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
中山
춘추시대 때 세워진 이민족인 백적(白狄)족의 일파인 선우부(鮮虞部)가 세운 국가. 수도는 고(顧)였으나 전국시대에 이르러 영수(靈壽)로 옮겼다. 특이하게도 오(吳)처럼 군주의 성씨가 주나라의 왕성인 희성(姬姓)이어서 군주가 한족이고, 백성들은 토착민이자, 이민족인 백적으로 구성된 국가로 추정된다. 그런데 중산과 관련이 있는 걸로 보이는 중국 선우(성씨)씨의 기록으로는 상나라 기자의 후예인 자성(子姓)라고 되어 있으며 실제로 허베이성 스자좡시에서 발굴된 중산의 유적에서 상나라 계통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춘추시대에는 뚜렷한 활동이 전해지지 않지만, 전국시대 때 그 행적이 드러나게 되는데, 각각 위(魏)나라와 조(趙)나라의 공격으로 기원전 296년에 멸망한다.
중산이 망한 후, 중산 왕족들은 중국을 통일한 진(秦)나라에 의해서 현 산시성(산서성) 태원(太原)으로 이주되었고, 진나라가 망하자 현 호남(湖南), 호북(湖北), 강서(江西)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성을 역(易)씨로 바꾼다.
중산의 궁전 유적이 발굴되어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을 때, 이민족 국가이어서 그런지 낮은 기술력으로 커다란 건물을 짓기 위해서 흙산을 쌓고, 그 위에 전각을 만드는 공법을 썼다는 것이 밝혀졌다.
추잔(中山, 중산)이라는 이름은 꽤 오래 전부터 써왔던 걸로 보이며, 삼산시대에는 오키나와를 구성하던 세 왕국 가운데 하나를 가리켰다. 중산왕 쇼하시에 의해 1429년 통일 류큐 왕국이 건국되고 나서도 중산이라는 이름은 별칭처럼 계속 사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유구국 중산왕'이라는 이름이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광둥성 주강 삼각주 서안에 위치한 도시로 광저우시와 포산의 남쪽, 주하이의 북쪽에 인접해 있다. 면적은 1,784㎢, 인구는 2017년 기준 326만명[7] 이다. 원래 이름은 샹산(香山)[8] 이나, 쑨원의 출신지로서 쑨원이 사망한 후 1925년에 그 기념으로 개명한 것이다. 쑨원은 공산당에 있어서도 국부 대접을 받기 때문에 국민당 축출 후에도 중산이라는 이름은 남았다.
1.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존재했던 국가
1.1. 개요
춘추시대 때 세워진 이민족인 백적(白狄)족의 일파인 선우부(鮮虞部)가 세운 국가. 수도는 고(顧)였으나 전국시대에 이르러 영수(靈壽)로 옮겼다. 특이하게도 오(吳)처럼 군주의 성씨가 주나라의 왕성인 희성(姬姓)이어서 군주가 한족이고, 백성들은 토착민이자, 이민족인 백적으로 구성된 국가로 추정된다. 그런데 중산과 관련이 있는 걸로 보이는 중국 선우(성씨)씨의 기록으로는 상나라 기자의 후예인 자성(子姓)라고 되어 있으며 실제로 허베이성 스자좡시에서 발굴된 중산의 유적에서 상나라 계통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춘추시대에는 뚜렷한 활동이 전해지지 않지만, 전국시대 때 그 행적이 드러나게 되는데, 각각 위(魏)나라와 조(趙)나라의 공격으로 기원전 296년에 멸망한다.
중산이 망한 후, 중산 왕족들은 중국을 통일한 진(秦)나라에 의해서 현 산시성(산서성) 태원(太原)으로 이주되었고, 진나라가 망하자 현 호남(湖南), 호북(湖北), 강서(江西)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성을 역(易)씨로 바꾼다.
중산의 궁전 유적이 발굴되어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을 때, 이민족 국가이어서 그런지 낮은 기술력으로 커다란 건물을 짓기 위해서 흙산을 쌓고, 그 위에 전각을 만드는 공법을 썼다는 것이 밝혀졌다.
1.2. 역대 군주
2. 류큐 왕국의 이전 국호
추잔(中山, 중산)이라는 이름은 꽤 오래 전부터 써왔던 걸로 보이며, 삼산시대에는 오키나와를 구성하던 세 왕국 가운데 하나를 가리켰다. 중산왕 쇼하시에 의해 1429년 통일 류큐 왕국이 건국되고 나서도 중산이라는 이름은 별칭처럼 계속 사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유구국 중산왕'이라는 이름이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3. 쑨원의 호(號)이자 일본식 성씨
- 쑨원 문서 참조.
4. 융펑급 해방함 1번함 융펑의 개명된 이름
- 중산(해방함) 문서 참조.
5. 중국 광둥성의 도시
광둥성 주강 삼각주 서안에 위치한 도시로 광저우시와 포산의 남쪽, 주하이의 북쪽에 인접해 있다. 면적은 1,784㎢, 인구는 2017년 기준 326만명[7] 이다. 원래 이름은 샹산(香山)[8] 이나, 쑨원의 출신지로서 쑨원이 사망한 후 1925년에 그 기념으로 개명한 것이다. 쑨원은 공산당에 있어서도 국부 대접을 받기 때문에 국민당 축출 후에도 중산이라는 이름은 남았다.
[1] 중산 환공의 1차 즉위. 위나라 장수 악양(樂羊)에게 멸망.[2] 중산 환공의 2차 즉위. 중산국 복국.[3] 한자가 아주 괴랄하다. 興(일 흥)의 윗부분과 중간에 冖(덮을 멱), 밑부분에는 昔(옛 석) 자로 구성된 한자이다. 직접확인하고 싶으면 중국 위키백과에서 찾아보길 바란다.[4] 기원전 325년에 칭왕(稱王).[5] 아버지 중산왕 착 처럼 아들인 자신도 한자가 아주 괴랄하다. 절이라는 글자는 妾+子 이고, 차라는 글자는 위아래로 해서 次+虫 자이다. 직접확인하고 싶으면 중국 위키백과에서 찾아보길 바란다.[6] 이 왕의 대에 중산국의 거의 유일하게 잘 알려진 에피소드인 사마자기의 양고기 국 사건이 일어나 나라가 망한다. 다음 왕 상은 조나라가 병합하기 전 잠시 세운 허수아비에 불과하다.[7] 중국의 성 직할도시 치고는 적어 보일 수 있는데, 이는 주강 삼각주 일대 도시들이 타지역만큼 크게 통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동안의 선전시나 둥관이 비슷한 면적에 인구가 1천만명을 넘는 것에 비하면 덜 개발된 것은 분명하다.[8] 광둥어로는 Heung S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