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염
1. 삼국시대 촉나라의 정치가
劉琰
(? ~ 234)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 자는 위석(威碩).
예주(豫州) 노국(魯國) 사람으로 유비가 예주에 있을 무렵에 종사로 일했으며, 성이 같고 풍류가 있으면서 담론을 잘해 유비와 친했다.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고서 고릉태수로 삼았다.
유선이 황제가 되자 도향후가 되었으며, 매번 이엄에 다음 가는 반열로 위장군, 중군사가 되었다. 이후 후장군을 역임하고 거기장군으로 승진했지만 국정에 참여하지 않고 제갈량을 따라 풍자하거나 건의할 뿐이었다.
매우 사치스런 생활을 했고 231년에 이엄을 탄핵하는 제갈량의 표문에 연명했으며, 232년에 전군사 위연과 불화한 일로 제갈량에게 질책을 당해 사죄하고 관위를 유지한 채 성도로 보내지는 처분을 받았다. 234년 정월에 유염의 처 호씨(胡氏)가 태후(목황후)에게 하례하러 갔고 태후는 특별히 명령을 내려 호씨를 머무르게 했다가 한 달을 넘겨서 내보냈다. 유염은 호씨가 미녀이므로 황제(유선)와 사통했으리라고 의심해 신발로 호씨의 얼굴을 때리고 쫓아냈으며, 이 일로 인해 유염은 구금되었다가 기시[1] 되었다.
이 일로 유선은 남의 아내를 NTR하고 남자를 죽였다는 비판과 여성권리를 보장했다는 찬사 등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지만 공식적으로는 이 일과 상관이 없다. 호씨가 궁중에 남은 것이 유선의 명령이라는 기록도 없고 간통의 증거도 없다. 의심만으로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건 분명 심각한 문제고, 황제가 간통했다고 의심했으니 기군망상이다. 다만 이 정도로 사형까지 가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판결이라는 점에서 후대 사람들에게 좋은 의심거리를 남기게 되었다. 하지만 처형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유선의 속사정(...) 때문이었을 가능성보다는, 유염이 호씨와 싸우는 과정에서 유선에 대해 불경한, 아마도 팽양에 준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유염은 이미 이전에도 적절치 못한 발언 때문에 근신중인 상황이었고, 이로 인해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황이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아무리 정서적으로 불안정했다고는 하지만 유선이 출생했을 때부터 황제에 오를 때까지 유비의 최측근으로서 옆에서 이를 지켜봤을[2] 유염이 의심했다는 건, 유선의 평소 행실이... 어쨌든 유선은 유염의 재판에도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다. "병사는 아내를 때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얼굴은 형벌을 받을 곳이 아니다"라는 판결 자체는 명판결이지만, 이 역시 유선이 내린 건 아니라는 것. 유선 항목에 이 일화가 들어가지 않은 것도 그 이유.
이로부터 삼국의 조정에서는 대신의 어머니나 아내가 경조[3] 하는 풍습이 사라지게 된다. 유비의 예주 시절부터 섬겼던 창업 신하로 고위직을 역임했지만 정사 삼국지 촉서 유염전에 있는 그의 기록은 소략하다.
1.1. 미디어 믹스
1.1.1.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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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출사표 북벌 참가 명단에 이름만 언급된다.
2. 태조 왕건의 등장인물
김응겸과 더불어서 신라를 백제(후백제)에 팔아먹고 경애왕을 시해하고 김부(경순왕)를 임금으로 세운 역적. 배우는 윤덕용.
백제와 내통하여 경애왕이 모든 소식을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157화에서는 백제군이 서라벌을 점령하면서 박씨가 왕이 되어서 어려운 나라 사정이 힘들어졌다면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박씨왕을 버렸다고 한다.
이후 158화에서 견훤이 김응겸의 제안으로 김씨 성의 문중의 항렬이 높고 맏어른이다고 하는 김부를 경순왕으로 세웠고,즉위식에서 경순왕이 문성대왕의 6대손이자 이찬 효종의 아들로 경순왕의 등극식에서 사회를 본다.
이후 162화에서 조정 조회에 참석하여 태자에게 백제가 없었으면 지금의 경순왕이 있을 수 있겠냐고 묻지만 경순왕은 자신은 왕좌가 탐이 난 사람이 아니라 천년신라의 사직이 중요한 것이라면서 결심을 했고, 근위군사들을 불러 유염과 김응겸을 하옥하라고 명한다. 유염은 이럴 수 있냐며 묻지만, 조정 조회에서 경순왕의 명령으로 근위군사들에게 끌려나가서 김응겸과 같이 하옥되고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도성인 서라벌 밖으로 끌려나가서 처형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사실 드라마 전개상 김씨 문중의 맏어른이라 할 수 있는 경순왕이 왕이 된 것이 김응겸과 유염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둘의 반역 행위는 살려 둘 수 없을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의 이름이 된 모델은 경순왕의 친척이였던 대아찬 김유렴으로 추정되는데, 시종일관 음모를 꾸미다가 끔살되는 드라마와 달리 무던한 인물이였으며 경순왕과 함께 고려에 투항해 천수를 누렸다.
[1] 棄市.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죄인의 목을 베고 그 시체를 길거리에 버리던 형벌.[2] 상술했다시피 유염이 유비 진영에 출사한건 유비의 군벌 일생 중 꽤나 초반인 예주 자사 시절이였다. 조운보다도 유비군 선배이며 유선이 태어날 때 시점에서도 벌써 10년 이상의 짬이 있었던 나름의 고참급이였던것.[3] 경축하는 것과 조문(弔問)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