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의학전문학교

 

1. 일제강점기의 의학교
1.1. 역사
1.2. 위상
1.3. 동문
2. 북한의 학교


1. 일제강점기의 의학교


京城醫學專門學校 (경성의학전문학교, 줄여서 경성의전)
1899년 대한제국에서 설립한 의학교가 1916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의학전문학교로 개설된 구제전문학교이다. 1928년에는 부속병원을 신축하였다.
해방 이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합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제2부속병원으로 있다가, 1963년 소격동 국군병원으로 분리되었다.

1.1. 역사


1899년 의학교로 출발하였다. 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 총독부로 이관되어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교가 되었다.
1916년 총독부에 의해 구제전문학교로 승격, '''경성의학전문학교'''가 되었다. 1920년대 초반, 조선교육령이 개정되면서 조선에도 대학 설립이 가능해지자, 경성의전을 대학으로 승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실제로 일본의 제국대학 설립 과정을 볼 때, 의학전문학교가 문과를 추가 설치하여 제국대학으로 발전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런데 경성제국대학제국대학 중 거의 유일한 사례로 매우 특이하게도 경성제대는 기존 관립전문학교들을 흡수하지 않고 존치한 상태에서 별도로 설립되었다.[1]
당초 총독부도 경성의전을 모체로 한 경성제대 설립을 구상했으나, 경성의전 재학생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여 기존의 경성의전을 그대로 두고, 새로 설립될 제국대학에 별도의 의학부를 설치하였다.[2] 그러나 경성의학전문학교는 명목상 존치되고 재학생들은 이어졌으되, 실상 학교의 중추인 교수진과 물적 자본은 경성제대 의학부에 빼앗기고 말았다. 사실 경성제국대학은 기존 경성의전의 실습병원이었던 조선총독부병원을 부속병원으로 흡수함은 물론이고 경성의전 교수진 상당수를 빼앗아 의학부를 만들고,[3] 그 건너편 자리인 동숭동 캠퍼스에 법문학부를 건설하여 법문학부와 의학부 2학부 체제로 창설된 것이었다. 즉, 경성의전의 입장에서는 교장부터 교수 상당수와 함께 자신들의 부속 병원까지 경성제대 의학부에 빼앗기고 소격동 종친부 터에 지은 신교사 겸 병원(해방 당시 경성의전 부속병원, 이후 서울대학교 제2부속병원을 거쳐 한국전쟁기 국방부에 징발되어 국군서울지구병원보안사령부로 사용됨)으로 쫓겨났던 것이다.[4]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는 해방 후 그 자체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되면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의학부보다 하위인 '전문부'로 흡수하였고, 당연하게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은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들에게 의해 장악되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는 그 학생들이 서울대 의대 전문부로 편입되어 경성제대 의학부와 같은 '의학사' 학위를 받지 못하고 일제시대와 동일한 의사 취급을 받았으며, 경성제대 부속병원이 서울대 의과대학 제1부속병원으로 메인병원으로 기능하는데에 반해, 경성의전 부속병원은 서울대 제2부속병원이 되며 찬밥 취급을 받아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일본 제국의 戰前 교육학제가 미국식 新학제로 개편되면서 고등교육기관이었던 구제대학 예과 또한 폐지되는데, 경성제대 예과는 문과(법문학부)/이과갑류(이공학부) 과정을 폐지하고 기존의 의학부 진학과정인 이과을류를 남겨 그대로 의예과로 계승하였다. 경성제대 의학부를 계승한 서울대 의대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예과로 사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청량리의 경성제대 예과를 의예과 캠퍼스로 승계하고, 의예과의 소속 또한 의과대학 대신 경성제국대학의 정통이라는 문리과대학에 귀속시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완전히 곁가지로 내쳐버렸다.
그래서 해방 후에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과정에서도 가장 강력히 저항한 학교이기도 하며, 우여곡절 끝에 통합이 됐어도 경성의전 출신 재학생을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 재학생과 달리 전문부[5]로 취급하는 것을 두고 경성의전 측이 강력히 반발하여 한동안 진통이 있었다.[6]

1.2. 위상


일제시대에도 의사 선호현상이 상당해서 경성의학전문학교는 경성법학전문학교 등의 관립 구제전문학교는 물론이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등의 사립 의학전문학교 보다도 압도적인 선호도를 보여,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의 최상위권 학생 대부분이 경성의전을 지망하는 해도 있었고, 일본 본토에서도 경성부는 물론 평양대구, 함흥광주 등에 있는 한반도의 관립 의학전문학교 진학 지망자가 많아, 지방의 의학전문학교 입학생의 절반 이상은 일본인이었다고 한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성의전은 경성제국대학 예과 이과에 절대 도전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명주완 박사[7]경성제국대학 개교를 기다리기 위해 경성의전 1학년에 가서 반수를 하였고, 전종휘 박사는 경성제국대학 예과 입시 낙방 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수석 졸업하였고 경성의전이 경성제대에 한참 못 미친다는 회고록을 남길 정도이다.

1.3. 동문




2. 북한의 학교


鏡城醫學專門學校
북한 함경북도 경성군에 있는 학교이다.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 유우성의 출신학교이기도 하다.

[1] 당시 일본 제국대학관립대학은 관립전문학교, 그 중에서도 의학전문학교를 기반으로 문과계열 학부를 설치하여 종합대학으로 발전시켜 개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최초의 제국대학인 도쿄제국대학의 출발도 의학교+개성학교였고, 두 번째인 교토제국대학 역시 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제3고등학교 의학부로 편입되어 이후 설치된 공학부, 법학부, 문학부 등과 함께 제국대학으로 승격된 것이었다. 세 번째 도호쿠제국대학은 '센다이의학전문학교'가 모체가 되었고, 네 번째 규슈제국대학은 후쿠오카의학교가 '교토제국대학 후쿠오카의과대학'을 거쳐 승격된 것이다. 다섯 번째 홋카이도제국대학은 특이하게 의학전문학교가 아닌 관립 삿포로농학교가 '도호쿠제국대학 삿포로농과대학'을 거쳐 승격된 것이었고, 일곱 번째 대만에 설립된 다이호쿠제국대학 역시 기존의 다이호쿠고등농림학교를 부속 농림전문부로 흡수해 이농학부를 만들고 거기에 더해 문정학부를 설치하는 방식으로 설립되었으며 의학부는 1936년 다이호쿠의학전문학교를 역시 부속 의학전문부로 흡수해 설치하였다. 여덞 번째 오사카제국대학도 오사카의학전문학교가 오사카의과대학을 거쳐 제국대학이 되었으며, 아홉 번째 나고야대학의 경우는 아이치의학전문학교가 현립대학 → 관립대학의 승격 테크를 차근차근 밟고 올라가 나고야제국대학이 되었다.[2] 경성제국대학 설립 이후에도 꾸준한 대학 승격 운동이 있었으나 총독부는 일제 패망 때까지 식민지에 새로운 대학을 설치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 본토에도 의과대학, 의학전문학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경성의전은 본토의 일본인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경성제대 의학부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었다. 경성제대 의학부 설립 당시 상당수의 교직원을 경성의전에서 빼와서 충당한 데다 지원도 줄었다. 경성제대 의학부의 존재가 경성의전의 대학 승격을 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3] 게이오 의대 교수로 있다가 1920년부터 경성제대 의학부 개교때까지 조선총독부병원 원장 겸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 있던 시가 기요시가 경성제대 의학부 교수진을 인선했으며, 그는 경성제대 의학부 초대 학부장을 거쳐 제2대 경성제대 총장이 된다. 경성제대 개교시 넘어간 그를 따라 경성의전 교수진의 상당수가 경성제대 의학부로 넘어갔다.[4] 이는 대만의 다이호쿠제국대학 창립시 대만총독부 다이호쿠고등농림학교(현재의 국립중흥대학가 위치해있던 지금의 캠퍼스에 문정학부를 신규 설치하면서 제국대학을 설립한 것과 유사하다. 다이호쿠고등농림학교는 교사 등 모든 물적 자본을 다이호쿠제국대학에 빼앗기고 다이호쿠제국대학 부속 농림전문부로 흡수되었다가 1943년에 타이중에 신교사를 마련하여 다이츄고등농림학교로 다시 독립해나간다. 흡수되어있던 기간을 제하면 경성의전의 사례와 매우 유사하다. 상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의학부는 최초 다이호쿠제국대학 설치시인 1928년에 설치되지 않았기에 대만총독부의 다이호쿠의학전문학교가 유지되었으나 1936년 결국 다이호쿠제국대학 의학부 설치시에 의학전문부로 흡수되었다.[5] 대학 소속이지만 전문학교에 상당하는 과정[6] 교직원에 대한 테러 등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흠좀무[7] 경성제대 의학부 제1회 졸업생인 명주완 박사는 광복과 동시에 경성대학 의학부 신경정신과학교실 초대 주임교수 겸 경성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의 초대 원장으로 취임하여, 국대안 시행으로 경성제대 의학부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개편된 이후인 1947년 3월까지 해당 직책을 계속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