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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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제27대 대통령.
대통령직을 마치고 난 뒤에는 제10대 연방 대법원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국가원수와 사법부 최고 수반을 모두 지낸 능력있는 인물이었으나, 전쟁부 장관 재임시절 체결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데 크게 기여하면서 대한민국에서는 최악의 평가를 받고있는 대통령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초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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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 시절의 태프트. 그의 리즈시절이다.
오하이오 주 출신으로 예일대를 2등으로 졸업했다. 이후 신시내티 로스쿨을 다녔는데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오하이오주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대단한 공부벌레였던 듯.
이후 오하이오 주에서 연방판사로 일하고 1900년 에스파냐로부터 얻은 필리핀의 초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4년간 필리핀에서 일했다. 그 후 미국에 돌아와 1904년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육군장관으로 임명되면서 그의 보좌관으로 뛰었다.
1905년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로 훗날 총리가 되는 일본의 가쓰라 다로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미국이 묵인하는 대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묵인한다'''라는 그 유명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이 밀약을 통해 초래된 결과가 을사조약과 경술국치. 어쨌든 루스벨트 대통령의 참모로 중용되면서 그의 신임을 받았고 개인적으로도 어지간히 친밀한 관계를 맺었는지 루스벨트는 태프트를 자신의 후계자로 내세웠다.
2.2. 대통령 시절
1909년,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지원 하에 미합중국 제2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대통령으로서는 전반적으로는 루스벨트 행정부의 팽창 정책을 계승했지만 루스벨트와 달리 이른바 '달러 외교'라는 경제력을 배경으로 한 무력을 수반하지 않는 평화적인 외교를 목표로 했다. 동아시아에서는 강대국들이 중국을 잠식해 가는 걸 억제하면서 강대국 권리의 평등한 분배를 목표로 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당연히 제국주의에 혈안이 된 강대국들이 이 말을 들을 리 없었다. 중앙아메리카에서도 유럽 열강의 자본을 배제하여 중앙아메리카의 개발을 추진, 정세의 안정을 도모했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의 무력 개입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서 오히려 중앙아메리카의 정세는 불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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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된 태프트는 능동적이고 패기 있던 루스벨트와는 정 반대로 몇몇 실력 있는 상원의원에게 끌려다니다시피 했다. 한번은 관세를 낮춰 보려고 임시의회를 열어서 관세를 낮추는 법안이 하원을 통과했지만 로드아일랜드 주 상원의원 넬슨 올드릭(Nelson W. Aldrich)이 거부하며 수정안을 달자 그대로 서명했을 정도. 캐나다와 자유무역을 하려다가 캐나다에서 반발이 일어나 윌프리드 로리에 총리가 1911년 사임하자 공화당은 분열 크리를 맞았다. 환경보호정책을 편 루스벨트의 장관인 제임스 루돌프 가필드(제임스 A. 가필드 대통령의 아들이다.) 대신 리처드 발린저를 장관에 임명하기도 했는데[1] 알래스카의 석탄 광산을 개발하려는 클라렌스 커닝햄을 옹호하는 게 마음에 안 든 루스벨트는 측근 기포드 핀커트 장관을 보내 장관을 교체하라고 말했지만 태프트는 반대로 그 측근을 경질시켜 버렸다. 그전에 발린저를 고발한 토지청 특수요원 루이스 글래비스가 발린저를 고발하자 글래비스도 고발해버렸다. 근데 당시 공화당 내부에는 루스벨트의 추종자가 적지 않아서 루스벨트와 다른 노선을 걷는 태프트의 정책에 반대를 일삼아 계속 태클을 걸어댔다. 이걸 보면 태프트 대통령이 열받는 것은 당연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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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에 열받은 루스벨트는 '저 친구 대통령 시키느니 내가 다시 한번 더 뛸래'라며 다시 한번 대통령에 출마했고 태프트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러나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는 태프트가 루스벨트를 561:107이란 압도적 결과로 누르고 후보 지명을 받았다.[2] 루스벨트는 그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진보당을 차려 공화당을 분열시켜 버렸다. 그 결과 공화당의 표는 분산되었고[3] 어부지리로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 후보가 당선되었다.
2.3. 연방대법원장 시절
대통령 임기를 마친 태프트는 예일대에서 강의를 하다가 1921년 워런 G. 하딩 대통령에 의해 제10대 연방대법원장으로 지명되어 1930년까지 재임했다.[4] 이로써 그는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국가원수(행정부 수반)와 사법부 최고 수반을 모두 지낸 인물'''이 되었다. 대통령으로써의 업적은 그다지 별볼일 없었지만 대법원장으로써의 평판은 매우 좋았다고. 원래 법조계 인물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대통령보다는 오히려 법관에 더 어울리는 인물이었던 듯하다. 본인도 대통령보단 연방대법원장이 되는게 꿈이었다고 이야기 했다.[5][6] 반세기 후에도 비슷한 대통령이 나온다. 대통령 은퇴 후 활동은 조금 차이가 났지만.
태프트 대법원은 주로 연방정부의 시장 규제에 반대하는 등 보수적인 판결을 이어갔으나, 미국 사법 역사에 깊은 발자취를 남긴다. 태프트는 대법원장의 판사에 대한 인사권을 확립했으며, 특히 현재의 한국 대법원처럼 밀린 사건 처리에 급급하던 연방대법원을 정책법원으로 탈바꿈하는 상고허가제를 도입했다.
태프트는 항소심 판결은 순회재판소(한국의 고등법원)에서 해결되어야 하며, 주요한 사건만이 대법원에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대법원이 상고 수리의 완전한 선택권을 갖는 상고허가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태프트는 "모든 당사자에게 대법원의 판단을 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반대 여론을 향해 "당사자 사이에 정의를 세우는 데는 두 번의 재판이면 충분하다"는 반론으로 의회를 설득했다. 대법원장의 강력한 주장 하에 상고허가제는 의회에서 3년만에 법률화 되었고, 태프트를 통해 미국 연방대법원은 오늘날의 전원합의체와 토론 중심의 법원으로 기틀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태프트가 대법원장이 되었을 때, 연방대법원은 자체적인 청사가 존재하지 않아 국회의사당에서 회의를 가졌다. 때문에 사무실은 항상 매우 어수선했고, 태프트는 1925년 대법원 청사를 지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27년 의회에서 대법원 청사를 위한 의회 남쪽 부지에 대한 예산이 책정되었으나, 태프트 사후인 1932년에 착공에 들어가 1935년에 준공되어 태프트는 생전 대법원 청사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
이렇듯 연방대법원장으로서의 태프트는 뛰어났다고 여겨졌지만, 태프트 법원도 흑역사가 있는데, '''버지니아 주민들의 건강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지적장애자들을 강제불임 시키는 버지니아 주 법을 합헌이라 판결'''한 Buck v Bell 사건이다. 이건 태프트만의 흑역사가 아니라 당시 법원 전체의 흑역사였다. 영향력이 큰 판례를 많이 만들어내 위대한 대법관 중 하나로 추앙받고 있는 올리버 웬델 홈즈 대법관과[7] 태프트 외 여섯 대법관의 지지, 즉 8대 1로 합헌판결이 났다.[8] 유일하게 반대를 한 대법관은 피어스 버틀러 대법관. 근데 이것도 반대의견을 쓰지 않고 반대표만 던진 것이다. 일각에서는 버틀러 대법관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어서 반대표를 던진 것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는 듯 하다. 1920년대엔 우생학이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21세기의 관점에서는 처절한 흑역사이다. 논란이 많았던 판결이지만, 연방대법원은 2018년 1월 기준으로 Buck v Bell 판결을 뒤집지 않은 상태이다. 판결을 뒤집으려면 판결을 뒤집을 만한 사건이 올라와야 하는데, 우생학이 흑역사라고 묻혀진 시점에서 이 일이 일어날 확률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이후 건강상의 이유로 1930년 2월 3일 연방대법원장 직에서 사임, 그해 3월 8일 7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태프트는 노령과 비만으로 인한 건강 악화에도 1929년 12월 31일 사망한 그의 형 찰스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신시내티로의 여정을 고집했고 이 여정에서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1930년 1월 6일에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초안을 작성했으나 병환으로 이를 완성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때문에 휴식을 위해 노스캐롤라이나주 애쉬빌로 갔으나, 1월 말경에는 말을 하지 못하고 환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후버 대통령에게 차기 대법원장에 하워드 휴즈를 지명할것임을 확약받기 전까지 사임하지 않았다. 2월 3일, 태프트는 연방대법원장직을 사임하였고 워싱턴으로 돌아와 8명의 대법관이 헌사한 감사 편지에 대한 서명을 겨우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3월 8일 워싱턴 자택에서 사망했다. 이후 시신은 국회의사당에 안치되었고 사망 사흘 뒤인 3월 11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된 최초의 대통령이자 첫 연방대법원장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그저 '제일 뚱뚱한 대통령'(...) 정도로 기억된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임자는 지금도 제법 유명한 시어도어 루스벨트이고 후임자 역시 행정학의 아버지이자 노벨평화상을 받은 우드로 윌슨이다보니 그 둘 사이에 끼여서 존재감이 없는 안습한 인물. 일부에서는 대통령 시절은 몰라도 대법원장 시절엔 몇몇 진보적인 판결을 내리며 나름대로 혁신주의 운동을 이어 나갔지만 루스벨트와 윌슨 대통령의 그늘에 가려서 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는데, 사실 한국 입장에서는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 명분을 만들어 준 밀약의 주역인 만큼 좋게 보기도 뭐하긴 하다.
3. 미국 역사상 가장 뚱뚱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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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아름다운 태프트의 전용 욕조. 후술하겠지만 평범한 체형의 성인 3명까지 들어갈 수 있는 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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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 밑에 깔린 소가 힘들어 보인다. 더구나 이 당시의 소는 지금보다 덩치가 작았으니... 태프트와 소 크기가 상당히 맞먹는다.
미국 역대 대통령에서 최고로 뚱뚱한 인물로 유명하다. 최고로 몸무게가 나갔을 때는 '''175kg'''이나 나갔다고.[9]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120kg대나 되었는데, 대통령이 되면서 백악관에서 50kg나 불어났다고 한다. 그때 붙은 별명이 "빅 빌 태프트(Big Bill Taft)." 참고로 예나 지금이나 '''182cm에 175kg이면 BMI 52.83이니 매우 심각한 상태다.''' 차라리 대통령이 되기전 120kg 시절이 양호한 수준으로 느껴질 정도. 친구였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활동적이고 운동을 즐겨 근육질을 가진 것과 대조된다.[10] 사실 테프트의 아버지 알폰소도 아들이 엄청난 배불뚝이로 전락하는 과정에 일조했다. 태프트의 아버지 알폰소는 굉장히 귀족적이고 보수적인 인물로, 밖에 나가서 활동하는 행위 자체를 천박하다고 여겨 싫어했다. 그 때문에 아들인 태프트도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안에 틀어박혀 하라는 공부만 하고 먹기만 하다 보니 저절로 뱃살이 나왔다.
그의 비대한 체중은 지금도 미국에서 유머의 소재로 쓰이곤 하며 체중과 관련한 일화도 많이 남겼다.
- 루스벨트 대통령 시기 필리핀에서 식민지 조사를 할 때 당시 국방장관 엘리후 루트에게 "하루 종일 걷다가 다행히 40km은 말을 타고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보고를 했는데, 루트 장관의 답장은 "그래서, 그 말은 멀쩡합니까?"
- 마찬가지로 필리핀 여행 도중 체스터 니미츠가 함장으로 있던 구축함 디케이터에 탑승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해군 표준보급품 의자에 앉을 수가 없어서 니미츠는 결국 안락의자를 2개 사온 다음 목수를 시켜 손잡이를 제거하고 하나로 합처 더블사이즈 의자로 만들어 제공했다고 한다.
- 목욕을 하다가 욕조에 몸이 끼는 바람에 간신히 구조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의 체구에 맞춘 크고 아름다운 욕조가 특별히 설치되었다. 성인 남성 3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라고. 현재는 새로 교체했으며(이것도 태프트 전용 욕조와 사이즈는 비슷하다), 태프트가 쓰던 건 백악관 전시용으로 보존. 이 몸이 꼈다는 일화는 허구라는 설도 존재한다. 다만 꼈든 안 꼈든 간에 욕조를 새로 교체한 것은 사실이다.
- 골프를 무척 좋아했는데 비대한 뱃살 탓에 허리를 굽힐 수 없어서 페어웨이에서도 골프공을 티에 올려놓고 칠 정도였다고.
- 대식가라서 식사량이 일반인보다 훨씬 많았다. 그래서 보다 못한 영부인이 다이어트하라고 바가지를 긁었지만[11] 계속 쳐묵쳐묵.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스테이크와 구운 감자였다. 하루는 간식을 먹고 싶어서 몰래 백악관을 빠져나가기도 했다고 한다. 먹다 남은 음식을 짱박아놓기도 했다.
- 이런 자학개그를 한 적도 있다. "얼마 전 전차를 타고 가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그 자리에 숙녀 셋이 앉더군요."
- 하루는 동생과 함께 극장에 갔는데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호러스(태프트의 동생), 이 극장에 불이 나면 난 덩치 때문에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내 몸에 불이 붙고 말 거야."
- 매사추세츠 베벌리 만에서 수영을 했는데, '면적이 넓은' 그가 수영하자 지역 주민들이 수영을 하지 못하고 물 밖에 나오거나 아예 물에 들어가지도 않고 태프트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을 가진 한 소년이 있었는데 이 소년이 병원을 갔다. 간호사가 소년의 손톱 물어뜯는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 "그거 계속하면 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단다"라고 말하자 소년은 그 버릇을 고쳤다. 이후 그 소년이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고 들어온 태프트를 만났는데 대뜸 그의 비대한 배를 보더니 "아저씨는 손톱을 물어뜯는군요!"라고 외쳤다.
- 절친한 친구이자 연방 상원의원이었던 촌시 디퓨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이 대통령을 만나자 태프트의 비대한 배를 만지면서 "이 배 안의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이름을 뭐라 할 건가?"라고 묻자 태프트는 "음, 아들이면 윌리엄(자신의 이름)이라고 짓고 딸이면 시어도라(전임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여성형 이름)라고 지을 거야. 그런데 이게 그냥 뱃속의 가스라면 촌시라고 부를 걸세."라고 받아쳐 당황하게 만들었다. 비대한 이미지 때문에 둔할 것 같지만 아주 재치가 없지는 않았던 듯. ~
- 먹성과 덩치에 어울리게(?) 식사 후에는 항상 졸아서 영부인과 보좌관들을 당혹스럽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영부인이 "잠자는 미녀(Sleeping Beauty)"라는 별명을 붙였으며 한 의원은 "대통령께서는 제가 정치 경험을 통틀어 완전히 잠재운 최대의 청중(the largest audience)입니다."라고 말했을 정도.
- 고위관료들과 오찬을 가지던 중 축음기로 음악을 틀라고 요구해 놓고 첫 곡이 끝나기 전에 잠들어 버렸다. 그러다가 다시 깨서 두 번째 곡을 요청하고는 또 잤다. 당시 동석한 재무장관 맥베이가 이건 아니다 싶어[12] 활기찬 행진곡을 틀게 해 놓고 "죽은 사람 아니면 누구라도 깨겠지요."라고 장담했지만,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이를 본 맥베이는 보좌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돌아가신 게 틀림없네요."
- 백악관에서 가족 만찬을 하던 도중 막내아들인 찰리가 부친의 정책에 반대하는 민감한 발언을 해서 분위기가 싸해졌다. 남편 눈치를 보던 영부인이 막내를 벌 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묻자 태프트는 "저 아이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권리요."라고 허허 웃으며 넘겼다. 가히 덩치에 어울리는 관대함. 실제로 태프트는 아내와 자식들과는 관계가 좋았다.
- 대통령 가족의 우유를 담당(?)하는 젖소를 백악관 내에서 키웠다. Mooley-Wooly라 불리던 홀스테인종 젖소였는데 언급했다시피 태프트의 왕성한 식욕을 못 견뎌 위스콘신주 상원의원이 Pauline -Wayne 이라는 새 젖소를 선물했다고... Miss. Wayne(웨인 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그리고 가장 뚱뚱했다는 것, 행정부와 사법부의 최고 수반을 모두 지냈다는 것 외에 그가 세운 사소한 기네스가 하나 더 있는데 지금까지의 미국 대통령 중 마지막으로 수염을 기른 대통령[13] 이다. 이후의 미국 대통령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태프트 이후로 수염을 기른 인물이 없다.
- 후술하겠지만 야구장에서 처음으로 시구한 미국 대통령인데 이때 경기장을 찾았다가 7회의 중간 즈음 관중석에 앉아있는것이 너무 불편해서 한번 일어났더니 관중들도 그가 야구장을 떠나려는 줄 알고 함께 일어섰으나 대통령은 아무데도 갈 생각이 없었기에 다시 자리에 앉았고 다른 사람들도 도로 착석하였다. 이때부터 메이저리그 야구장에서는 7회 스트레치라는 전통이 탄생하였다. [14]
4. 여담
그의 아들 로버트 태프트는 오하이오 주 연방 상원의원 3선을 기록했으며 1952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2차대전의 전쟁영웅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대결하여 패배했다. 공화당이 집권하면서 로버트 태프트는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에 선출되어 집권당의 1인자가 되었지만... 암이 온몸에 퍼진 게 발견됐고 얼마 못 가 사망했다. 특히 그가 1947년에 트루먼 대통령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강행했던 태프트-하틀리법(Taft-Hartley Act)[15] 은 미국 노동관계법 역사상 최악의 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증손자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4세는 국방차관(1984~1989), 주미 나토 대사(1989~1992), 국무부 법률 고문(2001~2005)을 지냈다.
태프트가 대통령 선서를 한지 두 달 후, 아내인 넬리[16] 는 갑자기 중풍에 걸려 몸의 일부가 마비되었으며 몇 년 후에야 회복될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 넬리는 포토맥 강변에 일본에서 온[17] 벚꽃 나무들을 Washington Drive에 심었다. 진주만 공격 직후에 그 나무들을 뽑아 버리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뽑지 않았고, 그 나무들은 지금도 봄마다 벚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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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시구를 한 대통령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체중이 많이 나가는 대통령이었음을 생각하면 아이러니.
태프트는 유럽 정세에 빠삭한 외교관인 주 프랑스 대사 헨리 화이트를 조기에 해임해버렸다. 그 이유란 25년 전에 태프트와 아내인 넬리가 프랑스에 신혼 여행을 갔을 때에 화이트가 그들을 박대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와는 처음에는 친밀했지만 태프트가 대통령이 되면서 사이가 틀어졌다. 하지만 1919년 루스벨트가 죽자 장례식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그날 비가 왔는데도 루스벨트가 안장되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그의 묘를 떠나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봤다고 한다.
타이타닉 침몰 사건 당시 대통령이 바로 태프트였다.
대통령 자리에 있었을 적에 찰스 에반즈 휴즈를 대법관에 임명하면서 대법원장 자리가 비면 대법원장으로 올려주겠다고 약속했다가 바꿨다. 이유는 47세 밖에 안 된 휴즈가 연방대법원장으로 올라가면 오랫동안 있을테니 자긴 대법원장 자리엔 못 앉게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65세의 대법관이었던 에드워드 더글라스 화이트를 대신 임명했다.[18] 화이트는 다행히도(?) 적절한 시기에 죽어주어서 (로버츠 대법원장은 "After White died on schedule"이라는 표현을 썼다.) 하딩 대통령의 지명을 받고 9년간 자신이 그렇게 바랬던 꿈의 직업에서 일하게 되었다. 태프트의 욕심 때문에 대법원장에 못 올라갔던 휴즈도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서 1930년에 대법원장으로 승진해서 11년간 지냈으니 결국은 다행. 건강상을 이유로 태프트가 1930년에 은퇴를 할 때 후버 대통령에게 자신의 후임자로 휴즈를 지명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땐 은퇴를 거부하겠다고 하였고 그 뜻을 관철시켰다. 자신이 휴즈에게 한 약속을 완전히 잊어버리지는 않은 듯 하다.[19]
[1]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대학 동문을 임명한 것으로 나온다.[2] 진보진영의 표가 위스콘신 주지사 출신의 상원의원 로버트 라 폴렛에게 분열된 측면도 있다. 라 폴렛은 훗날 탈당해 1924년 대선에서 별도의 진보당으로 무려 16.6%를 득표하고 위스콘신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해 심혈관 질환으로 급사했다.[3] 참고로 이때 대선에서 루즈벨트는 27.4%를 득표하며 23.2%를 득표한 공화당에 대해서는 완승을 거두었다. 진보당은 하원에서 10석을 확보했으나 상원에서는 오히려 몬태나 주를 잃어 0명이 당선되었다. [4] 태프트가 어떻게 연방대법원장에서 물러났는지는 기록이 서로 엇갈린다. 어떤 쪽에서는 은퇴했다고 하고, 또 어떤 쪽에서는 사임했다고 하는데, 미국 연방대법관 직은 종신직이라 은퇴하고 싶으면 사임해야 한다.[5] 루이 브랜다이스 대법관은 필릭스 프랑크푸르터(1939년 1월 20일에 FDR의 지명을 받고 취임하였다. 브랜다이스는 1939년 2월 13일에 은퇴했기 때문에 짧은 기간동안 동료였던 것)에게 저렇게 대법원장 노릇 잘 하는 사람이 왜 대통령 할때는 그 모양이었을까 하는 식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6] 원문: "It is difficult for me to understand why a man who is so good a Chief Justice...could have been so bad as President."[7] Buck v Bell 사건의 다수의견을 작성하였다. 다수에 있었던 태프트가 집필자를 홈즈로 지정한 것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세한 건 미국의 연방대법원 항목 참조.[8] 다수의견엔 "지적장애자로 3세대를 이어갔으면 충분하다. Three generations of imbeciles are enough."라는 문장도 있다. [9] 태프트의 키는 182cm. 182cm 기준 표준체중은 73.7kg. 미국의 고도비만 기준점은 BMI 40임을 감안해도 BMI '''52.83'''인 그는 '''초'''고도비만(...)[10] 다만 시어도어는 운동 중에서 복싱을 너무 즐기다 눈이 찢어지고 한쪽 눈은 시력을 아예 상실했다. 참고로 당시의 복싱은 베어너클이었기 때문에 펀치 드렁크 증세는 적었으나 피부가 찢어지는 일이 많았다.[11] 사실 이는 남편의 건강을 걱정한게 컷다. 실제로 태프트는 성인병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말년에 태프트는 성인병으로 인해 체중이 111kg으로 급격하게 감소해버렸다.[12] 아닌게 아니라 고위관료들과 오찬중으로 고위관료들과 함께 식사할 때 처묵처묵만 할 리가 없는데 관료들은 먹고 있는데 대통령은 잔다면 뭐...[13] 참고로 링컨 이전에는 수염 기른 대통령이 없었다가 링컨 이후 앤드루 존슨과 매킨리를 제외하면 연속으로 수염을 길렀다.[14] 2년 전인 1908년 잭 노워스가 쓴 <야구장에 데려가주세요> 라는 노래가 히트했는데 1971년부터 7회 스트레치 때 관중들이 이 노래를 부르는 전통도 생겼다.[15] 사용자 뿐만 아니라 노조도 부당노동행위 주체로 인정하였고, 노조의 취업독점권인 Closed shop을 폐지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16] 자서전을 쓴 최초의 퍼스트레이디로, (재클린 클린턴과 함께) 앨링턴 묘지에 안장된 유이한 퍼스트레이디다.[17] 당시 일본은 일찌감치 미국과 친교하는 정책을 시작했었다.[18] 재밌게도 태프트는 공화당 소속이지만 에드워드 화이트은 민주당 당적이었다.[19] 생각해보면 태프트는 휴즈가 중도에 대법관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결과적으로는 약속을 철저히 지켰다. 대법원장 자리가 '비면' 올려주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휴즈가 사임한 날짜는 1910년 6월 4일, 당시 대법원장이었던 멜빌 풀러는 1910년 7월 4일에 재직 도중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