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주
'''예주, 豫州'''
1. 개요
고대 중국의 행정구역 중 하나. 고대 9주에도 포함됐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 되었다.
2. 내용
그 영역은 대개 현재의 허난성(河南省, 하남성)을 중심으로 하며, 장쑤성(강소성), 안후이성(안휘성)의 영역도 일부 포함하고 있다. 고대 구주로 치면 '하남(河南)을 예주라 한다.' 라고 했다. 허난 성은 황하의 중하류에 위치해 있으며 황하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하남성이라고 한다. 동쪽으로는 산둥 성, 안후이 성을 접하고 북쪽으로는 허베이성, 산시성(산서성), 서쪽으로는 산시성(섬서성), 남쪽으로는 후베이성(호북성)을 접한다. 현재에도 허난성의 한 글자 약칭은 여기에서 따온 예(豫)다.[1]
그러나 전한에서 고대 구주의 제도를 차용하여 13주를 설치할 때, 고대 예주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낙양 일대가 수도권에 포함되어 사례교위(司隷校尉)의 관할에 들어갔기 때문에, 한나라의 예주는 지금의 허난 성과는 제법 차이가 난다. 거기다가 막연히 황하 이남으로 취급된 지역에 세부적인 구분이 많이 생겨서 떨어져나간 부분도 꽤 된다. 전한의 예주는 패국/초군(譙郡) 초현(譙縣)이 중심지였고, 초는 위나라의 5대 도시로 크게 번성했다. 애초에 패국 초현 자체가 한고제 유방과 위나라 무제 조조 모두의 고향. 그런데 정작 지금은 두 영웅의 고향은 각각 장쑤이성과 안후이성에 있다(...) 한편 난양 시는 고대에는 형주에 속했고 전국시대까지도 초나라의 영토로 예주와는 따로 놀았지만 이후 형주보다는 예주나 사례와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현대의 허난 성에도 난양 시가 들어간다.
전국시대 위나라의 후반기 수도인 대량(카이펑, 개봉)과 역시 춘추전국시대 송나라, 그 외 정나라와 노나라의 중심부가 예주에 있었다.
오늘날 허난성의 중심부에 있는 정주(정저우)와 허창, 여남, 그리고 익양이 예주에 속해 있었다. 특히 후한 말기 당시에는 허현, 허도라고 불렸던 허창이 바로 예주 영천군 소속이다. 건안 18년의 하남군 합병까지 보면, 예주는 건안 시대의 "수도권"이었던 셈이다.
동탁의 난 때는 공주가 자사로 있었으나 곧 기록에서 사라지고 손견을 앞세운 원술 세력과 주씨 형제를 앞세운 원소 세력이 대립한다. 공손찬이 원술에게 원군으로 보낸 공손월이 사망하는 등 일진일퇴 끝에 손견이 주씨 형제를 물리치고 예주는 원술의 세력이 되나 진류까지 쳐들어간 원술이 조조에게 패배하여 남양을 비롯한 중원에서 세력을 크게 잃고 수춘으로 도망간다. 이후에도 여전히 원술의 세력이 남아 있어 조조의 천자 봉대를 방해하고 예주 북서부인 영천, 진국, 양국에서 국지전이 벌어진다. 여남을 비롯한 예주 남부는 황건적을 앞세운 원술, 패국 패현(소패) 일대는 진규를 앞세운 도겸의 세력권이었다. 영천을 비롯한 예주 북서부에 세력을 미치고 있던 조조는 주씨 형제가 양주로 물러나고 곽공을 예주 자사로 임명한 듯하다. 곽공은 장막의 반란 때 어느 편에 설지 망설이다가 돌아갔다. 연주를 놓고 여포와 싸우게 되어 예주 대부분은 다시 원술의 세력권이 되었다가 조조가 여포를 몰아내며 세력을 점점 되찾게 된다.
193년 도겸을 도우러온 유비가 패국에 주둔하며 첫 번째로 예주 자사에 임명되어 이후 유예주로 불리게 된다. 도겸이 죽자 별가로 있던 진군의 만류에도 서주로 갔다가 여포의 공격으로 서주에서 쫓겨나 조조에게 의지하게 되었던 유비가 조조로부터 4천의 병력을 양도 받아 조조가 조정에 올린 표에 의하여 두 번째로 예주 자사로 임명된다.
위치가 애매하다보니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위나라가 오나라에 대항하는 사령탑이 있었던 회남 수춘(수양, 초나라의 옛 수도)과 합비는 예주가 아닌 양주 구강현에 있었다. 양주와 예주는 장강(양쯔강)이 아닌 회하(화이수)를 경계로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