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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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錫昶
1900 ~ 1972
1. 개요
2. 생애


1. 개요


독립운동가, 민중병원을 설립한 의사, 건국대학교를 설립한 교육자. 호는 상허(常虛).

2. 생애


1900년 2월 17일 함경남도 단천군 이중면 돌산리에서 유승균과 홍숙경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중농으로 비교적 윤택한 집안이었고 아버지 유승균은 한의사, 개화 지식인, 기독교 신자였으며 독립을 위해 헌신한 우국지사였다.
1912년 유승균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 장백현으로 이주하자 유석창은 그곳에서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던 관화학교(官話學校)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도와 독립운동 전선에서 활동하였다.
오랜 망명생활 끝에 직접적 항일무장투쟁보다 지속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의 전환을 도모, 1919년 고향에 돌아와 경신학교에 편입하여 졸업 후, 1928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가 한의사였던 것과 만주 망명시절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고통받던 동포들을 목도한 경험이 경성의전에 진학하는 동기가 되었다.
경성의전 재학중 '기독교 동우회'에서 활동하였는데, 민중병원 설립 시절부터 유석창의 후견인이자 동지 역할을 하는 이대위오화영, 그리고 첫 번째 부인인 한동죽을 그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1928년 경성의전 졸업 후 함경남도 장진에 공의(公醫)로 부임하였으나 부인 한동죽이 폐결핵에 걸리는 바람에, 아내의 병 치료를 위해 1929년 함경북도 성진의 제동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죽은 1929년 11월 2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30년 상경, 구료사업을 일으키겠다는 결심으로 실비병원 건립을 위해 노력한 끝에 1931년 사회영(社會營)[1] 중앙실비진료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개원 1년 후 화재로 진료원이 몽땅 타버리는 사고를 겪었으나, 새 병원건물을 마련하였고 1933년 '사회영 중앙진료원', 1934년 '사회영 민중의원'으로 개칭, 1949년에는 '사단법인 민중병원'으로 거듭났으며 훗날 건국대학교병원으로 이어진다.
실비병원이 궤도에 오르자 의료계의 새 지식과 동정을 알리는 간행물인 '보건시보'를 1932년 창간하여 발간하였으나 재정난으로 1937년 폐간하였다.
1937년 경성의전 시절의 은사였던 쓰자키가 교수로 재직 중인 경성제국대학에 연구생으로 입학하여 박사 과정을 밟게 되었다. 연구 주제는 췌장의 랑게르한스섬에 관한 것이었는데 민중의원 경영과 전쟁이라는 사회적 상황 때문에 연구의 진척은 순조롭지 못했다. 1945년 8월 말에서야 의학박사 학위[2]를 받았다. 사실 일제 패망으로 본국으로 귀향하는 일본인 교수들이 떠나는 마당에 고생한 제자들에게 박사학위를 남발한 소위 '해방 박사'에 해당되는데 유석창 본인도 뒷날 '자신의 논문은 미완성품이며, 쓰자키(津崎) 교수가 베풀어준 선물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해방 후 1945년 10월 낙원동에 건국의숙을 설립하였고, 건국의숙이 조선정치학관, 정치대학을 거쳐 1959년 종합대학건국대학교로 승격함에 따라 건국대학교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1] 영리업체가 아니라 사회에 봉사하기 위한 공영기관임을 강조한 명칭[2] 논문 제목은 '췌장 랑게르한스씨 섬에 관한 발생학적 지견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