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군

 


'''대궁의 역대 종주'''
3대
복녕군 이욱/유[1]

'''4대
의원군 이혁
'''

5대
안흥군 이숙
'''조선 인조의 증손'''
'''의원군
義原君'''

'''군호'''
의원군(義原君)[2]
'''시호'''
문정(文貞)
'''본관'''
전주(全州)
'''이름'''
혁(爀)
''''''
매중(晦仲)
''''''
근독당(謹獨堂)
'''생부'''
복녕군[3]
'''생모'''
군부인 양천 허씨(陽川 許氏)
'''부인'''
군부인 안동 권씨(安東 權氏)
'''자녀'''
3남
'''묘소'''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생몰
기간
'''
'''음력'''
1661년 6월 13일 ~ 1722년 11월 12일
'''양력'''
1661년 7월 8일 ~ 1722년 12월 19일
1. 개요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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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왕족. 인평대군의 장남 복녕군 이유의 둘째 아들이다. 대궁의 4대 종주로 원래는 차남이라 종주가 될 수 없었지만 형 양원군 이환이 소현세자의 아들 경완군 이석린의 양자[4]로 들어가 가문을 이었고 한 때 인빈 김씨의 제사를 같이 모신 적도 있었다.

2. 상세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문장에 매우 뛰어났고 예론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하지만 천성이 탐욕스러워 강제로 백성의 재물을 빼앗은 죄로 대간의 청에 의하여 작위를 삭탈당하기도 하였다.
1680년 작은 아버지 복창군 이정(李楨)의 양자가 되었으나 나중에 부정부패와 탐욕으로 인하여 양자의 자격을 박탈하고 원래의 가문으로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이 해 경신환국이 일어나 이 사건과 깊게 관련있는 숙부들과 엮여 형 양원군 이환과 함께 유배갔다.
1688년 결성현감으로 재임 중 일때 정부의 보관용인 저치미[5]를 모두 가져다가 자신이 써버렸으므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결성현감의 작위를 삭탈당했으나 곧 다시 임명받았다. 1722년에는 남의 토지를 부정한 방법으로 빼앗았다가 탄핵을 받아 몰수당하고 다시 되돌려주었다. 인과응보였는지 말년에 몇 년 간 풍병으로 고생하다 사망했다. 사후 고종 때 가서 의정부영의정 김병학의 상소로 의정부영의정 판종정경에 특별 증직되었다.
조선 고종의 실제 혈통 상 직계 6대조로, 조선 말기의 왕실 혈통을 잇는 데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1] 李栯. '''栯'''은 '산앵두 '''욱'''', '나무이름 '''유''''의 두 가지 음으로 읽을 수 있다.[2] 군호는 충청도 제천의 옛 지명인 의원(義原)에서 유래했다.[3] 인평대군의 장남.[4] 그 후 경완군의 사후양자는 성종의 13남 영산군(寧山君)의 7대손인 이의저가 지명받았다. 덧붙여서 이의저 뿐만 아니라 아들들도 군(君) 작위를 추증받았다. 참고로 영산군파보를 보면, 이의저 이후 현손부터 항렬자 통일령으로 '응(應)'자부터 쓰기 시작한 내용이 나온다.[5] 儲置米, 저축하여 둔 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