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원

 


1. 개요
2. 생애
2.1. 불우한 관료
2.2. 영조의 신임을 얻다
2.3. 비참한 최후
3. 사상
3.1. 상업 진흥론
3.2. 화폐론
3.3. 신분 개혁론
3.4. 관제 개혁론


1. 개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남로(南老), 호는 농암(聾菴). 충청북도 충주 출신으로 증조부는 형조정랑을 역임한 유성오(柳誠吾), 조부는 대사간을 역임한 유상재(柳尙載), 아버지는 유봉정(柳鳳延), 어머니는 김징(金澂)의 딸이다.
유수원이 주장한 사농공상의 직업적 평등과 전문화, 상인간 합자를 통한 경영, 고용을 통한 생산과 판매의 결합은 상업 활동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나온 것이었다. 노론 낙론이 중심이 된 중상학파에서 소론에 속한 인물이었다.

2. 생애



2.1. 불우한 관료


유수원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어 한양에 살던 일가 친족의 집에서 자랐다. 숙종 40년(1714년) 진사가 되었고 25세에 정시 문과에 응시해 병과로 급제했다. 경종 2년(1722년) 정언(正言)에 임명된 그는 1723년 영의정 조태구를 비롯한 여러 대신들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무릇 개기(改紀)한 이래 이미 3년이 되었는데, 천재(天災)가 겹쳐 이르고 민생(民生)은 곤궁합니다. 이 기강(紀綱)의 퇴폐(頹廢)와 정령(政令)의 문란은 가면 갈수록 더욱 심해져 하나도 볼만한 것이 없습니다. 전하(殿下)께서는 일찍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연유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전하께서 이미 홀로 신기(神機)를 운용(運用)하시어 흉당(凶黨)을 물리치고 재보(宰輔)에게 위임하시고는 단공(端拱)[1]

하며 그 공적의 성취를 독책(督責)하셨은즉, 시사(時事)가 이 지경에 이른 허물은 반드시 돌아갈 데가 있을 것입니다. 아! 저 대신(大臣)이 무슨 말로 감히 둘러대겠습니까? 신축년[2] 섣달은 곧 전하의 시정(施政) 초기였는데, 첫 연석(筵席)에서 대양(對揚)[3]한 것이 이미 여정(輿情)에 어긋났고, 다만 뜬 의논에 동요된 것만 보았을 뿐, 일찍이 국시(國是)를 근엄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명을 받고 안옥(按獄)함에 이르러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병을 핑계대었고 끝에 가서 결말을 지은 것은 더욱 책임이나 때운 것에 가까왔으므로, 인정(人情)이 답답해 하고 물의(物議)가 들끓어 올랐습니다. 이미 사람들로부터 부지런히 노력한다는 소리도 듣지 못하였고, 또 그 덕량(德量)도 넓지 못하여, 이에 삼공(三公)의 자리에 있으면서 연로(年老)한 처지에서도 도리어 편벽되고 사사롭다는 지목(指目)의 돌아감을 싫어하지 아니하여, 괴리(乖離)된 형세를 조화하는 데 뜻이 없고 사람을 이끌어 쓸 즈음에는 노골적으로 좌지우지하였습니다. 지부(地部)[4]

의 수망(首望)을 의망(擬望)하는 데도 지나친 곡절(曲折)이 있었고, 전관(銓官)의 문차(問差)[5]에도 처음부터 상량(商量)을 아꼈으니, 어쩌면 그 월조(越俎)[6]의 혐의와 추거(推車)[7]하는 뜻을 전혀 생각하지 아니한단 말입니까? 조정(朝廷)이 본원(本源)이 되는 곳임을 생각하건대, 두뇌(頭腦)의 부정(不正)함이 이와 같은지라, 드디어 청의(淸議)는 펼쳐지지 못하고 정기(正氣)가 막히고 사그라졌습니다.

오직 덮어주고 호도(糊塗)하는 것을 주(主)로 삼아 그것을 가지고 헛된 모습을 빌어 부귀(富貴)에만 안주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의사를 굽혀 승봉(承奉)하고 극구(極口) 찬동하여 호법(護法)하는 것으로 삼는 자도 있어 온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성은 내어도 감히 말은 하지 못하게 하니, 오늘날에 세도(世道)를 식자(識者)들이 어떻다고 말하겠습니까? 인군(人君)의 직분은 오직 정승을 얻는데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정신(精神)·역량(力量)·거조(擧措)·규모(規模)로 보건대 전하(殿下)께서 위임하신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성명(聖明)께서는 면려하시고 분발(奮發)하시며, 근심하고 근로(勤勞)하는 일들을 총괄해 살피시어 하늘에 나라의 운명을 장구하게 누리도록 기구(祈求)하는 계책으로 삼으소서.

근일(近日) 비당(備堂)의 계하(啓下) 가운데 품질(品秩)이 아경(兒卿) 이상인 자는 거의 빠진 사람이 없으니, 외잡(猥雜)하다는 비방이 없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정수기(鄭壽期)가 처음 영선(瀛選)에 든 것만 해도 이미 극히 근사하지 않은데 동벽(東壁)과 중서(中書)는 더욱 인망(人望) 밖에서 나왔습니다. 이정제(李廷濟)의 간사하고 지나치게 공손한 태도를 사대부(士大夫)의 모습이 전혀 없는데도 필경 우화(羽化)[8]

하였으니, 모두 권문(權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능력도 없이 사국(史局)에 들어갔는가 하면 참람하게도 웅번(雄蕃)에 임명되었는데, 조태채(趙泰采)가 복법(伏法)될 때는 감히 천 리 길에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짐바리에 가득하게 부의물(賻儀物)을 보냈으니, 만약 일분이라도 사람의 마음이 있었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을 차마 했겠습니까? 결단코 조적(朝籍)에 둘 수 없으니, 빨리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법을 베풀게 하소서.

또 홍치중(洪致中)은 한평생의 행동거지가 송도(松都)에서 승소(承召)하던 날 탄로났습니다. 국가의 안위를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겼는데도 고관(高官)과 숭질(崇秩)을 제마음대로 하였으니,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렸다는 지목이 어찌 털끝만치도 근사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억지로 이견(異見)을 세우려고 구차하게 인피(引避)하니, 인척과 벗들이 분주하게 내달리며 신탈(伸脫)을 주선하였고, 전후 세 번의 인피(引避)는 한 장의 종이로 찍어낸 것과 같았습니다. 그 구차스럽게 안면(顔面)만을 따라 대체(臺體)를 추락시킴이 이보다 심할 수 없으니, 또한 함께 견벌(譴罰)을 베풀어 공의(公議)를 펴게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경종실록 경종 3년 2월 19일자 기사

유수원의 상소는 김일경에게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는 조태구의 인사 문제를 문제삼고 김일경을 공격했던 정수기, 조태채가 복주될 때 부의물을 보낸 이정제 등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사관은 "유수원은 유봉휘의 종질이다. 혹자는 그의 지시를 따른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는데 유봉휘는 사람들에게 향하여 스스로 맹세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카의 장주(章奏)를 어찌 아는 바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통탄스러운 일이다."라며 상소가 조태구 등 완론[9] 대신들에 대한 준론[10]의 공격이라고 지적했다.
이후 유수원은 경박하고 일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여 조정을 분열시켰다고 비판받아 결국 2달만에 파직당했고 경종 3년(1723년) 7월에 낭천현감으로 좌천되었다.
영조 1년(1725년) 유수원의 종숙부인 유봉휘가 신임옥사를 주동한 인물로 낙인찍혀 노론의 탄핵에 시달린 끝에 경흥으로 유배되었고 1728년 영조의 즉위에 반발한 소론계 준론 인사들과 남인 인사들이 봉기한 이인좌의 난이 발발했다. 유수원은 비록 자신의 처가가 반란에 연루되었지만 끝내 가담하지 않았고 반란이 진압된 후에는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으며 지제교, 지평을 거친 후 1737년 무렵 단양군수를 맡았다. 이 무렵 유수원은 심한 병을 얻어 귀머거리가 되었고 정치적으로 불우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달래고 사회 개혁을 모색하고자 우서(迂書)를 집필했다.

2.2. 영조의 신임을 얻다


영조 13년(1737년) 10월, 비국 당상 이종성이 영조에게 유수원을 천거했다.

단양 군수 유수원이 귀는 비록 먹었으나 문장을 잘합니다. 책을 한 권 지었는데, 나라를 위한 경륜을 논한 것입니다. 헛되이 늙는 것이 아깝습니다.

영의정 이광좌도 유수원의 저서를 칭찬했다.

신 역시 그 책을 보았는데, 책 이름이 '우서'라 합니다. 주장과 논변이 매우 이채롭습니다.

이에 영조는 승정원에게 명해 우서를 구해 올리게 했다. 그 후 인조는 유수원을 어디에 쓸 지에 대해 대신들과 논의한 뒤 마침 비변사의 문랑이었던 이희가 죽어 자리가 비자 유수원을 단양 군수에서 체직한 뒤 비변사의 문랑으로 제수해 상고할 만한 문헌을 수집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했다. 이후 유수원은 정언 직을 제수받았으며, 이듬해에는 장령이 되었다.
영조 17년(1741년) 2월, 우의정 조현명이 유수원의 재주와 학문이 기용할 만하다고 추천한 것을 받아들인 영조가 유수원을 입시하도록 명했다. 유수원은 자신이 지은 관제 서승도설(官制序陞圖說)을 영조에게 바쳤다. 영조가 그 법을 묻자, 유수원이 답했다.

명나라의 관제는 주나라 관제의 정밀한 의의를 가장 잘 터득한 것이었으니, 오늘날에 시행하면 틀림없이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간혹 명나라 조정에서도 당론(黨論)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신은 명나라 조정에는 본래 편당이 없어서 2백 70년 동안 끝내 당론이 멋대로 행해져 어지럽힌 폐단은 없었고 기강(紀綱)도 아주 엄격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청(淸)나라 사람이 비록 이적(夷狄)이라 하나, 전적으로 명나라 제도를 적용했으므로 나라를 세운 지 1백 년이 되도록 편당의 폐단이 없었습니다.

영조가 물었다.

서승의 제도는 인재를 침체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이때 유수원은 '''귀가 먹어 영조의 질문을 듣지 못했다. '''이에 영조가 주서(注書)에게 써서 보여 주도록 명한 뒤 다시 물었다.

동자(董子)[11]

와 가생(賈生)[12]같은 인재는 어떻게 조처하겠는가?

유수원이 답했다.

동자와 가생 같은 현인(賢人)은 세상에 많지 않습니다. 비록 간혹 있다고 하더라도 서승법(序陞法)으로 한다면, 정자(正字)가 된 지 3년 만에 수찬(修撰)으로 승진하고, 점차 차례대로 승진하여 15년 만에 당상관인 부제학에 승진하고, 27년 만에 정2품에 승진될 것입니다. 비록 동자와 가생의 현명함이 있다 하더라도 이 관제를 적용하면 역시 침체되었다고 여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영조는 이에 대해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승진하기가 쉬운 방도이기는 하지만 어찌 침체되는 폐단이 없겠는가?"라고 말한 후 다시 유수원에게 글로 써서 보이도록 명했다.

정자(正字)를 선발할 때와 세 차례 고과(考課)하여 서승(序陞)할 때에 사정(私情)이 없을 수 있겠는가? 기강이 없으면 법을 따라서 폐단이 생기게 된다.

유수원이 답했다.

명나라의 전시법(殿試法)에 황제가 직접 거자(擧子)를 시험하였는데, 그 제도가 극도로 엄격하고 주밀하였습니다. 또 정자(正字)를 고선(考選)할 때에도 황제가 직접 과거 시험의 문제를 내었습니다. 전하(殿下)께서도 이 제도에 의거하여 정자를 선발하신다면 어찌 사정이 행해질 근심이 있겠습니까?

이에 영조가 "무관과 음관의 제도는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묻자, 유수원이 답했다.

오늘날의 무과(武科)는 그 수효가 몇천만인지 알지 못하니, 전신(銓臣)이 아무리 공도(公道)를 넓히려 하더라도 어떻게 모두 미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글 잘하는 이를 시켜서 강(講)하게 하고 활 잘 쏘는 이를 시켜서 쏘게 하여 이것으로 고선(考選)하며, 내삼청(內三廳) 및 군문 장관(軍門將官)의 소속에 나누어 차임(差任)하되, 중앙과 지방에서 거관(居官)한 것을 관찰하여 고적법(考績法)으로써 서승(序陞)한다면, 비록 곤수(閫帥)에 이르러서도 반드시 적당한 사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음관 또한 어찌 고적하고 승서하는 데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영조가 다시 물었다.

마음에 품은 것을 반드시 진달하니 비록 자상하게 여길 만하나, 나는 폐단을 구제하는 것은 기강을 세우고 공도(公道)를 따르는 데 달려 있다고 여기니, 아무리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이 하지 않고서 행할 수 있겠는가?

유수원이 답했다.

전하께서는 매번 기강 세우는 것을 급선무로 삼으시는데, 신의 생각에는 기강은 위엄이나 형벌로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겨집니다. 기강을 세우고 공도를 넓히는 요령은 실로 서승법(序陞法)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옥당(玉堂)으로 말한다면 오늘 파면시켰다가 내일이면 서용하고 있습니다. 시종(侍從)은 여러 관원의 본보기가 되지만 전혀 근신하며 힘쓰지 않는데 기강이 어디를 따라 세워지겠습니까? 만약 서승하게 한다면 정자가 된 지 3년 만에 수찬으로 승진하고 수찬이 된 지 3년 만에 교리로 승진하며, 교리가 된 지 3년 만에 응교로 승진함으로써 자못 참봉(參奉)·봉사(奉事)가 서승하는 제도와 같게 한다면, 어떻게 패초(牌招)하여도 나아가지 않는 자가 있겠습니까? 서승하는 법이 옛날부터 이와 같았던 것은 대체로 근신하며 힘써 공무를 집행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 사람을 기용할 적에는 반드시 낱낱이 시험해 보고서 기용하였기 때문에 삼고(三考)와 구재(九載)에 출척(黜陟)하는 제도가 있게 된 까닭입니다.

영조는 유수원의 대답에 대해 "이 말은 옳으며 이 그림 또한 좋다. 만약 이 법과 같이 한다면 근래의 명관(名官)이 반드시 수령이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과 더불어 묘당에서 계책을 상의한다면 반드시 도움이 많을 것이다."라며 칭찬한 후 유수원을 비변사 낭관으로 임명하도록 명했다. 다음날, 영조는 지경연사 이덕수에게 유숭원의 관제서승도가 붕당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지 물었다.

경은 유수원의 관제 서승도(官制序陞圖)를 보았는가? 이것이 붕당을 제거하는 데 한 가지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이덕수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명나라 조정의 관제를 비록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붕당을 제거하는 데 이르러서는 아마도 쉽지 않을 듯합니다.

영조가 다시 물었다.

명나라에서는 붕당이 없었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이덕수가 답했다.

어찌 붕당이 없었겠습니까? 동림당(東林黨)[13]

또한 붕당으로서 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조는 유수원의 제안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 이후 국사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유수원이 주장한 이조 전랑 통청권과 한림 혁파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했다. 좌의정 송인명은 유수원의 한림 추천 혁파 주장에 대해 동의했고, 승지 원경하는 한림 추천 뿐만 아니라 이조 낭관도 고질적인 폐단이라고 지적했으며, 우의정 조현명은 현재 세태가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은 모두 이조 낭관의 폐단 때문이라며 이를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영조 17년(1741년) 4월 22일, 한림의 추천을 뜯어 고쳐 정리하는 절목이 이뤄졌다. 춘추관 영사 김재로, 감사 송인명, 조현명, 지사 정석오, 동지사 정우량이 의논하여 정한 절목은 모두 10조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림(翰林)의 추천은 본관에서 홍문록(弘文錄)의 예에 의거하여 모여서 논의하고 추천하여 권점(圈點)한 뒤에 도당록(都堂錄)063) 의 예에 의거하여 영사·감사·관각 당상이 다시 모여서 권점한다.

둘째, 한림으로 만약 3원(員)을 비의하였으면, 마땅히 회권(回圈)하되 이는 바로 법을 제정한 처음이니, 시임(時任)은 한 사람에 불과하도록 하고, 일찍 한림을 거친 사람은 겸춘추(兼春秋)의 예에 의거하여 직임이 당하관으로 있는 이로 하여금 함께 참여하게 하며, 혹시 가지런하지 않은 경우 시임을 추천하는 예에 의거하여 3원을 비의하면 거행한다.

셋째, 현재 참하관(參下官)으로 있는 자는 방목(榜目)의 권점을 살펴서 차점(次點) 이상을 뽑되, 수효를 제한하지 말고 뽑는다.

넷째, 추천받은 사람으로 상고(喪故)를 당했거나 상피(相避) 때문에 부직(付職)하지 않은 자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부직하게 한 뒤 구방(舊榜)을 논하지 말고 다시 신방(新榜)으로 의논하여 추천한다.

다섯째, 본관에서 추천하여 권점한 뒤에 영사·감사 및 춘추관 지사·동지사, 예문관 대제학·제학이 회권(回圈)하되, 양관(兩館)의 당상관이 비록 정원을 갖추지 못하더라도 춘추관의 당상관 2원(員)과 예문관의 당상관 1원이 나와서 참여하였으면 또한 반드시 거행한다.

여섯째, 관각(館閣)의 권점 또한 차점 이상을 뽑되, 부직(付職)에 있어서 동점(同點)인 경우에는 방차(榜次)로써 선후(先後)를 삼는다.

일곱째, 향(香)을 피우고 강독에 응하던 일 및 차례로 부직하는 개월 수의 한계는 한결같이 전례에 의거하되, 이미 회권을 거쳤으면 사체가 더욱 중대하니, 회천하는 한 가지 항목은 지금부터 혁파한다.

여덟째, 벼슬의 임기를 채우고 15개월 이상이 되어 사초(史草)를 정리하여 바친 인원(人員)은 차례를 따라 승륙(陞六)한다.

아홉째, 회천(回薦)하는 한 가지 항목은 이미 혁파하였으니, 추천에 실패한 경우는 논할 바가 아니며, 설령 소장(疏章)을 올리는 즈음에 헐뜯는 의논이 있더라도 그 지명(指名)하는 자를 제외하고는 함께 추천된 다른 사람은 또한 인혐(引嫌)하지 않아도 된다.

열째, 지금 추천하여 권점하는 것은 문득 분관(分館)과 같아서 한번 추천하는 가운데에서 누락되면 구방(舊榜)에서 다시 추천하는 길이 없으니, 합당한 인원(人員)을 일시(一時)에 모두 뽑되 관원(館員)으로 상피 및 상중에 있거나 파직된 사람은 홍문록의 예에 의거하여 일체로 천거한다.

이에 대해 사관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때에 권세를 제멋대로 부리던 자가 사대부들이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음을 근심하여, 청요직(淸要職)의 권한을 모두 거두어 들이고 폐고(廢錮)된 친족을 끌어다 진출시켜 탕평(蕩平)하는 길을 넓히려고 하였었다. 그러나 발의하는 이가 없었는데, 마침 유수원이 관제 서승도를 올리자, 송인명·조현명 등이 원경하와 함께 의논하여 마침내 극력 찬성하고, 신충(宸衷)으로 결단하기를 청하니, 이에 곧바로 낭관의 선발을 혁파하고 사관(史官)의 추천을 고치도록 명하였다. 김재로는 마침 휴가를 받아 고향에 있었는데, 후에 조정에 돌아와서 성상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음을 알고는 감히 다투지 못하고, 즉시 새로운 절목(節目)을 기초하여 정하였다.

그 후 영조 19년(1743년) 3월 5일 '수교집록'의 속편을 간행할 때 이조 낭관과 한림 추천을 수정한 내용이 들어갔고, 뒤이어 '속대전'에 법규화되었다.

이조의 낭관은 삼사를 거친 자 가운데에서 두루 뽑아 쓰며 통청(通淸)[14]

을 주장하는 폐단을 없앤다. 가낭청(假郞廳)[15]의 임명에서는 왕의 재가를 받지 않는다.

한림 권점[16]

은 홍문록의 예에 따라 실시하되 7품 이하 관원 중에서 재목을 살펴 후보자를 골라 써내면 현직 한림과 전직 한림이 함께 모여 송나라의 관직 소시(召試)의 예를 모방하여 영사(領事), 감사(監事),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의 당상관, 옥당(玉堂)[17] 인사들이 과차(科次)[18]를 참고하여 삼하 이상인 자를 뽑고, 뽑힌 자들은 시험의 등급에 따라 관직을 받는다.

속대전, 이전(吏典)[19]

, 경관직(京官職)

이로서 유수원이 추진했던 관직 개혁론의 핵심인 이조낭관 통청 금지와 한림 추천 방식의 개선안이 법전에 실렸다. 이제 유수원이 출세 가도를 달리며 자신의 뜻을 펼치는 일만 남은듯 했으나, 현실은 그리 녹록치 못했다. 그는 영조 20년(1744년) 속오례의(續五禮儀) 찬수 작업에 참여했다가 윤광소(尹光紹)로 대체된 뒤 10년 동안 실록에서 사라졌다. 그가 그동안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 정확히 알 수 있는 기록이 전무하지만, 이무렵 자신을 지지해주던 소론 대신들이 권력을 상실하고 노론계 대신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그가 설 자리가 사라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정계를 떠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다가 영조 31년(1755년), 그는 역적으로 몰린다.

2.3. 비참한 최후


영조 31년(1755년), 전라도 나주로 유배되었던 윤지가 나주 객사에 괘서를 붙이는 일명 ''''나주 괘서 사건' '''이 일어났다. 이 일로 이인좌의 난 등 일련의 사건으로 유배되었던 소론 및 남인 잔당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실시되어 수백 명이 처벌받았다. 영조는 사건을 마무리지은 뒤 이를 기념하는 토역과를 실시했는데, 그 과거장에서 이인좌의 난 때 처형당한 심성연의 동생인 심정연이 영조와 조정 대신들을 비난하는 글을 제출했다. 이 일로 심정연과 연계된 인사들데 대한 국문이 실시되었다.
이때 유수원은 지난날 자신의 종숙부인 유봉휘의 상소를 베꼈고 신임옥사에 관여한 혐의로 유배되었다. 이는 유수원이 경종 2년 정언의 신분으로서 노론에게 온건적이던 조태구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나주 괘서 사건 때 처형된 박필현과 박필몽의 종질인 박사집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치운은 바로 도마 위에 오른 고기였기 때문에 감히 흉언을 하여 항상 김일경·박필몽·조태구·유봉휘 및 소하(疏下)에 든 여러 역적을 칭찬하면서 역적이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흉언은 감히 장전(帳殿)에서 아뢸 수가 없습니다만, 목호룡과 박필몽의 흉언은 모두 신치운이 한 것입니다. 역적 김일경의 흉소(凶疏)를 ‘충절(忠節)이 있다.’라고 일컬어 마치 이하징(李夏徵)의 말처럼 하였는데, 신 역시 ‘나도 그렇게 보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치운은 항상 준론(峻論)을 말하였는데, 그 중에 큰 것은 ‘이광좌(李光佐)는 거두(巨頭)이고, 심악(沈)은 반드시 절의가 있어 비록 김일경의 상소 같은 것도 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거원(李巨源)이 김일경을 신구한 일을 크게 칭찬하였는데, 심악과 이거원은 더욱 여러 번 칭찬한 자입니다. 신이 신치운과 흉언을 할 때에 그 아우 신치항(申致恒)·신치흥(申致興) 및 이거원과 이거원의 아들 이운화(李運和)·김호(金浩)·김홍석(金弘錫)·유수원(柳壽垣)이 함께 앉아서 수작하였는데, 이러한 흉언을 어찌 사람마다에게 하겠습니까? 윤상백(尹尙白) 및 김홍석의 손자 김정리(金正履)는 모두 그의 혈당(血黨)이며, 이거원·유수원은 바로 그의 평생의 친구입니다. 김정리는 흉언을 수작할 때에 비록 동참하지는 않았으나, 신치운이 항상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영조실록 영조 31년 5월 22일자 기사

이후 유수원은 신치운, 박사즙, 심악 등과 더불어 조사를 받았다. 신치운은 자신이 역모를 꾸몄다는 점을 시인하면서 유수원을 같은 혈당(血黨)이라고 진술했다. 또한 유수원과는 외삼촌과 생질의 관계였던 박사즙도 유수원과의 친분을 드러냈다.

유수원 역시 생사를 같이하는 무리입니다. 흉악한 말을 주고받았을 때, 일찍이 이거원, 유수원과 함께 했습니다. (중략) 신치원의 평생 친구는 곧 이거원, 유수원이라고 했습니다.

추안급국안 21권, 을해년(1755년) 5월 22일

유수원은 경종 2년에 올렸던 상소가 유봉휘의 사주를 받고 올렸냐는 추궁에 철저하게 부인했다. 그는 유봉휘와 형 유봉서의 행동이 잔학하고 천박하여 조부 유상재가 항상 책망했다는 점, 유봉휘 형제들이 유상재를 내쳤던 사실을 자신이 가계에 기록했기 때문에 자신과 사이가 안 좋았다는 점을 증거로 들어 유봉휘와의 친밀성을 부인했다. 이후 유수원은 5월 24일에 심문받았으나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고, 다음날 다시 신문을 받았을 때 밥을 먹지 않고 미친 사람처럼 굴면서 수갑을 풀어달라고 하는 등의 행동을 보였다. 이에 대해 추국청 심문관들이 추궁하자, 유수원은 속이 좋지 않아 미음을 먹고자 했으나 먹지 못했다는 것, 수갑을 풀어달라고 한 것은 옷을 갈아입고자 했기 때문이라는 것, 또 처형 여부를 나졸에게 물어보면서 처형될 때 수갑을 푸는지의 여부를 물어보았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심문관은 유수원이 공공연하게 황당하고 미친 듯 얘기를 하며 당황하는 기색을 보인다는 평을 내렸다.
또한 유수원은 자신을 혈당이라고 표현한 신치운, 박사즙의 증언에 대해서도 부정했다. 그는 신치운과는 데면데면하게 알고 있는 사이여서 특별히 개인적으로 원수진 일이 없으며, 보지 못한지는 이미 10여 년이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박사즙은 일절 얼굴도 모르는 자인데 혹시 서로 만났을 때 인사를 했으나 자신이 귀가 멀어 답례를 하지 못한 일이 있어 이로 인해 원한을 품고 자신을 모함했을 수도 있겠다고 주장했다. 또한 유수원은 박사즙의 조부 역시 역적 유봉휘, 유봉서 등과 같은 마음이었으므로 자신의 조부 유상재가 그를 배척하였다는 사실 역시 가계에 적었다고 진술했다. 또, 유수원은 심악과 절친한 사이임을 인정했지만 자신들은 평소 "우리가 언제 준론을 했느냐."며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면서 심악이 겁이 나 준론이라고 스스로 죄를 시인할 지 모르겠다며 심악과 본인은 준론이 아님을 강조했다.
신치운의 동생 신치홍은 형이 매번 학문과 문장으로 심악을 칭찬했지만 유수원에 대해서는 칭찬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박사즙의 형인 박사집 역시 유수원에 대해 잘 모른다고 했다. 이외에도 추국청에 끌려와 심문받은 사람들은 심악은 준론으로 유명해 이름을 알고 있지만 유수원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말했다. 유수원은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자신이 억울하게 끌려왔다고 주장했지만, 추국청 심문관들은 유수원이 신임옥사 때 청요직 후보자에 추천된 점을 지적하며 유수원이 거짓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추궁했다. 이에 대해 유수원은 자신이 비록 귀는 멀었지만 그래도 양반으로 급제를 했으니, 자신이 추천된 것은 특별히 어떤 인연에 힘입은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유수원은 이후에도 갑자년(1744년, 영조 20년)에 초상을 치를 때 신차운의 집을 한 번 조문한 것 외에는 신치운과 아무 관계도 없다고 주장했고, 심악이 설사 스스로를 준론이라 했다고 해서 자신이 왜 그 때문에 죽어야 하냐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듭된 고문을 견디지 못한 그는 박사즙, 신치운의 진술이 맞으며 자신이 역모에 가담했다고 시인했다.

신은 신치운·박사집과 친밀하게 사귀어 침체된 바가 신치운과 다름이 없게 되었는데, 이는 오로지 조제(調劑)한 소치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는 성상을 비방하고 아래로는 조제한 여러 신하를 욕하여 몰래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쌓아왔습니다. 그리고 매양 서로 만날 때마다 흉언과 패설을 많이 하기를 김일경과 박필몽처럼 하였고, 때로는 혹 김일경과 박필몽보다 더 하였는데 신도 거기에 난만하게 수작하여 참여했습니다. 대개 신은 여러 역적 가운데 비단 흉적을 알 뿐만 아니라 이는 실로 당준(黨峻)의 마음에서 말미암아 나라를 원망하기에 이르렀으며,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에서 항상 헤아리기 어려운 패설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영조실록 영조 31년 5월 25일자 기사

추안급국안에 따르면, 이때 유수원은 영조를 올려다봤고 관원들이 이를 문제삼자 이 또한 자신의 불경스런 행동이었으며 역적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이후 그는 준론이 왜 역모를 꾀하는 지에 대해 언급했다.

그들처럼 등용될 수 있는 자들이 모두 등용되지 않고 있으니 이 점이 지극히 원망스럽다고 했습니다. 조정 재상들이 탕평한다면서 고루 등용했다는 자들이 모두 소인들이었습니다. 단지 탕평으로 등용된 여러 사람들에 대해 패악스러운 말을 했는데 말의 기세가 너무 사나워서 제 대답 역시 그처럼 패악스럽게 되었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오늘 날 등용된 사람이 어찌 우리들보다 나은가." 했습니다. 우리는 배를 곯으며 장차 죽게 생겼는데 그들은 등용되었으므로 이 때문에 임금님을 원망한 것이니 이것이 어찌 패악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대역부도죄를 기왕에 면할 수 없다면 어찌 바른대로 아뢰지 않겠습니까.

추안급국안 21권 을해년(1755년, 영조 31년) 5월 25일

결국 유수원은 능지처참되니, 이때 그의 나이 61세였다. 유수원의 자식들은 며칠 후 모두 교형에 처해져서 유수원의 집안은 멸족되었다. 유수원이 유일하게 친하다고 인정했던 심악은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유수원을 정법한 것에 대해 신은 그 이유가 흉언 때문인 것으로 알았지 대역으로 정법한 것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신은 유수원의 역절을 나라를 향한 정성이라 생각하였고, 유수원의 흉언을 대역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유수원과 함께 죄를 입는다면 죽더라도 기쁘겠습니다.

심악 또한 유수원을 뒤따라 능지처참되었다. 그 후 영조는 역적들이 태어난 고을을 강등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유수원이 태어난 충주목의 현령 역시 현감으로 강등되었다. 유수원은 이후로 200여년간 역적이라는 낙인이 찍혔다가 순종 1년(1908년) 이완용의 주도로 역적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3. 사상


유수원의 사상은 당시에도 국왕에게까지 소개될 정도로 관심을 끌었던 우서(迂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서는 저자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후 금서로 지정되었지만 암암리에 전해져 오늘날 소수의 수사본(手寫本)이 남았다. 그 중엔 규장각 본이 10권 9책으로 보존 상태가 좋아서 1971년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규장각본을 영인한 것이 널리 유포되었다. 우서는 사마광의 저서인 우서를 본따 문답체로 기술되었으며, 처음 6개 항목은 서론, 다음 69개 항목은 본론, 끝의 2개 항목은 결론에 해당한다. 유수원은 이 책을 저술하는 취지에 대해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문) 그대가 이 책을 저술하는 것은 내용이 참으로 세상에 시행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가.

답) 미쳐서 실성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세상에 시행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모르겠는가.

문) 그렇다면 이 책을 저술하여 무엇하겠는가.

답) 천하의 모든 일은 참으로 그 이치가 있으면 반드시 그 말이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 세간에 반드시 이러한 이치가 있으므로 부득이 말하는 것이니, 시행될 수 있고 없음은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 옛날 군자들은 대개 많은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들이 어찌 당초부터 시행될 수 있고 없음을 헤아렸겠는가. 요는 마음에 쌓이고 맺힌 바 있으나 이를 펼 수 없어서 부득이 글로 기록하여 스스로 성찰하였던 것뿐이다.


3.1. 상업 진흥론


유수원은 나라가 허약하고 백성이 가난한 것은 오로지 사민(四民)의 직업이 제대로 분별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우리 왕조가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나라를 세운 지 3백 년에 이르었으나, 사민(四民)이 제대로 나누어지지 않고 있으니, 나라가 허약하고 백성이 가난한 것은 오로지 이에서 빚어진 것이다. 우리 왕조는 국초로부터 임진년에 이르기까지, 또 병자년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 차례의 구란(寇亂: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기는 했으나, 한자의 영토도 잃지 않고 인구도 날로 증가하여 왔다. 그리고 국가에서 받아들이는 것도, 공세(貢稅) 이외에는 별로 더 부과된 일이 없었다. 따라서 간혹 천재(天災)로 상해를 입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을 휴양(休養)하여 온 끝이니, 어찌 민산(民産)이 오늘날처럼 물로 씻은 듯 바닥을 드러낼 수가 있었겠는가. 우리나라의 이른바 부잣집을 말하더라도, 대개 사부(士夫)와 훈척과 상인ㆍ역관들을 여유 있다고 하는데 불과할 뿐, 농가를 보면, 비록 삼남(三南)의 비옥한 지역이라 할지라도, 햅쌀과 묵은 쌀이 이어지는 집이 거의 없다. 지난날의 역사를 두루 살펴 보아도 우리나라처럼 민산이 심히 메말랐던 나라는 없으리라. 그러면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실로 사민(四民)이 분별되지 못했으므로, 각자가 제 직업에 힘을 다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별'은 전문화되거나 분업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유수원은 모든 백성이 각기 자기 직업에 전념하도록 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유수원은 중국은 직업의 분화가 진전되어 있어 시골에도 채소 재배에 전념하는 사람이 있고 목화 재배와 직포의 분업이 잘 이뤄져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비해 조선에서는 본업에 전념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일이 거칠고 엉성하다며, 양잠을 보더라도 전문지식이 없어 중국보다 생산성이 현격히 낮아 중국의 무명값이 조선의 절반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유수원은 사민 가운데 사(士)를 우선 정돈하고 이치에 맞게 하면 나머지 농, 공, 상은 권장하지 않아도 각자의 직업에 힘쓰게 될 것이고, 나아가 문벌의 폐단도 구제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양반들이 문인도 무인도 아닌 채 청착, 착취 등을 통해 놀고 먹거나 굶어죽을 지경이 되어도 공상을 익히지 않는 폐단이 있다고 지적하며 양반의 상공업 종사론을 제기했다. 즉, 모두 양반들이 어려서부터 학교에서 배우게 한 후 그 중 학문적 재질이 부족한 자를 농, 상, 공업에 종사하도록 하면, 사민이 분화되어 누구도 직업에 게을리하지 않게 되고 농, 상, 공인도 문자를 알게 되고 대대로 떳떳하게 가업을 계승하는 상공인이 나올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또한 그는 농, 공, 상의 자제가 관직을 역임하는 것에 조금도 차별을 주지 않는다면, 농, 공, 상업이 천대받을 이유가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유수원은 분업이 단순히 사의 정돈과 농, 공, 상의 분화에 그치지 않으며 더욱 세분화된 직업 분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물화 마다 별도의 가게를 두고 해당 물종을 그곳에서만 판매한다면 상업 내의 전문화를 도모할 수 있으며 각 가게마다 매매가 활성화되고 이익도 많아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현재 상공업을 천시하는 세태가 나라를 좀먹고 있다고 지적하며 상공업을 천시하지 않아야 대자본이 투자되어 상공업이 번창할 수 있다고 봤다. 그리고 각자가 자신의 직업을 소중히 여기게 되면 농업이 흥성할 뿐더러 물가도 반드시 하락할 수 있으며, 나라의 허약과 백성의 빈곤을 구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한편 유수원은 조선 상인이 여러 사람의 자본을 모으고 힘을 모아 장사하는 것이 가장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도임을 모른다며 합과상업론을 제시했다. 합과상업은 중국에서는 산시 상인 등에 의해 널리 행해진 상관행이었다. 그것은 대상인과 군소 상인의 결합에 의한 대규모의 조직적인 상업 경영, 그리고 대상인이 소상인이나 소생산자를 고용하는 형태로 구분된다. 유수원은 이런 중국의 관행을 소개하면서 국가에서 대상인을 육성하여 국부를 증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주로 점포 상인이 대상인이 될 재목으로 간주했지만, 행상 역시 수레와 노새를 이용해 거래 규모를 증대하기를 바랐다.
유수원은 당시 농촌에서 행해지는 장시를 상설점포로 대체하자고 주장했다. 사실 이 주장은 그 만의 주장이 아니며 흔히 중농학파로 일컬어지는 유형원도 "장시에서 상인이 정착하지 못하고 풍속이 간사해진다."며 장시를 없앨 것을 주장한 바 있었다. 다만 유형원은 주요 거점에는 점포를 설치하되 그로부터 30리 이상 떨어진 곳에서는 장시를 남겨두자고 주장한 반면, 유수원은 벽지에서도 장시를 상설점포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점포를 중심으로 상설시장이 발달하면 전국적으로 상업이 발전할 것으로 전망했다.
또한 유수원은 호적이 불분명하여 호구 증감을 파악하지 못하고 산천의 이권이 각 관청으로부터 분리되어서 그 폐해가 붕당보다 심하다며, 국가가 자원, 산업 및 세원을 철저히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갑제로 호구수를 철저히 파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호적에다 전지와 토지세, 직업과 공상업, 각종 자원과 재원, 거래 시세 등을 파악해야 한다고 봤다. 또한 그는 토지를 호적에 기재하지 않으면 소유권을 행사할 수 없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철저한 세원 파악과 철저한 징세는 국역을 공평하게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그는 전국의 재원을 관청에 귀속시켜 용도를 헤아려 나누어주면 각 관청이 장사하고 재원을 사사로이 챙기는 폐단을 막을 수 있다고 봤다. 또한 그는 국가가 각 관청의 출납을 철저히 감시하고 그들이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걸 엄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수원은 대동법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그는 국가가 공납을 적정하게 정하는 등 잘 관리하면 공납법이 시행되지 못할 이치가 없으나 방납의 폐단 떄문에 폐지되었다면서, 임금에게 진상하는 물품을 대동법처럼 공인에게 조달하게 하고 백성들에게 쌀을 대신 바치도록 요구하는 것은 폐단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긴요하지 않은 진상품은 감축하더라도 관청이 진상물을 각 읍에 육성한 점포에게 넉넉히 정해 바치게 하고 그 값을 지급해주면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소금 전매제에 대해서도 소금의 생산은 국가가 담당하지만 판매는 상인에게 맡기는 게 낫다고 지적했다.
유수원은 상업에 대한 통제, 관리 방법에 대해 "상인과 공인 모두 이름을 등록하여 험첩을 교부받고 납세를 해야 하며, 험첩이 없이는 영업을 못하게 한다."고 밝혔다. 그는 서울에서는 모든 물화에 대해 각기 점포를 설정하여 액세를 납부하게 한 후 영업독점권을 부여하고, 점포의 철저한 관리로 상인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겉과 다르게 속이 좋지 않은 제품을 판매하는 자를 엄격히 처벌하며, 유통의 요충지에 관서를 설치해 상업세를 징수하고, 팔도의 관청들은 해마다 상업 증을 나눠준 후 호조에 보고하고 모든 물종에 세금을 거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액점제를 시행하는 주된 동기는 국가의 상업에 대한 철저한 장악과 대상인 자본의 육성 및 거래 질서의 확립이었다. 유수원은 소상인의 난립이 전문화된 대상인의 성장을 저해하므로 막아야 한다고 봤다.
그렇지만 유수원은 소상인 역시 "소상이 많지 않으면 물종이 도회로 몰릴 수 없고 대상도 또한 마음대로 재화를 돌려 이식을 엿볼 수 없다."며 그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모든 소상인들이 대상인의 통솔하에 각지에서 매매하는 길을 제시했다. 그리한다면 대상인은 자신들의 재화를 국가 전체에 고루 투자해 이익을 볼 수 있고, 소상인 역시 대상인에 의해 보호되어 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수원의 주장은 국가가 모든 상거래를 파악하고 통제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는 것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한계를 지니지만, 상업 발달이 미진했던 조선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숙고할 만한 발상이었다.

3.2. 화폐론


유수원은 "화폐는 천하의 공물이다."며 화폐의 가치와 기능을 중요시했다. 그러면서도 당시 화폐 정책의 모순과 화폐 유통 부면에 나타나는 여러 폐해를 철저히 비판했다. 그는 화폐가 재대로 돌지 못하고 그것들을 숨기는 이들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중앙의 관청과 지방의 관아들이 다량의 동전을 곳간에 숨겨두고 유통시키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요인으로 지목했다. 유수원은 관사에 묶여 있는 다량의 동전을 군량을 구입하고 관리의 녹봉으로 지급하는 등 여러 용도로 쓰고 그것을 순환 유통시킴으로서 화폐를 숨기는 폐단을 극복할 것을 제시하면서 이를 감독할 업무를 전담할 관청의 설치를 주장했다. 또한 유수원은 상업의 발달이 미비하기 때문에 다량의 동전이 쓰이지 못하고 있다면서, 상업을 부끄럽게 여기는 인식을 고치고 상업에 기꺼이 종사하게 한다면, 상업이 발달하면서 동전이 제대로 쓰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유수원은 국가가 화폐 주조 발행 과정을 합리적으로 관리하지 못해 화폐 유통량을 적절히 조절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가 동전을 주기적으로 주조 발행하지 못하고 필요할 때마다 부정기적으로 일시에 다량의 동전을 주조 발행하는 등, 일반 유통과정에서 필요로 하는 화폐 유통량을 적절히 조절하지 못함으로써, 동전의 주조 발행 초기에는 통화령의 과다로 그 가치가 폭락했다가, 그 후 동전을 주조 발행하지 못한 채 상당기간이 지나면 또 다시 동전을 숨기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일정 액수의 동전을 매년 주조 발행하여 화폐 유통량을 적절히 조절함으로써 일시적인 화폐 가치의 변동을 억제하고 화폐를 널리 유통시킬 수 있다고 보고, 동전 주조 발행의 주기화를 위해서는 화폐 주조 발행 업무를 관장할 관직의 개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3.3. 신분 개혁론


유수원은 양인과 천인의 구별은 명백히 해야 한다고 봤지만, 양반과 양인의 차별은 없애자고 주장했다. 즉, 그는 양천제의 이원적 신분제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중국이 송나라 이후부터 문벌제도가 없어지고 과거 제도가 확립되었으며, 대신 양인과 천인의 구별이 엄격해 천인에게는 과거 응시의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중국에서는 사농공상에 종사하는 모든 양인이 서로를 다같이 양인이라 부르고 서로 차별없이 대우하고 있으며, 양인도 때가 오면 관직을 갖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분수를 편안히 지킨다며 조선도 그리해야 한다고 봤다.
또한 유수원은 양인의 출신 성분을 따져 인재를 등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그는 출신 성분을 가려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면서 사람의 능력이 어찌 가문의 명성과 관계가 있겠냐고 지적했다. 특히 성씨를 가지고 차별하는 것에 대해 "공, 맹, 주, 장 씨 등은 모두 현인과 명인의 성이었지만 지금 행사하는 것을 보면 그만 못하니 어찌 우스운 일이 아니냐"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성씨를 가지고 사람을 가리는 것은 가소롭기 작이 없는 일이라고 단정했다.
그런 그가 정작 노예제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엄격히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선비의 생활에 있어 노예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선비는 농, 공, 상과는 달리 학문을 업으로 하는 학생이기 때문에 어차피 남의 힘에 의지하여 먹고 살아야 하므로 노예의 존재는 필수불가견하다고 봤다. 다만 지나치계 노예에게만 생계를 의존해 노예의 부담을 과중하게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보고 꼭 필요한 게 아니면 굳이 노예에게 의존하지 말며, 국가도 사노비로부터 부역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3.4. 관제 개혁론


유수원은 영조 17년에 임금 앞에서 관직 제도의 문제점과 개선책, 대안책을 제시한 '관제 서승도설'을 제출했다. 그는 당론이 없었던 명나라의 관제에 대해 설명하면서, 관직에 일정 기간을 복무하면 차례로 승진하는 서승제를 제시했다. 문관으로 승문원에 들어갈 사람은 모두 등급을 나누되, 장원은 홍문관 정자를 삼고, 그 다음은 에문관 검열을 삼고, 또 그 다음은 승문원 관원을 삼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하면 이름 높은 관원이 한림을 추천해 편당을 만드는 폐당을 혁파해 없앨 수 있을 것이며, 관제를 3년 만에 개정하는 규정을 적용한다면 이조 낭관이 자신의 후임자를 추천하는 것에서 비롯된 폐단을 저절로 깨뜨릴 수 있다고 봤다.
영조는 이러한 유수원의 생각에 관심을 보이면서도 인재를 침체시킬 수 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유수원은 과거제도의 정비를 통해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또 기본적으로 기강을 세우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던 영조의 생각에 대해, 유수원은 기강은 위엄이나 형벌이 아니라 서승법을 통해 세워질 수 있으며, 기강이 세워지지 않는 것은 관직에 오래도록 있지 못하는 현재 관직의 문제점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영조는 유수원의 저서 '우서'의 내용을 읽고 그 중 붕당을 없애는 방법으로 제시된 관제 서승법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그의 주장을 속대전에 반영했다. 또한 유수원은 '우서'에서 삼정승 등 대신의 지나친 위상 강화와 비변사의 설치로 인해 법사의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육조의 업무를 대신에게 보고하는 서사제도를 비판했다.

서사의 법은 육관이 일을 수행하지 못하여 삼공이 자신의 격을 낮추어서 사안을 몸소 다루는데 불과한 것이니, 이야말로 벌써 크게 예절을 잃은 것이고, 게다가 삼공의 불초한 자들이 또 권리를 침해하고 제멋대로 일을 독단해도 그를 금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시행할 일이겠는가. 혁파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혁파하던 무렵에 잘 처리하지 못하고서 군더더기같은 비변사를 더 설치하여 삼공과 육경이 모두 그 직을 잃어버린 것이다.

유수원은 특히 공조, 형조 판서의 경우 한직으로 되어 있어 중추부와 다름 없게 되었고 그 직임에 제수되는 인물들도 대부분 형조, 공조의 업무를 수행할 능력이 안되는 나이가 든 사람들이라고 지적하면서, 그 중요성은 참판직도 대신에 못지 않은데 육조의 장이 이런 형편이므로 참판의 경우는 더욱 알 만하다면서 육조의 직임에 적임자가 제수되지 못하는 현실을 꼬집었다. 또 육조 내부에도 그 중요도 차이가 있는데 이러한 점이 고려되지 않고 남설된 기관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중앙 관직이 넘치는 반면 지방의 관직은 너무 적으며, 실제 중요한 부서는 이조, 병조, 형조 등인데 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한편 유수원은 당시 지방의 송사에 대안 판결이 불복하여 서울에 상언을 올리는 세태를 비판하면서 형조와 한성부는 서울의 송사만을 다스려야 하며, 지방민들은 각기 원 거주지의 관부에서 심사를 봐야지 지방의 노비 소송을 서울의 관부에 가지고 갈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지방의 관사의 결정을 무시하고 재판 절차를 넘는 월소를 일삼는 데에는 비변사가 있다고 지적했다.

비변사가 생긴 뒤로는 모든 사민들이 지방 관아 및 감영이나 중앙의 해당 관청을 존중하지 않고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곧장 비국에 월소하는 것을 능사로 삼고 있는데, 비국은 제소되거나 맡겨진 것이 외람되고 번잡한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은 채 모두 수리해서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민간의 습속이 날로 나빠지고 관청의 체통이 크게 무너져서 관청의 높고도 중요한 지위가 문득 하찮은 것처럼 되고 말았으니, 각 관청을 설치하여 직무를 나눈 뜻이 다시는 존재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이 어찌 심히 탄식할 일이 아니겠는가.

또한 유수원은 국가의 안위에 관계되는 반역 사건 등은 의금부에서 다뤄야 하지만 그 밖의 죄에 대해서는 형조에서 다뤄도 충분한데 의금부가 지나치게 간섭하고 양반은 의금부에서 따로 다루고 형조는 천민들만 다루는 세태는 부당하다며, 의금부의 역할이 과도하게 부풀러져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강상 범죄가 아무리 중대하다고 해도 개인적인 윤리와 관련된 범죄인데 대역죄처럼 의정부, 사헌부, 의금부가 합좌하여 처리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주장했다.
유수원은 또 대간이 죄인의 사실 여부, 허실 여하를 조사하지 않은 채 개인의 억측으로 생살을 임의로 결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간들이 죄인의 공초를 받아서 증언을 듣고 사실을 조사할 권한이 없는데 그들이 형벌을 요청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느냐면서, 대간은 탄핵하는 데서 그치고 사건은 법사로 넘겨 재판을 끝낸 뒤 임금께 아뢰어 처단하는 식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반역죄를 다스리려면 죄인을 국문해 정당한 율법을 적용하는 게 규례인데, 대간들이 국문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역률을 청하여 임금의 윤허를 받아내면 의금부에서는 그저 왕의 명령대로 시행할 뿐이라면서, 평소 대신의 직위에 있던 자라도 역모 사건에 연루되면 사실을 진술할 겨를도 없이 죽게 되니 이런 예는 어떤 형법에도 없다고 비판했다.

대간들이 국문을 거치지도 않고 경전에 나오는 말인 '무장부도'를 이용해 대뜸 사형으로 단정하는데, 이렇게 경전에 나오는 말들을 다 인용하여 법을 적용한다면 이미 시행되지 않는 형벌도 지금 시행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는 이러한 세태가 남곤, 심정, 윤원형의 무리가 여러 선비들을 학살할 때 역모로 간주하고 심문하지도 않은 채 죄상을 조작하여 바로 극형으로 단정하기를 요청했던 떄부터 비롯되어 이러한 잘못된 규례가 관습이 되어 대간이 바로 극형을 단정하는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면서, 대간은 응당 심리해야 하는 죄인을 의금부에서 빠뜨릴 경우 그 실수를 지적하는 건 좋지만 심리하기를 요청하지도 않고 대뜸 마음대로 율법을 논정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유수원은 재판의 원칙 없이 자의적으로 이뤄지는 추국청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그에 대한 시정 방안을 제시했지만, 유수원 본인이 이러한 문제점을 안운 추국청의 심문 속에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으니 얄궃은 일이라 하겠다.
[1] 손을 단정하게 꽂고 있음. 임금 또는 재상이 무위(無爲)로 천하를 다스리는 뜻으로 쓰인다.[2] 경종 1년(1721년)[3] 임금의 명령에 답하여 그 뜻을 백성에게 널리 알림[4] 호조의 별칭[5] 누구를 낼까 물어봄[6] 자신의 직분을 넘어서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함[7] 임금이 장수를 전장으로 보낼 때 스스로 수레를 밀어주던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임금이 신임하여 임무를 맡김을 의미함.[8] 홍문관의 벼슬에 오르는 것.[9] 노론에게 온건한 성향인 소론 인사[10] 노론에게 강경한 성향인 소론 인사[11] 전한의 대학자 동중서[12] 전한의 문신 가의[13] 만력제 때 생긴 파당[14] 이조 낭관이 후임자를 추천하는 것[15] 정원 외에 임시로 임용된 낭관.[16] 추천권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추천대상자들의 명단 위에 각기 권점(○표)을 하고, 그 수를 집계하여 소정의 점수에 이른 사람을 이조에 추천하여 임명하는 제도[17] 홍문관의 부제학, 교리, 부교리, 수찬, 부수찬을 통틀어 일컫는 용어[18]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성적 등급[19] 이조의 조직과 소관 사무를 규정한 법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