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군

 



'''조선 성종의 왕자'''
'''영산군
寧山君'''

'''군호'''
영산군(寧山君)[1]
'''시호'''
충희(忠僖)
'''본관'''
전주(全州)
'''이름'''
전(恮)
''''''
공근(公謹)
'''부왕'''
조선 성종
'''생모'''
숙용 심씨(淑容 沈氏)
'''부인'''
금릉군부인 청송 심씨(靑松 沈氏)
교성군부인 경주 정씨(慶州 鄭氏)
함흥군부인 함흥 황씨(咸興郡夫人 咸興 黃氏)
'''자녀'''
4남 10녀
'''묘소'''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생몰
기간
'''
'''음력'''
1490년 미상 ~ 1538년 6월 11일
'''양력'''
1490년 미상 ~ 1538년 7월 6일
1. 개요
2. 생애
3. 사망
4. 여담
5. 가족과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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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왕족. 성종의 14남이자 서12남이다. 어머니는 숙용 심씨이다. 친형제로는 누나 경순옹주와 숙혜옹주, 형 이성군이 있으며 전주이씨 영산군파의 파시조이다.

2. 생애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조용하면서도 용맹하며 청렴 강직한 성품으로 성종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림에 능했고 외모 또한 수려했으며 사람들의 인망을 많이 얻었다고 한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그야말로 엄친아. 하지만 그로 인해 여러 역모 사건에서 추대 대상이 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3. 사망


1538년(중종 33년) 7월 6일에[2] 세상을 떠났다. 향년 48세.[3]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에 있으며 2007년 2월 15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었다.

4. 여담


  •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언급한 일화이다. 평소에 연산군은 동생 영산군의 성품을 시기했다. 그래서 숭례문 앞부터 을 타고 달려서 연산군 자신보다 먼저 궁궐에 도착하면 살고, 늦으면 죽는다는 내기를 강제로 걸었다. 이에 영산군이 괴로워하던 중 형 회산군이 영산군에게 빠른 말을 구해줘 화를 피하게 했다.#연려실기술》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회산군 포지션에 영산군이, 영산군 포지션에 진성대군(훗날의 중종)이 적혀있어 차이가 있다.#

5. 가족과 후손


정실부인은 금릉군부인 청송 심씨와 교성군부인 경주 정씨, 그리고 함흥군부인 함흥 황씨까지 총 3명이다. 심씨 부인 사이에서는 딸 2명을, 정씨 부인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고, 황씨 부인 사이에서 4남 3녀를 두었다. 그리고 3명의 측실에게서 5녀를 두었다.# 이들의 후손이 번성하여 오늘날의 전주 이씨 영산군파를 이루고 있다.
영산군의 7대손 이의저는 사후 100여 년 뒤인 1872년(고종 9년)에 소현세자의 차남 경완군 이석린의 사후 양자로 입적되었고 임녕군(臨寧君)에 추증되었다.#
영산군의 15대 종손문민정부국무총리를 지낸 이홍구이다.##
[1] 군호는 충청남도 천안의 옛 이름인 영산군(寧山郡)에서 유래했다.[2] 음력 6월 11일.[3] 세는나이 49세.