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왕

 



'''시호'''
'''경애왕(景哀王)'''[1]
'''관등'''
이찬(伊飡)
'''직위'''
상대등(上大等)
'''성씨'''
박씨(朴氏)
''''''
위응(魏膺)
'''부왕'''
신덕왕
'''모후'''
의성왕후(義成王后) 김씨[2]
'''형제'''
경명왕
'''생몰년도'''
음력
???년[3] ~ 927년 11월
'''재위기간'''
음력
924년 ~ 927년 11월 (4년)
1. 개요
2. 치세
3.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무엇을 했는가?
4. 견훤은 정말 왕비를 강간했는가?
5. 대중매체에서
6. 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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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55대 임금. 시호는 경애왕(景哀王), 휘는 위응(魏膺). 신덕왕의 아들이자 경명왕의 동복동생이다. 신라 박씨 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동시에 경순왕 시대에는 신라의 통치력이 경주 바깥 어느 곳에도 미치지 못하는 도시국가 정도의 안습한 상태까지 떨어졌으므로[4] 신라 역사상 실권과 영향력이 어느 정도 있었던 왕으로서는 실질적인 마지막 임금으로 볼 수도 있다.[5] 굴욕적인 일화인 포석정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임금이다.[6]
경명왕상대등을 지냈다. 신라는 사위왕위를 물려받는 일이 많았는데 대개 근친혼이 많아서 넓은 의미로 혁거세 시조왕을 중심으로 성씨와 관계없이 모두 같은 혈족이었다. 따라서 혈족의 의미가 오늘날과는 많이 다르다. 그래서 성씨가 다른 왕이 나와도 동요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사망한 왕을 기준으로 출생 순서로서 자녀의 왕위 계승 순위가 정해지는 것이어서 이전왕의 성씨는 상관없는 것으로 보인다.

2. 치세


경애왕은 신라 멸망이라는 벼랑 끝에 몰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해외 외교에 공을 들였다. 요사 태조본기에 따르면 926년 1월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발해 상경용천부 함락 때 거란 측에 서서 공을 세운 나라들로 (奚), 회흘(回紇), 토번(吐蕃), 당항, 실위(室韋), 오고 등과 함께 신라가 거론되고 있다. 물론 당시 신라는 서라벌조차 겨우 방어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상경용천부 공성전에 파병한 병력은 깃발만 보내는 정도거나 극소수의 정예병사만 파병했는데 경애왕은 앞으로 발해는 망하고 거란이 승승장구할 것을 예상하고 거란에 잘 보여둬서 나라의 보전에 도움이 되도록 조치를 해두었던 것이다. 920년대 신라의 안보 상황을 감안하면 지지 선언 정도로 말로만 도와준다고 하고 실제로는 도우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삼국시대 역사상 그런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927년 2월에는 병부시랑 장분(張芬) 등을 후당(後唐)에 보내 조공하면서 중원 국가와도 미리 친분을 맺어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 때 신라는 서해안남해안 지역의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강주(경상남도 서부) 지역을 지배하던 반독립 세력 왕봉규의 도움으로 남해안을 통해 중국으로 사신단을 보낸 것으로 보이며 왕봉규도 덤으로 후당에 같이 조공해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 관직을 제수받았다.[7]
한반도 내부에서도 경애왕은 이전에 방어 내지 방치에 가까웠던 신라 조정의 대응과 달리 비교적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도 보였다. 후백제가 경명왕 시기에 기어코 신라의 통제하에 있던 천혜의 요새 대야성을 함락하는 등 점차 강성해지자 막 건국한 고려왕건과 굳건하게 동맹을 맺어두는 한편 후백제와 고려가 대치하는 전선에 신라군을 파견해 고려와 같이 연합군을 편성하여 후백제를 공격해 승리를 거두는 등 유의미한 성과를 올렸다. 심지어는 후백제와 적극적으로 싸워보자고 왕건에게 의견을 전하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견훤은 노골적으로 왕건 편을 들면서 후백제를 적대하던 경애왕에게 격분하여 복수극에 나섰다. 후백제는 당시 지금의 경상북도 서부까지 점령한 상황이었는데 신라를 기습 공격해 순식간에 경주 옆인 고울부(오늘날 경상북도 영천시)까지 다다르자 경애왕은 급히 왕건에게 지원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 왕건은 1만 병력을 급파했지만 고려의 지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견훤이 친정한 후백제군이 경주에 나타났고 풍전등화의 상황에서도 견훤이 막 도착했을 때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을 마시며 놀고 있었다. 견훤이 급습하자 연회장은 난리가 났고 미처 피하지 못한 신하들은 변을 당했다. 경애왕은 도망쳤으나 붙잡혔으며 이런 뜻하지 않은 상황에 견훤도 혀를 끌끌 찰 정도였다.
사실 견훤의 기습 공격은 당시 상황에서는 엄청난 무리수에 가까웠다. 당시 후백제군이 정석대로 퇴로 및 보급로를 확보하며 진격한다는 전제하에 신라 지역을 공격하려면 문경 일대와 대야성이 있는 합천을 점령한 고려군의 협공을 피할 수 없었다. 만약 경애왕이 산성에서 농성하면서 오래 버티기라도 했다면 퇴로가 차단될테고 왕건이 직접 지휘하는 구원군이 도착하기라도 했다면 협공당할 위험이 컸다.[8] 그런데 견훤은 이런 협공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일단 문경 방어선을 뚫은 뒤 멧돼지처럼 우직하게 서라벌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이러니 고려군과 신라군은 도저히 대응할 시간을 벌지 못했던 것. 결국 경애왕은 견훤의 강요로 자결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으며 이후 견훤이 경애왕의 왕비겁탈했고 장군들은 들을 겁탈했으며 동생 박효렴(孝廉) 등 귀족들을 포로로 끌고갔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있다.
서라벌을 침공한 견훤은 수도 경주를 약탈하고 방화를 저질러 화려했던 신라의 보물들과 문화재들이 안타깝게도 다수 사라져버렸다. 또한 이제껏 신라군이 고려와 대(對) 후백제 연합전선을 펼쳤던 것을 뿌리 째 뽑아버리기 위해 병기를 제작하는 기반 시설들까지도 철저하게 없애버렸고, 이런 참상에 자포자기한 서라벌의 많은 사람들이 서라벌을 떠나거나 수도 전주로 돌아가는 견훤을 순순히 따라갔다. 이후 경순왕이 주도권을 되찾자 경애왕이 했던 것처럼 똑같이 나름대로의 직속 병력을 육성해서 고려와 또 다시 연합 작전을 벌여 후백제를 저지하려고는 했지만 이때 입은 타격이 워낙 심각하여 다시는 공세 작전에 병력을 투입하진 못하고 수세적으로 몰렸던 것으로 보인다.[9] 경애왕의 두 아들은 인질로 견훤이 데리고 갔는데, 장남 금성대군 교순(交舜)의 후손 박윤웅은 울산 박씨의 정식 시조가 되었으며 차남 계림대군 순현(舜玄)[10]은 경주 박씨의 정식 시조가 되었다. 겁탈당했다는 경애왕의 왕비는 기록이 없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자식들과 끌려갔거나 치욕감에 자살했을 것으로 보인다.
견훤은 문성왕의 후손인 김부를 새 임금으로 세우고 철군하니 그가 경순왕이다.[11] 고려 태조 왕건은 철군하는 견훤을 현재의 대구광역시 팔공산 인근인 공산에서 따라잡았고 공산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왕건은 여기서 신숭겸의 목숨을 대가로 겨우 살아나 단신으로 도망치는 대패를 당했고, 일시적으로 힘의 균형이 깨진다. 현재 대구광역시 전역에 많이 있는 왕건과 관련된 안습한 지명들은 모두 여기서 유래되었다. 사실상 후백제로서는 이때가 가장 절정기였었고, 견훤이 왕건에게 "나는 평양 성루에 내 활을 걸고, 패강(대동강)의 물로 내 말의 목을 축이게 할 것이다!"라고 패기있게 국서를 보냈던 게 이때에 있었던 일이다.[12]
경애왕릉은 본인이 일생을 마친 포석정에서 멀지 않은(1.5km 정도 남쪽) 남산 자락에 있다. 이미 신라의 국력이 쇠할 대로 쇠한 시기에 조성된 능인 만큼 소박한 편이고, 능 주변의 숲이 볼만하다. 경애왕릉 바로 옆에 삼릉이라는 3명의 선대왕의 릉이 위치한다.

3.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무엇을 했는가?


현대에는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인 이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시되고 있다.
1. 경애왕은 이런저런 시도들을 볼 때 분명 무능하진 않은 용기 있고 나름 유능한 임금이었으며,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분명히 후백제군이 경주 코앞 영천까지 왔다는 걸 인지하고 고려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런 마당에 설마 술을 마시고 놀고 있었을까? 일단 후백제군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 인지를 했고, 고려에게 도와달라는 요청쯤은 할 정도의 개념은 있었다. 아무리 개념없이 굴어도 저 정도 개념이 있는데 자기 목숨을 걸고 그런 풍전등화의 상황에 술을 마시고 논다는 게 맞지가 않는다.
2. 포석정은 흔히 그 특이한 물의 흐름을 이용해 술잔을 띄우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 놀이를 하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지만, 경애왕이 붙잡혀 최후를 맞았을 때는 음력 11월, 양력으로 치면 12월~1월이다. 즉 칼바람이 불고 얼음이 얼기도 하는 한겨울이었으므로 그런 시기에 야외에서 술잔을 띄우면서 한가하게 놀기는 어렵다. 경주는 겨울에도 눈이 잘 안 내리고 얼음도 쉽게 얼지 않는 따뜻한 남부 지방이라 술잔을 띄우는 것 자체는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굳이 한겨울 야외에서 달달 떨면서 그거나 구경하고 논다는 것도 좀 부자연스럽다.
3.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조에는 "遊鮑石亭宴娛"라고 되어 있다. 흔히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이고 놀았다"라고 해석되는 부분인데 遊는 "놀다" 말고도 "방문하다"라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으며, 실제로 삼국사기에서는 왕이 절에 다녀올 때도 이 글자를 쓴다.
4. 놀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다른 곳도 많았다. 안압지와 임해전 등의 인공호수들. 이 곳들은 신라 말기에도 연회장으로 사용하고 있었고[13] 실제로도 왕과 귀족들의 유희 용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다. 이런 놀 곳이 많은데 굳이 포석정에서 놀 이유가 없다.
5. 포석정은 신라의 성산(聖山)인 경주 남산의 중심에 있다. 포석정 북쪽 가까운 곳에는 박혁거세가 나왔다는 나정신궁이 있으며, 알영부인이 나온 알영정, 박혁거세의 무덤 오릉, 그리고 후기 신라 박씨 왕통의 상징적 장소랄 수 있는 배동 삼릉[14] 등 여러 성지가 많다. 또한 기록에도 '포석정'이란 이름 대신 '포석사(鮑石祠)'란 이름도 자주 나오고 실제로 이 터에서 '포석砲石'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왓장도 발견되어 포석정이 노는 장소가 아니라는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래서 이런 의문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설이 제기되었다. 포석정은 사실은 연회의 장소가 아닌 일종의 성지로서, 술잔을 띄우는 그 구조물도 사실은 연회용이 아닌 제례용이었다는 것이다.[15] 마침 음력 11월은 신라, 고려를 막론하고 팔관회가 있었던 시기였다. 즉, 나라가 위급해지자 경애왕은 팔관회를 통해 신라의 선조들에게 나라의 평안과 안녕을 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경애왕은 "나라 망하는데도 술쳐먹고 논" 막장 왕이 아닌, 흡사 서로마 제국 말기처럼 자력만으론 운명을 타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이것저것 다해볼려고 하다가 그래도 불안하니 천지신명에게 기원할 수밖에 없었던 눈물나는 망국의 군주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설이며''' 정설은 아니다. 별로 의미 없는 정황 증거를 제외하면 중요한 근거는 양력으로 1월경인 음력 11월에 포석정에서 덜덜 떨면서 잔을 띄우고 놀 이유가 없다는 것과, 견훤군이 공격해 오는 것을 알면서도 놀고 있었겠느냐는 것인데, 전자는 꼭 겨울에 유상곡수연(잔 띄우기) 놀이를 못한다는 법은 없고, 후자는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놀았다는 것보다 더 잘 설명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견훤군이 공격해 오는 것을 알면서 비빈들을 거느리고 방어 거점 밖으로 나가는 것도 유희를 위해서건 제사를 위해서건 지나치게 안이한 행동인 것은 마찬가지다. 정 안 되겠으면 고려 현종이나 조선 선조처럼 도망을 간다든지, 아니면 경주 근처의 명활산성 같은 데라도 올라가 농성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16]
차라리 경애왕이 견훤의 공격 징후까지는 알아챘었어도 구체적인 공격 내용은 제대로 몰랐거나, 혹은 견훤의 진격 속도를 잘못된 정보 때문에 오판했을지도 모른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아니면 실제로는 견훤이 왕건의 구원 시도에 퇴각하는 척하다 질풍신뢰와 같은 급습을 시도해 경애왕의 목숨을 빼앗았는데, 견훤을 지나치게 띄워줄 이유가 없는 고려왕조에서 작성한 역사적 기록이 이런 견훤의 천재적인 전략 전술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어느 쪽이 맞을지는 각자 알아서 판단해야 할 일.
경애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간만에 등장한 박씨 왕조는 15년 만에 허무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다시 신라에는 김씨 왕조가 들어섰으니, 즉위자는 바로 신라 최후의 왕 경순왕. 이런 사실 때문에 백제가 신라 내부의 이러한 갈등을 알고 김씨와 손을 잡고 경애왕을 제거했다는 가설 또한 제기된다. 실제로 경명왕 때는 김씨의 반란 사건도 있었던만큼 박씨가 뜬금없이 재등장해 김씨를 밀어내고 대를 이어 왕을 하는 것에 대해 남아있던 김씨들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건 분명하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김씨 세력의 일부유염과 김응겸이 박씨를 제거하기 위해 견훤을 끌어들인 것으로 묘사된 바 있다.[17]

4. 견훤은 정말 왕비를 강간했는가?


경애왕의 왕비에 대해선 자세한 기록이 없으며, 그나마 있는 기록이 견훤이 왕비를 강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논란의 여지가 꽤 많은 부분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본기 4년에는 다음과 같은 서술이 있다.

萱又縱其兵,剽掠公私財物略盡,入處宮闕,乃命左右索王。王與妃妾數人在後宮,拘致軍中。逼令王自盡,强淫王妃,縱其下,亂其妃妾。

견훤이 또한 병사를 풀어 공사의 재물을 모조리 노략질하고, 궁궐에 들어가 좌우에 명해 왕을 찾도록 하였다. 왕과 비첩은 후궁에 있다가 군사들에게 붙들렸다. 이에 왕을 협박하여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간하였으며, 아랫사람을 풀어 경애왕의 비첩들을 강간하도록 하였다.

ㅡ《삼국사기》 경애왕본기

이 기록이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에 의해 쓰여졌음을 생각하면 필요 이상으로 과장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왕건을 위해 견훤은 깎아내려져야 했는데 그 일환이 이런 기록이라는 것.
이런 잔혹한 행위는 삼국 시대에 신라가 백제에게 저지른 일에 대한 복수의 일환이란 해석도 일부 있다. 실제로 과거 백제의 성왕은 비장 도도에게 참수된 머리가 신라의 북청 계단 아래에 묻혔다는 썰이 전해지고 있었고[18] 의자왕은 항복 직후 태종 무열왕과 제장들에게 술 시중을 들어야 했으며, 의자왕의 태자 융은 문무왕이 침을 뱉기까지 했다. 이런 역사적 경위에 따라 견훤도 신라를 정벌한 후 "의자왕의 한을 씻었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
이런 '옛 백제의 복수설'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건, 신라든 백제든 이제는 모두 같은 조상 나라가 된 다분히 현대 한국인 입장에서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편견에 불과하다. 옛 백제가 망한 지 얼마나 세월이 흘렀든, 견훤이 원신라 혈통이었든 어쨌든 견훤은 그 당시 어디까지나 백제왕이었고 그 신분에 걸맞게 행동했다. 그가 그저 지지 기반인 백제 유민들에게 뭔가 보여줄 만한 보복 행위가 필요해서 억지춘향으로 그런 만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하지만 이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경애왕의 외조부 헌강왕을 섬긴 신라 정규군 장수였던 그가, 다소 과도하다 여겨질 정도로 신라 왕실에 치욕적인 굴욕을 그렇게까지 강요한 건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긴 하다. 정략적이고 정치적인 부분으로 따지면 왕성 약탈까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긴 해도, 왕을 겁박해 자살하게 만들고 왕비를 강간한 건 다소 불필요한 만행이었던 건 사실이다. 이것은 그보다는, 견훤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과 분노가 더 이유가 컸다고 보인다. 그전까지 경애왕이 경명왕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뭔가 해보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꽤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견훤이 겪으면서 꽤 많이 낭패를 보았던 건 사실이다. 백제니 신라니 뭐니 하기 이전에 개인적으로 몹시 약이 올라 격앙해있었을 가능성이 크단 얘기. '''이런 개인적인 큰 분노와 적개심에, 나름 백제왕으로서 백제의 복수를 한다는 쓸만한 합리화의 명분이 더해져 행동의 브레이크가 망가져 버린 걸로 보인다.''' 궁예가 친아버지 경문왕의 초상화에 검을 꽂은 것이, 궁예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도 원인이었겠지만 옛 고구려 유민들의 보복 행위를 대신한 것이라는 해석과 같은 맥락. 여하간 이 기록을 뒤엎을 수 있는 사료는 현재까지는 없으므로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
견훤이 경애왕을 죽인 후 신라를 무너트리는 게 아니라 김씨인 김부경순왕으로 추대해 세웠으니 백제 유민에게 잘 보이려 한 행동으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은 더욱 더 설득력이 적다. 신라에 대한 복수라면 이미 경애왕을 살해했을 때 충분히 차고 넘치도록 했던데다, 그대로 신라를 접수하기엔 왕건이 이끈 고려 대군이 바로 육박해있어 당장은 시간이 너무나도 없었다. 경애왕이 박씨므로 과거 백제왕들에 모욕을 주었던 신라 왕들과 관계가 없다는 얘긴 더욱 너무한 소리. 경애왕은 헌강왕의 외손자였던데다, 박씨와 김씨는 오래도록 통혼과 근친혼으로 엮여 있어 그렇게까지 다른 집안도 아니었다. 사태가 일단락된 927년 12월에는 견훤이 왕건에게 편지를 보내고 왕건은 답서를 보내는데, 그 내용에는 백제의 복수 같은 얘기는 없고 대신 위태로운 신라를 구원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나 신라왕을 삼국지의 한실에 빗대는 등의 이야기를 적어놨으니 딱히 백제왕으로서 자의식은 없었을 거란 이상한 해석이 있으나, 이건 당연히 신라 조정 상대로 하극상 이미 할대로 해놓고 말뿐인 궤변에 불과했다.
한편 견훤이 경애왕의 왕비를 강간했다는 부분은 워낙 자극적이다보니 복수의 제스처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인의 입장에선 지나친 행위로 보일 수도 있지만 승자가 패자 우두머리의 아내를 강간하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는 패자의 모든 것이 승자에게 예속되었음을 알리는 하나의 정치적 이벤트로 행해지는 일이었다. 구약성경을 보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점거한 후 다윗후궁들을 공개적으로 강간했고 티무르도 사로잡은 오스만 제국 술탄 바예지드 1세의 황후를 바예지드가 보는 앞에서 스트립쇼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19] 그리스 로마 신화트로이 전쟁이후에도 트로이의 여자들이 아카이아 장수들에게 노예로 끌려간다는 묘사가 있다.[20] 다만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이쪽에서 찾아봐야 수문제와 선화부인 정도이며, 그것도 수 문제가 개인적으로 선화부인을 곁에 두었을 뿐 패자를 복속시켰다는 정치적 이벤트 같은 것은 아니었다.
태조 왕건에서는 견훤이 경애왕의 왕비에게 자신의 시중을 들라고 말했다가[21] 경애왕의 왕비가 치욕으로 여겨 자결한 소식이 전해지기 전 최승우의 만류도 있었기에 '내가 호걸인데 폐위된 왕의 왕비를 건드릴만큼 망나니가 아니다.'는 말로 그저 왕비의 절개를 시험하려고 했다며 분위기를 수습하지만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당황하여 자기 장난이 지나쳤다고 뒤늦게 후회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도 제작진 측에서는 역사적인 사실은 있었으되 후대에 후백제를 깎아내리려는 서술로 확대된 것으로 본 모양이다. 물론 진심은 아니라도 왕비를 괴롭혀 죽음에 이르게 했지만.
그리고 김부식은 어디까지나 신라계니 뭐니 이전에 고려의 신하로서 삼국사기를 서술했고, 삼국사기를 김부식 혼자 전체를 서술한 것도 아니며 어디까지나 고려 임금 인종의 확인을 거친 관찬사서였다. 김부식이 일부러 후백제를 격하하려고 마음 먹었다 해도 신라의 왕비가 백제왕이라지만 한때 신라군 장수였던 늙은 역적에게 강간당했다는 얘긴 김부식이 정말로 신라계로 정체성이 강했다면 오히려 삭제하고 싶었을 치욕적인 일화다. 이는 고대 사회의 성향상 있을 법한 일이며, 현재까지 이를 제외한 추가 증거로 제시될 만한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
현대에 와서는 왕비강간을 당했냐 아니냐가 그렇게까지 중요한 부분은 아니기에 추가적인 연구는 거의 없을 것이다. 끽해봐야 승자가 패자를 죽이고 그 아내를 탐한다는 정복감에 이야깃거리로 언급될 정도.
어디선가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며 놀다가 지은 번화곡(繁花曲)이 전한다. 진짜로 경애왕이 이런 시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

기원실제혜이사동(祇園實際兮二寺東)

양송상의혜나중(兩松相依兮蘿中)

회수일혜화만오(回首一兮花滿塢)

세무경운혜병몽롱(細霧輕蕓兮幷濃)

기원정사[22]

와 실제사, 두 절의 동쪽에

소나무 한 쌍이 등넝쿨 속에 기대 있도다.

머리 들어 한 번 바라보니 꽃이 언덕에 만발했는데,

옅은 안개와 가벼운 구름이 둘 다 몽롱하구나.


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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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안습한 역할을 주로 맡아온 배우 문회원 씨가 경애왕 역을 맡았다. 근데 사망 당시 많아야 3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경애왕을 만 56세의 문회원 씨가 그것도 대놓고 흰 수염을 달고 노인 분장으로 나온 게 고증 오류.[23]
드라마에서의 모습은 비록 암군이지만 기울어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고 노력하고 최소한의 보는 눈은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24] 즉위 초부터 후백제를 지지해야 한다거나 후백제한테 이제라도 사신을 보내야 한다는 유염 등의 말을 무시하고 고려한테만 사신을 보내며 친고려 외교 노선을 견지하고 고려와 후백제 간 전투가 벌어졌을 때 고려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후백제를 공격하는 식으로 후백제를 자극했다.[25] 그렇게 해서 일단 경명왕 때 잃었던 대야성을 되찾는 등 전공도 올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를 가지고 샴페인을 일찍 터트렸다. 대야성 수복을 기념으로 3일 동안 나라의 곳간을 활짝 열고 성대히 잔치를 베풀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견훤은 대야성을 미끼로 내어주고 서라벌로 진군 중이었다. 그 사이 유염과 김응겸 등 박씨 왕실에 불만을 품고 있던 김씨 일당들이 몰래 후백제와 내통해 후백제를 신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 사실도 모르고 경애왕과 신라 관료들은 포석정에서 놀았고 술자리에서 경애왕은 견훤도적 놈이라 멸시하며 반드시 자신 앞에 무릎을 꿇리리라는 호기로운 소리를 했다. 사실 신라군도 치열하게 싸웠고 고려의 왕건도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지원하러 가고 있었다. 경애왕이 놀지 말고 전력을 다해 방어라도 제대로 했거나 고려군과 적극적으로 연계를 했더라면 최소한 견훤에게 치명타를 안길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유염과 김응겸이 지방에서 온 전령들을 죽여버리며 소식을 차단한 사이[26] 이미 서라벌 근교의 고울부가 함락되고 최후의 보루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던 김율이 지휘하는 경주 월성마저 함락된 상태였으며 병사들은 모두 도망간 뒤였다. 연회를 즐기다가 환관들에 의하여 후백제군이 침입하였고 궁궐이 장악되었다는 말을 뒤늦게 듣고서 그제서야 아연실색하여 왕비와 도망치려 하였으나 이미 늦었다. 궁궐까지 장악한 후백제군이 경애왕을 잡으러 포석정으로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는데 남아있던 얼마 되지도 않는 호위 병력들은 갑작스러운 후백제군의 습격에 우왕좌왕하다 경애왕이 도망갈 시간조차 벌지 못하고 모두 전멸했다. 많은 신하들은 죽거나 사로잡혔으며 경애왕과 왕비는 환관 및 후궁들과 같이 급히 도망치다가 밤에 탈출하기 위해 근처 별궁의 병풍 뒤에 숨었으나 곧 발각되었고 "걔 아무도 없느냐"를 연발하다가 견훤 앞에 끌려나온다. 이후부터는 안습하고 비굴한 장면의 연속인데 한때 신하였던 유염과 김응겸으로부터 조롱을 당하더니 견훤을 잡아서 꿇리겠다는 패기는 온데 간데 없고 에 취해서 1번 해 본 말이라고 변명하는걸 시작으로 견훤에게 술을 따라 올리고 견훤이 바닥에 흘린 술을 처럼 핥기까지 한다. 급기야는 견훤으로부터 "더러운 놈"이라고 을 먹고 얼굴에 침을 맞으며 발로 걷어차이는데 그런 수모를 겪고도 경애왕은 "살려주시옵소서. 폐하!" 소리만 해댄다.[27] 이에 친 견훤은 내가 너를 미워해서 핍박하고 모욕한게 아니었으며 단지 지난 날 의자왕의 한풀이를 하려는 것이었고[28] 그래도 천 년 사직을 이어온 신라의 기백을 보고자 했다고 일갈한다. 이후 단도를 던져주며 자결할 것을 강요하지만 자결할 때조차도 강단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어이할꼬... 어이할꼬..."만 연발하며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 끝에 측근 대신 연식의 도움으로 자결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연민과 혐오가 공존하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을 듯. 뒤늦게 고려군이 도착을 하지만 후백제군한테 대패한다.
재미있는게 배우 문회원 씨는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드라마)에서는 의자왕 역을 연기하였고 2006년 KBS 드라마인 대조영(드라마)에서는 문무왕 역을 맡아서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의 경애왕과는 전혀 다른 당당하고 위엄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위에 언급한 실제 역사에서 문무왕에게 치욕을 당한 의자왕의 복수를 한다며 견훤이 한 행동을 생각하면 더욱 재미있는 배우 개그가 성립한다.

6.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
一年秋八月 경애왕이 즉위하다
一年秋九月 태조에게 사신을 파견하다
一年冬十月 신궁에 친히 제사지내고, 대사면을 하다
二年冬十月 태조가 투항한 능문을 돌려보내다
二年冬十一月 견훤이 진호를 고려에 인질로 보내다
三年夏四月 진호가 갑자기 죽자, 견훤이 고려를 향해 진군하다
四年春一月 태조백제를 친정하자, 왕이 그를 돕다
四年春二月 장분 등을 후당조공 보내자, 후당에서 관직을 제수하다
四年春三月 황룡사 탑이 흔들려 북쪽으로 기울다
四年春三月 태조가 친히 근암성을 깨뜨리다
四年春三月 명종이 왕봉규를 회화대장군으로 삼다
四年夏四月 왕봉규가 임언을 후당에 사신으로 보내다
四年夏四月 강주 관할 하의 4개 향이 태조에게 귀부하다
四年秋九月 견훤이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경순왕을 세우다.[29]
[1] '경애왕'의 '경(景)'과 '애(哀)'가 사료를 오독한 사학자들에 의해 각각 발해 13대 왕 대현석과 발해 15대 왕 대인선에게 매치되어 이들이 '경왕', '애왕'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개별 항목 참고.[2] 헌강왕의 딸.[3] 어머니 의성왕후 김씨가 헌강왕의 딸이다. 어머니의 나이를 최소한 870년대 중반생으로 보아 경애왕은 최소 890년대 초,중반 생인데 죽었을 당시 나이는 아무리 많이 잡아봐야 30대 후반이다. [4] 역사 속에서 말기에 비슷하게 수도 주변 약간의 직할영토만 남아있다가 멸망한 나라로 주나라동로마 제국, 무굴 제국 등이 있다.[5] 이런 측면에서 후대 고려로 치면 우왕, 조선으로 치면 고종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사실 멸망이 임박한 대부분 왕조의 마지막 임금들은 이미 즉위 시점부터 실권을 잃어버려 뭘 하려고 해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인 경우가 많다.[6] 시호에 슬플 애(哀)가 들어간다. 숙부인 헌덕왕의 반란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애장왕과 비슷한 케이스.[7] 하지만 제3의 세력치고는 힘이 있던 왕봉규도 고려후백제라는 두 고래 싸움에 껴서 새우등 터지듯 927년이 지나기도 전에 망한다.[8] 그러나 경애왕이 너무 빨리 당해서 견훤이 돌아가는 중에 공산(지금의 대구광역시)에서 왕건의 고려군과 맞붙었는데 왕건이 역대급으로 대패하고 자신의 오른팔인 신숭겸마저 잃은 공산 전투이다.[9] 그럼에도 왕건은 견훤의 선례를 상당 부분 참조하여, 아예 신라 왕궁 근처에 일종의 파견 군 사령부를 설치해서 철저히 감시를 하는 한편 강원도로 통하는 길목에도 정예 부대를 남겨둠으로써 경순왕이 경상도, 강원도 일대에 있는 친신라성향 호족들과의 커넥션을 철저히 못 만들도록 했다.[10] 다른이름으로는 입순(立舜) 혹은 수현(受玄).[11] 효녀 지은 설화로 잘 알려진 화랑 김효종의 아들이다.[12] 이 글은 후백제에서 관직 생활을 했던 신라삼최의 일원 최승우가 지었다고 전한다.[13] 예를 들어 경순왕 때 왕건이 서라벌로 찾아오자 안압지에서 연회를 열어 왕건을 접대했다.[14] 초기 신라 박씨 왕조의 마지막 왕인 아달라 이사금과, 후기 박씨 왕조의 두 왕(신덕왕, 경명왕)도 여기에 묻혔다고 알려져 있다. 수백년간 김씨 왕통이 이어져오다가 왕위에 오른 박씨 경애왕에게는 자신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장소 중 하나랄 수 있다.[15]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포석정이 포석사(鮑石祠)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포석정이 사실 제례용 사당이었다는 설을 뒷받침한다. 다만 필사본 화랑세기는 사학계에서 위서론이 대세라 일부 학자 외에는 사료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16] 다만 포석정의 위치가 남산 등산로의 시작점이며, 남산 위에도 지금까지 성벽 일부와 군량고 유구가 남아있는 남산신성이 있기는 하다. 남산신성에는 3개의 창고가 있었는데 그 중 좌창지는 가로 47미터, 세로 18미터나 되는 큰 창고였다. 정황상 증거지만, 경애왕이 포석정 위치에서 잡혔다면 병자호란처럼 산성에서 농성하려다 실패한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다.[17] 경순왕의 어머니는 경명왕과 경애왕 어머니의 동생으로 3명은 모두 헌강왕의 外孫이다. 따라서 경순왕은 경애왕 사후 가장 가까운 근친 중 하나였다. 또한 견훤에게 수도가 약탈되면서 경애왕과 同姓인 박씨일족들이 타격을 받은 영향도 있을 것이지만, 경순왕의 즉위도 당시로서 정통성 있는 즉위였을 것이다.[18] 다만 이 일화를 언급한 일본서기 구절을 보면 말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당시에 떠돌던 '그런 소문이 있다'는 정도의 기록이다.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한때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관계이기도 하고, 이후 처단 과정에서도 왕으로써 예의를 차려줬다는 부분을 보면 계단 아래 목을 묻어 모욕을 줬다는 일설 부분과 앞뒤가 맞지 않다.[19] 세르비아 공주 출신인 바예지드의 황후 올리베라 데스피나가 티무르와 그 신하들 앞에서 알몸으로 술 시중을 들고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세르비아의 초기 기록에만 보이기 때문에 세르비아인들이 대중 선동용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게 현재 통설이다.[20] 이 중 안드로마케가 이 사례에 부합한다. 트로이의 왕세자이자 트로이 제일의 영웅이었던 헥토르의 아내로,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와의 대결에서 패배해 죽었다. 트로이 전쟁이 트로이의 멸망으로 끝난 이후 안드로마케는 전리품으로서 아킬레우스의 아들(상세한 건 각 항목 참조)인 네오프톨레모스이 된다. 이 후 안드로마케는 몰로소스를 비롯한 네오프톨레모스의 아들을 다산한다.[21] 삼국사기에서의 기록대로 견훤이 경애왕의 왕비를 겁탈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은 심의상 문제가 있기 때문에 시중들라고 말하는 것으로 순화된 것으로 보인다.[22] 인도 마칼타국의 수달장자가 부처님(석가모니)을 위해 세운 절의 이름을 딴 것.[23] 실제로 경애왕은 많아봐야 30대 후반인 젊은 사람인 반면 경애왕 사망 당시의 견훤은 60세, 한마디로 환갑을 맞이한 노인이었다. 그러므로 경애왕 역을 맡아야 할 배우의 연령대는 최대 30대 후반쯤 되어야 했다.[24] 그의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는데 후백제는 절대 자신들을 보존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말대로 실제로 후백제는 경애왕을 자결하게 하고 궁궐을 약탈하고 경순왕을 세웠음에도 계속 신라를 침략하여 나라를 개판으로 만들어놓은데 비해 경순왕고려귀순하자 그는 태자보다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상보로도 책봉되었고 그의 딸은 경종결혼한 후 망국의 왕들 중에서는 손꼽힐만큼 행복한 여생을 보내다가 갔다는 것이다.[25] 고려가 신라에 지원을 요청한 적이 없는데도 멋대로 구원병을 보낸 것이지만 신라군이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안 왕건은 크게 기뻐했을 뿐만 아니라 대야성 공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26] 이 와중에 전령 하나가 살아남아 소식을 알렸다.[27] 경애왕 본인은 몰랐겠지만 견훤은 사람이 너무 부드럽다는 이유로 신덕 대신 애술을 데리고 궁궐로 들어온데다가 이미 승리했으니 적에게 인정을 베풀라는 최승우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실제로 이게 전략적으로도 옳았다.) 그런건 왕건한테나 필요한거라며 일축하고 경애왕을 처음부터 죽일 작정으로 서라벌에 온 것이었기에 살려달라고 비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차라리 도망가거나 항복하지 않고 싸우다 죽은 장수들이나 병사들처럼 당당하게 죽었으면 비록 죽더라도 명예는 지킬 수 있었을 것이건만 결과적으로 목숨과 명예 둘 다 지키지 못한 꼴이 되었다.[28] 견훤이 경애왕에게 "더러운 놈"이라고 욕을 하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발로 걷어찼는데 문무왕부여융에게 했던 것을 견훤이 그대로 되돌려준 것이다.[29] 스스로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