요미우리 신문에서 ‘세이부·모리 감독 사임’ 이라는 제목의 보도를 내 상처를 입기도 했다. 게다가 이 소식은 도쿄돔 전광판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리고 결국 이 해 일본시리즈는 요미우리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감독에서 물러난 뒤 여러 군데에서 야구 해설 위원으로 지냈으며 요미우리 구단 프런트에서 나가시마의 후임 감독으로 고려되었지만 세이부에서 코치-감독을 역임한 것이 문제가 되어 거인 감독직은 꿈으로 끝났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문서 중 감독순혈주의 항목 참조.[12]
2001년에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곤도 히로시 감독 시절의 자율야구와는 다른 빡빡한 관리야구 스타일이 팀에 먹히지 않았고, 2002년 시즌에 결국 팀이 꼴찌로 추락하면서 시즌 종료를 앞두고 사임했다. #
현재는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으며, 2005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5년 KIA 타이거즈의 하와이 스프링캠프에 방문한 적이 있다. #
2016년, 제자 기요하라가 마약 복용 혐의로 피소됐을 때 현역 시절 선수 지도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라이벌 노무라 카츠야에게 비판받았다. #
2018년 7월 20일 메트라이프 돔에서 열린 세이부 홈경기에 '''레전드 OB'''로 등장하여 시구를 맡았고, 경기 종료 후 토크쇼를 가졌다. 학생 팬이 모리 마사아키 감독의 책을 읽어왔다고 하자 흐뭇해하기도... # 토크쇼 직캠
수상 경력으로 선수 시절에는 베스트나인 8번(1961-1968)을 차지했고, 올스타전은 11회 출장했다. 1967년 일본시리즈 MVP였다. 감독 시절에는 1986년과 1990년에 일본프로야구 최고 권위의 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했다.
자산 관리를 철저히 한 덕분에 현역 시절에는 화려한 프로야구 선수에 걸맞지 않은 “구두쇠 모리”, “기후의 저금통”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무역상이었던 부친이 진 고액의 부채를 갚기 위해 대학 진학 대신 프로 입단을 선택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현역 시절에는 "우리는 개인 사업주.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를 늘 말버릇으로 하고 있었다. 그의 짠돌이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로 고라쿠엔 구장에서 시합이 끝나면 자택에 있는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넣어라」라고 말 한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 말의 뜻은 「밥솥의 스위치를 넣어라」라는 의미로, 모리가 집에 도착할 무렵 밥이 지어져 전기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철저한 절약의 결실로 지금도 고급 저택에 거주할 정도로 부유한 삶을 살고 있다.
원래는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지만 세이부 감독 2년차 부터 안경을 착용하면서 감독으로서의 풍모가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선수, 코치, 감독으로써 일본시리즈 20연승(!!)'''이란 대기록까지 보유한 사람인데, 선수로썬 요미우리 시절의 1961, 1963, 1965~1973년까지 패배 없이 11번 연속으로, 코치로썬 야쿠르트 시절의 1978년과 세이부 시절의 1982~1983년까지 패배 없이 3번 연속으로, 세이부 감독으로써 1986~1988년, 1990년~1992년까지 패배 없이 6번 연속으로 총 20회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어찌보면 대단한 기록. 그러나 결국 1993년, 전해 모리의 일본시리즈 20연승의 희생양이 된 선수 시절의 라이벌 노무라 카츠야가 이끄는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역으로 우승을 허용하여 연승기록이 끊겼다.
1. 소개
전직 일본프로야구 선수이자 지도자. 현역 시절 소속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V9 당시 주전 포수로 팀을 받쳤고, 감독으로서는 세이부 라이온즈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본명은 모리 마사히코(森 昌彦) 였으나 1986년 '''마사아키'''(祇晶)로 개명했다.
2.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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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중학생 때부터 시작하여 원래 포지션은 내야수였다. 고교 시절 2학년에 포수로 전향했고 3학년 때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으나, 첫 경기에서 타구를 가랑이에 맞고 기절하여 경기 도중에 그라운드를 떠났다. 도쿄6대학에서의 플레이를 꿈꾸며 릿쿄대학 진학을 염두에 두었으나 집안 사정으로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계약금 50만엔에 요미우리에 입단하였다. 월급 3만 중 일부를 어머니께 계속 송금했으며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자세도 이 무렵에 양성되었을지도 모른다.
두 명의 동기생 포수와 함께 입단했으며 그 중 한 명인 가토는 주쿄고등학교[2] 를 그 해 여름 고시엔 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모리를 포함한 3명의 신인 포수는 경쟁을 벌였다.
입단 후 5년간 무명의 세월을 보냈다. 에이스 투수들은 경기가 없는 날 숙소로 찾아와 2군 포수를 앉혀놓고 투구 연습을 실시 했는데 에이스 투수 벳쇼 타케히코가 "너 받어!"하면 다리 밑으로 같이 이동해 벳쇼의 피칭을 받는 등 맹렬한 연습을 했다. 모리는 '프로라는 곳이 이런 곳'임을 이 때 깨달았다고 한다. 후지모토 히데오가 폭스바겐 차를 끌고 오는 모습에 눈부심을 느꼈으며 이것이 과연 거인의 대스타의 모습임을 알았다.
1군에는 은퇴를 앞둔 히로다와 호타, 준족, 강견의 후지오 시게루가 있었다. 입단 동기들, 1군 레귤러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수비력 향상만이 우선임을 알게된 후 투수리드, 볼배합, 블로킹, 캐칭, 도루저지 등을 가다듬는데 집중했다.
미즈하라 시게루,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의 신임을 받으며 후지오를 중견수로 밀어내고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했다. 빠른 두뇌회전, 늘 연구에 노력하는 자세, 상대 타자의 약점과 상대팀 배터리의 볼배합을 모조리 기억하는 암기력 등 우수한 기량을 갖춘 당대 최고의 포수로 명성을 날렸다. 또한 캐칭 기술도 좋아서 폭투 내지 패스트볼은 좀처럼 허용하지 않았고, 이러한 모습으로 그의 표면적인 성적에 비해 팀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막대하여 선수 시절에 이미 '''"V9의 두뇌"'''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또한 강견을 바탕으로 높은 도루 저지율을 자랑하며 도루를 시도하는 상대 팀 주자는 전부 죽는다(잡힌다)는 의미에서 '''"몰살의 모리"'''라는 별명도 있었다. 부상에도 강해 좀처럼 결장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카와카미 감독은 그를 안주시키지 않기 위해 계속 아마추어계에서 우수한 포수들을 영입하였고, 모리는 카와카미 감독의 그러한 행태에 대해 '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인가?' 라고 생각 했지만 영입된 새로운 경쟁 포수들에게 절대 뒤쳐지지 않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주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3]
일본 시리즈에서 상대할 퍼시픽리그의 전력을 분석하기 위해 난카이 호크스의 라이벌 포수 노무라 카츠야 집에 방문하기도 했다. [4]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한 날이면 모리는 축하연에 참석하지 않고 노무라가 어딨는지를 주위에 묻고, 노무라를 만나기 위해 귀경하고는 했다. 리그 우승의 순간 퍼시픽리그 우승팀의 정보 분석이 바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리의 성실한 자세를 높이 삼아 1967년 일본시리즈[5] 에서 모리가 MVP로 선정됐을 때 가와카미 감독은 누구보다도 기뻐했다고 한다.
모리는 투수의 컨디션이 나쁘면 즉시 감독과 코치에 보고했다. 투수가 안타나 실점을 허용했을 때 책임을 절대 자신의 탓으로 하지 않고 전적으로 투수에게 돌렸다. 모리가 주전 포수가 되고 나서 투수들이 벤치에 돌아오는 속도가 빨라졌다고 코치가 폭로한 적이 있는데, 모리가 저런 보고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와카미 감독은 그런 모리의 비정한 보고가 승부처에서 도움이 됐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동료 3루수 나가시마 시게오는 이런 모리의 모습을 맘에 들어하지 않았으며, 이는 모리가 마치 책임회피를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동갑인 모리와 나가시마는 현역 시절에 서로 격려의 말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을만큼 불화가 있었다. 이 때 같이 호흡을 맞춘 투수로 가네다 마사이치, 후지타 모토시등이 있다.
1963년은 그에게 참 힘든 시즌이었다. 132경기에서 마스크를 쓰면서 타율은 .198, 홈런은 단 4개를 기록했다.[6] 니시테츠 라이온즈와의 일본시리즈 3차전 도중, 고라쿠엔 구장의 백스톱에서 어느 팬이 파울타구를 그라운드로 돌려주려다가 가족과 함께 경기를 관람중이던 3세 소녀의 후두부를 직격하는 큰 사고가 발생했는데, 경기가 끝나고 이를 안 모리가 달려들어 필사적으로 간호한 바람이 있어 다행히 큰 일까지는 가지 않은 적이 있다. 일본시리즈 4차전에서는 니시테츠 타자의 파울타구에 맞아 팔뼈 염좌 진단을 받았으며, 일본시리즈 직전에 탄생한 장남이 감기로 생후 100일 남짓으로 생을 마감했다.[7] 모리는 낙담했지만 이러한 일들이 큰 영향을 주어 '나는 보리 같은 것. 밟혀도 밟혀도 일어나겠어'라는 말버릇대로 야구에 몰두해 주전 포수의 아성을 공고히 했다. 만년 8번타자였던 모리는 어느덧 ON포의 뒤를 잇는 5번 타자로 급부상하여 타선의 핵심이 됐다.
1966년에는 신인 투수 호리우치 츠네오의 개막 13연승을 어시스트했다. 이 때 호리우치 츠네오는 긴장을 푼답시고 백스톱에 공을 던지는 등 모리를 아연실색케 한 일화가 있다. 이 해에는 도쿄 6대학리그에서 타격 3관왕을 차지한 거물신인 오하시가 입단했고 다들 모리는 이제 끝이라고 여겼지만 모리는 그 이후에도 무려 8시즌을 더 주전으로 포수 마스크를 썼다.
타율은 높지 않았지만 결정적인 승부처에서 필요할 때 한방을 쳐 주는 클러치 능력이 뛰어났다. 같은 시기 1루수 오 사다하루, 3루수 나가시마 시게오와 함께 팀의 일본 시리즈 9연패에 기여했다. OH포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뛰어난 포수 능력으로 '''"그늘의 MVP"'''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8]센트럴 리그 - 일본 시리즈 10연패 달성에 실패한 1974년 시즌[9] 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나가시마 시게오도 모리와 같은 해에 은퇴했다.
V9 시절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해 평하기를, 당시의 거인은 전문가들이 모인 집단이었으며 파벌이나 그룹 같은 건 없었다고 한다. 선수의 자존심도 높아 평소에는 선수 각자 자신의 포지션에서는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는 강한 신념을 가졌지만 게임에 들어가면 똘똘 뭉쳤다. 이렇게 팀을 유지하는 고삐를 쥔 것은 가와카미 감독이었으며, 모리가 현역 시절에는 말도 못 붙일만큼 어려웠지만 감독과 포수 관계로 변화하고 나서는 태연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선수 모두 부상에 강했으며, 오 사다하루나 나가시마 시게오조차 부상을 당해도 표를 내지 않았다. 모리는 본인이 골절, 탈구 등의 부상을 입어 공 1개를 받을때마다 머리까지 아픔이 전해져 왔지만 시즌 종료까지 마스크를 쓰고 계속 플레이 했다.
3. 지도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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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이던 1972년 부터 요미우리의 배터리 코치를 겸임했다. 은퇴 후, TV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요미우리 팀 선배 히로오카 타츠로가 감독을 맡은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1978년과 1979년에 팀의 배터리 코치로 활동하면서 1978년 스왈로즈의 사상 첫 센트럴리그 우승,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한다. 이후 1979년 히로오카가 최하위로 떨어진 팀 성적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자 자신도 코치직에서 물러나 잠시 TV 해설위원으로 돌아갔다가, 1982년부터 1984년에는 다시 히로오카 감독이 이끄는 세이부 라이온즈의 수석 겸 배터리 코치를 3년간 역임했다. 엄격한 관리와 통제로 대표되는 히로오카 감독의 '''관리야구''' 코칭 스타일에 따라 선수들의 경기장 밖에서의 사생활까지 관리하여 '모리 KGB', '모리 CIA'라는 원성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모리도 그 당시 히로오카의 이러한 방침을 선호하지 않았으며[10] 후에 히로오카와의 갈등을 빚으며 세이부의 코치직을 내려 놓았다. 다시 야인으로 지내던 중 1986년, 히로오카가 떠난 세이부 라이온즈의 감독직을 맡았고 이때 현재의 이름으로 개명했다.
감독 재임 기간 동안 '''퍼시픽리그 우승 8회'''(1986년 ~ 1988년, 1990년 ~ 1994년[11] )와 '''일본시리즈 우승 6회'''(1986년 ~ 1988년, 1990년 ~ 1992년)의 대업을 달성했다. 이 당시의 세이부는 네모토 리쿠오 단장의 총 지휘 하에 우수 선수를 많이 영입했다. 쿠도 키미야스-와타나베 히사노부-궈타이위엔(일본명 가쿠 타이겐), 황금기 말기에 합류한 신진 에이스 이시이 타케히로 등이 포진한 강력한 선발진에, 카토리 요시타카와 시오자키 테츠야 등이 버틴 불펜투수들이 돋보였다. 야수에도 내야의 사령탑이었던 유격수 이시게 히로미치를 리더로, 안정된 수비가 돋보였던 2루수 츠지 하츠히코, 이시게가 부상으로 인해 3루수로 전향하며 유격수를 맡은 타나베 노리오, 고교 졸업 후 첫 시즌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긴 기요하라 가즈히로, 호타준족의 대명사 아키야마 코지, 거포 스위치 히터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 모리의 후계자이자 명포수 이토 쓰토무 등이 맹활약하던 그야말로 황금기였다.
그러나 1994년 일본시리즈에서는 현역 시절 친정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6차전을 앞두고 요미우리 구단의 모기업인 요미우리 신문에서 ‘세이부·모리 감독 사임’ 이라는 제목의 보도를 내 상처를 입기도 했다. 게다가 이 소식은 도쿄돔 전광판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리고 결국 이 해 일본시리즈는 요미우리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감독에서 물러난 뒤 여러 군데에서 야구 해설 위원으로 지냈으며 요미우리 구단 프런트에서 나가시마의 후임 감독으로 고려되었지만 세이부에서 코치-감독을 역임한 것이 문제가 되어 거인 감독직은 꿈으로 끝났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문서 중 감독순혈주의 항목 참조.[12]
2001년에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곤도 히로시 감독 시절의 자율야구와는 다른 빡빡한 관리야구 스타일이 팀에 먹히지 않았고, 2002년 시즌에 결국 팀이 꼴찌로 추락하면서 시즌 종료를 앞두고 사임했다. #
현재는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으며, 2005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5년 KIA 타이거즈의 하와이 스프링캠프에 방문한 적이 있다. #
2016년, 제자 기요하라가 마약 복용 혐의로 피소됐을 때 현역 시절 선수 지도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라이벌 노무라 카츠야에게 비판받았다. #
2018년 7월 20일 메트라이프 돔에서 열린 세이부 홈경기에 '''레전드 OB'''로 등장하여 시구를 맡았고, 경기 종료 후 토크쇼를 가졌다. 학생 팬이 모리 마사아키 감독의 책을 읽어왔다고 하자 흐뭇해하기도... # 토크쇼 직캠
4. 기타
수상 경력으로 선수 시절에는 베스트나인 8번(1961-1968)을 차지했고, 올스타전은 11회 출장했다. 1967년 일본시리즈 MVP였다. 감독 시절에는 1986년과 1990년에 일본프로야구 최고 권위의 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했다.
자산 관리를 철저히 한 덕분에 현역 시절에는 화려한 프로야구 선수에 걸맞지 않은 “구두쇠 모리”, “기후의 저금통”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무역상이었던 부친이 진 고액의 부채를 갚기 위해 대학 진학 대신 프로 입단을 선택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현역 시절에는 "우리는 개인 사업주.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를 늘 말버릇으로 하고 있었다. 그의 짠돌이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로 고라쿠엔 구장에서 시합이 끝나면 자택에 있는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넣어라」라고 말 한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 말의 뜻은 「밥솥의 스위치를 넣어라」라는 의미로, 모리가 집에 도착할 무렵 밥이 지어져 전기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철저한 절약의 결실로 지금도 고급 저택에 거주할 정도로 부유한 삶을 살고 있다.
원래는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지만 세이부 감독 2년차 부터 안경을 착용하면서 감독으로서의 풍모가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선수, 코치, 감독으로써 일본시리즈 20연승(!!)'''이란 대기록까지 보유한 사람인데, 선수로썬 요미우리 시절의 1961, 1963, 1965~1973년까지 패배 없이 11번 연속으로, 코치로썬 야쿠르트 시절의 1978년과 세이부 시절의 1982~1983년까지 패배 없이 3번 연속으로, 세이부 감독으로써 1986~1988년, 1990년~1992년까지 패배 없이 6번 연속으로 총 20회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어찌보면 대단한 기록. 그러나 결국 1993년, 전해 모리의 일본시리즈 20연승의 희생양이 된 선수 시절의 라이벌 노무라 카츠야가 이끄는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역으로 우승을 허용하여 연승기록이 끊겼다.
야구해설자 김정준이 자주 언급하는 지도자이기도 하다.[13] 트위터의 모리 마사아키 봇 게시물을 가끔 RT하기도 하고.“포수는 경기 도중 전방 90도를 주시한다. 양 옆 벤치의 감독은 물론 뒤에 서 있는 주심의 성격까지 신경써야 한다. 360도를 두루 살펴야 하는 것이다. 이 넓은 시야는 감독이 된 후에도 계속 살아있다.”
[1] 출생지는 오사카이다.[2] 아이치현의 야구명문교로 고시엔에 많이 출전하고 있으며 프로야구선수들을 꾸준히 배출하고 있다.[3] <불패의 감독학>이라는 책에서는 모리 때문에 날린 요미우리가 영입한 포수들 계약금과 연봉이 못해도 10억엔은 넘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모리에게 밀린 포수는 24명, 그들의 계약금을 합하면 5억엔이라고 한다.[4] 이 때의 에피소드로 노무라의 집에 다녀올 때마다 노무라의 옷을 꼭 한 두 벌씩 들고 왔다고 한다. 이 둘은 1992, 1993년 세이부와 야쿠르트의 감독으로서 일본시리즈에서 대결한다. 전적은 1승1패로 동률.(세이부는 '92년, 야쿠르트는 '93년 우승)[5]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이 이끄는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매치업이었으며 4승 2패로 교진이 승리하면서 3연패를 달성했다.[6] 1963년 정규시즌에서 나가시마는 타율(.341), 타점(112), 최다안타(163) 등 3개 부문 1위였으며, 오 사다하루는 홈런(40), 득점(111) 등 2개 부문 1위였다. 같은 해 퍼시픽리그에서는 노무라 카츠야가 52홈런, 135타점, 104득점을 기록하여 이 부문 1위에 올랐다.[7] 팀은 1963년 일본시리즈에서 니시테츠 라이온즈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7차전은 요미우리의 18-4 대승.[8] V9 시절 모든 일본시리즈를 출장한 선수는 오 사다하루와 모리 마사아키 둘 뿐이다.[9] 이 해 요나미네 카나메가 감독으로 있던 주니치 드래곤즈에게 센트럴 리그 우승을 허용하며 요미우리는 일본 시리즈 진출 자체에 실패했다.[10] 세이부에서 선수 생활 말년을 보낸 에나츠 유타카의 회고에 따르면 어느 날 밤 원정 숙소에서 점호를 마친 뒤 모리가 자신의 방을 찾아와서는 한숨을 쉬며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것은 아닐세. 다 감독 방침이니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일 뿐"'''이라고 그가 안고 있던 맘고생을 털어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세이부 감독에 취임한 뒤 선수단에 외박이라던가 육식 등 히로오카 시절 금지되었던 행동을 허용하고, 경기력이 저하되지 않는 선에서 선수들의 개인적 취미 활동도 허락하는 등 자신의 소신대로 선수단을 통솔했다. 결국 모리는 일본 시리즈 3연패와 퍼시픽 리그 5연패라는 넘사벽급 성적을 거두며 자신을 비판하는 여론을 잠재우는데 성공했다. [11] 1989년은 긴테츠 버팔로즈가 우승. [12] 타 팀의 코칭 스태프를 역임한 뒤 요미우리 감독에 취임한 케이스는 1975년~1976년 시즌 다이요 훼일즈 투수코치를 역임한 후지타 모토시가 유일하다(...)[13] 그러나 지도자로서의 능력으로 보면 김정준은 지나친 포수리드 중시론으로 비판받으며 전력분석 담당 시절과 다르게 한화 이글스 시절 지도자경력에 큰 오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